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걷고 싶은 길] ㅡ 3 마포나루길
https://blog.naver.com/prmapo77/222140693018
https://www.mapo.go.kr/site/culture/content/culture040102
3코스 마포나루길
옛 번영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조선시대 당시 지금의 마포, 공덕, 부근에 존재했던 마포나루의 날들을,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였던 마포나루는 늘 전국에서 드나드는 배들로 붐비곤 했다. 지금은 영락없이 현대적인 모습이지만, 옛 흔적이 일대 곳곳에 남아있다. 상인들이 구워먹던 갈비의 전통을 잇는 갈비집들, 뱃사람들의 무사를 기원하며 지어진 사찰, 마포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역사 속 인물들까지, 걷는 속도에 맞춰 찬찬히 역사를 그려본다. 얽힌 사연만큼이나 풍성한게 또 있으니, 먹거리다. 갈매기 골목과 족발 골목, 전 골목, 마포 음식문화거리 등이 포진해 있으니 코스의 마무리는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
지하철 5, 6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공덕역 5번 출입구
공덕역 5번 출입구에서 바라본 공덕시장 방향
이 횡단보도를 건너 수협은행 방향으로
공덕시장 족발골목
공덕 푸르지오 펜트라우스
◑ 제목 : '빛을 든 사람'
◑ 작가 : 유영호
◑ 크기 : 3m × 5m × 10m
◑ 재질 : 스테인레스 스틸, UV코팅 백색 폴리카보네이트, 우레탄 도색, LED 조명
◑ 제작년도 : 2011. 04.
◑ 제작 : 스튜디오 성신
"거대한 빛을 들어올리는 사람 형상의 작품은 미래에 대한 밝고 힘찬 신인류의 비전을 표현한 것이다.
작품은 구슬의 엮임, 세포들 또는 분자 구조의 결속을 상징하는 구체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문학적, 환경적 요소의 결합체인 신인류를 표현한다. 구들이 강력히 결합된 형태는 우리가 서로 깊이 연결된 존재들 임을 암시하며 함께 힘을 합쳐 힘차게 빛 덩어리들을 들어 올리는 신인류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들어올려진 빛은 희망과 꿈, 밝은 미래, 불멸의 생명성과 정신성 그리고 에쓰오일 본사를 방문하는 고객들은 물론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출처 : 공공미술시민발굴단>
SㅡOIL & 시소와 그네
마포영유아통합지원센터
에쓰ㅡ오일이 시민 여러분의 갈증을 풀어드리고
오늘도 힘찬 하루 보내시라고
시원한 생수 한잔으로 응원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을 드시고 자유롭게 후원금을 모금함에 넣어주세요.
모금함에 모인 따뜻한 마음은 희망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 영유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됩니다.
(기저귀, 분유, 병원비, 심리치료비 등)
후원문의 : 02-706-0610 마포영유아통합지원센터
옛날불고기
용강지구대 도화치안센터
복사골, 도화동...
그 옛날
낮은 푸른 산에 복숭아나무 있었네
그 옛날
배고파 할 때
작은알 복숭아
신맛, 단맛, 쓴맛 의미하며 배불렀지
지금이야
탐스런 복숭아
맛과 향기가 참으로 그윽하지
세월따라
복사골, 도화동이 변한 것
말로 다 어찌하랴...
복사골 55년 삶
나눔빌딩 박준규 증
마포구 도화동 관내도
마포 삼성아파트
마포 걷고 싶은 길
진선미어린이집 / 마포은석교회
덕성빌딩
모바일이 지배하는 세상
喜相逢料理
석불사 입구
大韓佛敎曹溪宗 石佛寺
대한불교조계종
석불사 石佛寺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다길 23-6
대한불교조계종 석불사의 전신인 백운암(白雲庵)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肅宗 1674년 ~ 1720년) 때 환성(喚惺) 지안대사(志安大師 1664년 ~ 1729년)가 수도 한성(漢城)의 젖줄인 한강의 마포항 인근 지금의 석불사 터에 창건하였다. 백운암은 한강을 진호(珍護)하고 상인과 선원들의 무사항해와 상업 번창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이었으나 조선시대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백운암은 파괴, 폐사되고, 절터에는 한강변 여덟 정자 중 하나인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다.
200여년 전 불심이 돈독한 김해 김씨 무진거사(無盡居士)가 청룡 한 마리가 한강변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 그곳에 달려가 살펴보다 석불과 백운암이라는 편액(扁額)을 발견하고 이곳이 절터임을 알고 중창 불사(佛事)를 펼쳐 석불암(石佛庵)으로 개칭, 중건한 후 딸 일광화(日光華)와 월광화(月光華) 자매로 하여금 불공토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삼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월광화의 딸로 동진출가(童眞出家)하신 천일(天日) 스님(1912년 ~ 1977년)의 원력(願力)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중창하였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모두가 낡아지고 미륵 부처님까지도 부식이 심해져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20년에 걸쳐 대웅전, 극락전, 삼성각, 설법전, 요사채 등을 새롭게 불사하였고 불기 2554년(2010년) 음력 8월 7일 새로 모신 미륵 부처님 봉불식과 중창불사 회향식을 올렸다.
이처럼 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석불사는 오늘날 서울 도심 속 한강변에 자리잡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실로 유서 깊은 비구니(比丘尼) 사찰이다.
희망과 치유의 연등을 밝힙니다
십일면 관세음보살상
성냄을 버려라
거만을 버려라
모든 애욕과
탐심을 버려라
정신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고요하고 편안해
괴로움이 없다.
안심요(安心寮)
石佛寺 寺跡碑
麻浦 한강변에 조그맣고 아름다운 절 石佛寺 이야기입니다. 약 270여 年 前 숙종 조 때 환성대사에 의해 수도 한성의 젖줄인 한강을 진호하고 아울러 수로사업의 융창을 기원하는 護國寺刹 彌陀庵을 창건하여 서민 대중의 종교적 소망과 護國遠念을 전통적 문화축제(수륙제 보살계)를 통해 충족 발현시켜온 한성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곳입니다. 그렇게 佛子의 신앙수도처 역할을 해 오다가 한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책의 일환으로 폐사, 사찰 전부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한강변 8정자 중 하나인 風月停이라는 이른바 선비들의 놀이터를 세우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세인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려하던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 불심이 돈독하기로 이름난 김해 김씨 무진거사가 청룡 한 마리가 한강변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 그곳에 달려가 살펴보니 石佛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막대한 사재를 들여 주변을 정비하던 중 彌陀庵이라는 편액이 나와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았고 재창건하여 寺名을 석불암으로 개칭한 후 딸 日光華 · 月光華 자매로 하여금 시전불공토록 하였으며 당시 김무상화 · 전정월화 등 신심불자들과 함께 사찰을 지켜오다가 그 후 청신녀 월광화의 딸로서 동진출가하신 高 天日스님(1977년 열반)의 원력과 피땀어린 노력으로 서울에서는 제법 큰 比丘尼 사찰로까지 발전시켰으나 이곳 石佛寺가 애석하게도 6 · 25동란 이후, 전각은 파괴되고 인적은 끊겨 寺勢가 퇴락하고 쓸쓸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6 · 25로 인해 현재 남은 三聖閣을 제외하고는 거의 全燒되었던 것을 당시 주지이신 天日 스님이 원력을 세워 전후 시작한 불사는 1960년대 초에 大雄殿과 極樂殿 · 彌勒 부처님 등을 중창하여 마쳤습니다. 天日 스님의 상좌 스님으로 法眞 스님 · 法守 스님 · 法宣 스님 · 法印 스님 · 法雲 스님께서 함께 절을 중창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天日 노스님의 직계 상좌를 비롯해 권속이 70여 명에 달하는데 현재 石佛寺에 20여 명 거주하고 그 외 스님들은 石佛寺 布敎堂 10여 사찰과 분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大雄殿과 極樂殿 · 講堂의 부처님 조성은 여진 이진형 불모님이 모셨으며 大雄殿 후불탱화 및 신중탱화는 이전 법당에 모셔졌던 문남정 불모님의 작품 그대로 모셨고 極樂殿 후불탱화 및 신중탱화는 이철승 불모님이 모셨으며, 大雄殿 및 요사채 丹靑은 주인철 거사가 맡아서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전 극락전에 모셔졌던 아미타부처님 · 지장보살님 · 관세음보살님은 미륵존불님을 조성해 주셨던 권정도 불모님 작품으로 현재 강당에 박물관 형태로 모셔져 있고, 현재 오래된 건물로는 삼성각이 있고 잘 모셔진 괘불만(불모님 금어, 보경, 보현 스님)이 가로 3.2m, 세로 5.2m 서기 1932(임신)년 4월 28일 봉안되셨습니다. 허나 각종 전각들이 낡고 비좁아서 1990년 당시 주지이신 法雲 스님께서 원력을 세워 대웅전을 비롯해 강당 · 요사채 · 식당 · 사찰 입구 십일면 관세음보살님 등 건평 650여 평을 중창하셨습니다. 당시 증축불사는 일신진흥건설 이대성 사장님이 맡아 건축 완공하였습니다. 현재는 대지 천여 평에 건평 천여 평으로 불자들의 신앙생활함에 원활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사격이 커지다 보니 사명을 石佛庵에서 石佛寺로 1992년도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현 주지 暻輪 스님이 2004년도에 100년된 요사채와 극락전 등을 헐고 다시 그 자리 극락전을 비롯해서 요사채 · 주차장 등 350여 평을 주식회사 해우의 김필성 사장님이 증축하였고
대웅전
석불사 대웅전 주련(柱聯)
大方廣佛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
佛身充滿於法界 불신충만어법계
普現一切衆生前 보현일체중생전
隨緣赴感靡不周 수연부감미부주
而恒處此菩提座 이항처차보리좌
實相妙法蓮華經 실상묘법연화경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부처님 몸 온 법계에 가득하니, 일체중생 앞에 모두 나타나시었다. 인연因緣따라 가지 않는 데 없지만, 언제나 보리좌에 항상 계신다.
이는 바로 지혜智慧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는 의미다. 깨친 마음의 지혜 세계가 못 깨친 생각 세계와 다름을 말하고 있다. 어둠과 공포를 만드는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리석은 업력業力에 빠지면 고통없는 곳에서 고통을 만든다.
대웅전 현판
삼성각 옆면
삼성각
삼성각 현판
극락전 현판
ㅡ 한글반야심경 ㅡ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세 번)
템플스테이
TEMPLESTAY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한
휴식
[休息]
02ㅡ712ㅡ1765
법회안내
자비회, 거사회, 청년회
매월 첫째 일요일 오전 10시
신도회
매월 음력 1일, 7일 오전 10시
년중기도안내
정초기도
음력 1월 11일 ~ 13일
정진주간기도
음력 2월 8일 ~ 15일
백중영가천도기도
음력 4월 15일 ~ 7월 15일
백일관음기도
음력 9월 15일 ~ 12월 24일
소모임 활동
반야회, 일향회, 사물놀이
우리동네 소. 나. 기.
(소통. 나눔. 기쁨)
매월 둘째주 일요일
마포어린이공원
구 상징조형물(區象徵造形物)
작품명 : 여명(黎明)
작가 : 이성완
작품설명
ㅡ 청둥오리 깃털을 형상화한 4개의 조형물은 "세계 → 한국 → 서울 → 마포"를 상징
ㅡ 조형물 상단은 마포구의 발전을 의미하고,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상징
ㅡ 조형물 하단은 마포 8경을 부조(양각, 음각) 형태로 표현
공사기간 | 1996년 12월 28일 ~ 1997년 12월 23일 | ||
시행청 | 마포구청 | 시공자 | (주)건림원 |
설계자 | 극동건설(주)ENG | 감독자 | 김윤철 |
준공검사관 | 유이형, 이영주 | 감리자 |
마포종점나들목으로 내려가는 계단
마포종점나들목
새우젓 ● 소금장수
마포 황 부자이야기
마포나루에는 소금창고 일꾼 황득업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는 약값이 아까워 병든 부인마저 허무하게 하늘로 보낸 천하의 구두쇠였다. 그런 황득업이 새우젓 장사와 고리대금업으로 악착같이 재산을 늘려가는 가운데 마을에는 몰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인이 등장한다. 어느 날 황 부자는 지나친 탐욕의 대가로 큰 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인이 홀연히 나타나 황씨를 용서해 달라 청하며 정체를 드러내니 그는 바로 황득업의 딸이었다. 비로소 자신의 죄를 뉘우친 황부자는 전 재산을 들여 마을에 둑을 쌓아 홍수를 막아내고 대대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마포나루 소금과 젓갈
마포(麻浦)의 순우리말 이름은 '삼개'로서, 강 갯벌이 삼베를 덮어놓은 듯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초기에도 황해(黃海)를 거쳐 온 배들이 집결하는 주요 포구였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바닷물이 마포 앞까지만 역류하게 됨으로써 수륙(水陸) 물산(物産)의 집결지가 되었다.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조세곡을 보관하는 광흥창(廣興倉)이 이곳에 만들어져 창전동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서해안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과 젓갈도 주로 마포 주변에서 거래되었다.
ㅕㅁ리동(鹽里洞)은 소금매매 상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동네였으며, 젓갈을 보관하기 위한 옹기 생산지도 이 일대에 있어 옹리(甕里) 또는 독막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니, 오늘날의 동막(東幕)이다. 마포는 조선 후기부터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에서 가장 번성한 포구로서 오랫동안 '삼개삼주'라는 말이 유행했다. 삼주란 상거래를 알선하는 객주(客主), 항해의 안녕을 빌어주는 당주(堂主), 그리고 술집인 색주(色酒)를 말한다. 그렇다보니 주변에는 농기구, 무구(巫具) 등을 생산하는 철제 수공업장과 술도가들도 많았다.
ㅏㅇ수동, 하수동, 신수동, 구수동의 지명은 모두 '무쇠막 동리'라는 뜻의 수철리계에서 나온 것이며, 동막과 공덕동은 삼맥주(三麥酒)라는좋은 술의 산지로 유명했다.
자전거 경사로
한강 낚시 유의사항
서울특별시 한강 내수면은 생태계 보호와 유어질서 확립을 위하여 내수면 어업법, 하천법 등에 따라 낚시금지 및 제한사항이 있으니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1. 낚시금지구역 : 낚시 등 유어행위 전면금지
낚시금지구역 | 위반시 과태료 부과 | ||
서울특별시 소재 한강 잠실대교 ~ 행주대교 구간 내 금지구역으로 고시한 구역(22개 구역 총 26.5km) | 1차 | 2차 | 3차 |
50만원 | 70만원 | 100만원 |
2. 낚시제한구역(낚시금지구역 이외 지역) : 제한사항을 준수하여 낚시 가능
제 한 사 항 | 위반시 과태료 부과 | ||
1차 | 2차 | 3차 | |
떡밥, 어분 등 미끼 사용 | 100만원 | 200만원 | 300만원 |
위험상항 발생시 낚시행위금지 및 낚시인 대피 명령 위반 | 100만원 | 100만원 | 100만원 |
낚시대 4대 이상 사용(3대까지 가능), 훌치기 낚시 등 | 50만원 | 70만원 | 100만원 |
수상낚시 및 투망, 작살류 등 제한장비 사용 | 50만원 | 70만원 | 100만원 |
3. 포획, 채취금지(위반시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
○ 뱀장어 포획금지(금지기간 : 10. 1 ~ 3. 31)
○ 뱀장어 15cm 이상 ~ 45cm 이하는 기간 관계없이 연중포획 불가
○ 내수면어업법 시행령 별표1에 규정한 어종 포획, 채취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마포나루터
황포돛배
한강 물류의 주역,
황포돛배
누런 돛을 달고 전국의 물화를 옮겨
나르던 황포돛배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1517 ~ 1578)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수산(水山) 혹은 토정(土亭)이며 시호 문강(文康)이다. 신년 초면 누구나 한번쯤은 재미로라도 보게 되는 토정비결을 지었다.
마포 강변에 흙으로 언덕을 쌓고 아래에 굴을 파서 거처를 하고 위에는 정자를 지어 토정이라고 했는데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마포대교 북단의 용강동 마포유수지 부근이 초정 선생의 집터인데 토정 선생은 자기가 살던 집터가 나중에 주차장으로 변하게 될 것을 알았을까?
선생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에 있다.
마포나루
마포나루의 옛 이름은 삼개나루였다. 마포의 와우산, 노고산, 용산의 구릉이 한강으로 뻗어 내린 곳에 세 곳의 포구가 있었다. 이를 용호, 마호, 서호로 불렀고 함께 이르던 말이 삼개포구였다. 그런데 한자 표기를 위해 3개의 삼을 삼(麻)으로 쓰면서 마포가 된 것이다. 현재의 마포대교 북단 용강동 마포유수지 부근이 마포나루였는데 이곳이 마포 새우젓장수니 서울깍쟁이니 했던 말의 진원지였고 여기서 벌이는 한가한 뱃놀이가 마포범주(麻布泛舟)라고 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 중 하나였다.
삼개포구
麻浦浦口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 집산의 포구
마포나들목으로 오르는 계단
마포나들목
토정 이지함선생 집터
이곳은 조선 중기 명현(名賢)으로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선생이 살던 집터 부근이다. 해방 직후까지 이곳에는 토정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토정의 옛 고을 이름에 아랫토정, 윗토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예전부터 토정리로 불리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다.)
"영의주를 얻으니 운수대통하리라!"
조각가 김석희
3500㎜(가로) × 1000㎜(폭) × 2200㎜(높이)
석재, 스테인레스
마포구 용강동(龍江洞) 동명은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용머리'로 불리던 곳이 있고, 마을 앞에 한강이 임하여 있는 위치 관계로 '용강'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潛龍得珠 變化無窮(잠용득주 변화무궁) 토정비결에서 용, 여의주, 운수대통과 관련된 괘 풀이로, 잠긴 용이 구슬을 얻으니 변화가 무궁하다. 용이 승천하는 길한 기운을 받아 마포음식문화거리 상권의 활기찬 발전과 성장을 기원한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토정 이지함 조각가 김석희
土亭 李之菡(1517 ~ 1578)
3000㎜(가로) × 1500㎜(폭) × 3500㎜(높이)
브론즈, 자연석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 기인(奇人), 역학 · 의학 · 수학 · 천문 · 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준 인물로, 당시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실천가였다.
토정 이지함은 시대를 앞서 백성구제와 구구의 방략 등 3대 부고론(도덕 · 인재 · 백용)을 외친 경세가이자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3대 부고론>
첫째, 도덕부고론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인하며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돼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
둘째, 인재부고론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으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바르게 배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셋째, 백용(산업)부고론
육지와 바다는 일백 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다.
이 창고에서 나는 은 · 옥 · 물고기 · 소금 등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선생
1517(중종 12) ~ 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奇人)으로 <토정비결>의 저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며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이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한강의 마포강변(현재 마포구 토정동 마포주차장 부근)에서 흙담 움막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토정'이라는 호가 붙여지게 되었으며, 그의 기이(奇異)한 행동과 예언술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 뿐만 아니라 수리(數理) · 의학 · 복서(卜筮) · 천문지리 등에 달통하였다. 그가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일년의 신수(身數)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많아져서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었고 이듬해 포천 현감이 되었으며, 재임중에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고 미리 대비하여 많은 인명을 구하였다.
이어 1578년에는 아산(牙山) 현감에 임명되어 걸인과 기민(饑民) · 노약자의 구호에 힘썼으며,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숙종 때인 1713년에 명현(名賢)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서는 <토정비결(土亭秘訣)>과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있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귀한 소금 받아가시구려!"
(토정 이지함의 구휼활동 재현) 조각가 김석희
3500㎜(가로) × 1000㎜(폭) × 1800㎜(높이)
브론즈
토정 이지함은 맨손으로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이용하여 2 ~ 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그는 직접 지은 토정(土亭) 옆에 곡식을 쌓아 놓고 굶주린 백성들, 특히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토정 이지함은 토정을 근거지로 삼고 무궁무진한 바다와 땅을 이용해 생업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 주고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자, 실학의 선구자였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용강동 주민센터(복합청사)
용강동 관내도
용강나루소공원
베롱나무
마포용강 맛깨비길
능소화
용강동 정구중 가옥
지방민속자료 제17호
한옥
용강동 정구중 가옥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7호 / 시대 : 일제강점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 335번지
이 집은 제한된 땅에서 여러 채의 건물들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도시형 개량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배치형태다. 경사진 곳에 있는 이 집은 단을 달리하여 지형에 맞게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ㄴ자형의 대문간이 있는 행랑채와 ㄱ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져 ㅁ자형의 안마당을 이루고, 그 뒤로 중문간 행랑채와 별채가 있다. 안채 대청 앞 쪽마루의 고막이널에는 태극 문양을 장식하였고, 쪽마루 아래에는 섬세한 문양을 장식한 까치발을 대는 등, 전반적으로 세심하게 장식하였다. 안마당에서 보이는 안채의 처마 부분은 겹처마로 하였고, 보이지 않는 뒷부분은 홑처마로 처리하여, 경제적인 효과를 높이면서도 화려함을 추구하였다. 안채 뒤로는 중문간 행랑채가 있고, 여기에 있는 중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높은 곳에 ㄱ자형의 별채가 있다. 중문간 행랑채는 안채와 별채 사이에 놓여, 두 건물의 높이가 크게 차이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큰우물로2길 22
cafe Riverwell
休
동막 큰 우물터
동막 큰 우물터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동막상계(현재의 대흥동, 용강동 일부)에 위치한 우물로서 약 200년 전 주민들이 직접 조성하였다.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던 큰 우물로 상수도 보급 전까지는 약 1000여 세대의 유일한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이후에는 민방위 비상급수용, 소방용수로도 사용되었다.
대흥구역주택개량 재개발 사업으로 1999년 11월 20일에 매몰되었다.
마포자이아파트
조선초가한끼
추억을 먹는 아궁이
옹색한 정지의 터주 격인 가마솥의
아궁이에는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길이
주름진 얼굴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는데
가지를 툭툭 꺽어
불을 더 지피는 중 늙은이
토닥토닥 솔까지 타는 소리에
아랫마을 개울 건너 친정이 그립다
덜그렁 척 덜그렁 척 베틀소리
어머니 허리 꺽이는 소리 이명처럼 들린다.
부질없고 부질없다.
넘치는 밥물이 세월이 세월의 흔적을 적신다.
마디 굵은 손은 부지런히
아궁이에 추억을 밀어 넣고 있다
아궁이 불꽃에서 피어나는
도란도란 옛 추억 이야기에 날 저무는 줄 모른다.
부부요리단
육회 어때
옥면가
학교법인 송산학원
동도중학교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아소당(我笑堂) 터
이 곳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70년에 수장(壽藏,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을 겸하여 조성한 별서(別墅)가 있던 터이다. 1898년 운현궁(雲峴宮)에서 대원군 내외가 세상을 뜨자 이곳에 합장묘가 만들어졌다가 1908년 파주로 이장되었다.
아소당 건물은 1962년에 해체되었고, 일부가 봉원사(奉元寺)로 옮겨졌다.
Moving Forest
스테인리스 스틸, 우레탄도장
Moving Forest는 성장 · 변화 · 균형이라는 모티브를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의 의미를 나무의 형태에 담아내고자 한 작품이다.
3개의 열주형식의 형태는 각각의 방향으로 상승회전하며 선과 색의 변화를 통해 도심 속에서 경쾌함을 줄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작품은 forest라는 텍스트의 와곽성을 단순화한 단면의 형태로이루어져 있으며, 3개의 기둥 형식의 덩어리는 다른 방향의 휨의 정도를 가지며 움직이며 드러내고 있다. 공간을 고려한 움직임과 덩어리의 섬세한 선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자연의 생명력과 변화의 리듬감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2020. 5. Kim kunju
BLUE BIRD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주물, 우레탄 도장
작품 BLUE BIRD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 오르는 파랑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사실적인 형태와 생동감이 넘치는 컬러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푸른 희망과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파랑새의 역동적인 모습은 보다 나은 내일을 지향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상을 상징한다.
2020. 5. 전준호
롯데시티호텔
공덕역 2번 출입구
'둘레길 등(누죽걸산 :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포 걷고 싶은 길] - 5 와우! 홍대길(1) (0) | 2022.09.21 |
---|---|
[마포 걷고 싶은 길] ㅡ 4 마포한강길 (0) | 2022.09.02 |
[마포 걷고 싶은 길] ㅡ 2 아현동고갯길 (0) | 2022.08.22 |
[마포 걷고 싶은 길] ㅡ 1 경의선 숲길 (0) | 2022.08.22 |
[당산역에서 구일역까지 한강을 따라] (0) | 2022.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