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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乙巳年, 뱀을 말하다]

드무2 2025. 1.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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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乙巳年, 뱀을 말하다]

 

 

 

‘을씨년스럽다’ 는 말의 어원이 된 을사년 (乙巳年). 국운 (國運)이 크게 요동쳤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뱀의 검질긴 생명력이 있었기에 당시 어려움을 오히려 유연하게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뱀은 우리 문화 속에서 징그럽고 두려운 동물이지만 생명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하다. / 일러스트 = 이철원

 

 

 

온몸이 꼬리인 동시에 몸통··· 어떠한 고난도 유연하게 통과하리라

 

 

 

검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물

극복하기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어

 

새 乙 뱀 巳··· '날개 달린 뱀' 아닌가

기적처럼 날아오르는 새해 되길

 

 

 

을사년 새해 첫날에 신문을 보는 분들께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가장 복될지를 고민하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이경손 (1905 ~ 1977). 조선일보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던 그는 유독 신문이라는 매체와 가까웠는데, 이유인즉 어떤 주제로 어떤 장르의 글을 청하든 막힘없이 써서 틀림없이 건네주는 편리함과 성실함 덕이었다. 하여 그 자신은 스스로를 ‘촙수이 문사’ 라 자조하기도 했다. 촙수이란 요즘으로 치면 중화요리점의 잡탕밥과 흡사한 메뉴. 빠르고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믿음직한 요리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것을 꼽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이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으리라.

한국의 1세대 영화인이었던 그는 일명 ‘이수일과 심순애’ 로 유명한 영화 ‘장한몽’ 을 연출하기도 했다. 업적에 비해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문 편이다. 그런 그를 나는 어찌 알고 있는가 하면 작년에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한 권 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그가 오촌 조카 현앨리스와 손잡고 지금의 인사동 일대에 최초의 서구식 끽다점, 즉 카페를 창업한 이야기를 다뤘다. 창업 도전 전후로 그가 겪은 온갖 실패도 함께 엮었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에 담아내려 한 궁극은 이경손이나 현앨리스 같은 근현대 인물 개개인의 사사로운 체험만이 아니었다. 이경손의 실패담은 3 ∙ 1운동의 후일담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의 경력은 3 ∙ 1운동에 자극을 받아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운데서 시작됐고, 함께 카페를 창업한 현앨리스는 3 ∙ 1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상하이로 가져간 목사 현순의 딸이었다. 사촌 매형 현순을 동경했던 이경손은 그를 본받아 신학대학에 다닌 적도 있다. 생애 내내 3 ∙ 1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그가 마침 1905년 을사년 태생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고 보면 묘연이다. 뱀띠 소설가라는 이유로 을사년 뱀띠 해 특집 원고를 청탁받은 내가, 실존 인물이었던 을사년생 소설가 겸 영화감독을 주인공 삼아 역사소설을 쓴 적이 있고,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조선일보는 내 소설의 주인공 이경손 역시 장편소설을 연재한 적 있는 지면이라는 것. 서로의 꼬리를 물어 기다란 원을 이루는 뱀들의 형상이 아닌가. 역사라는 것의 속성 또한 그런 듯싶다. 우리는 그것이 수십 년 전, 한 세기 전,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일일 뿐이라 착각하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멀게 느낀 그 일이 우리 눈앞에서 재현될 때도 있는 것이다.

갑자가 돌아 올해는 을사년이다. 보통 뱀띠 해가 아니라 소위 ‘을씨년스럽다’ 라는 말의 어원이 된 바로 그 을사년이다. 두 갑자 전에는 을사늑약이 있었고 한 갑자 전에는 한일협정이 있었다. 이렇게만 보아서는 을사년마다 국운이 크게 요동치는 것인가, 사뭇 긴장도 될 법하다. 그러나 어느 해라고 평온하기만 했던가. 돌아보면 한 해 한 해 크고 작은 아픔이 있었고, 같은 해에 뜻하지 않은 기쁨들도 있었다.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에 일어났다면 극복하기 어려웠을 일이라도, 검질긴 생명력의 상징인 뱀의 해에라면 이겨낼 수 있다. 지난 을사년의 아픔들은 도리어 을사년에 일어났기에 보다 빨리 극복된 거라 믿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2025년, 새로운 을사년은 과연 어떨까. 사실 을사년은 새 을 (乙) 자에 뱀 사 (巳) 자를 쓰니 상상력을 발휘해 날개 달린 뱀으로 해석해 봄 직도 하다. 뱀에게 날개가 달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진화를,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온몸이 꼬리인 동시에 몸통이기에 어떠한 고난도 유연하게 통과해내는 뱀, 그 몸에 날개가 돋쳐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2025년을 대하는 우리가 갖춰야 할 태세, 청사진 (靑寫眞) 아닌 청사 (靑巳)의 진 (陣)일 것이다.

 

 

 

뱀띠 소설가 박서련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월 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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