[스파이 박물관, 탈북민 인터뷰 계기로 국정원 협조 얻어··· 7점 신규 입고]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공개한 북한 공작원 관련 전시물. ①독침이 든 펜, ②독극물 립스틱, ③내부 통신용 송신기 ④원거리 통신용 라디오, ⑤야간 공습용 적외선 조준경, ⑥암호 전송기. 박물관이 북한 공작원 관련 도구를 전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독침 펜 · 자살 립스틱··· 北간첩 장비 美서 첫 전시
약 1년 만에 성사된 특별한 전시
작년 탈북민 김현우씨 공개 인터뷰에
탈북 여정 들으려 청중 수백 명 모여
北암살범 · 대남 공작원 등 사용 물건
지난주부터 일반에 사상 첫 공개
전시된 스파이 관련 물건은···
대북전단 살포 주도 박상학 대표를
암살하려고 소지했던 독침 펜
자살용으로 쓰인 독이 든 립스틱
간첩이 본국과 원거리 소통 때 쓴
日파나소닉사의 단파 라디오
DMZ서 쓰인 자외선 카메라
北에 보고할 때 쓴 전송기 등 전시
박물관측 "北, 세계서 가장 억압 심해"
"많은 사람이 첩보 활동과 역사
세상에 벌어지는 일 제대로 알아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장비들이 실제 사용됐단 사실을 생각하니 놀랍고 소름 돋는데요···.” 지난 23일 미국 워싱턴DC ‘국제 스파이 박물관’ 4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을 비롯한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국제 스파이 박물관이 지난주부터 북한 암살범 · 대남 공작원 등이 실제로 썼다는 독침 펜과 적외선 카메라, 통신 장비 등 7점을 새롭게 전시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파이 박물관은 지난 2002년 설립된 박물관으로, 전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1만여 점의 스파이 (espionage) 관련 전시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작년에만 69만명이 방문한 명소다. 4년 전엔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국제 스파이 박물관이 북한 관련 물건을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본지와 만난 얼라이자 브란 박물관 매니저는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유물을 찾아다닌다” 며 “이번에 들어온 (북한 관련) 전시물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것” 이라고 했다.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최근 공개한 북한 공작원 관련 전시물. 독침이 든 펜.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이 중에서도 관람객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암살 도구인 독침 펜이다. 지난 2011년 대북 전단 살포를 주도했던 탈북민 출신 인권 운동가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를 암살하려다 붙잡힌 북한 정찰총국 인사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 대표는 이 인사를 만나러 가다가 정보 당국의 제지로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펜은 겉으로 보기엔 파커사의 은색 볼펜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안에 펜촉 대신 독침이 들었다. 오른쪽으로 3 ~ 4번 돌린 후 볼펜 윗부분을 누르면 독침이 총알처럼 발사된다고 한다. 해당 독침을 맞으면 바로 근육이 마비되고 숨이 막혀 금세 목숨을 잃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독침은 볼펜 · 만년필 등에 숨기기 용이하면서도 유효 사거리가 10m는 돼서 근거리에서 효과적으로 기습 공격을 할 때 쓰였다고도 한다. 1968년 청와대 무장 공비 습격 사건에도 쓰였고, 1990년 · 1995년 두 차례 남파된 공작원 김동식씨도 이 독침 펜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공개한 북한 공작원 관련 전시물. 독극물 립스틱.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암살범 · 공작원이 유사시 썼다는 ‘독극물 립스틱’ 도 인기를 끌고 있는 전시물 중 하나다. 검은색 몸통에 든 립스틱으로 독을 머금고 있다. 박물관 측은 “보통 10달러 (약 1만4000원)도 하지 않는 립스틱이지만 이 안에 독이 있다면 바르는 사람은 바로 목숨을 뺏긴다” 면서 “암살이 아닌 자살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고 했다.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공개한 북한의 원거리 통신용 라디오.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북한 공작원이 본국과의 소통을 위해 종이에 쓴 보안 코드 ('코드 테이블'). 박물관이 북한 공작원 관련 도구를 전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북한 간첩이 본국과 원거리에서도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데 쓰였다는 일본 파나소닉사의 RF-B65 단파 라디오, 여기서 송출되는 난수 방송을 해석하는 도구인 ‘코드 테이블’ 도 볼 수 있다. “숫자 ‘86093′이 ‘암살’ 을 뜻한다” 고 한다. 비무장지대 (DMZ)를 배회하던 북한 군인이 어둠 속에서 의지하던 적외선 카메라, 북한 암살범이 작전 수행 후 본국에 정보를 보고할 때 썼다는 낡은 트랜스미터 (전송기)도 함께 전시됐다.
박물관이 북한 스파이 관련 물건을 전시하게 된 건 작년 7월 박물관 소속 역사가인 앤드루 해먼드 박사가 탈북민 김모씨를 공개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씨는 북한 정보기관 요원 출신으로, 탈북 후 2015년부터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해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탈북 여정과 남한 정착 얘기를 들으려 평일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청중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이를 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측은 우리 국정원에 협조를 구해 북한 물건들을 사상 최초로 전시하기로 했다.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공개한 북한 공작원 관련 전시물. 야간에 쓰이는 적외선 조준경.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미 ‘국제 스파이 박물관’ 이 공개한 북한 공작원 관련 전시물. 내부 통신용 송신기. /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가 현재진행형인 한반도 분단, 북한 핵 · 미사일 폭주 등에 대한 관심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브란 매니저는 “많은 사람이 첩보 활동과 역사,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면서 “이것이 우리 박물관이 지닌 교육적 사명” 이라고 했다.
박물관은 전시 안내문을 통해 “공산주의 북한은 1950 ~ 1953년 한국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통일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며 한반도 분단이 남침에서 비롯됐단 사실도 분명히 알리고 있다. 박물관 측은 또한 북한에 대해선 안내문을 통해 “1948년부터 김씨 집안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고립된 권위주의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억압이 심한 나라” 라며 “당의 노선에서 벗어나거나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심한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고 했다.
워싱턴 = 김은중 특파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5월 27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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