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통, 세계 3대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회화 국내 첫 상륙]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린 르누아르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결코 파산하지 않는 빛··· 갑부는 아름다움에 투자했다
월가 큰손의 심미안
한국 온 '리먼 컬렉션'
국립중앙박물관 개막
눈부신 걸작의 향연
후대에 물려주는 보물, 유산 (heritage)이라 한다. 후대는 직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보물은 고로 모두에게 공유된다. 누구나 조금은 선대에 빚지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 거대 금융사 ‘리먼 브러더스’ 를 이끈 로버트 리먼 (1891 ~ 1969)이 평생 모은 미술품은 2600여 점이었다. 그가 세상을 뜬 이듬해, 14세기부터 20세기를 망라하는 유럽 예술의 정수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됐다.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장엄하게 빛낸 그의 메시지는 “위대한 예술은 나만의 기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는 것이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누릴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로버트 리먼 컬렉션의 가치는 1960년대 약 7500만달러 수준으로 추산됐다.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1조원이 넘는다.

미국 금융계를 호령한 생전의 로버트 리먼. / 베이커 도서관
갑부의 저택 밖으로 나온 거장의 걸작, 즉각적인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일부가 처음 한국에 도착했다. 14일 개막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을 통해 내년 3월 15일까지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흐 · 고갱 · 마티스 · 르누아르 · 세잔···. 한국 관람객이 특히 사랑하는 인상주의 회화 위주로 엄선해, 로버트 리먼 컬렉션 65점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주요 소장품 16점을 긴밀히 연결하는 자리다. 맥스 홀라인 관장은 “로버트 리먼 컬렉션은 단일 작품 대여조차 거의 이뤄진 적이 없기에 이 같은 규모의 전시는 매우 특별한 시도” 라고 했다.
조부가 설립한 회사를 미국 4대 투자은행의 반열에 올려놓은 남자. 163㎝의 단신이었으나 “눈썹 한 번 치켜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백만 달러를 모을 수 있던” 냉철한 투자자. 물론 그는 금수저였지만 그가 물려받은 진짜 유산은 심미안 (審美眼)이었다. 역시 저명 컬렉터였던 부친 필립 리먼과 함께 유럽 전역을 누비며 눈높이를 높였고, 예일대 졸업 후 한국 · 중국 · 일본 등을 여행하며 아시아 미술에도 깊은 조예를 쌓았다. 허영과 차익 실현을 위해 창고에 쌓아두고 소장 목록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방에 걸어두고는, 혹여 상할까 결코 불을 켜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컬렉션에 진심이었다.
부자들의 그림 사랑은 대개 주머니 사정에서 비롯되고는 하지만, 안목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로버트 리먼은 흔히 ‘현대 미술’ 로 불리는 흐름을 적극 받아들인 1세대 미국 컬렉터이기도 하다. 팔랑이는 ‘귀’ 대신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눈’ 을 믿었다. 전쟁이 끝난 1940년대 후반 유럽행이 재개되면서, 인상주의 사조에 매료됐고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고흐의 ‘룰랭 부인과 아기’ 를 손에 넣었는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최초의 고흐 작품 구매 (‘사이프러스 나무’)보다 1년 빠른 것이다. 인상주의 풍경화가 알프레드 시슬레 ‘밤나무 길’, 점묘법 선구자 폴 시냐크 ‘클리시 광장’ 등 이 시기 그가 택한 진귀한 미감을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버트 리먼 컬렉션은 액면가 혹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 수집가가 어떻게 인류의 보화 (寶貨)를 계승하는지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다. 전국 공공 미술관에 초고가의 수집품을 무상 기증해 한국 현대 미술의 영토를 넓힌 ‘이건희 컬렉션’, 역시 소장작 수천 점을 기부해 오늘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매년 500만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 명소로 이끈 ‘JP 모건 컬렉션’ 처럼, 그 공익적 효과는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 이번 전시 출품작을 살펴본 우정아 포스텍 교수 (서양미술사)는 “자칫 묻히거나 훼손될 수 있었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 · 기증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컬렉터 덕에 미술품은 사회적 자본이 될 수 있었다” 며 “물론 개인적 욕망도 있었겠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명감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이라고 말했다.

인상파 풍경화가 시슬레 '밤나무 길' (1878).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로버트 리먼은 1957년 소장품 293점을 프랑스로 보내 인상주의의 성지로 불리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대형 전시를 개최하는 등 꾸준히 예술적 환희를 전 세계에 나눴다. 1962년에는 컬렉션이 대거 보관돼 있던 자신의 뉴욕 저택을 재단장해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도록 했고, 1967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사회 의장이 됐다. 이듬해 예일대학교는 “우리 문명의 생활 · 문화 · 예술 발전을 증진했다” 며 그에게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돈의 부침 (浮沈) 속에서 리먼 브러더스는 2008년 파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림은 여전히 건재하다.
정상혁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5일 자]
그냥 '예쁘고 유명한 그림' 이라고요?
큐레이터가 본 인상파 회화의 묘미
인상주의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 중 하나다. 밝고 다채로운 색감, 부드럽고 자유로운 붓놀림, 보기만 해도 청량한 풍경과 기쁨이 묻어나는 인물···. 그 자체로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을 준비하며 설렘만큼이나 걱정도 있었다. 이미 대중에게 친숙한 인상주의를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것인가. 기대에 부응할 특장점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메트로폴리탄박물관 로버트 리먼 컬렉션' 전시를 찾은 시민들. / 박성원 기자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인상주의’ 그 자체였다. 누구나 대표 작가 몇 명쯤은 쉽게 떠올릴 만큼 친숙하지만, 인상주의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그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상주의가 태동한 19세기 후반은 거대한 서양 미술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과 통념에서 벗어나려는 화가들의 새로운 시선이 예술의 물결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들 작품은 “벽지보다 못하다” 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기존 양식을 과감히 탈피한 인상주의의 실험 정신은 오늘날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린 르누아르 '해변의 사람들' 을 한 관람객이 촬영하고 있다. / 뉴스1
전시는 ‘몸’ ‘초상과 개성’ ‘자연’ ‘도시에서 전원으로’ ‘물결’ 등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주제는 인물화와 풍경화라는 오랜 미술의 장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며,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변화가 예술에 미친 영향을 함께 조명한다. 단순히 사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화가들의 시선을 통해 19세기 파리를 바라봄으로써 인상주의가 어떻게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인식의 문을 열었는지를 새롭게 탐색하고자 했다.
출품작 대부분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로버트 리먼 컬렉션’ 에서 온 것이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 로 유명한 거부 (巨富)의 애장품. 부친 필립 리먼이 1910년대 시작한 수집을 아들 로버트 리먼이 이어받아 1969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나갔다.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프랑스 회화에 관심이 깊었고, 인상주의 대표 작가의 걸작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자문에 의존하지 않고 폴 세잔의 독특한 풍경화, 점묘법을 활용한 폴 시냐크의 도시 풍경화 등 본인만의 감식안을 통해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번 전시가 인상주의의 다채로운 면모와 더불어 수집가의 독창적 안목을 함께 경험할 기회인 이유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 초입에 걸린 살바도르 달리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 (왼쪽). 17세기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동명의 그림 (오른쪽)을 재해석한 것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루브르박물관
전시의 문을 여는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1955년 작 ‘레이스를 뜨는 여인’ 이다. 17세기 네덜란드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모사한 것인데,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인 달리가 이런 고전적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더 놀라운 건 리먼이 직접 달리에게 이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컬렉션에 끝내 비어 있던 페르메이르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평소 ‘레이스를 뜨는 여인’ 의 재해석에 관심이 많았던 달리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그림마다 이 같은 화가와 수집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전시 제목 ‘빛을 수집한 사람들’ 은 바로 이 두 세계를 함께 가리킨다. 하나는 19세기 후반 순간의 인상 속에서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자 했던 화가들의 세계, 다른 하나는 그들의 화폭 속에서 피어난 빛을 알아보고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은 수집가 로버트 리먼의 세계. 화가들은 붓으로 빛을 담았고, 리먼은 그 빛을 그러모았다.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을 모으며 예술이 한 사람의 감동에서 또 다른 이의 삶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여정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인상주의가 단지 ‘예쁘고 유명한 그림’ 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꾼 화가들의 도전과 열정 속에서 모더니즘의 꽃을 피운 결정적인 흐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평생에 걸친 수집품을 기증하며 “예술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 임을 보여준 로버트 리먼의 마음이 한국 관람객들에게도 깊이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양승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5일 자]
르누아르의 소녀와 함께 고흐의 과수원을 거닐다
메트 리먼 컬렉션 한국 첫 공개
주목할 만한 전시작 요모조모
고흐 · 르누아르 · 세잔···
女 인상파 커샛까지
초상 · 누드 · 풍경 다양
당대의 변화상 담겨
인상파 거장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 (1891)는 뽀얗고 통통하고 따스한 인물화로 대표되는 그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명작이다. 1890년대 르누아르는 세련된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을 즐겨 그렸는데, 화랑에서 “이미 많으니 그만 그려도 된다” 고 만류할 때조차 그러했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파리의 화상 폴 뒤랑 뤼엘에게 250프랑을 받고 판매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르누아르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 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려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874년 등장한 인상주의는 환호받던 장르가 아니었다. 반대였다. 비평가들은 조롱했다. “이 화가들은 미쳤지만 더 미친 자들이 있다. 그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다.” 폴 뒤랑 뤼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인상파를 서양 미술의 새 후계자로 여겼던 그는 파산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림을 모으고 전시를 열고 화가를 후원했다. 훗날 모네가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 이라 말했을 정도. 인상파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값이 폭등했다. 이번 전시에도 뒤랑 뤼엘에게서 흘러나온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샛이 그린 '봄 : 정원에 서 있는 마고'.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메리 커샛이 그린 ‘봄 : 정원에 서 있는 마고’ (1900)는 그 점에서 의미가 깊다. 파리 교외에 살던 이웃 꼬마 마고의 천진난만한 귀여움이 오롯이 담긴 그림.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 최초의 미국 여성 인상파 화가는 당시 유럽과 미국 미술계를 잇는 가교였다. “인상주의 기치 아래 현대 미술의 혁명을 성취한 화가들의 동지, 놀라운 여성” 으로 평가받던 커샛은 1870년대부터 아이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고, 곧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견고한 윤곽선과 피부의 질감으로 전달되는 온기. “아이들은 자연스럽고 진실하며 의도를 숨기지 않아요.”

고흐의 '꽃 피는 과수원' 을 한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 / 뉴스1
흐린 눈을 정화하는 색채의 마술은 전시장 실내를 일순 야외로 바꿔 놓는다. 고흐의 ‘꽃피는 과수원’ (1888)이 그 중심에 있다. 1888년 프랑스 아를로 터전을 옮긴 고흐는 봄이 되자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어. 프로방스풍의 과수원을 활기차게 그려보고 싶어.” 과수원을 주제로 한 달 만에 14점의 그림을 그렸다. 살구 · 아몬드 · 사과 · 복숭아, 그리고 이 그림 속 매실까지 푸른 물감에 생명력이 가득하다. “이런 주제는 기운을 돋워주기 마련이지.” 농부는 없지만 그림 하단에 놓인 낫과 갈퀴가 인간의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왼쪽)과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그 너머에 ‘누드’ 라는 또 다른 풍경화가 놓여 있다. 폴 세잔은 이 벌거벗은 자연을 꾸준히 연구했고 ‘목욕하는 사람들’ (1874 ~ 1875)로 남겼다. 실제 누드 모델을 그리는 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상상력을 발휘해 고전 · 르네상스 회화에서 빌려온 인체를 재현했는데, 추상화 거장 말레비치가 “세잔은 육체가 추상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고 평했듯 인물의 포즈 역시 구성적 형태를 띤다. 반면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1892)은 원시성을 찾아 헤맨 그가 열대의 섬 타히티에 머물며 원주민 여성들과 부대끼며 그려낸 작품이다. 이국의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독특한 대목은 캔버스가 아닌 종이 위에 드로잉 형태로 작업한 뒤 이를 다시 캔버스에 붙여 수정한 그림이라는 점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코 ‘봄’ 앞에서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상파 태동 이전 고전주의 화풍은 미술사 (史)의 전개를 설명하는 귀한 이정표다. 어린 선남선녀가 그네에서 껴안고 있는 그림, 피에르 오귀스트 코의 ‘봄’ 은 1873년 파리 살롱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화단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살롱전에서 외면받던 신예들이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 를 열기 바로 1년 전이다. 제목처럼 싱그럽고 낭만적이고 관능적인 이 그림은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부채 · 도자기 · 직물로도 복제됐다. 이 그림의 첫 소유자였던 미국 거물 사업가 존 울프는 “첫사랑에 취한 두 아이” 를 위해 자신의 저택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줬다고 한다. 이듬해 화가는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다.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 ‘가면무도회 참가자들’.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햇빛 쏟아지는 무도회장 근처 온실에서 잠시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남녀, 스페인 유명 초상화가 라이문도 데 마드라조 이 가레타가 그린 ‘가면무도회 참가자들’ (1875 ~ 1878) 역시 능숙하고 유혹적인 장면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특유의 세련된 연출, 새틴 · 모피 · 벨벳 등의 광택 처리가 몰입의 효과를 배가한다. 그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상의 영예를 누렸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도 선출됐다. 명백한 주류 (主流)라는 증거였다. 그해 미국 철도 재벌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가 이 그림을 구입했다.

카미유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세월이 흘러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또 한 번의 격렬한 충격을 낳았다. 인상파를 위한 전시가 따로 열린 것이다. 인상주의가 비로소 미술계의 새로운 사조로 진입했다는 만국을 향한 선언. 인상주의의 성립에 누구보다 크게 기여한 화가가 있다.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빠짐없이 참여한 유일한 화가, 평생 가난했지만 그 와중에도 동료를 후원했던 통 큰 스승 카미유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 대로’ (1897)는 피사로가 근처 호텔에 묵으며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마차, 인파, 일렬로 늘어선 집들을 마치 새의 눈처럼 내려다보면서” 그린 도심 풍경이다. 풍경화이자 변화하는 당대의 초상. 커다란 길이 다음 세기를 향해 뻗어 있다.
정상혁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5일 자]
"메트로폴리탄 처음 떠나 온 명화들 인상주의 창의성 · 감수성 잘 드러나"
리먼 컬렉션 소개하는 홀라인 관장
꼭 봐야하는 작품 꼽자면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기증 덕분에 대중과 공유
120년 넘게 한국 작품 수집

맥스 홀라인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장이 13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장에 서 있다. / 박성원 기자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머리칼을 뒤로 넘긴 장신 (長身)의 남성이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맥스 홀라인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하 메트) 최고경영자 (CEO) 겸 관장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안내로 ‘사유의 방’ 을 관람하고 왔다고 했다. 국보 반가사유상 2점이 전시된 국박의 대표 공간. “예전에도 와봤는데, 굉장히 감정을 고양시키면서 아름답고 힘 있는 공간이에요. 예술적 우수성과 영적인 감수성이 모두 녹아 있어요.”
메트가 소장한 로버트 리먼 컬렉션이 처음으로 서울에 상륙했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개막을 앞두고 만난 홀라인 관장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한 번도 메트 밖을 떠나본 적이 없다” 고 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대표하는 인상주의 걸작들이 서울에 처음 상륙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개막을 하루 앞두고 13일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맥스 홀라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장이 축사하고 있다. / 박성원 기자
ㅡ 메트에서 리먼 컬렉션은 어떤 의미가 있나.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트는 대중을 위해 설립된 박물관이다. 광범위한 예술과 문화를 아우르는 공간은 여러 소장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기증과 헌신 덕분에 박물관 컬렉션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특히 로버트 리먼은 독보적인 소장가 중 한 명으로 우리 박물관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사업가이면서 자선가였던 그는 1970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는 철학으로 소장품 2600여 점을 기증했다. 덕분에 100주년을 맞은 메트를 ‘위대함’ 에서 ‘독보적인 경지’ 로 끌어올려 주었다.”
ㅡ 한국에서 리먼 컬렉션을 처음 소개하는 소감은?
“프랑스 대표 걸작들을 보여드릴 수 있어 뿌듯하다.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기, 파리는 그야말로 창의성이 폭발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인물화를 통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조건, 감수성이 드러나는 시기였다. 로버트 리먼은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소장가였다. 컬렉션을 보면 그가 선별한 작품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르누아르 · 마티스 · 피사로 · 세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가의 걸작을 보실 수 있다.”

맥스 홀라인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장이 13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린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앞에 서 있다. 81점 출품작 중에서 그가 '단 하나의 작품' 으로 꼽은 명작이다. / 박성원 기자
ㅡ 출품작 중에서 한국 관람객들이 ‘이것만은 꼭 봤으면’ 하는 단 한 점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그럼에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를 꼽겠다. 프랑스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일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 의미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소녀들은 미술사의 주요 주제였지만, 르누아르는 당시 부르주아 가정의 매력적인 소녀들을 포착해 이 주제를 재해석했다. 또 정부가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가에게 의뢰해 그려낸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다. 이른바 ‘마이너’ 에 머물러 있던 인상주의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고, 프랑스 대중들이 그만큼 인상주의를 포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ㅡ 한국에서도 고 (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이 큰 울림을 줬다. 이번 전시는 기증과 나눔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전적으로 그렇다. 기증 문화는 박물관의 발전에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뼈대 역할을 한다. 메트는 바로 그런 문화 속에서 설립됐고 앞으로도 많은 자선가와 개인 후원자, 기증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나갈 것이다. 개인이 모은 소장품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전시로 공유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맥스 홀라인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장이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박성원 기자
196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홀라인 관장은 예술계 ‘금수저’ 다. 아버지 한스 홀라인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을 받은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 빈 대학에서 미술사와 경영학을 전공했고,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관리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 미술관, 슈테델 미술관, 리비히하우스 조각 미술관 관장을 거치며 경영 능력과 기획력을 인정받았다. 20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장에 취임했고, 2018년 제10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장에 임명된 후 2023년부터 CEO까지 겸임하게 됐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미술과의 접점도 많아졌다. 지난 2023년에는 한국실 개관 25주년을 맞아 한국 미술 전시를 강화했고, 같은 해 9월엔 한국 미술 큐레이터직을 신설했다. 작년엔 설치미술가 이불이 메트 건물 외벽 (파사드)을 장식하며 한국 미술의 위상을 드높였다. 홀라인 관장은 “메트는 120년 넘게 한국 작품을 수집해 왔고, 한국 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며 “전문가 교류, 상호 지원의 형태로 협업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교류를 더 강화할 생각” 이라고 했다.

맥스 홀라인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장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 / 박성원 기자
ㅡ 루브르 박물관, 브리티시 뮤지엄 (영국박물관)과 다른 메트만의 강점은 뭔가.
“메트는 시작부터 루브르나 영국 박물관과 같은 유럽 박물관과 달랐다. 유럽 박물관들은 대중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특정 귀족이나 통치자에 의해 컬렉션이 만들어졌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대중에게 공개됐다. 메트는 설립부터 공공을 위해, 대중을 위한 미술관이라는 사명을 갖고 세워졌다. 메트는 미국만의 박물관이 아니다. 세계에 의한, 세계를 위한 메트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허윤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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