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 일러스트 = 양진경
노각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 (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란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
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
그대 혀끝이나 귓불에 스친 우박이든
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
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
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
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
ㅡ 유종인 (1968 ~)
이제 텃밭에서의 일도 점차 줄어든다. 내 텃밭에는 자줏빛 가지가 몇 개 매달려 있을 뿐이다. 어제는 마른 덩굴 위에 가을비가 내려 스산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시인은 늙어서 그 빛이 누렇게 된 오이를 노래한다. 오이를 따지 않고 계속해서 두면 황토색 노각이 된다. 오이는 한해살이이지만, 사람의 일생에 빗대자면 노각은 노년에 해당하는 때인 셈이다. 시인은 노각이라는 이름에서는 달셋방, 각 (閣)의 공간을 생각하고, 노각의 향과 맛에서는 싱겁고 심심하지만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리고 은근하게 스며든 것의 깊고 깊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의 그윽한 늙음이라고 여긴다. 사람도 노년에 이르러 수박 향 같은 향기를 지닐 수만 있다면.
유종인 시인의 시는 고아한 시풍이 빛난다. 시 ‘초가을 이부자리’ 에서는 “한때는 더워서 걷어찼으나 / 지난 새벽엔 / 모처럼 그대 생각처럼 / 이별의 서늘함도 끌어당기네 // 방울벌레와 귀뚜라미 소리의 / 귀퉁이마저 끌어당기니” 라고 노래했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0월 2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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