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국립항공박물관] 03

드무2 2022. 6. 1. 21:51
728x90

[국립항공박물관] 03

 

 

 

 

 

 

대한민국의 항공역사

Aviation His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은

시련의 순간에도 가장 높은 꿈을 꾸었기에

오늘날 전 세계 어디로든 마음껏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Koreans had the highest dream even at the time of hardship

today we can fly anywhere in the world.

 

 

 

관람 동선 알림

 

 

 

임시정부의 항공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하늘을 열다

Aviation Independence Activists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ree the Sky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평화적인 시위였던 3 · 1운동이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끝나자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몸을 피하여 그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동시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선포한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1918. 11)된 직후로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비행기에 크게 주목하고 잇었다. 임시정부 역시 일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작은 전력으로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비행대 창설을 결정한다. 먼저 비행기 구매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군무총장(현 국방부장관) 노백린을 미국에 급파하고,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윈난 육군항공학교에 청년 4인(권기옥, 이영무, 장지일, 이춘)을 보냈다.

 

미국에 도착한 노백린은 현지에서 이미 조종술을 배우고 있는 한인 청년들이 있음에 놀랐고, 임시정부와 긴급히 연락하여 미국에 비행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방문목적을 변경하였다. 비행학교 설립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이는 김종림이라는 한인 청년에 의해 해결되었다. 김종림은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쌀을 재배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량미로 유럽에 수출하였고 이로 인해 큰 부자가 되어 '백미대왕(Rice King)'이라 불렸는데, 그가 비행학교 설립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후원해 주었다. 그리하여 1920년 2월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학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윈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였던 4인의 청년들은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임시정부로 복귀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서구 열강들이 임시정부에 비행기를 판매하지 않자, 중국 국민당군의 비행대에 들어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들 중 권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이름을 남겼으며, 이영무는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군의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급박하게 창설되었음에도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항공력 양성을 추진하였기에 대한민국의 항공역사는 자랑스러운 '항공독립운동'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항공역사의

시작

Beginning of Aviation History

 

1903년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 이후 세계 각국이 비행기 개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지만, 국권을 상실해 가고 있던 대한제국은 세계의 흐름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비행 관련 기록은 미국 이민 1세대인 김광명이 비행기 연구를 하였고 이응호가 미 항공대 조종사로 입대하였다는 단편적인 기사 2건이 전부였다.

 

한편 한반도 하늘에서는 1913년 일본 해군 소속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일본의 조선 합병(경술국치)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용산의 일본군 연병장에서 시험 비행을 하였는데, 이것이 한반도 하늘에서 최초로 비행기가 날았던 기록이다. 이후로도 일본은 1914년과 1915년 연속으로 비행대회를 개최하며 기술력과 군사력을 과시하였으나,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조선 민중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917년 9월 15일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Art Smith)'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을 때는 5만 군중이 운집해 그의 공중묘기에 감탄하였는데 특히 당시 현장에 있던 안창남, 권기옥, 신용욱, 박경원 등이 이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가져 이후 대한민국 항공역사에서 각자의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하와이 동포 김광명. 비행기 제조를 연구하다

[신한민보 1913. 10. 17]

 

 

 

이응호, 최초의 한인 비행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파일럿 이응호(조지 리)가 미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유럽 전선에 파병되어 비행선을 타고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를 156회 비행하였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

 

 

 

 

 

 

나라하라 신지 비행 기념 엽서

Commemorating Postcards of the Narahara Sanji's Flight                                시대 1913년 추정 | 분류 기록물(엽서류)

 

1913년 4월 8일, 일본인 조종사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그의 비행기 '오도리(鳳戶)'호를 타고 한반도 하늘을 최초로 날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과 합병된 지 3년째를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총독부 관료, 일본군 고위 장교, 조선인 친일 인사 등을 초대하여 용산의 일본군 연병장에서 비행행사를 가졌는데, 실상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앞선 기술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엽서는 그 당시 행사를 기념해 발행한 것으로 오도리호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한반도에서의 첫 비행(위)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성공한 지 10년이 지난 1913년 4월 8일 한반도 하늘에서도 첫 비행이 있었다.

이 행사는 조선의 강제 병합 3년 차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총독부 관료와 조선인 친일 인사만을 초대하여 용산의 연병장에서 진행하였다.

 

 

 

'용산연병장'에서 시험비행을 하고 있는 오도리호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Art Smith)(아래)

그는 1917년 9월 15일 여의도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이 행사는 유료였음에도 5만 명의 구름 관중이 관람하는 등 큰 호응이 있었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첫 비행이었기에 조선인 젊은이들이 비행사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과 우리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한국인 안창남도 있었다.

 

 

 

아트 스미스

 

 

 

 

 

 

 

 

 

 

 

 

 

 

 

 

 

 

아트 스미스의 커티스호

Curtiss Pusher(Curtiss Model D)                             시대 1916년 | 규격 285 × 364mm(축척 1 : 32) | 분류 비행장치(모형)

 

1917년 9월 15일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을 때 조종했던 비행기로 미국인 '글렌 커티스'가 개발한 '커티스 A - 1호'의 개량형이다. 이 곡예비행으로 현장에 있던 안창남, 권기옥, 신용욱, 박경원 등 많은 조선 청년들이 조종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공독립운동가들

The Japanese Invasion of China an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dependence Activists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1937년 7월 7일 전면적인 중국 침략을 단행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비행대는 중국 본토를 공습하며 위력을 과시하였다. 이에 중국은 신예 비행기를 도입하고, 비행사 육성을 시급히 추진해 1937년 10월 윈난 육군강무학교에 중국 전역의 항공학교들을 통합한 항공과를 출범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이나 중국, 소련 등에 있는 군관학교나 육군항공학교 등에 청년들을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다. 한인 청년들은 비행기 조종사나 항공기술자가 되기 위해 각국의 항공학교를 졸업하였고, 각자 졸업한 국가의 군대에 들어가 대일본 전투에 참전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처럼 이들이 각국의 군대에 편입하였던 것은 어디에 소고되어 있건 일본과 싸워 이기는 것이 조국이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공독립운동과

한인비행학교 창설

Establishment of the Korean Aviation Corps and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전략을 마련하면서 비행대 편성과 비행사를 육성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군무총장 노백린은 '독립전쟁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비행대 편성을 추진하였다.

미국에서 노백린이 처음으로 하려던 것은 비행대 창설이 아니라 비행기 구매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동포들이 안창호,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고, 대한인국민회는 1년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하였을 정도로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캘리포니아를 찾았던 노백린은 이미 대한인국민회 산하의 청년단체인 '청년혈성단' 단원들이 조국 독립에 투신하고자 비행술을 배우고 있는 모습에 매우 놀라게 되었다. 이에 노백린은 현지에 비행대를 만드는 것으로 방문 목적을 변경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쌀농사로 엄청난 거부가 된 김종림이 훈련기 구매, 활주로 부지 제공 등 비행학교 설립비용 전액을 지원해 준 것과 청년혈성단원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있던 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가 조선인의 애국심에 감동해 교관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노백린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김종림을 중심으로 한 대한인국민회의 적극적인 지원, 일본에 대한 분노와 구국의 신념으로 강하게 뭉쳐진 청년혈성단원들의 굳은 결기가 모여 1920년 2월 20일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한인비행학교(K.A.C. : Korean Aviation Corps)가 창설되었다.

 

 

 

한인비행학교 설립기사 [신한민보 1920. 2. 24]

 

 

 

 

 

 

https://www.youtube.com/watch?v=j27XSMvf3co 

 

 

 

재미 한인들의 청년혈성단 결성

Formation of Korean - American Youth Devotion Corps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었던 도산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미주 대한인국민회 청년 23명이 참여하는 청년혈성단'이 조직되었다.

청년혈성단은 취지서를 통해 "무릇 국혼이 있는 충의용감의 열혈남녀를 단합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광복함에 혈성을 다하기로" 결성하였다. 청년혈성단원 중 상당수의 청년은 샌프란시스코 레드우드 비행학교(Redwood Aviation School)에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외에도 '한국형명'이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공연하며 문화활동을 통해 재미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大韓人國民會 靑年血誠團規約

 

대한인국민회 청년혈성단 규약

 

제1장 총칙

제1조 목적

          본단은 무릇 국혼이 있는 총의용감의 열혈남녀를 단합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광복 함에 혈성을 다하기로 목적함.

 

제2조 명칭

          본단은 대한인민국회 청년혈성단이라 칭함.

 

제3조 위치

          본단의 위치는 북아메리카 합중국 갤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둠.

 

 

 

 

 

 

대한민국의 항공역사

“ 대한민국은 시련의 순간에도 가장 높은 꿈을 꾸었기에
오늘날 전 세계 어디로든 마음껏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몰랐던 대한민국 항공역사의 숨겨진 이야기,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경제성장을

이끈 대한민국 항공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

 

 

 

구국

일제강점기 항공독립운동

항공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안창남, 권기옥 등

 

 

 

호국

1950년대 한국전쟁

공군창설과 한국전쟁의 활약상

 

 

 

부국

1960-70년대 초기민항의 시작과

1980-90년대 민항의 발전

역경을 이겨낸 초기의 민항, 제트점보기의

도입과 민항의 발전

 

 

 

강국

2000년대 이후 항공강국으로의 비상

인천국제공항의 개항과 항공산업의 비상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대한민국 1호 비행장교를 배출하다

The Republic of Korea Provisional Government's Aviation School Produces

Korea's First Air Force Officer

 

1920년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를 방문한 노백린 군무총장은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우고 있던 청년혈성단원들을 만났다. 2월 5일 직접 레드우드를 방문한 노백린은 현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의 설립 소식을 만천하에 선언할 목적으로 청년혈성단원 6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상해의 임시정부로 보내져 4월 27일 자 『독립신문』 전면에 실렸다. 비행학교의 위치는 김종림의 대농장이 있어 활주로 설치가 용이하였던 캘리포니아 윌로우스 지역으로 정해졌다. 당시 비행기는 미국인에게도 신기한 기계였기에 동양의 이름도 생소한 '코리안'들이 나라도 없으면서 비행학교를 만든다는 사실은 현지인들에게도 놀라운 것이엇다. 그 사실은 지역 신문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ly Journal)』 2월 19일 자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

The Republic of Korea's First 6 Trained Pilots                                                                             시대 1920년 | 분류 신문

 

1920년 4월 27일자 독립신문이다. 기사 첫머리에 '大韓이 처음으로 가지는 飛行家 六人'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조종사 복장을 한 7명의 사진이 실려 있다. 왼쪽부터 '장병훈, 오림하, 이용선,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로 군무총장 노백린을 제외한 6인은 모두 조종사였다. 노백린 군무총장이 비행대 설립을 위해 미주 한인사회를 순회하던 중 이미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있는 한인 청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학교를 방문하였고, 이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설립에 함께 하기를 제안하자 흔쾌히 의기투합하였다. 노백린은 이 기쁜 소식을 조국의 동포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도 조종사 차림으로 기념촬영을 한 후, 이 사진을 임시정부에 보내자 독립신문이 대서특필하였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1920. 2. 19」

Willows Daily Journal                                                                                                                      시대 1920년 | 분류 신문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시의 지역신문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ry Journal)'이 지역에 한인들의 비행학교가 설립되었음을 대서특필한 1920년 2월 19일자 기사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문 원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의 존재를 현지 언론이 증명하는 자료로써 당시 미국인들에게도 신기했던 비행기를 동양의 이름모를 민족 '코리안들이 비행학교를 가지게 되었다.'라는 헤드라인을 통해 당시 미국 현지인들의 충격과놀라움을 엿볼 수 있다.

 

 

 

 

 

 

1920. 2. 19일자

한국인들이 비행장을 가진다.

 

퀸트에 교사(校舍)를 임대하고 교원을 확보 - 40에이커의 비행장을 구매하고 비행사를 고용 쌀 농사로 거부(巨富)가 된 한국인 김종림 - 15명의 학생과 3대의 비행기로 한국운영을 시작할 예정.

 

쌀농사로 거부가 된 김종림은 윌로우스 부근에 한국 청년들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할 예정이다. 교육을 위해 체육과 영어 교원도 충원했다. 임차한 비행학교와 근방의 비행장 부지는 40에이커(약 16만 2천 평방미터)이며, 이미 매입완료하였다.

조종술을 교육할 비행사와 관련 교원도 고용했다. 최신 비행기 모델 3대를 구매하여 곧 도착할 예정이다. 비행장은 머지 않아 형태를 갖출 것으로 보이고 격납고도 곧 건립된다. 두 명의 기계 기사는 항공기 기체를 관리하게 된다.

"젊은 청년들을 좋은 미국인으로 훈련시키고자 합니다." 김종림은 이같이 말했다. "이것이 학교를 설립하는 주목적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읽기, 쓰기, 말하기에 능통하도록 교육하려 합니다. 이는 그들을 훌륭한 미국인으로 성장하게 할 것입니다. 청년들은 비행훈련을 통해 미국이 또 다른 전쟁을 겪게 될 때 함께 싸울 것입니다."

고학력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김종림의 부인은 채니 교육청장을 방문해 학교 설립을 원하는 한국인에게 퀸트 교사(校舍)를 임대해 줄 수 잇는지 문의했다. 약 100여 명의 한국인 학생이 있으며, 이후 그녀는 교육청장에게 학생수를 15명으로 줄이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퀸트 지역 내 한인 비행학교 건립에 동의한 한 명의 이사가 학교 수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곧 해결되었고, 빠른 시일 내에 학교의 곧 해결되었고, 빠른 시일 내에 학교의 문을 열 예정이다. 그녀는 교육청장에게 곧 설립될 비행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비행을 배우는 한국인 청년을 미국인화하는데 앞장 선 김씨 부부는 윌로우스 지역에 가족과 함께 지낼 집을 마련했다. 김종림은 캘리포니아 주의 콜루사 카운티에서 이사했으며, 쌀 재배에 종사하여 자금을 확보했다.

윌로우스에는 많은 기독교 한인이 거주하고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이 교육을 받았다. 한국인은 윌로우스에서 비행사로 교육을 이수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1921. 4. 11일자

윌로우스 조종사, 자격증 취득 비행 중 부상 입어

 

한인 비행학교의 학생 조종사 하워드 박(박희성)은 일요일 산 호세의 버니 평야에 300피트 아래로 추락했다. 다행히 잔해로부터 탈출하고 도움 없이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비행했지만, 기체 꼬리부분에 문제가 생겨 땅과 충돌하고 말았다. 하워드는 얼굴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1921. 6. 1일자

한국 항공분야의 새로운 시작

 

지난 얼마간 문을 닫았던 퀸트의 한국인 항공훈련 비행장이 새롭게 문을 열려고 노력한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졌다.

 

 

 

1921. 4. 12일자

한인 조종사, 심각한 부상은 아닌 것으로 밝혀져

 

지난 일요일 버니 평야에 추락한 한인 청년 조종사 하워드 박(박희성)은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병원에 입원 중이다.

 

 

 

1920. 9. 4일자

한인 비행학교, 영화화될 예정

 

글렌 지역의 일부가 미국 전역에 걸쳐 상영되는 영화에 등장할 예정이다. 캘리포니아 주를 넘어 어느 주에서도 이보다 더 명성을 떨칠 수는 없을 것이다. "Thunderer"라는 별명으로 영국 전역에 배포되는 'London Times'도 글렌 지역의 쌀 산업을 기사로 실은 적이 있었다.

이 영화로 글렌은 광범위하게 홍보가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의 연합 영화 뉴스사에 의해 제작될 예정으로 글렌은 이 영화에 담겨 미국의 모든 중요한 지역에서 순환 상영될 예정이다. 퀸트 지역에서 주목 받고 있는 한인 비행학교를 영화에 담기로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인이 하늘을 나는 방법에서 시작해 곡예비행까지 모든 비행에 통달하게 된 내용이 담긴다.

美 영화뉴스사 대표 마우리스 블라슈는 윌로우스에 도착해 한국인들이 훈련하는 장소(비행학교)에 즉시 갔다. 그는 제작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으며, 한인 비행장이 속해 있는 지역을 포함할 것이다. 아찔한 높이에서 보여지는 글렌 카운티의 모습은 전 미주지역에서 영화를 통해 보여질 것이다.

 

 

 

1920. 6. 24일자

한인 비행학교에 2번째 비행기 도착

 

ㅣ행학교 교원이자 조종사인 '해피 브라이언트'는 레드우드 시에서 출발한 또 다른 비행기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 비행기는 퀸트 지역에 있는 한인학교에서 운영될 예정이다. 이미 한 대의 비행기는 학교에서 운영 중으로 학생들이 비행에 대해 배우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세 명의 한인 조종사(Young S. Lee, Peter Ohu, Charles Lee)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레드우드 시의 비행학교를 경영한 경험이 있다. 학생 30명은 항공에 대한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1920. 6. 22일자

한인 비행학교에 비행기 도착

 

얼마 전, 본지는 한국인이 퀸트 지역에 한인 비행학교와 비행장을 마련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설립 사업은 금전상 잠시 연기되었고, 최신 군사 전술교육, 언어와 항공 수업 만 이루어졌다.

현재 학교에는 30명의 학생이 있으며유능한 교원을 갖추고 있다. 한인들은 알려진 것보다 더 큰 꿈이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시달리며 자유를 박탈당했고, 동양의 군국주의에 의해 물들어 가고 있다. 미국 땅에 거주하는 것이 기회가 되어 한국에 자유를 희망하는 바람이 불었고, 마침내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몇 년 동안 항공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오늘 날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비행사를 양성하는 등 훌륭한 성과를 냈다. 퀸즈 지역의 비행학교와 비행장은 그 결과물이다. 한인 청년들은 항공에 대해 교육받을 예정이다. 오늘 첫 번째 비행기가 도착했다. 이는 가장 최신, 최고의 디자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홀스콧 모터를 장착했다.

이 지역에서 쌀농사를 크게 짓는 김(종림)이 비행기를 구입했다. 숙련된 곡예 비행사 '해피 브라이언트'는 한인 학교에 교원으로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한 대의 비행기는 다음 주에 도착할 것으로보인다. 글렌 지역의 비행장은 단순한 관심과 호기심을 넘어서 한인 동포에 의한 한국인의 메카가 될 것이다. 최대한 빨리 비행기 조종에 능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그곳에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이다.

 

 

 

1920. 3. 1일자

훈련된 한인 조종사, 일본과 싸우기 위해 왔다

 

한국인이 설립한 비행학교는 1년 전 시작된 한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일본과의 전쟁 최전선에서 싸울 조종사를 훈련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군인이자 조종사인 한국인 콜로넬 팔린(노백린 장군)은 새크라멘토에서 이를 지휘했다.

노 장군은 '많은 한인 청년들이 현재 레드우드 시에서 비행을 교육받고 있다.'고 말했다. 몇몇 학생들은 교육 코스를 3월에 마친 후 글렌 지역에서 비행교관으로 근무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백린은 학교에 필요한 교원과 비행기가 완비되는 대로 학교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얘기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한국인 청년에게 비행을 교육할 목적이다.

그는 비행학교에 입학한 모든 학생이 캘리포니아에서 봉사중이며, 학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한인 동포로부터 더 많은 재정적 자원을 받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 장군은 40에이커에 달하는 비행장을 만들고자 하는 한국인의 계획에 대해 미국인들은 비웃음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글렌 지역에서 부유한 한인 농부와 그의 미국인 동료가 쌀을 재배하는 데 3천 에이커를 사용하기로 한 약속에 대해 언급했다.

콜로넬 노(노백린)는 미국인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비행사를 꿈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한인 청년들이 한국의 독립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본다면, 그 문제는 미국이 아닌 한국의 문제이다. 나는 왜 미국인이 한안 비행학교를 반대하는 지 알 수 없다. 중국에 설립된 비행학교 또한 한국인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3월 1일은 한국의 첫 번째 독립운동기념일이다. 캘리포니아 북방에서 온 수백 명의 한국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에 집결할 것이라고 클로넬 노는 말한다. 그 자신 역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새크라멘토에 있었다고 말했다.

 

 

 

1920. 2. 26일자

반 버나드, 한국인 비행학교에 위협 느껴

 

14개주(州) 보호연합 대표 반 버나드(토도라 거주)는 한국인이 청년 교육의 목적으로 윌로우스 부근에 설립예정인 학교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 했다. 그는 백인들이 아시아인을 볼 때마다 위협을 느끼며, 비행학교와 그들의 항공기가 캘리포니아 주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 전망했다. 다음은 새크라멘토와 샌프란시스코 간의 전보로 시행된 버나드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윌로우스 변두리 글렌 지역에 있는 한국인 비행학교의 설립과 관련해 반 버나드는 아시아인의 위협이 발전한 결과라고 말했다. 또한, 14개주 보호연합의 대표인 그는 아시아인의 위협이 더 커짐에 따라 북쪽의 거주 중인 주민들은 더 감정적으로 변한다고 언급햇다. 또한, 반갑지 않은 이 외국인의 침입이 불러온 국민의 불안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규제에 대한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비행학교를 조직한 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 우리 미국인은 입법부의 즉각적인 조치가 캘리포니아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한다"고 농민 단체장(반 버나드)은 주장했다. "만일 스테판 주지사가 계속 우리의 목소리를 무시한다면 '평화적 침투'가 '강압적 침투'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며 버나드는 소리를 높였다.

버나드는 한인 비행학교 측이 이미 4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비행기를 구입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 측이 캘리포니아 주 북방의 토지법을 회피하고 있으며, 토지임대계약 기간을 100년에서 200년으로 조정해 사실상 토지 소유권이 넘어간 것과 같아서 이제는 거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계약은 명의만 가져다 쓴 것에 불과하며, 동양인이 3년간 토지를 경작하는 특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_2mR_oXdU 

 

 

 

 

 

 

 

 

 

장병훈

 

 

 

오림하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비행학교 설립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던 노백린은 정식 개교식 없이 우선 2월 20일에 학교문을 열었다. 이는 3 · 1 만세운동 1주년이 되는 날 비행대를 출범시키고자 하는 노백린의 강력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행학교의 교관이 될 대부분의 청년이 아직 레드우드 비행학교 소속으로 6월 4일 졸업할 예정이었고, 주문한 첫 훈련기 '스탠더드(Standard) J - 1' 역시 6월 22일에 도착하였기 째문에 실제 개교식은 7월 5일에 이루어지고 그 뒤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용선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비행학교였지만 안타깝게도 운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해 10월 추수기에 큰 홍수로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종림의 농장이 큰 타격을 입어 재정이 어려워지자 결국 1923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3년간 총77명의 비행사를 배출하였으며, 그 중에는 1921년 7월 7일 국제항공연맹(FAI)에서 공식 조종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박희성과 이용근이 있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두 사람을 육군비행병 참위(소위)로 임명하였고,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교가 되었다.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돌리고 있는 이용선

 

 

 

윌로우즈 비행학교 훈련기 사진

 

 

 

레드우드 비행학교 전경

 

 

 

윌로우즈 비행학교 미국인 교관

프랭크 해피 브라이언트와 학생들

 

 

 

레드우드 비행학교 훈련기를 타고 있는 한장호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한 노백린 장군과 한인 조종사들

 

 

 

한인 조종사들이 교육받던 레드우드 비행학교 전경

 

 

 

 

 

 

 

 

 

https://www.youtube.com/watch?v=zTTxfjnGX7M 

 

 

 

https://www.youtube.com/watch?v=rC6jf-pG3W4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군을 설계하다

Provisional Government Designs Air Force

 

설립 초기 의욕적으로 시작하였던 비행학교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항공력을 활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었다. 거기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에 따른 일본의 보복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 지역으로 떠돌게 되면서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태평양에서 제공권을 잃게 되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밀리게 되자 충칭에 자리 잡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가기 위해 광복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특히 광복군 내 공군 설립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1943년 8월 19일 국무회의에서 군무부(현 국방부) 관할의 공군설계위원회 조례를 제정하고 최용덕, 윤기섭, 김철남, 이영무 등을 공군설계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45년 3월 군무부는 임시의정원(현 국회)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국 및 작전계획'에서 처음으로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을 언급하였고, 이에 의하여 3월 30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잠행중앙관제潛行中央官制'에서 처음으로 '공군'을 명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은 미군전략정보처 OSS(현 CIA 전신)와 함께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한반도로 진입시켜 게릴라 전술을 펼치게 할 '독수리 작전(The Eagle Project)과 냅코 작전(NAPKO Project)'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의 설립자, 대한민국 항공의 아버지

노백린 盧伯麟 | Rho Baiklin

Founder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viation School, father of Korean Aviation

 

 

 

 

 

 

노백린 장군 건국훈장

General Rho Baiklin's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시대 1962년, 1993년 | 분류 훈장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노백린 장군의 숭고한 뜻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 추서한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훈장과 훈장증으로 1962년 유족에게 추서된 것과 1993년 유해 송환 시 다시 추서된 훈장과 훈장증이다.

 

 

 

 

 

 

노백린 장군 전신사진 2장

Two Full - portrait Photographs of General Rho Baiklin                                         시대 1920년대 | 분류 기록물(사진류)

 

노백린 장군의 전신사진으로 임시정부에서 활약할 당시 촬영한 것으로 하나는 국무총리 재임 시(모자 쓴 것)와 생전 마지막 찍은 사진(정장 사진)이다.

 

 

 

 

 

 

노백린의 선경지명!

"앞으로의 전쟁은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tRPV2fajik 

[출처 : 연합아카이브 Yonhap Archive]

 

 

 

조국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아끼지 않은, RICE KING

김종림 金宗林 | Kim Chonglim

Spared all his assets for his country's independence, Rice King

 

 

 

 

 

 

 

 

 

김종림 애국지사 건국훈장

Kim Chonglim's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시대 2005년 | 분류 훈장류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설립에 기여한 항공독립운동가 김종림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 2005년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의 훈장과 훈장증이다.

 

 

 

 

 

 

 

 

 

김종림 가족과 이승만의 단체사진

A Group Photograph of Kim Chonglim's Family and President Rhee Syngman      시대 1924년 | 분류 기록물(사진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한 당시 김종림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김종림의 장모, 큰딸 코라(Cora), 이승만, 부인 앨리스(Alice), 둘째 딸 엘레인(Ellaine)이고, 김종림은 뒷줄의 태극기 앞에 서 있다.

 

 

 

 

 

 

후원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던

한인비행학교의 안타까운 폐교

 

 

 

https://www.youtube.com/watch?v=ZSse50efwXw 

[출처 : 연합아카이브 Yonhap Archive]

 

 

 

한인비행학교 출신의 우리나라 최초 비행장교

박희성朴熙成 | Howard S. Park

이용근根 | James K. Lee

Korea's first flight officer from Korean aviation school

 

 

 

 

 

 

 

 

 

박희성 애국지사 건국포장

Howard S. Park's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시대 2010년 | 분류 훈장류

 

대한민국 임시정부 1호 비행학 장교인 항공독립운동가 박희성 애국지사에게 201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추서한 건국포장의 훈장과 훈장증이다.

 

 

 

박희성 비행사와 이용근 비행사 면허증

Aviator Certificate of Howard S. Park and James K. Lee                                                         시대 1921년 | 분류 증서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에서 활약했던 박희성과 이용근 비행사가 1921년 국제항공연맹(FAI)에서 발급 받은 비행사 면허증이다. 이 면허증을 계기로 임시정부는 박희성과 이용근 비행사를 1호 비행장교로 임명하였다.

 

 

 

박희성 비행사 면허증

 

 

 

 

 

 

https://www.youtube.com/watch?v=gsuUbxBjQNA 

[출처 : 연합아카이브 Yonhap Archive]

 

 

 

그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암울한 조선 하늘을 한줄기 희망으로 날았던

안창남 安昌男 | An Changnam

Flew a gloomy Korean sky with a ray of hope

 

 

 

 

 

 

 

 

 

안창남 애국지사 건국훈장

An Changnam's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시대 2001년 | 분류 훈장류

 

항공독립운동가인 안창남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 2001년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의 훈장과 훈장증이다.

 

 

 

 

 

 

개벽 31호 -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A Monthly Magazine 'Gae Byeok' Vol. 31 - Aerial View of Gyeong seong and Incheon        시대 1923년 | 분류 기록물

 

안창남이 1922년 12월 고국방문 비행을 하고 난 후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의 모습, 그리고 조국 하늘을 비행한 자신의 소회를 월간지 '개벽 31호'에 기고한 글이다. 안창남은 이 글에서 빼앗긴 조국 산하와 동포들의 모습을 표현하며 조선인으로서 경성하늘의 첫 비행이 마냥 기쁘기보다 안타깝고 마음 아프다고 적었다. 이러한 안창남의 심정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살하자 분개하여 1924년 중국으로 망명, 항공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대한독립공명단 가입, 독립운동 자금 조달

 

 

 

https://www.youtube.com/watch?v=rQLX7e9II_8 

[출처 : 연합아카이브 Yonhap Archive]

 

 

 

최초의 여성 비행사보다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날았던

권기옥 權基玉 | Kwon Kiok

Flew as an air - independent activist than the just first female aviator

 

 

 

 

 

 

 

 

 

권기옥 애국지사 건국훈장

Kwon Kiok's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시대 1977년 | 분류 훈장류

 

항공독립운동가인 권기옥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 1977년 추서한 건국훈장 독립장의 훈장과 훈장증이다.

 

 

 

 

 

 

 

 

 

권기옥 사진

Pictures of Kwon Kiok                                                                                          시대 1920~1988년 | 분류 기록물(사진류)

 

권기옥의 비행학교 시절 모습과 가족들의 사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JEls1N-09Ss 

[출처 : 연합아카이브 Yonhap Archive]

 

 

 

https://www.youtube.com/watch?v=GwFj2SQi1Lk 

 

 

 

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후 공군 창군의 주역이었던

최용덕 崔用德 | Choi Yongdeok

From the Korean liberation army, father of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ir Force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휘장과 완장

Insignia and Armband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Liberation Army   시대 1940~1946년 | 분류 부착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의 휘장과 완장이다. 휘장은 광복군의 모자에 붙어 있던 것이고, 완장은 위생병이 차고 있던 것이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군 역시 정식 군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귀국하는 광복군들은 인천항에서 무장해제를 당해야 했다. 이 유물은 1946년 인천항으로 귀국하던 광복군을 무장해제하던 미군 병사가 압수 후 기념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2004년 그의 아들이 공개 매도(e - bay)하였고, 이를 국내에서 구매하여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최용덕 애국지사 건국공로훈장 단장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of Patriot for Choi Yongdeok                                    시대 1962년 | 분류 훈장류

 

광복군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한 최용덕 애국지사에게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추서한 건국공로훈장 단장이다.

 

 

 

공동의 적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힘을 모았던 '중국'과 '한국'!

 

 

 

대한민국 항공독립운동가

Korean Aviation Independence Activist

 

 

 

대한민국

항공독립운동가

Korean Aviation Independence Activist

 

암울하였던 일제 강점기에 항공력을 활용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장에 뛰어들기 위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하였고, 거금을 후원하기도 하였으며, 기술자나 비행학교의 행정요원으로도 참여하였다.

여느 독립운동 분야의 활동가들이 그러하듯이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모든 활약상을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 공간을 통해 일단의 항공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기록해 두고, 향후 한 분도 빠지지 않도록 모두 반론하여 독립투사들의 희생정신과 숭고함을 알리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나라 항공의 뿌리가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하였다.

 

 

 

 

 

 

 

 

 

 

 

 

마춘봉 馬春逢

Joseph C. Marr / Marr Choonbong

생몰년 : 1886~미상

활동지역 : 미주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간사

 

마춘봉은 1911년에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여 리버사이드 지방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의 의무금수봉위원이 되어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1920년에는 윌로우스 지방분회 구제원의 자리에 있으면서 7월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가 개교하자 간사로 근무했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꾸준히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마춘봉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초李超

Charles Lee / Lee Cho

생몰년 : 1894년~미상

활동지역 : 미주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교관

 

이초는 191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자 뜻을 같이하는 대한인국민회 회원들과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에 투신할 목적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1920년 졸업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레드우드 비행학교 졸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에 합류하여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으로 입대하여 전략정보국(OSS) 산하 야전침투훈련반(Field Experimental Unit)에 배치되어 한반도 상륙작전인 냅코작전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초 애국지사의 뜻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병훈張炳勳

Chang Byunghoon

생몰년 : 1894~1979년

활동지역 : 미주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교관

 

장병훈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미주 한인이민 1세대이다. 1916년 이용근, 이용선과 함께 샌츠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였고, 무장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회원들로 구성된 청년혈성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이초와 함께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술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합류하여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꾸준히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병훈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장호韓章鎬

Jason H. Hahn / Hahn Jangho

생몰년 : 1893~1994년

활동지역 : 미주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교관

 

한장호는 평안남도 강동 출신으로 1910년 경술국피를 당하자 1913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191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였고, 이용근, 이용선, 이초, 장병훈, 최자남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무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항일결사단체인 '청년혈성단'을 조직했다. 청년혈성단 활동의 일환으로 1919년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았는데, 그가 암긴 말을 통해 일본 천황궁을 폭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비행술을 배워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도쿄에 가서 떨어뜨리겠습니다. 아마도 그건 자살하는 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대 창설을 준비하던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의 창설멤버가 되었고, 개교 후에는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한장호는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바쳤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장호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림하吳林河

Oh Yimha

생몰년도 : 1887년~미상

활동지역 : 미주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교관

 

오림하는 1911년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규식과 함께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 1914년 3월 19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자 뜻을 같이 하는 대한인국민회 회원들과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에 투신할 목적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1920년 졸업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개교행사에서 미국인 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와 함께 축하비행을 했으며, 이후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림하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용선李用善

Lee Yongseon

생몰년 : 미상

활동지역 : 미주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교관

 

이용선은 1916년 이용근, 장병훈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였고, 무장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회원들로 구성된 청년혈성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이초와 함께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고,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합류하여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항공독립운동가들의

국외활약상

Performance of Air Independence Activists

 

비행사가 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꿈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막을 수 없었다.

1919년 중국 군벌들이 잇따라 항공학교를 세우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항일 운동가들은 중국 항공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비행사가 될 수 있었다.

군사양성이 불가능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산하에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두고 많은 한국 청년을 중국이나 소련의 항공학교에 위탁교육을 보내 군인으로 양성하였다. 미주에서는 조국 독립을 꿈꾸는 한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으며, 노백린이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에 입학라여 비행사가 되기도 하였다.

 

 

 

 

 

 

U. S. A.

미주지역

 

192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전쟁이후 불필요해진 비행기를 활용한 비행교육이 활발해졌고 이에 많은 한국인들이 미군에 입대하거나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술을 익히게 되었다.

 

 

 

① 윌로우스 비행학교 Willows Aviation School

 

 

 

이용선 윌로우스 한인학교 교관(좌)

우병옥 비행기 수선과 졸업 정비사(가운데)

이초 비행학교 교관 후 냅코 작전 참가(우)

 

 

 

곽림대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 설립 / 감독관

 

 

 

한장호 최초의 파일럿 클럽 조직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 교사 건물

 

 

 

② 새크라멘토 비행학교 Sacramento Aviation School

 

 

 

박희성(왼쪽) / 이용근

새크라멘토 비행학교 훈련

한국 최초 공군장교

 

 

 

③ 레드우드 비행학교 Redwood Aviation School

 

 

 

이초(뒷줄 오른쪽 3번째)

한장호(앞줄 오른쪽 2번째)

미국인 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앞줄 왼쪽 1번째)

 

 

 

레드우드 비행학교 전경

 

 

 

레드우드 비행학교 입구

 

 

 

④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비행학교 San Diego Riverside Aviation School

 

 

 

⑤ 필라델피아 에싱턴 미 해군 비행학교 Philadelphia Aslington US Naval Aviation School

 

 

 

노정민

에싱턴 미 해군 비행학교 졸업 후 '비행세기'라는 논설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비행대 창설 최초 주창

[신한민보 1919. 10. 7.]

 

 

 

Japan

일본 지역

 

일제강점기 하에서 조선인이 비행기술을 배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일본 유학이었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던 '비행사 면허를 갖고 고향 방문 비행을 하는 것'은 비행사로서 성공했다는 뜻도 있었으나 이것을 통해 한국인의 항공사상과 기술을 알리는 데 또 다른 의의가 있었다.

 

 

 

⑥ 다치가와立川 비행학교 

     東京都立川市緑町5番地

 

 

 

전상국

중일전쟁 비행 대대장 참전

 

 

 

⑦ 도와東亞 비행학교

     千葉県習志野市袖ケ浦5丁目16

 

 

민성기

조선비행학교 교관

"···열시간 배우면 비핼할 수 있다···"

[시대일보 1926. 5. 21.]

 

 

 

⑧ 오쿠리小栗 비행학교

     東京都江東区塩浜2丁目

 

 

 

안창남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후원회' 설립

"···성대한 안창남씨의 환영···"

[동아일보 1922. 12. 5.]

 

 

 

⑨ 다이이치第一 비행학교

     神奈川県橫浜市鶴見区安善町1丁目

 

 

 

정재섭 중국 공군 소속 활약

"···정재섭 비행사 고향 방문 비행···"

[동아일보 1928. 4. 10.]

 

 

 

⑩ 나고야名古屋 비행학교

     愛知県名古屋市守山区小幡

 

 

 

김영수

고야 비행학교 졸업 후 대구에 조선항공연구소 개설하여 후학 양성

"···고학으로 성공한 이등비행사 김영수씨 고국 방문 비행···"

[동아일보 1938. 3. 22.]

 

 

 

China and Soviet Union

중국 · 소련 지역

중일 전쟁을 한국독립전쟁의 기회로 여긴 많은 한국 젊은이들은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⑪ 난위안南元 항공학교

      Nanyuan Aviation School

 

 

 

최용덕

난위안 항공학교 수학

한국과 중국 공군의 산증인

 

 

 

⑫ 바오딩保定 항공학교(베이징)

     Baoding Aviation School

 

 

 

⑬ 쭝양中央 항공학교

     Zhongyang Aviation School

 

 

 

김원영

쭝양 항공학교 비행훈련

중미 혼합단 소속

 

 

 

⑭ 광시廣西 항공학교

     Guangxi Aviation School

 

 

 

임도현

중국 광시 항공학교 교관(앞줄 가운데)

 

 

 

⑮ 광둥廣東 항공학교

     Guangdong Aviation School

 

 

 

⑯ 윈난雲南 항공학교

     Yunnan Aviation School

 

 

 

1924년 고급 과정용 훈련기로 첫 단독비행 성공

 

 

 

권기옥 윈난 항공학교 제1기 졸업

 

 

 

⑰ 모스크바 항공학교

     Moscow Aviation School

 

 

 

김공집(사진) / 박태하

모스크바 항공학교 전투기 조종훈련 북벌전쟁 참여

 

 

 

⑱ 레닌그라드 항공학교

     Leningrad Aviation School

 

 

 

장성철

레닌그라드 항공학교 비행훈련

항저우 항공학교 교관(대일 선전 활동)

 

 

 

광복군의 후예 대한민국 공군

조국의 하늘을 지키다

Republic of Korea Air Force(ROKAF), Descendants of the Korean

Liberation Army, Defends Korea's Sky

 

대한민국 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에 뿌리를 두고, '한국 광복군 비행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국방의 기치를 걸고 창군하였다. 해방 직후 민간 항공단체인 '국군항공준비대'를 시작으로 '육군항공사령부'를 거쳐 '공군창군 7인'의 주도로 마침내 독자적인 '대한민국 공군'이 1949년 10월 1일 창군하게 된 것이다.

 

창군 시기 공군이 보유한 비행기는 미군에게 넘겨 받은 연락기 20대가 유일하였다. 이후 국민들의 성금으로 훈련기인 'T - 6' 10대를 구매하였고, 이 훈련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건국기가 도입되던 날은 1950년 5월 14일로 성대한 명명식이 열렸는데 불과 한 달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건국기는 훈련다운 훈련 한번 하지 못하고 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훈련기였던 탓에 자체 무장이 없어 부조종석에 앉은 사람이 적을 발견하면 창밖으로 수류탄이나 박격포탄을 던지는 수준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공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이러한 투지를 인정한 미군이 제대로 된 전투기 'F - 51D(무스탕)'을 지원해 준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영공수호에 나서게 되었다.

 

휴전 이후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공군력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첫 제트전투기인 'F - 86F(세이버)'에 이어 첫 초음속기인 'F - 5(프리덤파이터)'를 도입하였으며, 마침내는 'KF - 5(제공호)'를 자체적으로 조립 · 생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주국방의 노력은 많은 항공기술자의 양성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이들이 민간으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민간항공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하늘에서

독립을 꿈꾸다

The Republic of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Aviation School,

Dreaming of Indeoendence the Sky

 

728x90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천시립박물관] ㅡ 부천향토역사관  (0) 2022.07.23
[600년 문화 변천사가 그대로]  (0) 2022.06.12
[국립항공박물관] 02  (0) 2022.05.30
[국립항공박물관] 01  (0) 2022.05.23
[한양도성박물관] 01  (0) 2022.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