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2

드무2 2025. 8. 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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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2

 

 

 

 

 

 

 

 

 

 

의병, 애국계몽 운동

 

 

 

 

 

 

 

 

 

 

가야차성충 伽倻車晟忠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가야산 차성충 집에서 한 해를 보내다"

 

1909년 (49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이상룡은 의병 운동을 시작한다. 의병 기지를 구축하려고 1만 5천 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간다. 이 시는 1906년 섣달 그믐밤, 가야산 차성충의 초가집에서 썼다.

 

'산골 창밖에 눈이 날리는 데,

고향 소식 멀고 친구도 드물다.

앞 일을 어찌 알까 궁리하면서

지난 잘못을 알아차린다.'

 

 

 

 

 

 

 

 

 

 

대한협회안동지회취지서 大韓協會安東支會趣旨書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1909년 (52세)

 

이 취지서는 민주 공화주의의 정의를 밝힌 글이다. 지금은 민주 공화정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16년 전 나라는 군주의 사유물로 인식되고 정치는 관리들의 독점물이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용감하게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였으나 재물만 소비하고 참혹한

화를 입었을 뿐이다. 백성의 지혜를 모아

국력을 증진하여야 한다.'

 

'나라는 백성의 공공 재산이요,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다. 나랏일은 국민이

다스리고, 국법은 국민이 정하며,

국가의 부는 국민이 일으키고,

국난은 국민이 방어해야 한다.'

 

 

 

 

 

 

 

살기 좋은 고향을 떠나 황폐한 만주로

 

 

 

 

 

 

 

 

 

 

서사록 西徙錄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서간도로 이주하다"

 

1911년 (54세)

 

「서사록」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을 적은 일기다. 이 작품에서는 서사록의 서문 만을 적었다.

 

'지금 내가 떠나는 길은 난리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몸과 가족을 보존하려

한다면 객지가 고향보다 나을 리가 없다.

고향에는 문전옥답과 고대광실, 술 익는

항아리가 있어, 먹고 살며 형제간에 정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왜 고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황폐하고 궁벽한 간도 땅으로 가려 하는가?

아아, 나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회인현북산임공택 懷仁縣北山賃空宅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잠시 머물려고 회인현 懷仁縣 북쪽의 빈집을 빌려 자다"

 

1911년 (54세) 2월 15일

 

온 가족이 마차 두 대에 짐을 싣고 피난민처럼 걷는다. 어제 아들 준형이 150리 떨어진 유하현 柳河縣에 살 집을 구하려고 떠났다. 잠시 머물던 집의 부엌이 눈 녹은 물로 잠기려 한다. 할 수 없이 빈집으로 옮긴다. 구들이 꺼져 하룻밤도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 어린 것들이 병이들까 걱정스럽다.

 

'여러 해 빈집이라 먼지투성이.

찬바람에 문풍지가 윙윙거리네.

몸이 얼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효기구점비서장 曉起口占賁西丈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새벽에 일어나 입으로 읊어 비서 (손위 처남 김대락의 호, 1845년생) 어른께 보이다'

 

1911년 (54세) 3월 1일

 

집주인이 나가라고 재촉한다. 비서 어른의 집으로 옮겨 자다 새벽에 일어나 시를 짓는다.

 

'방이 너무 추워 잠을 이룰 수 없었네.

긴긴밤 온 몸이 쇠처럼 굳었다,'

 

 

 

 

 

 

 

민주 공화정과 무장 독립운동의 씨를 뿌리다

 

 

 

 

 

 

 

경학사취지서 耕學社趣旨書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12폭 | 지본묵서 | 행서

 

1911년 (54세) 4월

 

이상룡은 유하현 柳河縣으로 이주하자마자 바로 여러 독립운동가와 힘을 합쳐 추가가 鄒家街의 산속에 경학사를 창설하고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경학사는 농사를 지으며 공부하는 조직이다. 경학사 내에는 군사훈련을 위한 신흥강습소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이 바뀜)가 있었다. 경학사는 민주 공화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글은 경학사 설립의 의미를 밝힌 연설문이다. 이 연설문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대련) 분골 마정 (對聯) 粉骨 磨頂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2폭 | 지본묵서 | 행서

 

1911년 (54세) 4월

 

경학사 취지서 중의 대구 對句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각오를 다진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되는 것을 나는 사양치 않을 것이니,

머리가 갈리어 발꿈치에 닿는 것을 그대들은 달게 여기시리.'

 

 

 

 

 

 

 

 

 

 

(대련) 부여 구려 (對聯) 夫餘句麗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2폭 | 지본묵서 | 광개토대왕비체

 

1911년 (54세) 4월

 

경학사 취지서 중의 대구 對句

 

이상룡은 부여 · 고구려 · 발해가 우리의 역사이고, 만주가 우리 땅이며, 여기에 사는 사람이 동포라고 여겼다. 이 작품은 광개토왕비 서체로 썼다. 서체는 원필 圓筆이나 전서, 예서, 해서 어느 것도 아니다. 이 세 가지 필법을 하나로 녹여 쓴 서체다.

 

'부여의 옛 영토가 눈강 (강 이름)에 이르렀으니, 이 땅이 남의 영토 아니요,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 땅에 모여 사니,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 동포다.'

 

 

 

 

 

 

 

 

 

 

추가가점초정집중운시비서장 鄒家街拈楚亭集中韻示賁西丈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문서 | 행서

 

"추가가 鄒家街에서 초정집의 운으로 시를 지어 비서 어른께 보여드린다"

 

1911년 (54세)

 

머나먼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하여 봄에 경학사를 창설했다. 경학사가 있는 산골 마을에도 여름이 왔다. 박꽃이 피고 한인들의 글 읽는 소리도 난다. 마을마다 돼지와 닭을 기르고 집들에서 밥하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그러나 고향이 아니다.

 

'우리에게 참된 목적이 없다면, 왜 이 덥고 궁벽한 곳에 와서 머물겠는가?

 

 

 

 

 

 

 

 

 

 

(대련) 야수 임화 (對聯) 野水林花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2폭 | 지본묵서 | 행서

 

"날이 갠 뒤 다시 짓다" 중의 대구 對句

 

1911년 (54세)

 

'물찬 들녘 텅 비어 때때로 백로 내려앉고

꽃핀 숲 속 고용하여, 간간이 귀뚜리 우네.'

 

 

 

 

 

 

 

 

 

 

 

 

 

 

 

 

유증박용만 留贈朴容萬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떠나면서 박용만, 신숙 등의 벗들에게 주다"

 

1921년 (64세)

 

북격 군정 통일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주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는다, 계속 회의에 참석하는 박용만 (40세), 신숙 (36세) 등의 동지에게 간곡한 당부를 시로 남긴다.

 

'동쪽의 붉은 해가 맹세의 단상 위에

비추는데, 이 늙은이 위태롭게 말탄 꼴이

우습구려. 지금은 앞뒤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무릇 냇물 건널 때는

얕고 깊음을 알아야 하네.

사람 마음이 모두 달라 상황은 어지럽게

꼬여 있고, 실력은 아직 완전치 못하네.

시작은 하였지만 결말 짓기는

왜 이리 어려운가?'

 

 

 

 

 

 

 

 

 

 

북진군인권재중 北進軍人權在重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북쪽으로 갔던 권재중이 노령의 자유시에서 돌아오다"

 

1921년 (64세)

 

지난해 왜놈의 군대가 우리 군사훈련소가 있는 안도현 安圖縣 내도산 乃道山을 공격하여 우리 의용군은 러시아 영토인 자유시 방향으로 피하여 전전하였다. 권재중은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눈 바다, 얼음산, 온갖 것들 다 죽는 곳

대포 연기와 탄환 비 뚫고 살아나온

사람들 하늘이 자네들 단련시켜

고귀하게 쓰려 함이니 위축되지 말고

정신력 더욱 키우시게.'

 

 

 

 

 

 

 

 

 

 

임술원단음시척서 壬戌元旦吟示尺西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임술년 새해 아침에 척서 (동생)에게 보여주다"

 

1922년 (65세)

 

'오십 년 세월이 눈 깜짝한 사이인 듯.

궁한 집에 손님 맞느라 밤잠을 못 이루었지.

이가 흔들리니 연한 밥도 씹기 어렵고,

어깨가 저리니 가죽 옷도 불편하네.

문필의 헛된 명성은 수를 써서 얻을 수

있으나, 조국 산천 되찾는 일은 하늘에

달려 있네. 한 평생 진 빚은 누구에게

기대어 갚을 수 있을까?

지네와 고향 집에서 놀던 때가 그립네.'

 

 

 

 

 

 

 

 

 

 

황강동야우음 黃崗冬夜偶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초서

 

"황강 黃崗의 겨울밤에 우연히 읊다" 의 첫수

 

1922년 (65세)

 

한 해 전 겨울 황강에 서로군정서를 개설하고 인원을 보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겨울밤에 한 해를 되돌아본다.

 

'매서운 바람이 뼈를 찌르고 눈은 뜰을

덮었다. 한밤중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루네.

북쪽으로 간 젊은이들 소식은 끊겼고,

남으로 간 벗들은 만날 기약이 없네.

자금이 말라 버려 정세를 지켜볼 수밖에

없네. 적을 상대하려면 힘을 길러야지.

성공의 빠르고 늦음은 하늘에 맡기고.'

 

 

 

 

 

 

 

 

 

 

 

 

 

황강동야우음 黃崗冬夜偶吟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초서

 

"황강 黃崗의 겨울밤에 우연히 읊다" 의 둘째수

 

1922년 (65세)

 

'병농 일치 (군사훈련과 농사를 함께 함)의

옛날 법은 지극히 편리하여, 다섯 달만

훈련해도 익힐 수가 있네.

노루, 사슴 쫓으며 연발 사격 훈련하고,

바위 언덕을 오르며 돌격을 연습하네.

이런 훈련으로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으니,

하늘이 마땅히 좋은 기회를 줄 것이다.'

 

 

 

 

 

 

 

 

 

 

아섭자반석 兒燮自盤石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아들 섭 (준형)이 반석현 盤石縣 호란에서 밭을 구하고 집을 물색하고 돌아오다"

 

1924년 (67세)

 

만주 임시정부에 분란이 생겨 사표를 던지고 뒤로 물러난 뒤, 반석현의 호란하 (지명)로 이주하였다. 동생 척서도 불러와 낚시질하며 밤늦도록 이야기하며 지냈다. 이 시는 호란하로 이사를 준비하면서 지난해 한가하게 지내던 때를 회상하며 썼다.

 

'지난해 집창허 (지명)에 갔을 때

시냇물은 흐르고 들은 넓었지.

왜놈 오지 않으니 삽살개도 편히 졸고,

관군 발길도 드물어 학선 (학 같은 신선)도

배불리 먹었네. 읍내가 가까워

술 사 오기 알맞고, 물가에는 고기 노닐어

보기가 좋았지. 그 가운데 노는 재미

따로 있었으니, 이웃 마을에 시벗과 바둑

친구가 살았기에'

 

 

 

 

 

 

 

 

 

 

음시척서 吟示尺西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예서

 

"척서에게 읊어주다"

 

1924년 (67세)

 

직책들을 털고 물러나 있는 심정을 동생 척서에게 밝힌다.

 

'눈보라로 반 길이나 빠지는 들판을,

날마다 회의하느라 자주 오갔었지.

젊은 영웅들 판치는 요즘 세상에,

산골 백발노인을 생각이나 할까?'

 

 

 

 

 

 

 

 

 

 

방어시 放魚詩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물고기를 놓아주다"

 

1924년 (67세)

 

낚시질을 서술한 긴 시다.

 

'낚시로 큰 물고기를 잡았다.

탐욕을 부리다가 잡힌 물고기가 안쓰럽다.

놓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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