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들/2022년

2022-012 결정적 순간들

드무2 2022. 7. 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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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 결정적 순간들

 

 

 

 

 

 

박보균 지음

2019, 중앙books

 

 

 

목감도서관

SL052121

 

 

 

325.24

박45ㄱ

 

 

 

리더십은 역사를 연출한다 ||||||||||||||

 

 

 

 

 

 

글 · 사진 박보균 대기자

중앙일보 · 중앙SUNDAY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大記者) 칼럼니스트.
서울 출생. 고려대 정외과 졸업. 1981년 중앙일보에 들어가 정치부장·논설위원 · 편집국장 · 편집인을 거쳤다. 기자 생활의 거의 전부를 정치부에서 일했다. 그의 관심과 열정은 ‘좋은 리더십·유능한 권력’을 추적, 발굴하는 데 집중된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의 재매입 공적으로 2013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했다. 한국기자상(2회)·관훈언론상 · 고운언론상 · 효령상 · 장한 고대언론인상 등을 받았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이사를 지냈다. 저서로 『살아 숨 쉬는 미국역사』 · 『청와대 비서실(Ⅲ)』 등이 있다.

 

 

 

 

 

 

 

 

 

 

 

 

 

 

 

 

 

 

 

 

 

 

 

 

 

 

 

 

 

 

 

[ 20세기 후반 냉전의 습격을 알린 고발장 ]

 

 

[ 촌철살인 언어로 작동하는 처칠의 리더십 ]

 

 

 

처칠 조각상. '철의 장막'을 언급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처칠 동상들 중 가장 독특하다. 미국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대학 '처칠 박물관' 앞에 있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대학 체육관에서 45분간 '철의 장막' 연설을 하는 처칠, 왼쪽 앞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쳐졌다." 처칠 조각상의 받침돌 문구.

 

 

       With a dramatic gesture, WINSTON CHURCHILL warned the world---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March 5. 1946 Fulton, Missouri

 

 

 

"Never Give In(절대 굴복하지 말라)." 제2차 세계대전 때(1941년 10월) 총리 처칠이 자신의 모교 해로(Harrow)스쿨에서 했던 연설.

 

 

 

웨스트민스터 캠퍼스 내 또 다른 처칠 동상. 그 뒤는 영국 런던에서 옮겨 복원한 교회 건물.

 

 

 

https://www.joongang.co.kr/article/19748227#home

 

 

 

- 풀턴(미국), 중앙일보 2016년 3월 19일

 

 

 

전쟁을 말로 바꿔

언어로 돈을 버는 재주

 

1953년 영국 총리 처칠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평화상이 아니다. 그해 문학상 유력 후보는 헤밍웨이였다. 그만큼 의외였다. 수상작은 처칠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이유는 이렇다. "역사적이고 전기(傳記)적인 글에서 보인 탁월한 묘사와, 고양된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빼어난 웅변술 덕분이다(for his mastery of historical and biographical description as well as for brilliant oratory in defending exalted human values)."

처칠과 문학상의 조합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전업 작가보다 많은 글을 썼고 책을 냈다. 처칠은 43종(72권)의 책을 출판했다. 신문과 잡지에 1000여 개의 글을 기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205만 단어가 넘는다. 그는 20대 초반 쿠바와 인도의 전쟁터에 있었다. 신문에 전쟁 기사를 썼다. 그는 보어전쟁 현장에 갔다. 그때는 종군기자였다. 그는 참전 경험을 책으로 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큰돈을 벌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겸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처칠의 능력은 전쟁을 언어로 바꾸고 언어를 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처칠은 말의 힘을 일찍 터득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 중에서 연설 재능이 최고다. 연설을 즐기는 사람은 위대한 왕보다 오래 권력을 행사한다."(『수사학의 발판(The Scaffolding of Rhetoric)』, 1897년) 그는 훌륭한 연설과 연설가의 공통점을 이렇게 집약했다. "눈에 띄는 존재감, 정확한 어휘 사용, 운율, 논쟁의 축적, 비유의 적절한 구사." 처칠은 언어의 조련사다. '정상외교(summit)'란 말은 처칠이 만들었다. 그는 경쾌한 유머를 내놓았다. 처칠이 의사당에 지각 했을 때다. 의원들 비판에 그는 "여러분도 나처럼 예쁜 아내와 살면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 것"이라고 넘겼다. 처칠은 많은 명언을 제조했다. 그 말 속엔 통찰과 지혜가 넘친다.

풀턴의 '처칠 박물관'에는 그의 어록이 널려 있다.

 

● 위대함의 대가는 책임감이다(The price of greatness is responsibility).

●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 절대 굴복하지 말라-위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크고 작든 명예와 선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말라(Never give in! in nothing great and small, large and petty,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 광신자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없고 화제를 바꾸지 않는다(A fanatic is one who can't change his mind and won't change the subject).

● 협상은 언제나 전쟁보다 낫다(To jaw-jaw is always better than war-war).

● 간결한 말이 으뜸이며, 그중 친근한 단어가 최고다(Broadly speaking the short words are the best, and the old words are best of all).

 

처칠은 다재다능했다. 그는 평생 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차트웰의 금붕어 연못'은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280만 달러에 팔렸다. 그의 사저였던 차트웰은 관광명소다.

 

 

 

>>> '철의 장막' 나치 괴벨스도 썼지만 주목 받지 못했다.

 

'철의 장막'은 처칠 연설 전에도 존재했다. 그 말은 극장에서 방화용 안전장치를 뜻했다. 1918년 러시아 작가 바실리 로자노프(Vasily Rozanov)는 "러시아 역사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잇다"고 했다.

영국 여성인권운동가 스노든(Ethel Snowden)은 그 용어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공산주의 러시아를 '뚫을 수 없는 장벽'이라고 했다(1920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 철의 장막 뒤쪽에'란 글(1943년 5월)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귀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용어의 제조자는 처칠이 아니다. 하지만 말의 파괴력은 때와 장소, 인물의 삼박자가 맞아야 생긴다. 처칠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공산주의는 장막 너머의 어둠과 동일시됐다. 처칠의 철의 장막은 역사 언어의 전당에 올랐다. 그 용어는 파생됐다. 냉전 시대에 중국은 '죽(竹)의 장막'으로 불렸다.

 

 

 

[ 프랑스는 핵무장을 단행할 용기와 집념을 가져야 한다 ]

 

 

[ 드골의 핵전략은 프랑스 영광의 복원 ]

 

 

 

드골 동상(파리 상젤리제-클레망소 지하철역 앞)

 

 

 

로렌의 십자가

 

 

 

드골과 케네디 부부

 

 

 

드골 기념관에 전시된 시트로앵 자동차.

 

 

 

콜롱베의 드골 기념관 조각상. 지팡이를 든 노년의 드골, 집념과 피로가 얽힌 표정에 그의 큰 키(196cm) 높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963624#home

 

 

 

- 파리 · 콜롱베(프랑스), 중앙일보 2017년 9월 23일

 

 

 

 

조촐한 무덤, 이름뿐인 묘비명

'내가 곧 역사'라는 자부심 완성

 

 

프랑스 시골 마을 콜롱베 성당의 공동묘지에 있는 드골의 흰 대리석 무덤과 수식어 없는 비석. 파리에서 270km 떨어져 있다.

 

 

 

[ '정의로운 평화'로 미국을 재통일했다 ]

 

 

[ 냉혹과 관용 사이의 링컨 드라마 ]

 

 

 

게티즈버그의 링컨 동상.

 

 

 

 

 

 

밀랍인형으로 전시된 링컨 가족.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의 밀랍인형(스프링필드 링컨박물관).

 

 

 

북군의 최고지휘부 화동 장면을 묘사한 그림(Peacemakers, 1868년 조지 힐리 작품) 속 링컨과 그랜트, 셔먼 장군(오른쪽부터). 그림은 백악관에도 걸려 있다.

 

 

 

항복 조인식에서 악수하는 남군의 리(오른쪽)와 북군의 그랜트.

 

 

 

막내아들과 함께한 링컨의 모습을 묘사한 동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616290#home

 

 

 

- 게티즈버그 · 리치먼드 · 애퍼매톡스(미국), 중앙SUNDAY 2019년 5월 12일

 

 

 

애퍼매톡스에서 남북전쟁이 끝났다

격정을 누르는 절제는 위대한 드라마를 만든다

 

 

전쟁 종결 장소는 거창하다. 동상을 세우고 영웅을 기린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그런 기억을 깬다.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Appomattox) 코트하우스-. 워싱턴에서 남쪽으로 자동차 3시간 거리다. 1865년 4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났다.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양쪽의 간판 장군들이 나왔다. 승자는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 패장은 남군의 로버트 리다.

그곳은 역설적 파격이다. 어떤 기념비도 없다. 누구를 기리는 동상도 없다. 추모비와 동상, 전적비로 넘치는 게티즈버그와 다르다. 입구부터 조용하다. 평범한 안내판과 국기게양대뿐이다. 전쟁 시절의 목책, 건물들이 유적지를 지킨다. 안내판 설명문이 시선을 잡는다. “이곳에서 리와 그랜트 그리고 그들의 지친 군대는 미국 역사에서 위대한 드라마(Grant drama)를 연출했다.” 글 속에 승자의 환희, 패자의 절망이 없다. 그것은 격정(激情)을 누르는 숨 막히는 절제다. 그것은 링컨의 종전 정신이다. 화려한 웅변이나 감동적 회고보다 가슴을 찌른다.

 

애퍼매톡스 정신은 역사 기록의 금욕주의. 동상은 없고 조촐한 기념판뿐이다.

 

그곳 전적지 안내자는 “같은 국민 간 내전(civil war)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잔인하다. 교훈과 반성 등 어떤 의미의 기념비, 동상도 전쟁의 반목과 갈등을 재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은 간결하다”고 했다. 내전의 후유증은 깊다. 증오와 원한의 상흔(傷痕)은 오래간다. 그 때문에 지금도 남부의 주에선 링컨의 기념상은 찾기 힘들다.

애퍼매톡스의 풍광은 관대한 항복 조건을 상기시킨다. 남부의 체제 반역은 재앙적 희생을 낳았다. 하지만 누구도 체포돼 처벌받지 않았다. 남부의 총지휘관 리 장군은 고향으로 갔다. 그는 대학총장으로 제2 인생을 살았다. 애퍼매톡스의 절제는 역사의 경외감을 생산한다. 한반도 화해를 위한 전략적인 영감을 준다.

 

 

 

>>> '스필버그의 정치 9단 링컨'

 

 

링컨은 정치천재다. 그의 정치적 삶은 다층(多層)적이다. 관대함과 잔인함, 소박함과 위대함, 순교자적 고결과 마키아벨리적 노회(老獪)ㅡ, 링컨의 지도력은 그 대칭적 경계를 넘나들며 작동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Lincoln)’은 그 리더십을 추적한다. 영화는 수정헌법 13조(노예제 폐지)의 하원 통과 과정을 다룬다. 그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게임이다.

 무대는 1865년 1월 워싱턴 정가. 전쟁은 링컨의 북군 승리로 기울었다. 링컨은 재선 대통령이다. 링컨의 여당(공화당)은 다수당이다. 하지만 여당 전원이 찬성해도 헌법수정 정족수(3분의2)에 미달이다. 20표가 부족했다(전체 182명). 야당 민주당은 남부 정부와의 평화 협상을 앞세운다. 당 차원의 타협 · 양보는 불가능하다. 여당은 강온파로 갈려 있었다.

 

'전쟁 회의(Council of War)'ㅡ 조각상(60cm × 48cm) 제목이다. 링컨 대통령이 그랜트 사령관(왼쪽), 스탠턴 전쟁장관과 함께 전투계획서를 검토하고 있다. 1868년 존 로거스 작품이다.

 

 

 영화 도입부는 처참한 전선이다. 링컨 집권 동안 미국은 내전(Civil War)에 시달렸다. 남북전쟁의 내전 전사자는 4년간 62만 명. 피의 도살(屠殺)이었다.

 전선에 나간 링컨(대니얼 데이 루이스),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외우는 사병들 모습이 이어진다. 연설은 짧다. 272개 단어다. 링컨의 그 연설은 대통령 언어의 정수다. 권력언어는 대중 동원의 유효한 수단이다.

 링컨은 임기 중반에 노예해방선언문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전시 대권에 의한 임시방편이다. 종전 후 법의 재해석을 받을 수 있다. 링컨은 결심한다. 전쟁 종료 전에 헌법적 보호 장치를 완성하기로 했다.

 링컨의 의회 전략은 다양하다. 설득과 회유, 소통과 압박이 함께 전개된다. 우선 공략 대상은 야당의 레임덕(lame duck) 의원들. 그들은 선거에 떨어졌지만 임기가 두 달쯤 남아 있다. 그들을 당 노선에서 이탈시켜야 한다. 정치 변절의 대가는 낙하산 임명직이다. 그것은 밀실 정치다. 국무장관 슈어드(William H. Seward)가 막후 해결사를 관리한다. 슈어드는 링컨의 정적이었다. 이제는 세련된 충성파다.

 링컨은 설득의 정공법에도 주력한다. 그는 밤늦게 야당 의원 집을 찾아간다. 어둠 속 문 앞, 링컨의 소통 리더십은 강렬하게 펼쳐진다.

 그는 당내 온건파도 만족시켜야 했다. 온건파 보스는 블레어(Francis P. Blair)다. 블레어는 남부와의 종전 협상을 자원했다. 링컨은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 도박이었다. 협상이 알려지면 그동안의 노력은 헝클어진다. 야당의 반격을 받게 된다. 선택의 기로다. ‘평화냐, 노예제 폐지냐’-.

 링컨은 상호 모순되는 카드들을 올려놓는다. 판은 커진다. 거기에 완급(緩急) · 경중(輕重)을 매긴다. 그리고 역설과 반전으로 돌파한다. 그것은 링컨의 승부 방식이다. 스필버그의 감수성은 폭발한다.

 링컨은 강경파도 무마한다. 스티븐스(Thaddeus Stevens, 토미 리 존스)는 급진 노예 폐지론자다. 그의 완승 자세는 민주당의 경계심을 키운다.

   대통령의 설득언어는 매력적이다. “나침반은 정북의 방향을 가리켜준다. 그 길에 있는 늪, 사막과 협곡을 알려주지 않는다.” 스티븐스는 흑백의 무조건적 평등에서 후퇴한다. ‘법 앞의 평등’으로 완화한다.

 스필버그의 상상력은 투표 순간의 긴박감을 높인다. 평화 협상이 장애물로 등장했다. 야당은 협상의 진위를 물었다. 링컨은 “(남부 정부) 대표단이 워싱턴에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워싱턴 근처의 북부에 들어와 있었다. 교묘하게 거짓을 피했다. 그 순발력은 마키아벨리의 ‘좋은 거짓말’을 연상시킨다.

 법안은 통과된다. 2표 차다. 스티븐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법안은 부패로 통과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의 교사(敎唆)와 방조(aided and abetted)로.” 부패, 꼬드김의 어두운 어휘ㅡ. 그 장면은 스필버그가 포착한 정치 9단 링컨의 또 다른 진실이다. 고귀함을 실천하는 링컨 정치의 이중성이다.

 정치는 진흙탕이다. 위대한 역사는 진흙탕에서 만들어진다. 링컨 정치는 정공법과 변칙의 혼합이다. 용기와 단호함, 일관성은 추동력이다. 세련된 악역의 참모도 있다. ‘링컨’에서 사병들과 격의 없는 인생 대화, ‘세 귀로 듣는다’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링컨 정치의 노회한 면모를 상쇄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링컨 전문가다. “영화는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는 링컨 신화를 영리하게 활용해 왔다. ‘링컨’은 박근혜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전략은 허술하다.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치열하지 않다. 참모 역량도 부족하다. ‘링컨’은 우리 정치에 메시지를 던진다.

 

 

 

[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다 ]

 

 

[ 천하 평정한 마오쩌둥의 언어 마술 ]

 

 

 

 

 

 

징강산 시내 쪽 남산(해발 860m)공원 정상에 서 있는 거대한 횃불(높이 34m) 조각상. 아래 글씨 '성화상전(星火相傳)'은 마오쩌둥 홍색 혁명정신의 계승을 다짐한다.

 

 

 

마오쩌둥 고향 샤오산 광장에 있는 마오 동상.

 

 

 

옌안 혁명기념관의 대장정 지휘부 조각상. (왼쪽부터) 류사오치 · 마오쩌둥 · 주더 · 저우언라이.

 

 

 

징강산 박물관의 마오쩌둥 시(서강월)와 산 주변의 기념 조형물 '승리의 나팔소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82758#home

 

 

 

- 징강산 · 샤오산 · 옌안(중국), 중앙SUNDAY 2019년 9월 21일

 

 

 

 

 

 

 

 

 

[권력과 인간 본성의 불편한 진실 집필 500년의 『군주론』을 추적하다]

 

 

[살아 숨 쉬는 위기 극복의 통치술]

 

 

 

마키아벨리의 흉상. 죽음의 얼굴상(추정)이다. 베키오 궁전 백합홀 집무실에 초상화와 함께 전시돼 있다. 얼굴(데스마스크)에 치장용 벽토(stucco)를 발라 본뜬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에 검은색, 붉은색 등 여러 색을 칠했다. 기록대로 '마르고 작은 얼굴'이다. 상반신의 옷 형태와 색깔은 초상화와 같다. 작가 미상이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초상화. 궁정복 차림이다. 1575년(사후 48년) 산티 디 디토의 작품. 얇은 입술에서 야릇한 미소가 풍긴다. (위) 체사레 보르자(아래 왼쪽) 사보나롤라.(아래 오른쪽)

 

 

 

 

 

 

마키아벨리의 정치 유배지. 500년 전 그대로인 시골집의 돌벽에 붙은 탄생 400주년 기념 석판.

 

 

 

피렌체 정치와 행정의 중심인 베키오 궁전. 궁전 2층의 화려한 백합홀에 마키아벨리의 집무실이 있다.

 

 

 

 

 

 

 

 

 

우피치 미술관(베키오 궁전 옆) 바깥쪽 회랑에 서 있는 마키아벨리 동상.(위) 산타 크로체 성당의 마키아벨리 묘비명, '어떤 찬사도 이처럼 그 위대한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아래)

 

 

 

최장집 교수의 『군주론』

한국 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요즘도 ‘왜 마키아벨리를 공부하나’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최 교수는 3년 전 “우리 정치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그 주장은 유효한가.

 

“그렇다. 한국정치는 도덕적·이상주의적이다. 한국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전통이 약하다. 마르크스 이론에는 정치의 역할이 없다. 규범과 이상만 강요한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왜 마키아벨리인가’다.”

 

- 민주주의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는.

 

“민주주의도 통치체제의 하나다. 통치행위는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추상화, 물신(物神)화, 도덕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런 문제의 해독(解毒)제로서 마키아벨리의 유용성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항의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솔직하고 대담무쌍한 정치철학자다. 도덕·종교적 담론은 인간의 권력의지를 베일에 덮어씌운다. 마키아벨리는 그 위선적 가면을 벗겨 보인 위에서 정치현상을 설명했다.”

 

- 우리 사회에 반(反)정치의 분위기가 퍼져 있다.

 

“정치 배제의 반정치는 무책임의 정치를 낳는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찾는 게 정치다.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와 통치술에 익숙해야 한다.”

 

- ‘좋은 정치’란.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좋은 정당으로 뒷받침받는 좋은 리더십이 해결 과제를 사려 깊게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군주론의 권력과 인간관계 비교]

 

 

 

[레닌의 혁명열차 1917년 망명지에서 귀환하다]

 

 

[역사는 미적거린 혁명가를 용서하지 않는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있는 293호 기관차.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움직였다.

 

 

 

핀란드역 광장의 레닌 동상.

 

 

 

혁명과 사랑,

레닌 열차에 동승한 부인과 연인

 

 

레닌의 열차는 ‘혁명과 사랑’을 압축한다. 탑승자 중에 레닌의 부인과 연인이 있었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사진 위쪽)와 이네사 아르망(1874~1920).

두 사람 모두 레닌의 혁명 동지. 레닌과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노동운동을 함께했다. 둘의 1895년 결혼(레닌이 한 살 적음) 장소는 레닌의 시베리아(슈셴스코) 유형지. 그해 크룹스카야도 다른 곳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레닌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평생 남편을 뒷받침했다. 이네사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출신이다.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연인(이네사 아르망)

 

 

그 후 이네사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1910년에 망명객 레닌을 파리에서 만났다. 이네사는 외국어에 능숙했다. 레닌의 저서 번역과 통역, 밀사를 맡았다. 레닌은 이네사를 사랑했다. 크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인정했다. 그것은 미묘한 삼각관계였다. 혁명열차의 도착 뒤 삼각관계는 대충 정리됐다. 다음 해 이네사는 콜레라로 숨졌다. 레닌의 상심은 컸다. 레닌 부부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 1917년 레닌의 오디세이, 8일간 3200km 대장정

 

 

핀란드역에서 내리는 레닌을 볼셰비키 의장대가 도열해 환영하고 있다.

 

 

 

 

 

 

[섬뜩한 독재의 유혹 '젊은 스탈린'의 고향을 찾아서]

 

 

[성직자 꿈꾼 낭만시인은 왜 잔혹한 통치자가 됐나]

 

 

 

23세 청년 스탈린 초상화 '타오르는 눈빛을 지닌 젊은이'(스탈린 박물관 전시).

 

 

 

 

 

 

 

 

 

"분홍 꽃봉오리 피더니 / 연한 푸른 빛 제비꽃이 되네 /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눕고 / 짙푸른 하늘에서 종달새 노래하며 / 하늘 높이 날고 / 목청 좋은 나이팅게일새 / 덤불에서 아이들에게 노래하네 /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아여 / 평화가 내 나라에 퍼지게 하라 / 친구여 노력하자 / 나라를 빛내자"

 

ㅡ 스탈린

 

 

 

박물관 앞의 스탈린 석상은 건재하다. 뒤쪽 대리석 파빌리온 속에 스탈린 생가가 있다.

 

 

 

희귀한 스탈린 가족사진(1935년 촬영). 어머니 케케, 큰아들 야코프, 작은 아들 바실리(왼쪽). 앞은 막내딸 스베틀라나. 모두 비운의 삶을 살았다.

 

 

 

첫 부인(스바니제, 왼쪽), 결핵으로 숨졌다. 두 번째 부인(알릴루예바, 오른쪽), 자살했다.

 

 

 

혁명 자금을 마련하라

은행을 털어라

 

 

은행 강도는 젊은 스탈린의 이력이다. 혁명 자금 조달 수단이다. 1907년 6월 ‘트빌리시 은행 강도 사건’-. 25세 행동대장의 별명은 카모(Камо). 전설적 볼셰비키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이다. 태어난 곳은 스탈린 고향인 고리. 스탈린과 감옥 동기였다.

 범행 장소는 에리반 광장. 지금은 ‘자유 광장’이다. 2003년 장미혁명 현장이다. 카모는 대원 열 명을 농부로 위장시켰다. 광장 주변에 배치했다. 카모는 기병대 장교 차림. 돈을 실은 역마차가 다가왔다. 범인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아우성 속 카모의 동작은 전광석화였다. 돈 자루를 훔쳐 마차에 싣고 달아났다. 자루 속 돈은 34만 루블(340만 달러 추산). 초대형 사건이었다. 배후에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의적 코바의 심정으로 연출했다. 그 돈은 레닌에게 전달됐다. 1922년 카모는 교통사고로 숨졌다. 묘비가 광장 앞(지금은 푸시킨공원)에 있었다. 스탈린은 권력 장악 후 묘비를 없앴다. 그는 과거 정체를 숨겼다. 그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숙청됐다.

 

 

스탈린이 사주한 '트빌리시 은행강도' 현장인 에리반 광장의 지금 모습(자유광장), 자유 기념탑(세인트 조지 동상)이 서 있다.

 

 

스탈린 만찬은 풍성했다. 조지아(옛 그루지야) 식이다. 술, 노래, 담배가 곁들여졌다. 그는 성가대 출신이다. 야비한 습관이 가끔 작동됐다. 상대방 약점을 잡으려 했다. 보드카 건배는 유용했다. 그는 자기 잔엔 화이트 와인을 몰래 채웠다. 상대방의 ‘취중 진담’을 주목했다.

 

 

 

>>> 조선인 강제 이주, 분단, 6 · 25··· 한반도에 드리운 스탈린의 그림자

 

 

스탈린은 한반도의 비극을 설계했다.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그의 첫 연출이다. 분단, 공산 위성국 북한 수립, 한국전쟁에도 스탈린의 기획과 음모가 들어있다. 전시 홀은 7개다. 전시품은 800여 점(4만7000여 점 보유). 진열장 속에 한글이 보인다. ‘이·쓰딸린 저작집 1’-.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전집의 번역책이다. 북한 관련 전시품은 그것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품은 드물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승자다. 그는 히틀러를 궤멸시켰다. ‘대조국수호 전쟁’ 홀은 승전 신화로 장식된다. 크렘린 붉은 광장 승리 퍼레이드 사진, 수훈갑 주코프 원수가 기증한 T-34 탱크 전기 스텐드, 병사들의 비장한 결의, 대원수 스탈린의 득의의 미소-. 옆 전시실에 스탈린 데스 마스크가 있다. 그것은 승전 홀과 어울려진다. 박물관은 스탈린 성지(聖地)가 된다.( 전시공간 규모는 1,550)

얄타회담 사진들도 붙어 있다. 1945년 2월 흑해 휴양지 얄타에서 빅 3(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영국 처칠 총리)는 외교 게임을 했다. 나는 2010년에 가봤던 얄타회담 장소인 리바디아궁을 떠올렸다. 루스벨트의 병색은 박물관 사진에서 뚜렷하다(두 달 뒤 사망). 얄타회담은 한반도 분단의 뿌리다. 그의 야심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장이었다. 루스벨트는 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박물관 밖에 열차 객실이 전시돼 있다. 스탈린이 얄타, 테헤란 회담장에 갈 때 탔던 전용객실이다. 초록색 객차 번호는 ФД 3878. 소련 국가 휘장이 붙어 있다. 무게 83t의 방탄객차. 집무실, 서재, 화장실, 부엌이 있다. 움직이는 크렘린이다. 객차에 스탈린 체취가 남은듯하다. 그 체취에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절망이 담겨있다. 그 순간 스탈린 유품은 심하게 거슬린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외 열차 방문은 스탈린 벤치마킹이었다.

 

 

스탈린 전용 방탄 객차.

 

 

1949년 12월 스탈린 70회(실제 71세) 생일 기념행사가 모스크바에서 있었다.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도 참석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에서 보낸 축하 휘호가 선물 전시실을 장식한다. ‘萬壽無疆 慶賀 斯大林同志七十壽辰’(만수무강 경하 사대림동지칠십수진)-. 사대림은 스탈린. 제2야전군 정치위원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스탈린과 마오가 함께 있는 자수 그림은 흥미롭다. 마오는 중·소 우호조약 체결에 매달렸다. 그림은 서열을 드러낸다. 안내원은 "스탈린은 냉전시대 공산세계 대부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수락했다. 마오는 중국 군대를 한반도에 진입시켰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싸움을 부추겼다. 그 사이 그는 동유럽의 지배권을 강화한다. 동족상잔의 참혹함은 계속됐다. 그가 숨진 4개월여 뒤 한국전쟁은 종료됐다. 그의 그림자는 한반도에 질기게 남아 있다.

북한체제의 강압과 공포는 스탈린 방식이다. 대회장에 끝없는 박수 소리는 그 잔재다. 한국의 남남갈등 속 극렬좌파 행태에 그 잔영이 있다. 계층 가르기, 증오심 키우기, 거짓 선동, 진실 왜곡은 볼셰비키 투쟁 전략이다. 박물관에서 나는 25년 전 현장 취재를 떠올렸다. 1989년 6월 소련 붕괴 2년 전. 야당 총재 김영삼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타슈켄트(현 우즈베키스탄)에도 갔다. 동포(고려인)들을 만났다. 그 장면은 신기한 감동이었다. 1930년대 소련 땅 연해주에 조선인 집단 마을이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군 침공을 경계했다. 조선인이 일본을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 1937년 그는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6000㎞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17만 명의 열차 집단이동과 죽음(2만5000명 사망 추정). 그는 의심의 뿌리를 제거한다.

 

 

 

[로마 영광의 신화 끌어낸 무솔리니의 대중 장악 기술]

 

 

[나치의 괴벨스는 무솔리니를 모방했다]

 

 

 

무솔리니 흰 대리석 얼굴상. 생전에 부릅뜬 눈, 꾹 다문 입술을 형상화했다.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작은 마을 프레다피오에 있는 지하 납골당 돌무덤 앞에 놓여 있다. 파시스트 정권 상징물인 파스케스(fasces)가 얼굴상 양쪽에서 지키고 있다.

 

 

 

 

 

 

군 원수 복장의 '두체(수령) 무솔리니.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가 태어난 3층집

 

 

 

연설의 달인. 요란한 제스처와 연극조의 언어 구사로 무솔리니는 대중을 장악했다.

 

 

 

1914년 10월 무솔리니가 창간한 신문 '일 포폴로 디탈리아'. 참전을 호소하는 1면 기사(Popodo Italiano Corri Alle Armi, 이탈리아 국민이여 무기를 들라).

 

 

 

무솔리니(오른쪽)는 경례 · 복장 · 표식 등 다양한 체제 상징을 히틀러에게 전수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따온 오른손을 높게 뻗는 경례 방식.

 

 

 

무솔리니와 그람시

동시대의 두 사람은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해석했나

 

 

피렌체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의 무대다. 도시 외곽 그의 고향 집에 찬양 석판이 달려 있다. “국가통치술과 이탈리아 해방에 대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군주론(Il Principe)』(1513년 집필)에 담긴 지적 파괴력은 영속적이다. 그 책은 권력과 인간성의 진실을 조명, 해부한다. 무솔리니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는 마키아벨리에 심취했다. 무솔리니는 박사 학위 논문을 냈다. 그람시는 ‘현대 군주론’의 개념을 조립했다. 젊은 시절 둘의 사상 연마와 지적 역정은 비슷하다. 나중엔 이념적, 정치적 적수였다. 나이는 무솔리니가 여덟 살 많다.

『군주론』은 정치의 본질을 설파한다. 그것은 힘(fortezza)이다. 권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 습득은 편향적이다. ‘이기적인 인간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을 읽는 데 주력했다. 그람시는 힘과 헤게모니를 구별했다. 물리적인 힘만이 아닌, 물리적인 힘이 수반될 수 있는 인민의 동의를 강조했고 헤게모니에 초점을 맞췄다.”(곽준혁 교수,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 논문(서문)은 이런 내용을 담았다. “말로는 국가가 유지되지 않는다.(Cum le parole non si mantengono li Stati)” 그 무렵(1924년)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군주’는 정치적 영감을 줬다. 그람시는 인민과 집단에 봉사하는 군주를 모색한다. 현대 군주로서 정당의 개념을 재구성했다.

군주론』의 진수는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다. 새 질서의 확립은 포르투나의 운명에 다르지 않는다. 그것은 비르투의 권력의지와 승부근성으로 성취된다. 무솔리니는 엘리트 규합과 기회 선점을 중시했다. ‘로마 진군’의 권력 탈취는 속전속결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은 이렇게 비교한다

“무솔리니가 로맨스와 드라마(romance & drama)에 의존할 때 그람시는 생디칼리즘을 고수했고 공장 점거를 설파했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교활하게 펼쳤다. 그람시는 현실정치의 패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하원의원)였다. 1926년 파시스트 정권은 의원면책특권을 무시한다. 그람시는 체포되고 투옥된다. 그람시의 옥중수고(獄中手稿)는 패배의 반성, 복수의 준비다.

그람시는 절묘하면서 매력적인 혁명과 변혁의 개념을 내놓았다. 문화 헤게모니, 인간의지와 비(非)결정주의 역사관, 진지(陣地)와 기동(機動)전, 역사적 지배블록…. 1980년대 그람시 이론은 한국에 본격 소개됐다.

 

 

 

>>> 뇌의 작동 20년간 중단시켜라

 

1927년 그람시에 대한 재판과 격리가 진행됐다. 파시스트 검사의 구형 논고는 악마적 직설이다. “이 뇌의 작동을 우리는 20년간 중단시켜야 한다.(Per vent’anni dobbiamo impedire a questo cervello di funzionare.)” 판결 형량은 20년4개월5일이었다. 그는 어릴 때 성장 부실 장애를 앓았다. 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됐다. 그곳 생활 10년 뒤 숨졌다(46세). 감옥 속 그의 글쓰기는 치열했다. 그 글들은 이념의 지평을 확장했다. 지난해 로마에 있는 그의 묘소에 갔다. 한국 사회에 그람시가 스며들어 있다. 그 영향력 때문에 궁금했다. 지하철 B라인을 타고 피라미드 역에서 내렸다. 가까이에 ‘개신교, 비(非)가톨릭 공동묘지’(Cimitero Acattolico)가 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 묘지를 “로마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했다.

그람시 묘소는 조촐했다. 비명도 간략했다. 그의 이름에다 ‘ALES 1891 ROMA 1939’라고 적혀 있다. 태어나고(사르데냐 섬 알레스) 죽은 곳(로마), 그 연도만 썼다. 파시스트 정권의 감시 탓일 것이다. 묘소 주위에 작은 화분 10여 개가 놓여 있다. 평소 정성스레 가꾼 인상은 주지 못한다. 그에 대한 열광과 찬사와 달랐다.

 

그람시.

 

 

 

로마 테스타시오 구역 '개신교 공동묘지'에 있는 그람시 묘소.

 

 

 

[히틀러의 역사 보복 상징물 제거와 기억의 교체]

 

 

['사라예보 총 소리' 기념판의 운명]

 

 

 

사라예보 총소리의 주인공 '프란치프 기념석판'은 1941년 4월 나치 독일에 압수돼 총통 히틀러(왼쪽0의 52번째 생일선물로 전락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전용열차(Fuhrersonderzug)에서 독일의 역사적 모욕으로 규정한 기념판을 살펴보고 있다.

 

 

 

 

 

 

프린치프(왼쪽)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사라예보 길모퉁이(street corner)에서 20세기가 시작됐다(박물관 위 걸개그림).

 

 

 

모퉁이 건물은 현재 박물관.

 

 

 

유고연방 시절 박물관 벽에 새겨진 프린치프 기념판과 발자국.

 

 

 

[프랑코의 영악한 협상술 영국 총리 속인 히틀러 농락]

 

 

[약자는 어떻게 강자의 허를 찌르나]

 

 

 

1940년 10월 프랑스 앙다예(2차대전 중 독일 점령)역 플랫폼 열병식. 나치 독일의 히틀러(왼쪽0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 의장대에 파시스트식 답례를 하고 있다. 작은 역의 좁은 플랫폼 탓에 붉은 카펫은 프랑코의 발걸음이 차지했다. 왼편은 프랑코가 타고 온 열차.

 

 

 

프란시스코 프랑코.

 

 

 

 

 

 

프랑코가 세운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 아래 거대한 지하 성당 내 프랑코 묘지.

 

 

 

☞ 2019년 10월 24일 '전몰자 계곡(El Valle de los Cados)' 묘역 속 프랑코의 유해가 파헤쳐졌다. 그곳의 성전 특별 묘역에 안장된 지 44년 만이다. 그동안 스페인의 좌파 사회당 정부는 프랑코 무덤의 파묘(破墓)와 이장을 추진해 왔다. 사회당 정부는 "스페인 민주주의 복원의 대단원"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 근처의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공포 폭로 소련 역사의 가장 장엄한 순간]

 

 

[우리는 진실 증언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흐루쇼프의 기념 동판. 권력 퇴장 뒤 그가 살았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돌벽에 2015년 붙여졌다. 동판에 '저명한 국가적 · 정치적 인물'이라고 씌어 있다.

 

 

 

1956년 2월 크렘린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흐루쇼프 무덤.

 

 

 

폴란드 기자, 공산당 사무실 연인 통해 입수

이스라엘 모사드가 CIA에 제공, NYT 보도

 

 

흐루쇼프 연설의 비밀 시한은 짧았다. 그는 “적들에게 탄약을 주어선 안 되고, 우리의 환부를 보여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연설 99일 뒤(1956년 6월 4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특종 보도했다. 출처와 입수 과정은 007 드라마다. 사연은 이렇게 전개됐다.

모스크바 중앙당은 연설문을 지방에 보냈다. 3월초 동유럽의 공산당도 극비 열람용으로 받았다. 폴란드 공산당은 소수 간부들에게 돌렸다. 1956년 4월 초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젊은 미남자가 공산당 건물에 들어섰다. 31세의 빅토르 그라예프스키(Wiktor Grajewski, 1925~2007). PAP 통신사 기자다.

그라예프스키는 취재 겸 연인을 만나러 왔다. 연인은 공산당 제1서기 사무실의 여비서(루시아 바라노프스키)다. 루시아는 연상(35세)의 유부녀. 남편(폴란드 부총리)과 별거 중이었다. 루시아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기자의 눈길이 우연히 책상 위로 쏠렸다. 붉은색 표지로 장정된 책이다. 일급비밀 도장에 번호가 매겨졌다. 책 표지는 ‘흐루쇼프 동지의 연설문’. 기자는 내심 놀랐다. 흐루쇼프 연설에 대한 소문은 퍼졌다. 그라예프스키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다. 기자는 직감적으로 책자의 가치와 정체를 파악했다. 그는 당돌하게 부탁했다. “집에 가서 조용히 읽겠다. 몇 시간만 빌려 달라.” 루시아는 연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라예프스키는 집중해서 읽었다. 그는 전율스러운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이다. 가족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때 러시아로 피난했다. 종전 후 가족들은 신생 이스라엘로 옮겼다. 그는 스탈린주의자였다. 1955년 그는 가족을 만나러 이스라엘에 갔다. 공산주의와 다른 세계를 만났다.

 

 

 

책자를 돌려줄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의미 있는 돌출행동을 했다. 그는 바르샤바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들렀다. 코트 속에 붉은색 책자를 숨겼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첩보기관 샤바크(신베트) 요원을 만났다. 그는 책자를 건넸다. 요원은 대어를 낚았다. 책자를 사진복사했다. 그라예프스키는 모른 척했다. 그는 책자를 루시아 책상에 갖다놓았다. 반환 약속시간 이전이었다.(선데이타임스 2007년 11월 5일)

샤바크 요원은 복사본을 이스라엘 본부에 보냈다. 본부는 흥분에 빠졌다. 4월 13일 샤바크 책임자(아모스 마노르)는 벤구리온 총리에게 달려갔다. 문서는 최고 정보기관 모사드로 넘어갔다. 모사드 책임자(이세르 하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제공하기로 했다. 모사드와 CIA와의 관계는 격상됐다. 4월 17일 모사드는 CIA 본부로 전달 요원을 보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극비 정보로 보고했다. 덜레스는 연설문 획득을 ‘첩보 세계의 쿠데타’라고 했다. CIA는 연설문을 진짜로 최종 판정했다. 뉴욕타임스에 흘렸다. 서방의 친소·좌파 지식인들은 경악했다. 소련은 누설 내막을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특급 비밀로 관리했다.

그라예프스키는 1957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는 노년기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역사를 만든 사람은 흐루쇼프다. 나는 잠시 그 역사와 만난 행운아다.” 연설문은 33년 뒤 소련에서 공식 간행된다. 고르바초프 집권 시절인 89년 4월이다.

나는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다. 89년 6월 옛소련 시절, 김영삼 야당 총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나는 현장을 따라갔다. 소련의 ‘세계경제·국제문제연구소’의 연구원들과 만남이 있었다. 연구원의 발표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이 드디어 간행됐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의미있는 진전이다.” 연구원의 득의에 찬 표정은 강렬했다.

 

 

 

>>> 검은색·흰색 돌 맞물린 무덤 조각상, 두 영혼의 흐루쇼프 형상화

 

흐루쇼프의 무덤은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있다. 그는 크렘린 성벽 묘역에 묻히지 못했다. 권좌 하야 뒤 숨졌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도 프라우다의 한 줄 기사로 다뤄졌다. 그의 역정은 전진과 후퇴다. 묘지의 추모비도 그런 대비를 드러낸다. 1975년, 사망 4년 뒤 유족들은 기념비석을 세웠다. 사전에 코시긴 총리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유족들은 러시아 조각가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1925~2016)를 찾아갔다. 묘지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각가와 흐루쇼프는 악연이 있었다. 1962년 흐루쇼프는 네이즈베스트니의 미술전에 갔다. 그는 험담을 퍼붓었다. “당나귀가 꼬리를 캔버스에 흔든 것 같다. 퇴폐예술이다.” 그런 속에서 흐루쇼프는 조각가와 어울렸다.

조각가는 그 소통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족의 요청에 응했다. 그는 흐루쇼프의 삶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흐루쇼프의 영혼 속에서 다투던 진보와 반동을 형상화했다. 검은색과 흰색 돌이 요철로 맞물려졌다. 그 사이에 청동 얼굴상을 앉혔다. 표정은 애매하다. 우울한 듯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띤 듯하다. 흰색은 해빙, 검정은 결빙이다. 조각상은 격렬하지만 이중적이다. 네이즈베스트니는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말년에 조국과 화해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고 기렸다.

 

 

 

[요시다 쇼인의 그림자 아베 역사 도발에 어른거린다]

 

 

[쇼인 글방, 메이지유신 주역 쏟아내다]

 

 

 

요시다 쇼인의 밀랍인형. 에도의 막부 감옥에 갇혔을 때다. 야마구치현 하기시 '요시다 쇼인 역사관' 전시물.

 

 

 

 

 

 

쇼카손주쿠(松下村塾0에 걸려 있는 문하생 사진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로 차 있다.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맨 위 오른쪽이 기도 다카요시(유신 삼걸 중 한 명).

 

 

 

쇼인 묘소에 참배하는 아베 신조 총리.

 

 

 

쇼인의 수제자 이토 히로부미 조각상.

 

 

 

쇼인 학당(쇼카손주쿠) 입구에 서 있는 돌비석. 메이지유신 100주년(1968) 기념물이다. '明治維新 胎動之地’(명치유신태동지지)' 글씨는 당시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썼다.

 

 

 

쇼인 학당의 풍운아, 다카스기 신사쿠(晉作)

"움직일 때 번개, 일어설 때는 비바람"

아베 신조의 '晉' 신사쿠에서 따와

 

 

요시다 쇼인의 사생(死生)관은 강렬하다. 그는 최후의 감옥에서 수제자에게 이렇게 전수했다. “죽어서 불후(不朽)의 존재가 될 수 있으면 언제든지 죽고, 살아서 대업을 이룰 수 있으면 언제든지 살아야 한다”. - 그 제자가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1839~1867)다. 대란의 시대 ‘풍운아’로 불린다.

1863년 조슈는 외국 군함과 포격전(시모노세키 간몬해협)에서 참패했다. 조슈 번주는 신사쿠를 불렀다. 군사력 재정비의 책무가 떨어졌다. 그는 군대를 재편했다. ‘쇼인 교육’이 혁파의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초망굴기(민초여 궐기하라)’다. 그 시대 전투는 사무라이의 신분 특권이었다. 평민은 칼을 찰 수 없었다. 신사쿠는 무사의 전권을 허물었다. 평민과 사무라이를 섞었다. 초망굴기의 실현이다. ‘신사쿠 기병대(奇兵隊)’가 등장했다. 말을 타는 기병(騎兵)이 아니다. 신개념의 기습 부대다.

야마구치현 남쪽 시모노세키의 공산사(功山寺). 신사쿠 동상이 있다. ‘유신 회천(回天)의 거병지’로 기린다. 천하 형세를 바꾼 곳이다. 평민 병사의 사기는 충천했다. 막부군 주력은 사무라이다. 1천 기병대가 2만 막부군을 물리친다(1866년 고쿠라 전투). 막부시대의 결정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기병대는 국민개병제 모델이다.

 

 

 

 

일본 국민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렇게 기억한다. “조슈는 무사와 서민이 하나가 되어 유신을 완수했다.” 신사쿠는 폐결핵으로 숨진다(28세). 새 세상(메이지 유신)의 열매는 맛보지 못했다. 풍운아의 마지막은 비운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를 추모했다. “움직일 때는 번개(雷電) 같고, 일어설 때는 비바람(風雨) 같다”-. 이토는 기병대 가담으로 입지를 굳혔다.

아베 총리의 이름(신조·晋三)은 신사쿠(晋作)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安倍晋太郞·전 외무대신) 이름에도 신(晋)이 들어있다. 아베는 이면의 ‘쇼인 문하생’으로 비춰진다. 사쿠라야마(櫻山) 신사-. 신사쿠가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려 지었다. 제사의 형식과 개념이 달랐다(초혼제). 그것은 야스쿠니 신사 초혼식의 원형이다.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 줄리안 알프스 전선의 비극]

 

 

[1차대전 이탈리아군 집단 패주하다]

 

 

 

슬로베니아 코바리드(카포레토) 길가에 전시된 1차대전 이탈리아군의 149mm 곡사포.

 

 

 

코바리드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과 필자.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집단 후퇴했다. 전쟁 의지를 상실한 군대의 붕괴 모습.

 

 

 

코바리드 박물관은 쌍방 군대를 모두 기억한다.

 

 

 

이탈리아 운전병 헤밍웨이(왼쪽), 카도르나 사령관(오른쪽).

 

 

 

무솔리니는 베르실리에리 부대에서 복무했다.

 

 

 

헤밍웨이가 포착한 환멸의 전쟁

탈영한 중령, 처형 직전 한마디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느냐"

 

 

카포레토 패주는 혼돈이다. 이탈리아군 사령탑은 즉결처형 수단을 동원한다. 헌병(carabinieri)들은 낙오·탈영한 장교들을 체포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주인공 헨리 중위도 붙잡힌다. 즉결재판장으로 끌려간다. 강둑에선 중령 한 명을 놓고 신문이 진행 중이다.

- 장교는 부대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느냐. 중령은 “안다”고 했다.

- (다른 헌병 장교가 물었다.) 신성한 조국 땅을 야만인들이 밟게 한 것은 바로 너 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란다.” 중령은 말했다.

- 승리의 전과를 잃은 것은 너희들이 저지른 배신 때문이야.

“후퇴해 본 적이 있느냐(Have you ever been in a retreat).”

- 이탈리아는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 이탈리아군 앰뷸런스 운전장교 헨리(왼쪽 · 룩 허드슨 분).

 

 

중령의 말은 작렬한다. 후퇴 경험을 묻는 순간에서다. 그것은 폭로의 어휘다. 전쟁의 모순과 명분의 위선이 드러난다.

헌병(재판) 장교들은 후방에 있다. 그들은 최전선의 고통을 알 수 없다. 후퇴의 고뇌를 모른다. “그들은 죽음의 위험 밖에서 죽음을 다룬다. 『무기여… 구절』”-. 후방 장교들은 배신의 무게를 잰다. 즉석에서 단죄한다. “부대 이탈, 총살에 처한다.” 그 장면은 “헤밍웨이가 잊을 수 없게(unforgettably) 묘사했다.”(존 키건, 『1차 세계 대전사』). 코바리드 박물관 큐레이터는 “전쟁은 인간성의 야만과 광기를 극적으로 노출한다”고 했다.

헨리 중위의 재판 순서다. 그는 탈출한다. 타글리아멘토(Tagliamento) 강에 뛰어든다. 전쟁은 환멸이다. 그는 전쟁의 대의(大義)와 결별한다. “신성한, 영광과 희생이란 말을 들으면 당혹스럽다. 지명(地名)만이 위엄(dignity)을 갖고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미국인 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 출판)는 1차대전 자원병 체험이다. 전직은 신문(캔자스시티 스타) 기자. 1918년 6월 이탈리아군 야전병원에 배치됐다. 한 달 후 다리에 박격포탄을 맞았다. 밀라노 병원으로 후송됐다. 간호사와의 사랑은 소설에 그려졌다. 그는 참전 8개월 전의 카포레토 전투를 취재했다. 20년쯤 뒤 스페인 내전 현장에 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헤밍웨이의 감수성은 모험과 도전, 투쟁이다. 『노인과 바다』(1952년)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사막의 여우' 롬멜의 신화, 카포레토 전투서 시작

 

 

에르빈 롬멜(Erwin Rommel·1891~1944)은 신화다. 코바리드 박물관에 청년 장교 롬멜 사진이 붙어 있다. 잊혀진 전쟁 속 의외의 만남이다. 관람객들은 흥미있어 한다. “최고훈장,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받음”-. 카포레토 전투는 신화의 예고편이다.

1917년 10월 롬멜은 그 전투에 투입됐다. 26세 독일군 중위. 뷔르템베르크(Wrttemberg) 산악 경(輕)보병 중대장이다. 그는 후티어 침투 전술을 실천했다. 적의 측면 반격이 위협요소였다.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정면 고지 깊숙이 진격했다. 그의 천재적 재능과 공세적 상상력은 주효했다. 이탈리아군 진지는 무너졌다. 마타주르(Matajur·1642m)산 진지를 점령했다. 롬멜은 이탈리아군 9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52시간의 전과다. 그의 중대 피해는 경미했다(사망 6명, 부상 30명). “기량과 대담함은 특별났다. 그는 독일군에서 가장 빼어난(notable) 젊은 장교로 등장했다.” (전시실 설명문).

후티어 전술은 2차대전에서 전격전(Blitzkrieg)으로 진화한다. 1940년 6월 프랑스 공격 때 롬멜 기갑부대는 아르덴 숲을 돌파한다. 그는 ‘사막의 여우’가 됐다. 북아프리카에서 독-이탈리아 합동작전이 있었다. 카포레토의 기억은 이탈리아 군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했다.

 

 

독일군 중위 롬멜.

 

 

 

[스페인 내전의 무대 20세기 이념과 문화의 경연장]

 

 

[이념의 광기는 집단의 악마성을 배양한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전사로 참전한다. 그는 중상을 입었다. 좌파 혁명의 배신을 경험하고 탈출한다. 바로셀로나의 중심가 람블라스 거리 안쪽에 조지 오웰 광장이 있다.

 

 

 

 

 

 

[스페인 내전 연표]

 

● 1936년

2월 좌파 인민전선(공화 진영) 총선 승리, 집권

7월 프랑코 주도의 군부 우파 반란(국민 진영), 내전 개막

● 1937년

4월 게르니카 폭격(히틀러 독일 공군, 프랑코 지원)

6월 파리 국제 박람회, 피카소의 게르니카 출품

● 1939년

4월 내전 종식, 프랑코의 우파 국민 전선 승리

9월 제2차 세계대전 개막(프랑코, 히틀러의 참전 요구 거절, 전략적 중립)

● 1975년

11월 프랑코 사망, 후안 카를로스 국왕 즉위, 민주화 개막

● 1981년

9월 '게르니카' 스페인 귀환(피카소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피카소와 『게르니카』. 게르니카 마을의 주택가 벽화.

 

 

 

●그림 게르니카의 의미는.

 “전쟁의 최종 승자는 국민전선의 프랑코였다. 그러나 선전 전선에서의 역사적 승리는 공화파 쪽이었다. 그 승리의 원동력에 피카소가 있다. 그는 게르니카 만행을 예술로 규탄했다. 그 덕분에 좌파는 선(善)과 약자 쪽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게르니카가 마드리드에 전시돼 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자치의 신성한 상징이다. 이웃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게르니카를 전시해야 한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전쟁이었다. 그는 종군기자로 현장에 갔다. (왼쪽)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오른쪽)

 

 

 

●헤밍웨이에게 내전은 무엇인가.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숙명이다.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도전과 투쟁에 충실했다. 그는 공화국의 내전 승리를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했다. 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 방법론으로서의 공산주의 지지였을 뿐이었다. 그는 이기적인 자유인이었다.”

 

●좌파가 승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프랑코는 잔인한 청산과 보복을 했다. 하지만 좌파가 승리했어도 보복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처형과 희생의 규모가 프랑코 체제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색(el terror blanco) 테러나 적색 테러(rojo) 모두 유혈과 저주의 본성은 마찬가지다.”

 

 

 

최후의 승자, 철권 통치자 프랑코

화해의 '전몰자 계곡' 전승 기념관 이미지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1892~1975)는 내전의 최종 승자다. 39년간 최고지도자(Caudillo)였다. 내전 동안 가톨릭과 서구문명의 수호자로 자임했다. 정화(淨化·limpieza)를 체제 관리의 개념으로 삼았다. 그것은 좌파 공화진영에 오염된 세력과 이념의 퇴출이다.

 

 

 

초급장교 시절 작은 키에 작은 목소리의 그는 유약해 보였다. 하지만 신중 · 영리했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는 내전 과정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결정적 지원을 받는다. 그 후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합류 요청을 받는다. 그는 회피와 지연으로 교묘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독재정치 속에 1960년대 후반 ‘스페인의 기적(miliagro)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룬다. 그의 오만은 도발적이다. “나는 오직 신과 역사 앞에 책임질 뿐이다.

프랑코의 독특한 유산이 남아 있다. 전몰자 계곡(El Valle de los Caidos)-.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이다. 과다라마 산맥의 거친 암벽에 구멍을 뚫고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안에 거대한 지하 성당을 지었다. 성당 길이는 260m, 그 안쪽 한복판 바닥 아래에 프랑코가 묻혔다.

천장은 밖의 125m 높이의 십자가와 닿아 있다. 프랑코는 그 조형물을 내전 화해의 상징으로 내걸었다. 1941~59년 인부 2000여 명을 동원했다. 인부는 정치범도 많았다. 국민 · 공화군 수만 명의 유해도 안장돼 있다. 기이하고 거창한 조형물은 화해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프랑코의 전쟁 승리 기념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프랑코 유해 이장 논란도 계속된다.

내전 중 유혈과 살인은 양쪽 모두에서 이뤄졌다. 승자인 우파가 더 많이 저질렀다. 좌(공화) · 우(국민) 양 진영의 군인은 35만여 명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방에서 프랑코파는 공화파 5만~20만 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파 인민 전선이 처형한 프랑코파 희생자는 3만8000여 명 정도. 7000여 명의 가톨릭 사제와 수녀도 인민전선에 의해 살해됐다. 내전 종식 뒤 50만여 명이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 중 15만 명 정도가 귀국했다. 포로수용소에는 40만 명이 수용됐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추적한 '노몬한 전투'의 충격적 진실]

 

 

[소련에 당한 일본, 진주만으로 침공 목표 바꿔]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초원에 위치한 ‘노몬한 박물관’의 야외 벌판에 전시된 당시 소련군과 일본군 전차(대부분 실물 같은 모조품).

 

 

 

 

 

 

파괴된 전차 위의 하루키(당시 45세, 책표지).

 

 

 

'노몬한전역 유지 진열관' 입구.

 

 

 

'노몬한'을 승리로 이끈 2차대전의 소련군 영웅 주코프 사령관.

 

 

 

독단과 전횡의 쓰지 관동군 참모.

 

 

 

광활한 초원에서 완전군장 차림으로 행군하는 일본 관동군 병사.

 

 

 

관동군(關東軍) 일본 육군의 만주 공략 부대. 1931년 ‘9 · 18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어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1932~45년, 지금의 동북3성+내몽골자치구 일부 영토)을 세웠다.

 

 

 

[프랑스 마지노선 알자스로렌 사수의 비장함]

 

 

[2차대전 난공불락 신화는 왜 추락했나]

 

 

 

 

마지노 요새 전투의 가상 그림.

 

 

 

 

 

 

 

 

 

마지노 지하 요새에서 프랑스군 행진.

 

 

 

 

 

 

1차대전 베르됭 악몽의 산물

육군장관 마지노 이름 따와

 

 

 

 

 

프랑스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 1877~1932)-. 마지노 요새는 그의 이름을 땄다. 그의 활약과 집념 덕분이다. 그는 공무원 시험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하원의원(36세)이 된 다음해 1차대전이 터졌다.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했다. 베르됭 전투에서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전후 하원에 복귀한다. 세 차례 육군 장관을 지냈다. 베르됭에 그의 동상이 있다.

베르됭 경험은 그를 방어망 구축의 주창자로 만들었다. 베르됭은 인간 도살장(독일군 33만, 프랑스군 30만 명 전사)이었다. 마지노는 대규모 방어선의 장점을 이렇게 파악했다.

▷독일 기습공격을 국경선에서 저지

▷그 사이 2~3주 동안 군대 동원

▷탈환한 알자스-로렌의 산업 보호

▷인구 열세(독일 7000만, 프랑스 3900만 명)를 방어로 보완한다.

1929년 마지노는 요새 구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90%의 압도적 지지를 끌어냈다. 예산은 5년간 29억 프랑(지금 가치 17억 유로). 당시 프랑스 재정으론 버거웠다. 그 예산 부담은 전차부대 육성, 공군 강화에 차질을 줬다. 32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그는 그해 숨졌다(55세). 마지노선의 완성(38, 39년)을 보지 못한다.

 

 

 

>>> 히틀러 낫질작전이 프랑스 허 찔렀다
       유인과 기만책에 마지노선 무용지물

 

지헬슈니트(Sichelschnitt, 낫질)-. 독일군의 낫질작전은 기발함과 전격전이다. 독일의 프랑스 진격 방향은 역사적으로 세 가지다. ① 벨기에 북쪽 평야. 1차대전 슐리펜 공격 노선이다. ② 벨기에 남쪽 아르덴(Ardennes) 삼림 지역. ③ 프랑스와 맞닿은 알자스-로렌 지방. 이곳에 마지노선이 집중 쳐져 있다.

독일군은 전선 세 곳에 세 개의 집단군을 포진시켰다. 루트 ①쪽 부대가 선제 공격에 나섰다(1940년 5월 10일). 프랑스·영국군 지휘부는 슐리펜 계획의 재연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대규모 부대를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히틀러의 유인책에 말렸다. 독일군은 루트 ③의 마지노선을 회피했다. 마지노선을 공격하는 듯한 제스처만 썼다. 낫질의 기만책이다. 마지노선은 격리됐다. 낫질의 진짜 공격은 사흘 뒤 시작됐다. 루트 ②의 울창한 아르덴 숲이 주공 방향이었다. 프랑스가 전차의 통과 불능 지형으로 판정한 지역이다. 방어 진지는 취약했다. 독일의 주력부대는 프랑스의 허(虛)를 찔렀다. 천재적 지휘관인 구데리안(H. Guderian), 롬멜이 앞장섰다. 구데리안은 전차의 단독작전 개념을 만들었다. 그 무렵 프랑스의 통상적 육군 전력은 독일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차를 보조 병기로 제한했다. 독일 전차 부대는 아르덴 숲을 이틀 만에 돌파했다. 이어 프랑스 영토에 진입했다. 프랑스·영국군의 주력은 양분되었다.

 

 

 

 

 

 

[최악의 스탈린그라드 전추 20세기 최악의 지도자들 격돌]

 

 

[스탈린은 어떻게 히틀러를 눌렀나]

 

 

 

볼고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의 결사항전 조각상.

 

 

 

 

 

 

거대한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 조각상.

 

 

 

붉은 벽돌 제분소는 파괴된 채 남아 있다. 그 앞은 춤추는 소년 · 소녀상, 바르말레이 분수대, 전쟁 기억의 상징들이다.

 

 

 

T-34 전차를 앞세워 역포위 공격에 나선 소련군(그림).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전설의 저격수 소총은 살아 있다

 

 

 

바실리 자이체프가 사용한 소총(왼쪽). / 바실리 자이체프(오른쪽).

 

 

스탈린그라드는 폐허다. 벽돌 속 정글로  변했다. 인간 사냥꾼들의 무대가 됐다. 소련군의 27세 바실리 자이체프(사진). 전설적인 저격수다.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 그의 모신나강(M1891/30) 소총이 전시돼 있다. “오른 뺨에 총을 밀착, 스코프 십자가에 목표물이 메워지면 방아쇠를···”이라고 적혀있다. 스나이퍼 세계는 초인적 집중력을 요구한다.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 ).’- 한 발로 한 명을 쓰러뜨린다. 그의 총에  독일군 242명이 숨졌다. 사용한 총알은 243발. 100% 가까운 명중률이다. 그의 총은 길고 투박하다. 조준경이 달렸다(길이 1318㎜, 무게 4.05㎏). 나는 그 총을 뚫어지게 살폈다. 갑자기 살아 꿈틀대는듯하다. 사진 속 자이체프는 순박하다. 하지만 사냥감을 보는 순간 킬러의 본능이 깨어난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주드 로 주연)는 그의 활약을 그렸다. 자이체프는 우랄산맥 산골에서 태어났다. 10대에 사슴 사냥술을 배웠다. 흑해함대의 해군 육전대로 입대했다. 자이체프는 눈 부상을 입었다. (수술 후 전선 복귀) 그는 1991년 숨졌다(76세). 2006년 마마예프 쿠르간에 묻혔다.

 

 

 

주코프 원수 흉상.

 

 

 

[디엔비엔푸 승리 방정식 예측 파괴의 기습]

 

 

[105mm 대포를 험준한 산 위로 끌어올렸다]

 

 

 

디엔비엔푸에 우뚝 선 승전 기념상(높이 12.6m). 56일간 전투 승리의 원동력인 '뀌엣찌엔 뀌엣탕' 구호가 깃발에 새겨져 있다. 군인과 소수민족 타이(Thai)족 소녀.

 

 

 

 

 

 

1960년대 호찌민(왼쪽)과 지압(오른쪽).

 

 

 

타이족 여성들은 당나귀로 식량을 운반했다(디엔비엔푸 박물관 밀랍인형).

 

 

 

승전 기념식, 밀림 속에서 한 까닭

"포로 모욕 말라, 어제 적이 오늘 친구 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끝났다. 베트민군의 결정적 승리다. 드라마는 새로운 반전(反轉)을 준비한다. 프랑스군의 항복 6일 뒤, 1954년 5월 13일. 최고 사령관 지압은 밀림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곳에서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지압의 지휘본부 근처다. 산속 깊은 곳이다.

승전식 무대의 통상적 콘셉트는 과시다. 전투 현장의 기념식에선 포로들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승리의 쾌감은 치솟는다. 지압은 그런 상식을 깼다. 프랑스군 포로는 1만 명을 넘었다. 지압의 기념식은 포로들과 분리됐다. 그것은 호찌민의 지혜이기도 하다. “우리 군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하라. 그러나 포로가 된 프랑스군을 모욕하지 말라-.” 그것은 환희의 절제다. 승리의 송가(頌歌)는 밀림 밖으로 새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무엉팡 밀림 속에 세워진 거대한 승전기념 조형물.

 

 

나는 디엔비엔푸에서 차를 탔다. 그곳을 찾아갔다. 무엉팡(Muong Phang) 마을. 계곡과 원시림, 산속에 숨어 있다. 무엉은 소수민족 타이(Thai)의 집단 거주지를 뜻한다. 디엔비엔푸에서 35㎞, 1시간30분 거리다. 좁은 2차로 산속 도로. 가파르고 울퉁불퉁하다.

마을에 들어갔다. 길옆에 거대한 석상(石像)이 나온다. “여기서 디엔비엔푸 승리를 선언했다”는 표지판이 있다. 지압의 기념식 장소다. 기념식에 장병 1000명이 집합했다. 보병·포병보급부대, 타이족 짐꾼 여성 대표들이다. 지압은 호찌민의 ‘뀌엣찌엔, 뀌엣탕(결전결승)’ 정신을 되새겼다. 군인들은 그 구호를 외쳤다.

지금 그곳은 승리 광장이다. 석상은 기념 퍼레이드 장면을 축약했다. 길이 16m, 높이 9.8 m, 폭 6m. 2009년에 세웠다. 엄청난 크기다. 광장 앞쪽이 채워진다. 승리 주역 25명을 새겼다(키 높이 2.7m). 얼굴 표정들은 실감 난다. 헌신과 투지가 넘쳐난다. 자전거, 대포, 차량도 조각했다. 조각상 가운데 지압이 서 있다. 그곳 안내원은 60대 퇴역 군인이다. 그는 외우듯 말한다. “베트남은 전사(戰士)의 역사다. 디엔비엔푸는 승전 신화다. 이곳은 조국 수호를 위한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다.”

왜 이런 은밀한 곳인가. 깊은 산속과 대형 조형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임홍재 전 베트남주재 대사의 분석은 흥미롭다. “베트남 사람들은 침략을 당하면 투쟁의식을 다지고 저항한다. 그와 함께 상대방 강대국의 체면을 지켜주고 증오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배려한다.” 밀림 속 승전 기념은 절제의 격렬한 압축이다. 그것은 베트남의 역사 경험에서 나온 통찰과 지혜다.

국제 관계는 미묘하다. 어제의 적(敵)은 오늘의 친구다. 오늘의 우방은 내일의 적국이다. 베트남의 위쪽 대륙은 중국. 바다에 해양 강국이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 그 시절 우방은 중국이다. 하지만 그 후(79년) 중국과 전쟁을 했다. 오늘의 베트남은 프랑스와 친하다. 미국과 힘을 합친다. 남중국해에서 공동으로 중국과 맞선다. 베트남은 전쟁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60년대 중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맹호·청룡·백마부대의 활약은 돋보였다. 지압의 월맹(북베트남)군과 싸웠다. 베트남의 과거사 접근 자세는 한국과 다르다.

나는 마을 깊숙이 들어갔다. 석상 3㎞ 떨어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 지압의 지휘본부로 올라가는 입구다. 타이족이 ‘장군(지압)의 숲’으로 부르는 곳. 타이족과 지압의 군대는 ‘물과 고기’ 관계였다.(타이족은 디엔비엔푸 인구의 40%) 산속의 작은 개천, 다리를 지났다. 30분쯤 걸으니 작은 공터다. 오두막 몇 채가 있다. 한 채는 지압의 지휘본부다. 본부 아래는 땅굴(길이 70m, 높이 1.7m, 폭 1.5~3m짜리)이다. 땅굴은 그들에게 전가의 보도(寶刀)다. 60년대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주효했다. 낮 동안 지압은 산 위로 올라갔다. 디엔비엔푸 평야까지 직선거리로 8~10㎞. 프랑스군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사전략은 예술이다-.” 지압의 전략은 진화한다. “소(小)로 대(大)를 이기고, 소(少)로 다(多)를 누르고, 질(質)로 양(量)을 패배시킨다.” 지휘본부에 지압의 간이침대가 남아 있다. 마른 짚 매트리스다. 지휘관 드카스트리의 욕조(浴槽)가 떠오른다. 디엔비엔푸 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최후 전투의 노획물이다. 마른 짚 매트리스는 욕조와 대비된다.

디엔비엔푸로 돌아오는 길, 800m 산 중턱. 그곳에 또 다른 거대한 조형물(길이 21m, 높이 14, 폭 7m)이 있다. 105㎜ 대포를 끄는 장면이다. 사병 30명이 양쪽에서 밧줄로 끄는 모습이다. 항전의 투혼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베트남의 국가 영혼은 그런 상징물로 단련된다.

 

 

 

>>> 와인 마신 프랑스군, 폐타이어 샌들 신은 베트민군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은 골리앗과 다윗이었다. 보급품의 빈부(貧富) 차이도 뚜렷했다. 디엔비엔푸 전승박물관에서 확인된다. 진열품에 와인병 50개가 있다. 라벨 없는 빈 병이다. 프랑스군 C- 47 다코다 수송기는 와인을 대량 공수했다. 치즈·초콜릿도 함께 진지에 공급했다. 그 옆 전시물은 와인을 마시는 프랑스군 밀랍인형이다. 전세를 비관하는 보초병의 모습이다. 현장 지휘관 드카스트리는 고급 빈티지 와인 4만8000병을 저장했다. 투입된 군인 1명당 3병꼴. 그는 귀족가문 출신이다.

건너편 진열품은 낡은 고무 샌들이다. 검은 빛깔은 바랬다. 베트민군의 전투화다. 그들은 샌들을 신고 평균 300㎞를 행군했다. 베트민군은 가난했다. 가죽 군화는 없었다. 지압 장군도 샌들을 신었다. 드카스트리의 벙커를 점령한 군인도 마찬가지다. 샌들은 자동차의 버려진 타이어로 만들었다. 국가 지도자 호찌민도 샌들을 애용했다. 그는 “산에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어디서나 편하다”고 했다. 프랑스군 비제아(M.M Bigeard) 중령은 “공깃밥 하나에 샌들을 신고 산을 넘는 그들의 인내심이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았다”고 회고 했다. 폐(廢)타이어 샌들은 관광기념품이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 뒤편에서도 판다.

 

 

 

프랑스군 나바르 장군.

 

 

 

 

 

 

>>> Bㅡ52와 샌들 인간의 투혼과 첨단 과학의 대립

 

호찌민 샌들의 신화는 계속된다.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다. 우드바르-헤이지(Steven F. Udvar-Hazy) 센터는 항공기술을 과시한다. 그곳은 미국 워싱턴 외곽에 있다.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의 별관이다. 그 박물관은 거대하다. 160개 기종의 항공기로 차 있다. 20세기 하늘을 누빈 전투기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에놀라 게이(B-29), 스텔스기, 우주왕복선. 과학은 전쟁의 부산물이다. 그곳에 독특한 전시품이 있다. 호찌민 샌들과 B-52 전략폭격기다. B-52는 모형이다. 실물의 144분의 1 크기. 샌들만큼 작다. 두 진열품은 베트남전쟁 코너의 유리 박스 안에 나란히 있다. B-52는 지금도 미 공군의 주력기다. 북한의 핵실험 때 등장한다. B-52는 한반도 상공을 난다. 괌 기지에서 핵폭탄을 싣고 온다. 샌들은 50년 전 북베트남(월맹) 군의 전투화다. 자동차의 폐(廢)타이어로 만들었다. 호찌민 샌들 군대는 기술과학의 미군을 물리쳤다. 1960 ~ 1970년대 베트남전쟁에서다.

검은색 샌들은 볼품없다. 관람객들의 눈길은 거의 없다. 하지만 B-52와 함께 보면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정신력과 기술력의 독보적인 대조다. 샌들에서 뿜어나는 여운은 강렬하다. 인간의 투혼은 원초적이다. 그것은 첨단 과학을 압도한다.

인간 의지는 국가 안보의 핵심 요소다. 20세기 후반 북베트남은 그것을 격렬하게 작동시켰다. 프랑스와 미국을 패퇴시켰다. 1979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그 역사의 영향력은 쇠퇴하지 않는다. 그 주역은 보 구엔 지압(1911 ~ 2013)이다.

군사적 자립 태세는 국가 품격을 높인다. 의타적인 인간은 얕잡아 보인다. 국제관계도 비슷하다. 베트남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대치한다. 중국은 베트남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베트남의 자생적인 저항력 때문이다. 저항 의지는 마력이다. 국가 전략을 풍요롭게 한다. 자주의 투혼은 국가운영의 공세적인 상상력을 공급한다. 군사적 대결에서 압박의 묘수를 제공한다. 평화 때는 외교의 기량을 키워준다.

 

 

 

 

[사다트의 욤키푸르 기습 전쟁 결심해야 평화 얻는다]

 

 

[이스라엘 불패 신화는 어떻게 해체됐나]

 

 

 

'10월 전쟁 파노라마 박물관'의 조각상, 고무보트를 탄 알사카 특수부대원들의 역동적인 수에즈 운하 도하 장면.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상 중 워싱턴 근교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 남북전쟁 공원을 방문한 사다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 베긴 총리, 다얀 외무장관(정쟁 때 국방장관).

 

 

 

이집트군의 수에즈 운하 도하. 물대포로 이스라엘군 모래 장벽을 허물고 있다(에니메이션).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평화 만들 때도 전격적이었다

 

 

 

 

 

안와르 사다트(1918~1981)의 리더십 매력은 결단이다. 그의 삶의 절정은 10월 전쟁이다. 그는 절정의 주제를 평화로 바꿨다. 그런 전환은 용기와 신념으로 가능하다. 전직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렇게 회고(2000년 미국 메릴랜드대학 연설)했다. “사다트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거의 예언자적(prophetic) 비전을 가졌다. 그는 유연했지만 거칠었다.” 카이로의 외곽 나스르시에 이집트군 무명용사 기념비가 있다. 피라미드 형상9높이 37m)이다. 그 안에 사다트 묘지가 있다. 그는 1981년 10월 전쟁 8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 현장에서 피살됐다. 사다트의 묘비명은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과 평화의 영웅, 그는 평화를 위해 삶을 바쳤고 원칙을 위해 순교했다.” 그곳에서 만난 70대 전직 장교는 “사다트 대통령은 전쟁을 결행할 때 과감했고 평화에 나설 때도 용감했다”고 기억했다. 전쟁을 결심하는 지도자는 평화의 역사를 만든다. 그것은 세상사를 관통하는 역설의 절정이다.

사다트는 1952년 ‘자유 장교단’의 군사혁명에 참가했다. 혁명의 성공 주연은 가말 나세르(1918~1970). 나세르 시대는 아랍민족주의를 분출시켰다. 그 시대의 역동성은 박정희 · 김종필에게 5 · 16의 상상력을 주었다. 1970년 나세르는 심장마비로 숨진다. 권력의 행운은 부통령 사다트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그의 평판은 무해(無害)하고 평범한 조연자였다. 사다트는 내면의 권력 의지를 연마했다. 1971년 5월 반(反)사다트 · 친(親)소련파 각료들이 집단 사표를 냈다. 그들은 정권 붕괴를 노렸다. 사다트는 즉각 역습을 가했다. 집단 사표 수리→뉴스 방송→사표 제출자 가택연금→후임자 임명이다. 그것은 전광석화(電光石火)의 권력평정이었다. 사다트의 1977년 11월 이스라엘 방문은 예측 파괴다. 그는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전직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을 만났다. 메이어는 10월 전쟁 때 적대국의 통수권자다. 두 사람의 파안대소는 강렬했다. 전쟁과 평화 사이는 극적으로 교류한다.

 

 

 

>>> 카이로의 북한 흔적들

 

카이로의 ‘10월 전쟁 파노라마’와 시타델의 군사박물관에는 북한 냄새가 풍긴다. 상당수 벽화와 초상화들이 북한 화가의 작품이다. 사다트의 초상화 아래에 ‘DPR, KOREA 1993.1 황걸’이라고 적혀 있다. 건립과 개축에 북한의 지원이 있었다. 무명용사 기념비 옆에 세워진 10월 전쟁 기념화도 북한 화가가 그렸다. 북한 화풍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세밀하지만 단조롭다. 아무르 하산은 “사진 같은 화풍은 이집트의 장엄하고 상상력 풍부한 예술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바라크 30년 독재의 유산”이라고 했다.

10월 전쟁 때 무바라크는 공군사령관이다 북한은 공군 조종사 20여 명을 파견했다. 사다트 사후 부통령 무바라크는 권력을 장악한다. 그 이후 무바라크와 북한 주석 김일성의 밀월시대가 열렸다. 무바라크는 북한에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평양에서 장기집권의 노하우를 습득했다. 하지만 지금의 엘시시 대통령 시대는 다르다. 이집트는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한다.

 

 

 

북한 화가가 그린 사다트 초상화와 필자.

 

 

 

[적대에서 화해로 프랑스 · 독일 관계의 대전환]

 

 

[140년 2승2패 숙적은 어떻게 동반자 됐나]

 

 

 

1차대전 프랑스 승전비 정식 명칭은 알자스-로렌 기념비(콩피에뉴 숲, 파리서 80km), 긴 칼(프랑스)이 독수리(독일)의 심장을 찔러 추락시킨 형상. '조국과 정의의 수호자, 알자스-로렌의 영예로운 해방자인 프랑스의 영웅적 군인에게'라고 적혀 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1차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독일을 응징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1871년 1월 프랑스 영광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비스마르크(흰색 복장)가 주도한 빌헬름 1세 황제 즉위식. 보불전쟁 승리와 독일 통일을 과시한다.

 

 

 

1918년 11월 1차대전 종전, 콩피에뉴 숲에서 독일 항복 조인식, 휴전 협상 대표인 프랑스군 원수 포슈(오른쪽 둘째)와 연합국 대표들. 열차 객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1940년 6월 2차대전 초기, 콩피에뉴 숲에서 히틀러 '따라 하기' 복수, 히틀러는 1차대전 수모를 설욕하려고 같은 객차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는다. 히틀러(왼쪽 셋째) 등 나치 수뇌부.

 

 

 

콩피에뉴 박물관에 전시된 휴전 조약 객차.

 

 

 

 

 

 

랭스 대성당 석판 묵시록적 화해 결의

드골과 아데나워의 용단

 

 

프랑스 랭스의 대성당은 역사 전환의 장소다. 그 추억은 콩피에뉴 숲과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 화해(reconciliation, Versohnung)의 출발지다.

1962년 7월 8일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독일 총리(당시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는 랭스 대성당 미사에 함께 참석했다.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선언적 광경이다. 북동부 상파뉴 지방의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의 성지(聖地)다. 성당 정문 바닥에 기념 석판이 있다. “아데나워와 나는 대성당에서 화해를 맹세했다”, 샤를 드골. 1962. 7. 8 주일(主日) 11시02분. 분 단위까지 적은 그 단선적 결의는 묵시록적 감흥을 준다.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궁, 아데나워와 드골은 다시 만났다. 화해 협력의 엘리제 조약에 서명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유럽은 쇠퇴를 경험했다. 두 사람은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국력의 재도약을 위해 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새출발했다. 유럽연합(EU)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여론조사에서 양국 사람은 가장 친한 나라로 상대방을 꼽는다. 올해 두 나라는 유럽 재정위기 해법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동반자로서의 운명은 견고하다.

한 ·일 관계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우선적 원인은 일본의 역사 접근 태도다. 식민지사에 대한 일본 지도층의 반성 · 사과는 지지부진하다. 일본의 집요한 독도 욕심은 그 연장선이다. 이는 독일 리더십의 진정한 사과 자세와 다르다. 국가 간 화해 심리는 비슷한 국력을 확인하려 한다. 독일 · 프랑스의 전쟁 승부는 2승2패였다. 한 · 일은 임진왜란, 강제병합만 따지면 일본의 승리다. 하지만 한국의 부국강병은 세계사의 특별한 성취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전진, 88올림픽에서의 비약, 젊은 세대 경쟁력은 높아진 국력을 드러낸다. 동북아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 중국의 위세는 정세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한국은 중국과 친해야 한다. 일본과도 가까워야 한다. 진정한 친선은 한 · 일 지도자들의 역사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 · 독일 리더십의 비전과 전략적 용기는 롤 모델이다. 일본 지도층은 과거사와 진솔하고 대담한 결별을 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21세기 한 · 중 · 일 협력시대를 함께 열어야 한다.

 

 

 

드골(왼쪽)과 아데나워.

 

 

 

 

 

 

[잃어버린 역사의 귀환 대한제국 워싱턴 공사관]

 

 

[부국강병 없는 외교는 좌절한다]

 

 

 

워싱턴 대한제국 공사관. 원형 복원공사를 마친 2018년 5월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

 

 

 

구입 초기인 1890년대 후반의 공사관 모습. '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대조선주차 미국화성돈 공사관)'이라고 씌어 있다.

 

 

 

 

 

 

첫 주미공사 박정양.

 

 

 

1903년에 찍은 공사관 내부. 태극기가 정당(正堂) 내벽을 휘장처럼 감싸고 있다. 사무실 안에 상들리에와 태극 문양의 소파가 설치돼 있다.

 

 

 

>>> 박보균 대기자와 국민훈장 모란장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요지다.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그곳에서 아담하면서 미려한 건물 앞에 섰다. 그는 가방에서 한 세기가 넘는 빛바랜 사진을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꺼냈다.

"틀림없다. 고종의 공사관이다. 130년 된 빅토리아풍 건물이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감격, 충격, 비감(悲感)의 여러 상념이 나를 한참 붙잡았다.” 공사관의 실존 사실을 확인한 순간, 박보균 대기자는 그렇게 회고했다. 그는 지난달 20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대한제국 공사관의 환수에 기여한 최고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2000년 전후부터 20여 차례 현장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고 칼럼 집필과 관계자를 만나고 강연을 하면서 공사관의 역사적 의미를 전파했다.

 

- 기자협회보, 2013년 9월 4일자 요약

 

 

 

[카이로회담의 신화와 진실 '한국 독립 조항' 누가 넣었나]

 

 

[루스벨트가 주연, 장제스는 소극적 조연]

 

 

 

회담 본부였던 메나하우스 호텔은 지금도 운영 중이다. 뒤쪽으로 거대한 쿠푸왕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카이로회담의 세 거두(1943년 11월 25일 낮 메나 빌라).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 총리 처칠(왼쪽부터),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치마에 옆트임을 주는 중국 전통의상을 입었다. 뒷줄을 중국(商震, 林蔚), 미국(Somevell, Stilwell, Amold), 영국(Dill, Mountbatten, Wart)의 군 수뇌부(왼쪽부터).

 

 

 

메나 하우스 호텔 정원 뒤 피라미드, 70년 전 뉴욕타임스의 카이로회담 기사를 읽는 필자.

 

 

 

카이로선언을 다룬 70년 전 '뉴욕타임스' 1면. 한국 독립은 별도 작은 제목(PLEDGE FREE KOREA, 자유 한국 공약).

 

 

 

최초 발굴··· 루스벨트 숙소 메나 빌라

한국 독립 문제 첫 논의했다.

 

 

 

1943년 11월 25일 낮 12시 루스벨트의 숙소인 메나 빌라(Mena Villa). 루스벨트 · 처칠 · 장제스가 빌라 정원에 모였다. 3개국 수행원 50여 명도 함께했다. 포토 섹션을 위해서다. 첫 기념사진은 빅 스리(Big Three). 이어서 쑹메이링이 처칠 옆에 앉았다. 쑹메이링은 유창한 영어, 미모와 패션, 사교술로 외교가 스타였다. 3개국 군 지휘관들이 다음 차례. 미국 마셜 원수, 영국 마운트배튼 제독, 중국 상전(商震) 장군이 뒤에 섰다. 카이로에 뜬 별(3국의 40여 장군 · 제독)은 100여 개였다. 이어서 보좌관 홉킨스, 영국 외무장관 이든(Eden), 중국 비서실장 왕충후이(王寵惠)가 렌즈에 담겼다. 군사 · 외교 실무회담 장소는 메나 하우스 호텔.3국 정상의 주요 회담은 빌라에서 열렸다. 호텔에서 8㎞쯤 떨어졌다. 보안 강화, 루스벨트의 휠체어를 배려한 것이었다. FRUS에 따르면 빌라는 미국대사 커크(Alexander Kirk) 저택이다(임대로 추정). 그리고 “빌라는 중간 크기, 아름다운 가구를 갖췄고, 테라스와 뒤편에 멋진 정원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날 저녁 빌라에서 추수감사절 칠면조 파티를 했다.

회담 후 빌라는 반세기 이상 잊혔다. 외국의 관련 사이트, 연구서, 기사 어디에도 빌라의 운명은 없다. 철저한 회담 기밀 유지와 대통령 경호 탓에 숙소는 감춰졌다. 그 후 세계사의 격동이 겹쳐 빌라의 사연은 사라졌다. 나는 그곳을 찾아야 했다. 역사적 사진의 현장, 한국 독립 문제가 국제무대에 첫 등장한 곳이다. 메나 빌라는 남아 있었다. 기적과 행운이다. 3층 석조 건물은 낡았다. 빛이 바랬다. 1층은 전면 수리 중이다. 하지만 빅토리아풍 외관의 수려한 잔재가 드러난다. FRUS 일지와 같다. 나는 건물 안 2층에 들어갔다.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만찬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집트 고풍의 장식들은 그대로라고 한다. 장제스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그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기념사진 장소였던 정원은 잘 관리되고 있다. 빌라 소유자는 70년 전 갑부인 주인(Mahmoud Talaat)의 손자다. 그는 “집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자료에도 없다. 어떻게 알았느냐”며 의아해 한다. 가족사의 자부심만큼은 드러냈다. “여러 기록엔 루스벨트가 메나 하우스에 묵고 회담한 것으로 돼 있다. 그것은 경호와 보안 유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밀한 다른 거처가 필요했다. 귀국 때 루스벨트는 우리 조부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했다.”

 

 

 

>>> 카이로 초안 작성한 홉킨스

       루스벨트 철학에 익숙한 대통령 복심

 

 

카이로 선언문의 기안자는 해리 홉킨스(Harry L. Hopkins, 1890~1946)다. 직책은 대통령 보좌관이다. 여러 별명이 그에게 따른다. 대통령 복심(腹心), 권력 이면의 미스터리, 백악관 2인자-. 선언문 초안은 3국 공동으로 작성한 게 아니다. 홉킨스 단독 작품이다. 초안에 핵심이 거의 들어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식민지 반환, 중국 영토회복, 한국 독립 결의다. 홉킨스는 회담 사흘째인 11월 24일 루스벨트 빌라에서 초안을 구술했다(FRUS 기밀문서). “그는 사전 준비된 노트나 쪽지 없이 구술했다.”-.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전쟁철학, 전략, 언어에 익숙했다. 루스벨트는 국무부 관료를 불신했다. 그는 외교현장에 홉킨스를 등장시켰다. 대통령 특사로 내보냈다.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대담 배석자도 홉킨스였다. 언론인 출신 정일화 박사는 “선언문에 수많은 식민지 중 한국의 독립만 들어간 것은 신비스럽다. 홉킨스의 공로”라고 평가했다.

초안 작성은 루스벨트의 지시다. 루스벨트는 초안을 일부 수정했다. 장제스는 수정안에 만족했다. 처칠은 불만이었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는 처칠의 모호한 외교 수사(修辭)다. 홉킨스 초안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였다. 루스벨트가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다. 그것을 처칠이 바꾼 것이다. 처칠은 한국을 거의 몰랐다. 그 대목은 해방정국 갈등의 원천이다.

용어 변화는 별 의미 없다. 루스벨트는 이미 한국 독립과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었다. 회담 8개월 전 루스벨트는 영국 외무장관 이든에게 그 구상을 비췄다.

루스벨트와 홉킨스는 ‘기묘한’ 조합이다. 출신과 경력, 성향이 대조적이다. 부유한 집안의 하버드 대학 출신, 뉴욕 주지사를 지낸 루스벨트. 홉킨스는 중부 벽촌(아이오와주의 수)에서 태어나 그린넬 대학을 나왔다. 그는 뉴욕에서 빈민구제의 시민운동가로 활약했다. 그가 뉴딜 정책의 디자이너로 나서는 발판이다. 루스벨트는 그를 연방긴급구호청장, 상무장관으로 중용했다. 홉킨스는 스탈린의 대독일 전쟁 지원에 앞장섰다. 그로 인해 좌파 친소주의자라는 의심도 받았다.

 

 

루스벨트(왼쪽)와 그의 린치핀(최측근) 홉킨스.

 

 

 

[속임수 천재 스탈린 공산주의 협상술의 원형]

 

 

[테헤란회담 강대국 정상들의 외교 기량]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의 장소인 러시아(옛 소련) 대사관 경내 메인 빌딩의 현재 모습.

 

 

 

회담 기념사진. 건물 위 삼각형 페디먼트(소련 문양 새김)는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철거됐다. 아치형 창문과 둥근 기둥은 각진 형태로 바꿨다.

 

 

 

 

 

 

연합국 정상 세 사람이 건물 밖 로비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스탈린 · 루스벨트 · 처칠, 뒷줄 왼쪽부터 홉킨스(미국 대통령 보좌관), 물로도프(소련 외상), 이든(영국 외무장관).

 

 

 

처칠이 스탈린에게 전달한 '스탈린그라드 승전 축하' 보검(러시아 스탈린그라드전투박물관 전시).

 

 

 

소련군 원수 보로실로프가 보검을 루스벨트(앉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왼쪽)과 처칠(오른쪽)이 지켜보고 있다.

 

 

 

[냉전의 상징 얄타회담 분단의 씨앗이 뿌려지다]

 

 

[루스벨트와 스탈린, 한반도 운명을 가르다]

 

 

 

리바디아 궁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11년 건립했다. 얄타회담 장소로 쓰였다.

 

 

 

 

 

 

회담 6일째 날 궁전 안쪽 정원에서 찍은 빅3의 역사적 기념사진이다. 오른쪽부터 스탈린 · 루스벨트 · 처칠.

 

 

 

이름과 생몰연도만 적혔다. 프랑스 전직 대통령 '샤를 드골(1890 ~ 1970)'의 묘비명이다. 흰 대리석 비석에 미사여구가 없다. 그 풍광은 드골의 유언이었다. 드골의 언어 구성은 단순과 압축이다. 그의 무덤은 고향(콜롱베 레 되제글리즈) 성당 공동묘지 안에 잇다. 그곳은 파리에서 남동쪽 270여km 거리의 시골이다.

1944년 8월 나치 독일이 퇴각했다. 드골은 파리로 귀환했다. 그는 승리의 연설을 했다. "Paris! Paris outragé, Paris brisé, Paris martyrisé, mais Paris libéré(파리! 모욕당한 파리, 쇠락한 파리, 학대받은 파리, 그러나 해방된(자유로운) 파리)." 그 구절은 자유 회복의 극적 순간을 농축한다. 리더십 언어는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한다. 그의 묘비명은 극단적인 간결함이다. 드골의 신화는 언어의 절제로 완성된다.

 

ㅡ "프랑스는 핵무장을 단행할 용기와 집념을 가져야 한다" 중에서

 

 

 

"펼친 책을 덮을 수 없었다.

  파격과 흥미의 리더십 현장 보고서"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는 현장주의자다. 그에게는 운명적인 원칙이 있다. 현장에 가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열정과 집념이 책의 경쟁력을 높였다. 저자는 리더십 작동의 결정적인 순간을 추적해 왔다. 책 속에는 저자의 지적 축적과 역사적 감수성, 문제의식이 투사됐다. 기억의 장소에서 써내려 간 이 책의 독자 흡입력은 탁월하다. 그 때문에 『결정적 순간들』을 펼치면 덮을 수 없다. 독자들은 리더십이 연출한 역사 무대를 독특하고 신선한 시선을 통해 접할 것이다.

 

-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 · 전 덕성여대 총장

 

 

 

박보균 대기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갖고 있다. 그의 글은 선명하면서 강렬하다. 간결하면서 짧은 문장이 주저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어진다. 단문은 상황의 핵심과 사건의 정수만을 뽑아서 넣는 글이다. 『결정적 순간들』은 리더십 승부사들의 극적 장면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20세기 등장인물인 처칠·루스벨트·드골·히틀러·무솔리니·스탈린·레닌·마오쩌둥·호찌민을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서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새롭고 파격적인 접근 방식의 리더십 현장 보고서다.

 

- 이국종, 『골든아워』 저자 · 아주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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