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1

광복 80주년 기념 서울 · 안동 교류특별전
2025. 8. 5. Tues. ㅡ 8. 31. Sun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를 열며
안녕하십니까. 서울특별시장 오세훈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특별전을 개최하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상룡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십니다. 정통 유학자였던 그는 국권 침탈의 현실 앞에서 전통사상의 한계를 넘어서고, 근대사상을 수용한 혁신유림으로 거듭났습니다.
1911년 54세의 나이에 일가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그곳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과 임시정부 활동에 헌신하며 만주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이상룡 선생과 같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위에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충절의 고장 안동과 서울이 함께 마련한 뜻깊은 자리입니다.
이 전시를 통해 선열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독립의 가치를 마음 깊이 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시는 앞으로도 안동시와 함께 문화, 관광,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이번 전시가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의 자유와 평화가 어떻게 지켜졌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5. 8.
서울특별시장 오세훈

경북인,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다
나라를 빼앗기자 경북인의 만주망명은 줄을 이었다. 1911년에만 2,500명이 넘었고, 1920년대까지 수만 명이나 될 정도였다. 만주망명 애국지사들의 목표는 독립전쟁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자치단체를 만들고 학교와 병영을 세웠다. 청년들은 강인한 독립군으로 거듭났고,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목숨이 스러졌고,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 험난한 여정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들의 투쟁을 지탱했던 여성들 또한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경북의 대표적인 망명집안
울진 | 경주이씨 성주 | 성산이씨 안동 | 고성이씨
평해황씨 영덕 | 무안박씨 의성김씨
영양 | 한양조씨 함양박씨 전주류씨
상주 | 진주강씨 진성이씨
구미 | 임은허씨 풍산류씨
홍해배씨

만주로 망명하는 한인행렬 | 경상북도 호국보훈재단 제공




32일간의 망명 여정 안동 ~ 만주 횡도천 横道川
1911년
● 1월 4일 노비 해방 후 일가 친척과 조촐한 식사
● 1월 5일 의장소에 100꿰미 기부, 족조 동곽의 빚 갚는데 30꿰미 보조
도동서숙 道東書塾 학생들과 인사 후 안동 출발
● 1월 6일 송기식과 송별, 이종기 · 김흥한과 두솔원에서 투숙
● 1월 7일 하회 손서 류시준 집에 도착
● 1월 8일 울음을 터트리는 손녀를 달램
● 1월 9일 봉대 (상주 인봉) 사위 강남호 집에 도착
● 1월 10일 울음을 터트리는 딸을 달래고 작별
● 1월 11일 추풍령 도착
● 1월 12일 오전 2시 출발 (경부선), 8시 12분 서울 도착
● 1월 13일 양기탁 만남
● 1월 19일 9시 10분 경의선 열차 승차, 10시 개성을 지나고 오후에 평양, 밤 신의주 도착
● 1월 21일 용강학교 학도 이용혁을 만남
● 1월 22일 청국 돈으로 환전, 일본인 서점에서 만주지도 구입
● 1월 25일 아들 준형 및 동생 봉희 일행과 만남
●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너 단동 도착
● 2월 1일 관전성 남쪽 수십리에 있는 염가점 투숙
● 2월 4일 태평성에서 숙박
● 2월 7일 횡도천에서 처남 백하 김대락 가족을 만남



압록강을 건넌 구국의 일념
이상룡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 자금을 마련하였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을 받아들인 근대사상가답게,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며 계급 질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1911년 음력 1월 5일, 안동을 떠난 그는 1월 25일 신의주에서 가족들과 합류하고,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후 험난한 여정을 거쳐 3월 7일, 마침내 길림성 吉林省 회인현 懷仁縣에 도착하여 서간도에서의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국을 위해
온 가족이 만주로
1910년 8월 29일,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탄되자, 이상룡은 가족과 친척 등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신민회 新民會의 '해외 독립기지 건설론' 에 부응한 행동으로, 안동의 이상룡 · 김대락 金大洛 (1845 ~ 1915) · 김동삼 일가를 비롯해 서울의 이회영 李會榮 (1867 ~ 1932) · 이시영 李始榮 (1869 ~ 1953) 등 6형제, 강화도의 이건승 李建昇 (1858 ~ 1924), 진천의 정원하 鄭元夏 (1855 ~ 1925) · 홍승헌 洪承憲 (1854 ~ 1914) 등 여러 유력 가문 인사들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의 집단 이주는 서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 형성과 만주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국음 去國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김용직 한역 | 지본 묵서
"나라를 떠날 때 읊는다."
1911년 (54세) 1월 4일
만주로 출발하기 하루 전, 설날의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조촐하게 술상을 차리고 마을 사람을 불러 종일토록 놀며 이 시를 읊었다.
'원수에게 어이없이 나라를 빼앗겼네.
어찌 남아서 장부의 목숨 아끼랴.
잘 있거라. 고향 동산아, 슬퍼하지 말자.
난리 그친 밝은 새날 돌아오리니.'


압록강상망만주 鴨綠江上望滿洲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압록강 변에서 만주를 바라보며"
1911년 (54세) 1월 23일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혼자서 집을 떠난 지 19일이 지났다. 추풍령까지 걸어간 다음, 기차를 타고 압록강 근방까지 왔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쓴 시다.
'저곳은 부여가 나라를 세웠던 곳.
우리 땅이었다.
지금은 남이 차지하고 있지만.'



도강 渡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김용직 한역 | 지본묵서
"27일 강을 건넘"
1911년 (54세)
이틀 전에 도착한 가족과 함께 얼어붙은 압록강을 수레로 건너다.
'왜놈이 집과 논밭을 빼앗더니
이제 처자식마저 넘보는구나.
차라리 머리가 떨어질지언정,
무릎을 꿇고서 종이 되지는 않으리.
집 나선 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
벌써 압록강을 건너버렸네.
누굴 위해 발길을 머뭇거리랴?
가슴 펴고 가리라. 나는 가리라.'



서간도의 한민족 자치조직 건설
이상룡은 같은 시기 만주로 망명해 온 김대락, 이회영, 이동녕 李東寧 (1869 ~ 1940) 등과 함께 길림성 吉林省 유하현 柳河縣 삼원보 三源堡에 집결하여, 농업을 통한 경제안정, 교육기관 설립, 독립군 양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아래 1911년 5월 자치기구인 경학사 耕學社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이어 6월에는 신흥강습소 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이러한 자치 조직의 구성은 한인 이주민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지만, 풍토병과 대흉년, 그리고 일제의 방해로 인해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12년에는 이상룡이 소속된 자신계 自新契와 김대락이 이끈 공리회 등이 통화현 합니하에 부민단 扶民團을 조직하였고, 초대 단장은 허혁 許赫 (1851 ~ 1939)이 맡았다. 이후 1916년에는 이상룡이 부민단 단장에 취임하였다.





만주 한인사회의 지도자
초기 한민족 자치조직의 설립 과정에서 이상룡은 동료 애국지사들과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였다. 그는 유하현 柳河縣 국민회 회장 명의로 중화민국 국회에 한인들의 안정된 삶을 위한 네 가지 협조사항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통화현 通化縣 합니하 哈泥河의 신흥강습소를 운영하며 병농일치 방식으로 무장 독립 세력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활동은 농장을 가장한 군사기지 형태로 확대되어 백서농장 白西農莊과 마록구농장 馬鹿構農莊 등이 설립되었고, 이상룡은 직접 화전현의 길남장 吉南莊을 운영하기도 했다.
초기 독립자금 마련에는 서울 출신 이회영 6형제가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큰 힘이 되었고, 이상룡 역시 간도로 떠나기 전 집안 재산을 처분하였다. 이후 자금이 바닥나자 종택 임청각을 팔겠다는 결연한 뜻을 밝히며, 문중으로부터 1,000원의 독립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는 이어 남만주의 13개 단체를 통합해 한족회 韓族會를 발족하고, 독립운동의 재정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져나갔다. 또한 1919년 2월에는 만주 · 상하이 · 베이징 · 연해주 · 미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 39인이 독립전쟁 의지를 담아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상룡과 함께 경학사 창립에 기여한 주요 독립지사들
이동녕 李東寧 (1869 ~ 1940, 왼쪽), 이시영 李始榮 (1869 ~ 1953, 가운데), 이회영 李會榮 (1869 ~ 1932, 오른쪽)

이동녕 李東寧 (1869 ~ 1940)

이시영 李始榮 (1869 ~ 1953)

이회영 李會榮 (1869 ~ 1932)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 독립기념관 | 복제
1919년 2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 39인이 만주 길림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작성자인 조소앙 趙素昻은 이 선언서를 통해 대한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자 민주주의 자립국 임을 선포하고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으로써 반드시 해야할 일은 바로 독립을 이루는 것임을 일깨우며 목숨을 걸고 피 흘려 싸워 이뤄낼 것을 호소하였다. 서명자에는 이상룡을 비롯하여 김규식 金奎植, 김동삼 金東三, 김좌진 金佐鎭, 조용은 趙鏞殷 (조소앙), 여준 呂準, 이동녕 李東寧, 이동휘 李東輝, 이승만 李承晩, 이시영 李始榮, 박은식 朴殷植, 신정 申檉 (신규식), 신채호 申采浩, 안정근 安定根, 안창호 安昌浩, 허혁 許爀 등 39명이 이름을 올렸다. 조국을 떠나 만주 · 상해 · 미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인사들의 선언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신흥교우보
제2호 | 1913년 | 독립기념관 (김운하 기증) | 복제
『신흥교우보』는 신흥강습소 졸업생들이 만든 '신흥교우단' 에서 발행한 기관지이다. 1913년 6월에 창간되었으며, 제2호는 같은 해 9월, 강일수 姜一秀 (편집 겸 발행인)에 의해 발간되었다. 갱지 更紙에 등사기로 인쇄되었고 내용은 논단 論壇, 강단 講壇, 학원 學苑, 소설 小說, 문림 文林, 축사 祝辭, 잡조 雜俎, 회중기사 會中記事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이 기관지는 단순히 독립사상을 북돋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만주를 비롯해 연해주와 미국에까지 전해져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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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일가의 만주 망명과 정착
상영시간 | 5분 25초
영상 제공 | 걍상북도 호국보훈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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