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3




연경유감 燕京有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연경 燕京 (베이징 北京)에서의 소감"
1921년 (64세)
독립 군정 통일회의에 참석하려고 북경에 갔다.
이곳은 청나라의 수도이다.
'금마문의 아름다운 누대에는
향 연기가 멀어졌고,
청조의 황제 능에는 석양빛이 차갑다.
동족 망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프네.'



길림제석 吉林除夕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길림성에서 섣달 그믐밤에"
1920년 (63세)
'세계는 황금이 맹위를 떨치고,
요사스러운 여우들이 북간도에서 설치지만,
동쪽하늘 상서로운 운이 돌아서 봄바람에
춤출 날이 멀지 않으리,'



(대련) 고려 발해 (對聯) 高麗 渤海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2쪽 | 지본묵서 | 행초
"길림성에 이르다" 중의 대구 對句
1920년 (63세)
'고구려의 옛 문물은
산이 북으로 에워 쌌고
발해의 발자취는
물이 동으로 감고 흐르네.'



신축춘 辛丑春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신축년 봄"
1920년 (63세)
종숙 승일씨를 왜놈 10여 명이 잡으러 왔다. 이웃집 중국인 여인이 승일씨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옥을 벗게 하고, 승일씨의 어깨를 베고 이불을 덮어 위기를 넘겼다.
'중국인 부인의 고상한 의로움은
보통 인심을 초월하네.'





만주기사 滿洲紀事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10폭 | 지본묵서 | 예서
"만주에서 겪은 일"
1924년 (67세)
만주로 이주하여 이제까지 겪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16편의 서사시 敍事詩로 정리하였다.









사고향 思故鄕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8폭| 지본묵서 | 행초
"고향을 생각한다"
1924년 (66세)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일들과 고향 그리운 마음을 장편 시로 서술하였다.
'낙동강 강변에 대를 이은 우리집,
임청각! 사당문 잠그고 제향도 그만두었네.
대의도 이루지 못해 한스러운 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 못 자는데,
달은 서산에 기울고 두견새가 울어댄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서 물러나다



봉춘희음연경시 逢春戱吟燕京時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초
"봄을 맞이하여 우스개로 읊다. 연경에서"
1926년 (69세)
상해임정의 다툼이 치열하다. 국무령 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경 (북경)에 들른다. 난리를 만나 체류한다.
'노쇠한 몸으로 허명에 몸 굽히기를
평소에는 싫어하였는데, 그래도 몸을
움직여 통합해 보려 하였으나 희망이
없으니 어찌 머뭇거리겠는가?'
'봄바람이 바다의 동녘에서 불어 오니,
마땅히 내 고향집에 들렀겠지. 문 앞의
다섯 버들 소식 먼저 알리고, 집 밖의
심여 그루 매화나무 향기를 전해오네.
걱정이 많아 천 편 시도 짓지 못하였고,
돈이 없어 술 한 잔도 따르기 어려운데,
난 (지명) 냇가 헌 집들은 정취 고상해,
돌아올 때 다시 들러 즐겁게 거니네.'



환산후작 還山後作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산으로 돌아온 후에 짓다"
1926년 (69세)
상해에서 국무령 직을 내던지고 북경을 거쳐 호란하 呼蘭河의 산골로 돌아왔다.
'가을 달을 보고 가벼이 사립문을 나섰다가,
봄바람 동무 삼아 집으로 잘 돌아왔네.
시기와 다툼을 보고 산도 물도 노했는데,
꽃들만이 웃으며 반기는구나.'



화손반석과기불환 華孫盤石過期不還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손자 병화가 반석에서 올 때가 지났는데 오지 않는다"
1930년 (73세)
이때 손자 병화가 나이가 24세다. 7년 전에 결혼하였다. 재작년에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이 무렵 일본군이 봉천, 장춘, 길림까지 점령하였다. 이곳은 이상룡이 사는 소과전자 燒鍋甸子의 남쪽이다. 손자도 여기에서 더 가까운 남쪽인 반석현 盤石縣으로 갔는데 소식이 없다.
'반석에 간 손자가 한 달 넘게 돌아오지
않네. 어린아이 병은 실날같이 위태롭고,
나그네 수심이 삼밭처럼 어지럽다.
아침마다 우편함에 편지 있나 살펴 보고,
밤 깊도록 불을 밝혀 놓는다.
남쪽에는 왜놈들 함정이 많으니,
아무쪼록 어두울 때 총칼 대비 잘하기를.'




국무령 國務領 이상룡 李相龍 연보
박민영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지식산업사, 2020) 정리

1858. 11. 24.
158년 | 1세 안동 임청각에서 부친 고성이씨
승목과 모친 안동권씨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0대
1872년 | 15세 김진린의 딸, 우락과 혼인
1873년 | 16세 부친 이승목 별세
1875년 | 18세 아들 준형 출생

20대
1886년 | 29세 과거에 응시
30대
1894년 | 37세 조부 이종태 별세,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으로 도고 이거
1895년 | 38세 을미사변, 단발령 시행
1896년 | 39세 안동의병 봉기, 외숙 권세연 의병장으로
선발됨. 고성이씨 문중 5백 냥 출연

40대
1898년 | 41세 류창식, 김형모와 함께 향약 시행
1905년 | 48세 을사늑약 체결, 거창 차성충 등과 함께
가야산을 의병 근거지로 구상
50대
1907년 | 50세 류인식과 김동삼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 운영을 적극 지원
1909년 | 52세 안동경찰서 구금,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1910년 | 53세 친족 단위 가족단 결성, 경술국치, 처난 김대락 서간도 망명
1911년 | 54세 서간도 망명에 오름 1월 5일, 경학사 설립, 사장에 피선
경학사 취지서 작성, 신흥강습소 개교
1913년 | 56세 부민단 설립, 한민족 역사서 『대동역서』저술,
군자금 마련위해 아들 준형 국내 파견, 임청각 매각 시도
1914년 | 57세 백서농장 설립, 처남 김대락 별세
1916년 | 59세 부민단 단장

60대
1918년 | 61세 화전현에 길남장 설치 운영
1919년 | 62세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 3 · 1 운동 발발, 한족회 발족, 서로군정서 결성
독판에 피선
1920년 | 63세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1921년 | 64세 북경군사통일회의 좌장, 서로군정서 액목현 회의
1922년 | 65세 액목현 황지강자에 검성중학원 설립 운영, 대한 통의부 결성
1923년 | 66세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서간도 대표로 김동삼 · 배천택 · 이진산 · 김형식 파견
1925년 | 68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취임 (9월 23일), 이탁 · 김동삼 · 오동진 ·
이유필 · 윤세용 · 현천묵 · 윤병용 · 김좌진 · 조성환 등 9명 국무원 임명
1926년 | 69세 국무령 사임, 남만주 반석현 호란하 정착

70대
1929년 | 72세 서란 소과전자로 이주
1931년 | 74세 김동삼 체포 당함
1932년 | 75세 서거 5월 12일, 거주지 뒷산에
임시장례
1932. 5. 12. 이후
1938년 하얼빈 취원창으로 이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3년 대구 달성공원에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건립
1990년 유해 환국, 대던국립묘지 안장
1996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으로 이장



임청각에서 태어난
명문가 후예
이상룡 李相龍 (1858 ~ 1932)은 고성이씨로 1858년 11월 24일 경상도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이승목 李承穆 (1837 ~ 1873)의 장남으로, 어릴적 이름은 상희 象羲였으나 1911년 중국 망명 이후 '상룡' 으로 개명하였고, 호는 석주 石洲라 하였다. 고성 固城이씨 문중은 15세기 이증 李增 (1419 ~ 1480)이 영산현감에서 물러난 뒤 안동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의 유력 양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이후영 李後榮 (1649 ~ 1712) 등은 중앙관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국무령 이상룡 가계도



1940년대 임청각 모습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통 성리학자 이상룡
안동의 정통 유학자 집안 출신답게 이상룡은 이전 李銓 (1832 ~ 1886), 김도화 金道和 (1825 ~ 1912), 김흥락 金興洛 (1827 ~ 1898) 등 유학자로부터 수학하였으며, 29세 때 과거에 응시한 적도 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개화 정책으로 유교적 예교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에 우려를 느끼고 예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임청각에서 족친들과 함께 향음주례를 열며 유교적 전통을 실천하였다.



이후영홍패
1684년 | 지본묵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자료 (기탁처 :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 복제
이후영 李後榮 (1649 ~ 1710)이 1684년 문과에 합격하고 국왕 명의로 받은 합격증서이다. 문서에는 당시 정5품 통덕량 通德郞이던 그가 문과의 세 번째 등급인 병과 丙科에서 첫 번째 등위로 합격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발급 날짜는 강희 康熙 23년 (1684) 11월 18일이다.


우향계축
1738년 | 지본묵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자료 (기탁처 :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1738년에 작성된 우향계축이다. 원래 문서는 1478년 이증 李增 (1418 ~ 1480)이 영산 靈山 현감을 그만두고 안동에 들어오면서 이 지역 인사들과 함께 13명으로 계를 조직하고 작성한 것이다. 본문에는 계원 13명에 대해서 품계, 직역, 성명, 본관 그리고 각각 부친의 품계와 직역, 성명을 기록했다. 수록된 인물은 이증 李增 (고성인)을 포함하여 권자겸 權自謙 (안동인), 배효건 裵孝騫 (흥해인), 남경신 南敬身 (영양인), 노맹신 盧孟信 (안강인), 배효눌 裵孝訥 (흥해인), 남치공 南致恭 (영양인) 등 13인이다. 뒤에는 서거정이 쓴 7언 서시 序詩가 있고 이어서 이명 李洺 등 우향계의 자손들이 옛 전통을 계승하여 조직한 진솔회 眞率會의 명단 (15인)이 수록되어 있다.


의병운동에 참여하다
37세이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상룡은 병학 兵學을 연구하였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외숙부 권세연 權世淵 (1836 ~ 1899), 스승 김흥락 · 김도화 등과 함께 임청각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도성 점령보다는 험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 효과적이라 판단하여 이를 제안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이상룡은 매부 박경종과 함께 1만 5천 금을 마련하고, 이규명의 1만 금, 남세혁의 논밭 기부 등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1908년 차성충 車星忠 (1859 ~ 1905)을 의병장으로 세워 거병을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하였고, 이듬해 안동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은 오히려 그의 항일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안동의진 安東義陳 의병장에게 의병항쟁 대안 4가지 제시
1. 군율을 엄격히 할 것
2.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것
3.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아낄 것
4. 유능한 인물들을 충원하여 지휘부를 구성할 것

이규명 「기년」 李圭命 「記年」
『세심헌선생문집 洗心軒先生文集』 | 개인 소장
이규명 李圭命 (1851 ~ 1918)이 쓴 의병 전말기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상룡이 무신년 (1908) 정월에 일만 냥이 되는 거금을 마련하여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보내왔다고 했다. 그는 이 돈을 거창의 의병장 은표 隱豹 차성충 車星忠 (1859 ~ 1905)에게 전달했고, 그는 이를 자본으로 가조산 加祚山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거창의 왜적을 토벌하고자 했다. 이상룡은 이미 1905년 12월에 거창의 차성충을 찾아가 박경종 朴慶鍾과 함께 일만 오천 냥을 마련하여 험준한 산에 독립 기지를 설치하고자 했는데, 3년 뒤인 1908년 정월에도 일만 냥을 보내준 것이다. 그는 만주로 가기 이전 국내의 의병운동에서도 본인의 자산을 다해 투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지식인으로의
변신
의병 활동이 좌절로 끝나자, 이상룡은 그 원인을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데에서 찾았다. 그는 동서양 강대국들의 책을 읽으며 세계 정세 변화를 깨닫고, 서양의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명문가 출신의 유학자로 평샹을 살아온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믿어온 전통을 내려놓는 데 깊은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내면의 고뇌는 그가 남긴 시 『우음 偶吟』에도 나타나는데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유학 공부의 공허함과 선비로서 느낀 무력감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협동학교 지원과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의병활동의 실패 ➨ 서양사상 수용과 계몽운동 (협동학교 · 대한협회 안동지회 등) 새로운 방향 모색
ㅡ 협동학교를 통한 신교육운동
ㅡ 손위 처남 김대락 협동학교 교사 校舍 제공, 조카 이운형 · 이문형 등 학생으로 등록

협동학교 설립자 김동삼 金東三 1878 ~ 1937

김동삼과 협동학교 교직원


협동학교 졸업사진

대한협회 안동지회 관련 통감부 문서
1909년 5월 5일 오후 3시 창립총회를 개최, 회장 이상희 (이상룡), 부회장 권병시, 총무 이진구 등 56명이 참가하였다.


서양 근대사상의 수용
을사늑약의 부당성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을 이어가던 이상룡은, 성리학과 같은 전통사상만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절감햇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개화 사상가로 나아가, 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힘쓰게 된다.
1907년 류인식 柳寅植 (1865 ~ 1928), 김동삼 金東三 (1878 ~ 1937)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 協同學校에 적극 참여하며 안동 지역의 신교육을 이끌었고, 유교의 도덕적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점진적 진화론과 국가를 국토와 국민, 정부로 구성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동서양의 철학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상체계를 정립하려 했다. 또한 그는 근대 과학에서 다루는 자연현상과 법칙 등 실용적인 지식에도 관심을 가지며,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우음 偶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우연히 읊다"
1908년 (51세)
평생 공자와 맹자를 읽으며 의로움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으나,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음을 한탄한다.



무수 無睡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잠 못 이룬다"
1909년 (52세)
며칭 전에 받은 신문에 색칠하여 지운 곳이 있었다. 일제의 언론 검열이 삼엄함을 실감하고 놀랐다. 온갖 시름에 잠 못 이루는데, 마당에 별빛이 쏟아진다.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근대사상가로 거듭난 이상룡은 1909년부터 대한협회 안동지회 大韓協會安東支會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안동지역 계몽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와 행동강령을 통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 사상을 알렸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자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지회를 단순한 단체가 아닌 정당에 가까운 조직으로 인식하며 향촌 단위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룡이 주도한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구한말의 계몽운동과 향촌 사회운동을 이어받아 이후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 형성과 무장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협회라는 것은 대한 국민의 정당이 되는 모임이다. 오호라. 우리 한국도 또한 국민이 있는가? 대개 나라는 백성들의 공적 자산이고,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다. 국사는 국민이 다스리고, 국법은 국민이 정하고, 국가의 이익은 국민이 일으키고, 국난은 국민이 막는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업신여길 수 없고, 그 나라는 망하게 할 수가 없으니, 이를 국민이라고 하는 것이다. ···
···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정치에는 의회가 있고, 지식인에게는 학회가 있으며, 농민에게는 농회가 있고, 상인에게는 상회가 있으며, 장인에게는 공회가 있어야 한다. 이 모든 모임에서는 시국을 함께 배우고, 실업을 함께 연구하며, 국민의 지혜는 날로 밝아지고, 국력은 날로 자라난다. ···
··· 이에 우리는 원근의 동지들과 함께 지회 하나를 조직하고, 경성의 본화와 연계하기에 이르렀다. 그 취지를 말하자면 정치요, 교육이요, 산업이며, 그 목적을 말하자면 나라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며, 민족을 지키는 것이다. 본래 지녔던 옛 학문은 더욱 벼리고, 아직 갖추지 못한 새 제도는 취사하여 보완하며, 정신을 모으고 지덕을 함께 기름으로써 대한의 자주적 권리를 일으키고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
ㅡ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 중에서 ㅡ


안동대한협회취지서
1909년 | 서울역사박물관
1909년 2월, 대한협회 회원인 이성구 李性求, 김만식 金萬植, 이봉희 李鳳羲, 김흥한 金興漢 네 사람이 함께 뜻을 모아 작성한 문서로 단체의 설립 정신과 목적이 담겨 있다. '안동대한협회' 는 정확히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安東支會' 를 의미한다. 내용은 '사천 년 역사를 지닌 조국이 힘없이 이웃 나라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니 몸을 바쳐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굳은 뜻을 세우고 멀고 가까운 동지들이 지회를 조직하여 경성 京城의 본회 本會와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는 것이다.


대한협회규칙
1907년 | 서울역사박물관
대한협회가 단체를 세운 뜻과 지켜야 할 기본 정신, 운영 원칙 등을 담아 펴낸 책이다. 대한협회는 1907년 우리나라의 교육을 발전시키고 산업을 일으켜 일제 침략에 맞서 무너져 가는 국권을 되찾고자 설립되었다. 이후 1910년까지 정치, 교육,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와 민족이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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