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물 등

[천도교중앙대교당] 01

드무2 2026. 6. 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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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대교당] 01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백주년기념비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 기념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大告天下한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16년 이곳을 매입해 중앙대교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중앙대교당 건립 성금 모금을 독립자금으로 의심해 방해하였으나 의암성사는 특별성미금 수백만 원을 조성하였다. 의암성사는 3 · 1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건축성금의 절반 이상을 독립선언서 인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해외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일제의 방해로 최초 계획의 1/3 규모로 축소 건립한 중앙대교당은 1921년 4월 5일 천일기념식을 봉행하면서부터 상설운영되었다. 중앙대교당은 서울의 3대 건축물로서, 특히 민족자본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도 크다. 1920년대 『개벽』지의 출간과 함께 언론출판운동, 어린이 운동, 농민운동, 청년 및 여성운동이 이곳에서 전개되었다.

중앙대교당은 1926년 6 · 10만세운동, 1927년 신간회운동, 1938년 무인멸왜기도운동 등 독립운동의 발원지로써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천도교 정신이 현현 顯現된 장소이다. 오늘 역사적인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을 맞아 스승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100년 전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세운다.

 

포덕 162 (2021)년 12월 24일 (금)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이 건물은 의암 (義菴) 손병희 (孫秉熙)의 주관 하에 1918년에 시공하여 1921년에 완공된 천도교의 대교당이다.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종교의식 외에 각종 정치집회, 예술공연, 강연회 등 일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은 비교적 높고 웅장하여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3 · 1운동을 전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輔國安民) 기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이란 명분을 앞세워 1918년 4월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천도교가 3 · 1운동의 중심단체로 활동하면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공사가 늦어졌다. 이 건물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화강석을 섞어 써 색과 재질감의 조화가 뛰어나며, 한국의 근대건축에서는 보기드문 젯세션 (Secession : 분리파) 양식의 건축이다. 이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독일인 건축가 안튼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독일의 건축사조 (建築思潮)를 접한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 2층의 날개 부분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의 몸체는 내부기둥이 없는 강당 형식의 대집회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폭의 공간을 덮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구조적 해결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시시를 한울같이 하라."

 

ㅡ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우주는 원래 영의 표현인 것이니라."

 

ㅡ 의암성사법설 「성령출세설」

 

 

 

 

 

 

 

| 3 · 1독립운동

천도교가 주도한 대일항쟁기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1910년 일제에 강제병합이 되자 의암성사는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봉황각' 을 건립해 전국의 지방 두목들에게 수도연성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고,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모금을 명분으로 독립 자금을 준비하였다.

천도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유럽에서 약소국이 독립하자 우리 민족이 독립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대중화 · 일원화 · 비폭력화의 원칙을 정하였다.

천도교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 및 배포하고 운동자금을 전담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지도자로 민족대표 33인 (천도교 15명,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을 정하고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게 되었다.

3 · 1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외에서 전개된 모든 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기록화

 

 

 

 

| 『개벽』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3 · 1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형식상의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하고 언론 출판 결사의 규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이에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1920년 6월 25일 신문지법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개벽』을 창간하였다. 개벽은 천도교의 표상이다. '개벽의 정신은 신조선의 정신' 이라는 기치 아래 '개벽' 을 잡지의 표제로 삼았다.

『개벽』은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계몽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김억 · 김소월 · 염상섭 · 현진건 · 박종화 등 대표적인 문학인들의 활동무대였다.

『개벽』은 창간 이후 발매 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을 받았다. 그리고 1926년 8월 1일 제72호에 열두 분의 애국지사를 소개하였다는 이유로 압수를 당하고 호외를 준비하던 중 돌연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여 강제 폐간되었다. 이후 1934년 속간되어 4개월간 발행되었고 해방 이후 속간을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 어린이 운동

세계 최초의 어린이 운동

 

1919년 3 · 1독립운동을 주도해 어려움을 겪게 된 천도교단은 천도교청년회를 결성하여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청년회의 소년부는 천도교소년회로 확대 발전하여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 로 정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광복이후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등이 협의하여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방정환은 『어린이』잡지를 발간해 당시 나라를 잃은 어린이들에게 미래의 꿈과 희망을 주었다.

어린이 운동은 해월신사의 "아이를 치는 것은 곧 한울님을 치는 것" 이라는 인간존중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 『어린이』

천도교에서 발행한 아동문학잡지

 

『어린이』는 개벽사에서 발행한 아동문학잡지로 1923년 3월부터 1934년 7월까지 122호를, 1948년 5월호부터 1949년 12월 15호까지 통권 137호를 발행하였다.

『어린이』의 간행으로 '어린이' 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고,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소파 방정환이 쓴 창간사에는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그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라고 하여 천도교 2세교조이신 해월신사의 어린이 존중 사상을 담고 있다.

『어린이』가 발행되는 날 전국의 서점에는 어린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처럼 『어린이』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1923

최초 어린이 해방 선언

 

▶ 1922년 방정환 초안

▶ 조선소년운동협회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공표)

 

[소년운동의 선언]

 

세 가지 조건

 

본 소년운동협회는 이 어린이날의 첫 기념되는 5월 1일인 오늘에 있어 고요히 생각하고 굳이 결심한나마에 심히 아래와 같은 세 조건의 표방을 소리쳐 전하며 이에 대한 천하 형제의 심심 (深甚)한 주의와 공명 또는 협동 실행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라.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1.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1.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른에게 드리는 글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1.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1.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럽게 하여 주시오.

1.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1.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1. 산보와 원족 (소풍 : 인용자 주) 같은 것을 가끔 가끔 시켜 주시오.

1.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1. 어린이들이 서로 모이어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1.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1.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1.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1. 뒤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1. 길가에서 떼를 지어 눌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1.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1.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1.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 6 · 10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병인만세운동 또는 제2삼일 (3 · 1)운동

 

천도교 (天道敎)는 조선공산당과 제휴하여 순종의 인산일 (국장일)에 지식계층, 노동계층, 학생계층 등이 참여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는 격고문과 선전문의 인쇄를 전담하였고, 각 지방에 사전 연락을 취하였으며, 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때 <대한민국 만세> 등의 선전문은 「개벽」과 「신여성」등의 잡지에 끼워 넣어 전국에 배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6일 개벽사에서 격고문이 발각되자 일제는 천도교 대교당을 포위, 중앙총리원과 개벽사 직원 30여 명을 검거하고, 격문 7만여 장을 압수하였고, 상춘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인 (大韓民國臨時政府印)' 을 압수하였다.

6 · 10만세운동은 비록 사전에 탄로되어 실패하였지만 10일 서울 곳곳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으며 각 지방에서도 2천여 명의 관련자가 연행 또는 검속을 당하였다.

일제는 6 · 10만세운동을 <사내총독암살사건> <기미만세사건>과 함께 조선의 3대옥 (三大獄)사건으로 분류하였다.

정부는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다.

 

 

 

6 · 10만세운동

 

 

 

 

| 멸왜기도 (滅倭祈禱) 운동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어 종일전쟁을 일으킨 시기로 천도교는 어떠한 교회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36년 8월 대도주 춘암상사는 지일기념식에 참석한 각 지방 두목들에게 경전 「안심가」의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에 멸하고서 전지 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 원수 갚아보세" 의 구절을 인용하여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1937년 12월 중일전쟁 중에 기도가 탄로될 염려가 있어 기도문을 <동양평화의 기초가 조속히 확립되기를 기원하여>로 위장하여 지속하였다.

또한 1938년 1월부터는 특별기도와 함께 특별 희사금 명목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38년 2월 멸왜기도가 발각되어 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의 교인에 대한 대검거 선풍으로 수백여 명이 피검되었다.

교인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고령인 춘암상사는 병석에서 심문을 받는 등 일제의 식민지 파시즘 통치하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무인멸왜기도 운동 (독립기념관 춘암상사 어록바)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멸하고서

대보단에 맹서하고

한의 원수까지 갚아

독립 달성하겠습니다.

 

춘암 박인호                                                                                                                            

 

 

 

 

| 천도교중앙대교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 기공식을 행하고 1919년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3 · 1독립운동으로 중단되었다가 1920년 2월 공사를 재개하여 1921년 4월 완공되었다. 일제가 교인들의 건축성금을 독립자금으로 의심하여 방해하는 가운데 7월 총독부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다. 일제는 건축규모가 거창하다는 이유로 이를 불허하다가 1/2로 축소하여 현재의 규모로 허가를 하였다.

건축성금 일부는 3 · 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중앙대교당은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당시 서울의 3대 건물로 일컬어졌으며 시일식을 비롯한 종교행사뿐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 특히 대일항쟁기 민족운동 단체의 집회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중앙대교당은 3 · 1운동의 요량지이며 우리나라 근 · 현대사의 요람이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1924년 이곳에 건축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성신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가 개교하였다.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 폐정 개혁안 12개 조항

1894년 6월 동학군이 정부와 화약을 체결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개혁안

 

1. 도인 (동학교도)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씻고 서정 (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의 무리는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의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여 백정의 머리에 쓰는 평양 갓은 벗어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둬들이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벌 (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 (倭)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기왕의 공사채를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 (分作)하게 할 것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 (侍天主) 사상에 따라 동학혁명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이다.

이는 노비, 과부, 백정 등의 인권 존중, 징세 제도의 개혁, 탐관오리 처벌 등 사회적 · 정치적 개혁에 관한 요구를 담고 있다.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 동학혁명 | 東學革命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개벽운동

 

1894년 1월 고부접주 전봉준 등이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해 봉기햇으나 시정되지 않자 3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호남의 동학도와 농민들이 전라도 무장지역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동학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제안하고 전주화약을 맺은 동학군은 전라도 일대에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정 (民政)을 실시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국정 개입과 동학군 토벌을 시작하자 2세교조 최시형 해월신사는 9월 총기포령을 내려 항일전에 나섰다.

동학군은 우금티 전투에서 전력을 다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였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혁명에서 30여만 명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혁명은 3 · 1독립운동과 6 · 10만세운동 등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혁명 기록화

 

 

 

 

| 인내천 | 人乃天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다

 

'인내천' 은 천도교의 종지 (宗旨)이다.

인내천은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는 '시천주 (侍天主)'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내천 (人乃天)은 서구의 인간중심의 인본주의가 아니라 사람과 모든 생명을 한울님 같이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한울사람의 삶을 실천하는데 그 뜻이 있다.

이는 천도교의 목적인 지상천국을 이루는 길이다.

 

 

 

 

| 수운대신사 최제우 (1824 ㅡ 1864)

"천도교 제1세 교조", 동학을 창명하시다

 

수운대신사는 경신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하신 천도교의 제1세 교조이다.

동학의 핵심은 '시천주' 와 '다시개벽' 이다.

'시천주' 는 인간과 천지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인간은 존귀하고 평등하며 자연도 한울님 조화의 자취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다시개벽' 은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봉건 질서 속에서 고통받던 당시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운대신사를 찾아와서 동학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박해로 포덕을 시작한지 3년이 채 못되어 좌도난정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1864년 3월 10일 향년 41세로 순도하셨다.

저서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하신 수운대신사 존영

 

 

 

 

| 천도교

새 시대 ㅡ 새 종교

 

천도교는 우리 민족의 혼을 바탕으로 기존의 모든 종교사상의 본체를 밝힌 '무극대도 (無極大道)' 로 창도 초기에는 '동학' 이라고 불리다가 1905년 3세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께서 '천도교' 로 선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도교는 '인내천 (人乃天)' 을 종지로 하며, 개인적으로는 자아완성, 사회적으로는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 (侍天主)' 진리와 모든 존재를 한울님 같이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 (事人如天)' 의 윤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천도교는 동학혁명과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햇으며, 현재는 통일운동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생명 평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해월신사 최시형 (1827 ㅡ 1898)

"천도교 제2세 교조", 동학의 터전을 닦으시다.

 

 

|해월신사 최시형 (1827 ㅡ 1898)

"천도교 제2세 교조", 동학의 터전을 닦으시다

 

해월신사는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의 제2세 교조가 되었다.

해월신사는 관의 지목과 박해 속에서도 36년간 포덕 활동을 하면서 '대인접물 (待人接物)', '내수도문 (內修道文)' '부화부순 (夫和婦順)', '삼경 (三敬)', '이천식천 (以天食天)', '향아설위 (向我設位)' 등 많은 법설을 통해 동학의 뿌리를 내려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사켰다.

또한 수운대신사의 저술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시켰다.

한편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교조 신원운동 (伸寃運動)과 동학혁명을 주도하였다.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6월 2일 향년 72세로 고등법원 형장 (서울 종로 단성사 터)에서 순도하였다.

 

 

 

의암성사 손병희 (1861 ㅡ 1922)

"천도교 제3세 교조", 천도교로 선포하시다

 

| 의암성사 손병희 (1861 ㅡ 1922)

"천도교 제3세 교조", 천도교로 선포하시다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받아 천도교의 제3세 교조가 되었다.

의암성사는 동학혁명 당시 북접통령으로 활약하였다.

개화문명을 살피고자 일본에 체류하면서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여 흑의단발 (黑衣斷髮)을 단행한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2월 1일 '동학' 을 '천도교' 로 세상에 선포하고 대헌을 제정하고 중앙총부와 전국에 대교구를 설치하여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으로 발전시켰다.

언론 출판 교육에 전념하는 한편 1919년에 3 · 1독립운동을 영도하시고 투옥되신 후 감옥에서 중병을 얻어 1922년 5월 19일에 62세로 순도 순국하였다.

 

 

 

춘암상사 박인호 (1855 ㅡ 1940)

"천도교 제4세 대도두", 천도교를 지키시다.

 

 

 

춘암상사 박인호 (1855 ㅡ 1940)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천도교 지키시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받아 천도교의 제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으로 보성학교 (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였다.

3 · 1독립운동 때 48인의 1인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그 후 1926년 6 · 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지원하였고 특히 일제 말 멸왜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처럼 항일 독립투쟁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동학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천도교 소장 9점

 

 

 

01_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

 

 

 

 

 

 

02_무장포고문 필사본

 

 

 

 

 

 

 

 

 

 

 

 

 

 

 

 

 

 

https://youtu.be/GwwDoBmPukc

3월의 독립운동가 박인호 국가보훈처 영상 (150ㅡ2ㅡ27)

 

 

 

https://youtu.be/Ia_9S0fVk24

3 · 1운동 사진 슬라이드

 

 

 

https://youtu.be/BPlQ1RGRKc4

김구 참배

 

 

 

https://youtu.be/sWmCL7ihMLw

천도교의 위대한 유산 봉황각

 

 

 

 

 

 

https://youtu.be/JTf4LEJZurY

2021년 천도교종교문화활동 ㅡ 동학과 3 · 1운동 [의암성사 스토리]

 

 

 

https://youtu.be/u0pWUp0LibE

나의 독립영웅 86 이종일 (류근)

 

 

 

용담정과 용담교

 

 

 

| 용담성지 | 龍潭聖地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 135

 

용담 (龍潭)은 수운대신사가 동학을 창명한 곳으로 천도교 제1의 성지 (聖地)이다.

수운대신사는 10여 년간 전국을 두루 다니며 세상을 구할 도를 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59년 10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세상을 구할 도를 얻기 전에는 산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불출산외 (不出山外)' 의 중한 맹세를 하고 구도에 정진하였다.

이러한 구도의 결과 1860년 4월 5일 한울님과 만나는 결정적 종교체험을 하고, 무극대도를 받아 거의 1년 동안 닦고 단련하였다.

1861년 여름부터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시천주의 가르침을 펼치니 세상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1863년 12월 10일 수운대신사는 제자들과 함께 선전관 정운구에게 피체되어 순도하였다.

용담성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잇으며, 용담정과 태묘, 수운대신사 동상, 용담수도원, 동학기념관 등이 있다.

 

 

 

봉황각

 

 

| 봉황각 | 鳳凰閣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로 173길 107ㅡ12 (우이동)

 

봉황각 (鳳凰閣)은 1912년 3월에 착공하여 6월 19일 준공되었다. 의암성사는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구상하였고, 500여명의 교역자에게 3년간 7차에 걸쳐 49일 연성기도를 실시한 후 300여 곳의 지방교구 교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1919년 1월 5일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한 49일 연성기도가 끝나자 의암성사는 교회 간부에게 독립운동 거사의 뜻을 전달하고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므로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소." 라고 독립운동에 대한 필요성과 의지를 밝혔다. 1968년 경운동에 있던 중앙총부본관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의창수도원 (義彰修道院)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봉황각 동쪽 50미터 산록에는 의암성사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삼일운동의 발원지로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청수

 

 

| 오관 | 五款

천도교인이 수행해야 할 다섯 가지 신앙 방법

 

오관은 천도교인이 수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 정성으로 주문 · 청수 · 시일 · 성미 · 기도를 말한다.

주문 (呪文)은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21자로 된 글이다.

주문을 항상 외움으로써 습관된 마음을 한울님 마음으로 회복하여 한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신앙 방법의 하나이다.

청수 (淸水)는 모든 천도교 의식에서 모시는 맑고 깨끗한 물로 한울님을 공경하는 신앙 방법의 하나이다.

시일 (侍日)은 매주 일요일에 교인들이 교당에 모여 천도교의 종교의식인 시일식 (侍日式)을 합동으로 행하는 날로써 신앙 방법의 하나이다.

성미 (誠米)는 밥을 지을 때 식구 수대로 한 술의 쌀을 떠서 이를 교회사업에 활용하도록 하는 신앙 방법의 하나이다.

기도 (祈禱)는 매일기도와 특별기도가 있다.

매일기도는 새벽 5시, 저녁 9시에 행하고 특별기도는 일정한 목적으로 행하는 기도로 신앙 방법의 하나이다.

 

 

 

주문 [呪文]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 심고와 주문

한울님께 고하고, 한울님을 위하고

 

심고는 모신 한울님께 마음으로 알리는 신앙 방법이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모든 의식을 시작하고 마칠 때 반드시 심고를 한다.

뿐만 아니라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일상생활의 행동을 할 때마다 (日用行事) 심고를 한다.

이렇게 하면 한울님과 내가 항상 함께 있다는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21자로 되어 있다.

이 주문은 한울님 모심 (侍天主)을 밝힌 진리이며,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이다.

 

 

 

서산 신간회 표지석 기념식 (2017. 10. 24. 서산교구)

 

 

| 신간회 (新幹會) 운동

 

1927년 2월 대일 비타협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하여 '민족단일당' 또는 '민족협동전선' 을 표방한 항일민족운동 단체로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천도교는 신간회의 창립자금을 부담하였고, 본부와 각 지방지회의 조직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경성지회는 다수의 천도교인이 참여하여 주도세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10월 천도교대교당에서 신간회본부 총무간사로 활동하던 박내홍이 괴한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9년 12월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을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와 시위운동을 계획, 안재홍이 쓴 전단을 천도교 중성사에서 인쇄하는 등의 준비를 진행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천도교를 포함한 신간회 간부들이 대거 피검되는 수난과 옥고를 겪었다.

1931년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 세력과의 갈등으로 해체안이 대두되자 천도교는 해체를 반대하고 특히 경성지회는 해체반대 성명서를 내고 재결성과 연장론을 주장하면서 비타협 주의를 견지하였다.

한편 천도교여성동맹은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결성한 근우회 (槿友會)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천도교에 입교하려면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천도교 교당이나 수도원에서 입교식을 하면 된다.

입교식에는 교 (敎)를 전해주는 전교인 (傳敎人)과 교 (敎)를 받는 수교인 (受敎人), 그리고 의식을 진행하는 집례자 (執禮者) 및 참례인이 한자리에 모여서 식을 행한다.

입교식 때에 수교인이 서천문 (誓天文)을 낭독하고, 전교인은 21자 주문을 수교인에게 전해준다.

입교식이 끝난 후에 집례나 전교인은 수교인에게 수도의 요령과 오관실행 등 신앙의 절차와 기초적인 교리 교사를 설명해 준다.

 

 

 

 

'천도교' 는 '동학' 의 새 이름이다.

새 시대의 새 종교인 천도교는

수운대신사께서 오랜 구도 생활 끝에 1860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하엿다.

 

1905년 12월 1일 의암성사께서

'동학' 을 '천도교' 로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 지정번호 : 종로구 2013ㅡ93

✽ 나무이름 : 은행나무 (약 180년)

✽ 나무크기 : 둘레 270㎝, 높이 17m

✽ 소재지 : 경운동 88 (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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