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9) 대통령의 뒷모습

드무2 2021. 6. 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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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9) 대통령의 뒷모습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시청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기념 연설을 하자 수많은 평양 시민이 광장에 몰려들어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1950년 가을 평안북도 영변에 사령부 CP를 두고 운산 전투를 치르면서 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을 본격적으로 맞아 싸웠다. 날씨는 이미 추워지고 있었다. 아직 하복(夏服) 차림이어서 냉기가 더 느껴졌다. 나는 우리 전선의 정면에 나타난 중공군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내외가 평양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평양 10만 군중 연설, 하지만 중공군은 멀지 않은 곳에 …

 

 

대통령은 애초 10월 25일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연설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기됐다. 미뤄진 날짜는 10월 30일이었다. 나는 그때 중공군 포로를 닷새 전에 심문하고, 그들의 대거 참전을 예감하면서 조바심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평양에 처음 입성한 국군 1사단의 사단장으로서 대통령의 방문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나는 영변에서 지프를 타고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평양의 비행장 도착 때는 내가 시간을 맞추지 못해 당시 평양에 머물던 부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대통령을 영접했다.



나는 평양 시청으로 향했다. 이 대통령이 그곳에서 연설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대통령에게 힘찬 거수경례를 올렸다. 대통령은 내게 다가와 “정말 수고 많았구먼”이라며 격려했다. 그리고 대통령 내외는 광장 쪽을 향해 마련된 시청 앞 연단에 올랐다.

 

 

 

국군과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 뒤인 1950년 10월 30일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양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에게 평양의 한 어린이가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혁명가요, 독립운동가의 풍상(風霜)을 간직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든 평양시민은 어림잡아 10만 명은 돼 보였다. 대통령은 열변을 토했다.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이었고, 평양 시민들은 힘찬 환호로 노대통령의 연설을 반겼다. 그 현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마치 통일이 이뤄진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신경은 다른 데를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경호를 우리가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평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쪽에 이미 모습을 드러낸 중공군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대통령이 일정을 마쳤다. 내 지프 앞좌석에 대통령이 타고, 뒷좌석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내가 올라탄 채 비행장으로 향했다. 대통령의 다음 행선지는 함흥이었다. 대통령은 그곳으로 가서 평양에서처럼 함흥 시민들을 상대로 연설할 예정이었다. 비행장으로 가는 길에 이승만 대통령은 별말이 없었다. 역사의 풍운(風雲)을 헤치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2년 만에 치른 전쟁의 한복판. 그는 남북으로 갈라졌던 한반도의 비극을 체감했고, 급기야 통일을 눈앞에 뒀다는 생각을 했을지 몰랐다. 아니면, 청천강 이북에서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중공군의 존재를 이미 알고서 다른 조바심에 마음을 태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대통령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곧 비행장에 도착했다. 태극 마크를 그려 넣은 미 C-47 수송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뒤로 돌아서더니 우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트랩에 올랐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 정일권 참모총장도 함께였다. 트랩 속으로 사라지는 대통령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대통령이 탄 수송기는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치고 나아가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찌감치 불길한 여러 조짐을 드러냈던 그 싸움터로 가서 중공군과 혈전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참담하게 후퇴했다. 미군의 희생은 더 컸다. 그들은 미군 역사에 결코 기록하고 싶지 않은 참패를 중공군에 당했다. 운산 전투, 군우리에서의 참패, 이어 평양을 내주고 이어지는 1·4 후퇴의 기록이 그 다음으로 이어졌다. 이는 전 단락인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에서 이미 상술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한반도 북방의 추위는 원래 그랬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줄곧 이어지는 게 그곳의 겨울이다. 그러나 느낌으로 다가온 그해 겨울은 더욱 추웠다.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랑스러운 한반도의 명소이자 역사적 고도(古都)인 평양에서 다시 물러났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얼마였을까.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그 전선에서 물러난 군인에게 그 마음의 상처는 오래 이어진다. 지금도 그때의 여러 가지 정황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그러나 적이 있으면 붙어 싸우는 게 우리 군인의 본분이다. 나는 그 이듬해 봄인 1951년 4월 중순, 강원도 강릉의 1군단장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싸움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엄혹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맞이한 그 봄은 을씨년스러웠다.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령(山嶺)을 넘어온 새로운 적, 중공군의 춘계(春季) 공세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악 지역에서 나는 이들 중공군을 맞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넓히고 다지면서 치고 올라가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9) 대통령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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