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걷고 싶은 길] ㅡ 4 마포한강길
마포 걷고 싶은 길
4코스 나루의 추억, 마포 한강길 (4㎞, 약 1시간 30분 코스)
마포대교에서 서강대교를 지나 양화대교까지, 한강을 곁에 두고 걷다가 곳곳에 보이는 옛 흔적에 걸음을 멈춘다면, 길이 건네 오는 이야기에 화담하는 것이다. 때는 조선시대, 지금의 마포역 부근에는 수상교통의 요지, 마포나루가 있었다. 전국에서 드나드는 배들로 늘 활기를 띠었던 이곳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양화대교에 거의 다다랐다면 합정역 쪽으로 발길을 돌려 보자. 조선시대 최대의 천주교 박해사건이 벌어졌던 '절두산순교성지'와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외국인 선교사들이 잠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마포역 1번 출구 ㅡ 용강맛깨비길 ㅡ 토정이지함 동상 ㅡ 토정나들목 ㅡ 현석나들목(밤섬조망공원) ㅡ 서강나들목 ㅡ 양화진나루터 ㅡ 절두산성지 ㅡ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ㅡ 합정역 7번 출구
지하철 5호선 마포역 1번 출입구
마포용강 맛깨비길
마포 걷고 싶은 길 안내이정표
운수자판기 ㅡ 운세의 신
마포용강 맛깨비길 바닥표식
[月明中天 天地明朗] 월명중천 천지명랑
달이 하늘 한복판에 밝게 떠 있으니 천지가 명랑하다. 달이 하늘 한복판에 떠 있으면 세상이 환하듯이 근심이 없고 오직 명랑한 일만 있을 것이다.
[春回故國 百草回生] 춘회고국 백초회생
봄이 이 땅에 돌아오니 백 가지 초목이 다시 생장한다. 가정, 직장 등 주변 환경이 유리하게 형성되므로 모든 일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다.
[心固修德 終時無咎] 심고수덕 종시무구
마음을 굳게 하고 덕을 닦으면 종시 허물이 없다. 굳은 마음으로 은덕을 베풀라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小往大來 積小成大] 소왕대래 적소성대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게 되니 적은 것을 쌓아 큰 것이 된다.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다. 그리고 적은 이익이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마침내는 큰 재물이 된다.
[東風解凍 枯木逢春] 동풍해동 고목봉춘
지난 날에는 겨울을 만난 초목처럼 옴짝달싹 못하며 어려운 세월을 보내다가 새해를 맞이하면 언 땅이 풀리듯이 하는 일마다 잘 풀려 소원을 이루고 그간의 고생이 끝난다.
[春雖小通 勞力恒大] 춘수소통 노력항대
봄에는 조금 통하는데 노력하면 언제나 큰 것을 이룬다. 가만히 있어도 운이 좋으므로 어느 정도는 성공한다. 여기에 노력이 더해지면 큰 성공도 할 수 있다.
[若逢貴人 身榮家安] 약봉귀인 신영가안
만일 귀인을 만난다면, 몸이 영귀하고 집안도 편안해진다. 좋은 직위에 오르거나 가정의 어려운 문제도 잘 해결된다.
[貴人助我 財利可得] 귀인조아 재리가득
귀인이 나를 도우니 재리를 얻는다. 귀인의 도움을 받아 쉽게 돈을 번다.
[災消福來 心神自安] 재소복래 심신자안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오니 마음과 정신이 자연스레 편안해 진다. 나쁜 일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점차 사라지고 기쁜 일들이 생기게 되니 정신이 상쾌하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經營之事 必有成事] 경영지사 필유성사
경영하는 일은 반드시 일을 순성한다. 단 과욕을 부리지 않고 분수에 맞는 일을 운영해 나아가라.
"월척을 낚은 운수대통 토정 선단"
이지함은 해안의 어장과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을 알고 있었으므로 권문세가들의 어장을 벗어난 바다와 갯벌로 선단을 이끌고 나가 고기를 잡아들였다. 첫 출어에 고기를 가득 잡아 돌아왔다.
마포나루터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누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굶어 죽지 않도록 곡식을 준단 말인가? 나라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토정은 해낸 것이다. 그는 생선을 상고들에게 팔아 쌀과 보리를 샀다. 배를 타고 고생한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 먼저 나눠 주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에게도 골고루 남김없이 주었다.
2016년 3월 30일
마포구
"귀한 소금 받아가시구려!"
(토정 이지함의 구휼활동 재현) 조각가 김석희
3500㎜(가로) × 1000㎜(폭) × 1800㎜(높이)
브론즈
토정 이지함은 맨손으로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이용하여 2 ~ 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그는 직접 지은 토정(土亭) 옆에 곡식을 쌓아 놓고 굶주린 백성들, 특히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토정 이지함은 토정을 근거지로 삼고 무궁무진한 바다와 땅을 이용해 생업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 주고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자, 실학의 선구자였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토정 이지함 조각가 김석희
土亭 李之菡(1517 ~ 1578)
3000㎜(가로) × 1500㎜(폭) × 3500㎜(높이)
브론즈, 자연석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 기인(奇人), 역학 · 의학 · 수학 · 천문 · 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준 인물로, 당시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실천가였다.
토정 이지함은 시대를 앞서 백성구제와 구구의 방략 등 3대 부고론(도덕 · 인재 · 백용)을 외친 경세가이자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3대 부고론>
첫째, 도덕부고론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인하며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돼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
둘째, 인재부고론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으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바르게 배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셋째, 백용(산업)부고론
육지와 바다는 일백 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다.
이 창고에서 나는 은 · 옥 · 물고기 · 소금 등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선생
1517(중종 12) ~ 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奇人)으로 <토정비결>의 저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며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이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한강의 마포강변(현재 마포구 토정동 마포주차장 부근)에서 흙담 움막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토정'이라는 호가 붙여지게 되었으며, 그의 기이(奇異)한 행동과 예언술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 뿐만 아니라 수리(數理) · 의학 · 복서(卜筮) · 천문지리 등에 달통하였다. 그가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일년의 신수(身數)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많아져서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었고 이듬해 포천 현감이 되었으며, 재임중에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고 미리 대비하여 많은 인명을 구하였다.
이어 1578년에는 아산(牙山) 현감에 임명되어 걸인과 기민(饑民) · 노약자의 구호에 힘썼으며,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숙종 때인 1713년에 명현(名賢)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서는 <토정비결(土亭秘訣)>과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있다.
2015년 9월 17일
마포구
이 횡단보도를 건너 남도술상과 공사현장 사이로 토정나들목으로
저 앞으로 토정나들목이 보인다
토정나들목
토정나들목 신설공사 표지석
공사명 : 토정나들목 신설공사
공사개요 : 지하보도 L = 51.5m, B = 5.0m, H = 3.5m(U.P.R.S 공법)
공사기간 : 2017. 9. 1 ~ 2019. 12. 23
시행청 :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업무담당자 정 창 수
시공자 : 우탑건설(주)
현장 대리인 장 태 동
설계자 : (주)제일엔지니어링
책임설계자 정 경 록
감리자 : (주)삼안
책임기술자 김 만 선
U.P.R.S 공법(직선추진)
강관을 중첩되게 묶음 또는 강관과 강관 사이를 곡선인 철판 부재로 연결한 강관다발구조체를 제작하며, 강관다발구조체의 내부에는 좌.우 통행이 가능한 연통홈과 GROUTING 니플을 부착하고 강관다발구조체의 외부에는 압입시 맞물리게 추진될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부착한다 안입추진은 선 압입된 강관다발구조체의 측면을 내부에서 지지봉으로 보강하고 순차적으로 절개하며, 그절개면에 압입될 강관다발구조체의 외부에 있는 연결고리가 맞물리게 구속되어 압입추진되므로 이탈하고 싶어도 이탈이 방지되어 오차없이 정밀 시공된다.압입 완료후 맞물린 연결 부위는 강관다발구조체의 내부에서 용접으로 접하고 연통공에는 철근다발을 설치하여 콘크리트를 타설함으로써 횡방향 강성을 향상시킨 개선된 강관루프 구조체공법(U.P.R.S:UPGRADED PIPE ROOF STRUCTURES)이다.
U.P.R.S공법 형식
<출처 : (주)피디티건설>
구명환
어디서 떠네려온 배와 쓰레기일까?
이번 폭우에 물이 찼던 흔적들
쓰레기를 치우고 남은 쓰레기들
흙탕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리수 음용터
자전거도로와 화장실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표지석
현석나들목
한강영화
영화 / 드라마 속 이야기가 깃든 한강
김씨표류기(영화)
IRIS(드라마)
웃어라 동해야(드라마)
괴물(영화)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강은 일상과 추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특히 한강에서 연인과의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강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낭만과 기대를 불러 일으크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래서 사랑을 다룬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특별한 순간의 배경으로 한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한강 곳곳에서 펼쳐진 영화와 드라마 속 사랑을 찾아가는 걸레는 여행! 그곳에서 당신만의 영화 같은 이야기, 드라마틱한 추억을 만들어 보자.
밤섬
밤섬은 섬의 모습이 밤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율주(栗州)라고 했다.
1968년 여의도 제방을 쌓기 위한 돌을 조달하기 위해 섬을 폭파하기 전에는 어업, 도선업, 조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아름다운 강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이를 율도명사(栗島明沙)로 부르며 서호팔경(西湖八景)의 하나로 꼽았다. 이후 세월이 흐르자 밤섬에는 다시 토사가 쌓이기 시작했고 철새들이 날아 들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서울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했고 2012년 6월에는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되었다.
교각 밑으로 서강대교가 보인다
현석나들목 주변안내도
봉원천교
총연장 | 51.5m | 교폭 | 6.8m |
교량형식 | 합성형라멘교 | 설계하중 | DBㅡ13.5(총중량 : 24.3ton) |
공사기간 | 2010년 12월 30일 ~ 2013년 4월 30일 | ||
발주처 |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 시공사 | (주)승일토건 외 1개사 |
설계자 | (주)대한콘설탄트 (주)수성엔지니어링 |
설계책임자 | 김규년 |
감독처 |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 | 감독자 | 이종상 |
현장대리인 | 김은영 | 준공검사자 | 김국현 정은수 |
서강대교
봉원천
상수빗물펌프장 빗물 배출구
상수나들목
공사명 | 한강시민공원 접근로 증설공사(상수동) | ||
공사개요 | 지하보도 ■ 4.0 × 3.5 × 37.05m | ||
공사기간 | 2003년 12월 26일 ~ 2005년 06월 25일 | ||
발주자 | 한강시민공원 사업소 | 업무담당자 | 유충현 |
시공자 | 호용종합건설(주) | 현장대리인 | 천창범 |
설계자 | 금호엔지니어링(주) (주)천일기술단 |
책임기술자 | 박선주 |
감리자 | (주)경호엔지니어링 건축사무소 | 책임감리원 | 박헌호 |
상수육갑문 안내판
사강나루터
西江津址
삼개나루(용호, 마호, 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 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서강나루
현재의 서강대교 북단 신정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서강진이라고도 했는데 서강대교가 놓이면서 기능을 잃었다. 마포나루에서 양화나루에 이르는 한강을 서강 혹은 서호라고 불렀다. 지금의 동호대교 북단 옥수역 부근을 동호라고 했던 것과 대비되는 이름이다. 서강나루는 나루터라기 보다는 세곡선(稅穀船)의 선착장이었다. 황해도, 전라도, 충청남도, 경기도의 세곡을 운반하는 배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세곡을 잠시 보관하기 위한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의 강창(江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동여도>
세곡운반
서강나루 최고의 일꾼, 돌쇠의 꿈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서강나루. 이 곳에 모인 쌀을 옮겨 나르는 서강의 하역 일꾼들은 일 잘하기로 소보다 낫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장사로 꼽히는 돌쇠. 그에게 생애 최고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돌쇠 내외가 지난 7년간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가 생긴 것이다. 돌쇠는 마음이 급하다. 기력이 쇠해 더는 쌀짐을 나를 수 없게 되기 전에 빨리 돈을 모아야 한다. 배 한 척만 마련하면 이곳을 드나드는 선주들처럼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아이를 목에 태우고 너른 한강을 누비는 꿈 때문에 오늘은 등에 진 쌀짐마저 가볍다.
한강공원 ~ 당인리발전소 승강기 설치공사
(한강공원 이용객의 접근성 개선과 편의성 향상을 위한 공사이며 안전하고 신속히 공사 완료 하겠습니다.)
● 위치 : 한강 망원공원 ~ 마포새빛 문화숲
● 공사기간 : 2021. 12. 16 ~ 2022. 10. 31
● 공사내용 : 승강기 및 연결로 설치공사(승강기 21인승, 연결로 L = 17m, B = 3m)
● 시행청 : 한강사업본부 한강관광사업과
● 감리 : 서울시설공단 (박영희 과장 T. 02-2290-6914)
● 시공사 : 태궁종합건설(주)
● 현장소장 : 강종안(T.010-6560-5544)
당인리 발전소
당인동 어린이놀이터
폭우로 떠내려온 쓰레기가 걸려 철망 울타리가 쓰러져 있다.
물고기가 그려진 횡단보도
강 건너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한강의 유람선
당산철교
절두산 성지
양화진 나루터
楊花鎭津址
서울과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양화나루
양화나루는 한강나루, 삼전도나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나루 중 하나였다. 양화나루는 김포나 강화 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양화(楊花)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초 월산대군, 강희맹, 서거정 등이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 열 곳을 가려 한도십영(漢都十詠)을 노래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 양화나루에서 흰 눈밭을 걷는 모습 양화답설(楊花踏雪)이다. 옛날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에서 배를 타면 건너편 선유봉의 양화나루에 닿았는데 지금도 양화대교가 대신하고 있다.
영혼의 강
시 이인평 아우구수티노
글씨 동고 이석수
한강아, 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터, 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물결 가득 영혼의 빛살로 흐른다
한강아, 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붓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
천주교서울순례길
20 절두산 순교성지
지정번호 : 사적 제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양화진 동쪽 한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가을 녘 누에의 머리와 같다하여 잠두봉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않고 다녀갔을만큼 경치가 아름다웠고, 조선시대 풍류객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러나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병인박해동안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머리가 잘려 목숨을 잃었다고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잠두봉이 형장으로 변한 배경은 병인년 9월과 10월 프랑스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시도하면서부터이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화친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문을 걸고 서양인에 의해 더럽혀진 양화진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인의 처형장을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양화진으로 옮기게 하였다.
절두산의 첫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1866년 10월 부인 김이쁜 마리아, 아들 이붕익 바오로와 함께 참수됐다. 이 일가족을 비롯하여 30여 명 만이 기록이 남아 있고, 수천 명의 교유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는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 명령에 따라 아무런 재판이나 절차 없이 참수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형장이동
(우포도청 →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년 후인 1946년 전국단위의 순교자현양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활동을 통해 양화진에 부지를 매입하여 성지를 조성하였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광장과 기념관이 준공되었고,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인 1972년 김대건 신부 기념동상이 광장에 세워졌다.
당산철교를 지나는 지하철
선박(수상활동체험교육장) 뒤로 양화대교가 보인다
수상활동체험교육장
꾸르실료회관
본 건물은 성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참석하신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년)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서울대교구 모든 푸르실리스따들의 모금으로 건립되었다.
◀ 건립 약력 ▶
◎ 1988년 12월 : 건립승인(대지 600평, 연건평 1,000평)
◎ 1989년 4월 6일 : 기공식(김옥균 바오로 주교 주례)
◎ 1990년 10월 28일 : 축성미사(김옥균 바오로 주교 주례)
사도 바오로
천주교 순교자들의 터
절두산은 본래 북악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한강에 막혀 불뚝 솟아오른 모습이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든 모습과 같다하여 잠두봉으로 불리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 하여 절두산으로 불러 왔다는 지역 일대 주민들의 구두 전승을 받아, 1956년 12월 잠두봉 일각을 매입한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잠두병을 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한 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
1866년 병인박해 시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 위에서 침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교회사 연구소에 의하면 실제 처형이 이루어진 곳은 절두산 위보다는 양화나루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절두산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을 처형할 만한 넓은 공간이 없었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양화나루터에서 형을 집행함으로써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병인박해 시 수 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스며들어 있는 땅. 양화나루터. 그 터 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회관이 서 있습니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신자들이 피와 죽음으로 증거하고 선포하였던 그 신앙과 복음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이 여기 꾸르실료회관에서 신앙의 교육을 받고 교회의 지도자로, 신앙의 증거자로, 복음의 사도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생활의 꾸르실료 운동
'꾸르실료(Cursillo)운동'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살고 나눔으로써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알아내어 완수하도록 도와주며, '꾸르실료운동' 고유의 방법을 통해 핵심적인 크리스천 그룹을 형성하여 '세상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운동입니다.
스페인어인 꾸르실료는 단기과정(a short course)을 뜻하며 세계 꾸르실료 운동 기구는 OMCC(Organismo Mundial de Cursillos de Cristiendad)입니다.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꾸르실료 운동을 평신도와 성직자가 협력하는 교회의 신심 운동으로 인정하셨으며, 꾸르실료의 수호성인으로 바오로 사도를 정해주셨습니다. 2004년 교황청 평신도 평의회는 OMCC를 교회법적으로 인정하는 교영을 발표하였으며, 2014년 9월에는 OMCC의 정관을 확정적으로 승인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끄르실료 심벌은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칼'을 의미합니다.
이는 꾸르실료 운동의 주보성인인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페 6, 10 ㅡ 18)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칼 모양에 새겨진 I · S · C는 꾸르실료 운동의 덕목인
I(Ideal : 이상), S(Submission : 순종), C(Charity :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영적 투쟁(에페 6, 10 ~ 18에서 발췌)
주님 안에서 그 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산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력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강변의 성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서 있던 절두산을
바라보시는 성모님
순교자들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이승훈(李承勳) 베드로 (1756 ~ 1801)
이승훈은 1784년 2월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및 십자고상, 상본 등 많은 성물을 국내에 들여 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과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이승훈(베드로)이 세례 받은 북경 북천주당 ◈
◈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 ◈
양화진(楊花鎭)의 옛터
이 일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였다.
영조 30년(1754)에는 한강수로의 정비를 통해 수도로 방어하기 위해서
이곳에 군진(軍鎭)이 설치되어 상비군이 주둔하였다.
이곳을 양화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군진 옛터의 일부를 장대석(長臺石)으로 구획해 놓았다.
2006. 6
保護數
1 지정보호 1ㅡ10ㅡ15ㅡ10ㅡ24
2 수 종 느티나무
3 지정년월일 1981. 10. 27
서울특별시장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관
ㅡ 봉 헌 ㅡ
양화진(楊花津)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
백년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끝으로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안에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
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화의 진통은
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랑의 터밭에서 열매 맺은 믿음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이 땅에 주어야 할 것 아낌없이 주어
썩지 아니한 것과 영광스러운 것과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기 위하여
그 몸을 이곳에 심었으니
이곳은 하나님이 만드신
변화산의 정수리
그들은 하나님께 돌려드릴 흙 한줌으로
누어있으나,
남아 있는 우리, 영혼의 귀를 열면
하늘나라 사랑의 속삭임이 들리네
비밀한 약속의 말씀이 들리네.
백년전에 말씀으로 맺어진 우리
먼저 가신 그분들의 은혜 우러르고
그 사랑을 기려
일천만 성도 삼만교회 우리의 뜻을
하나로 모아
이곳에 집을 세우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된
감사 기도.
이제, 사랑의 반석 위에
주께서 머리되신 교회를 여기 세우셨으니
고난 많은 이 땅과 슬픔 많은 이 민족으로
주님의 뜻을 속히 이루게 하소서.
복음의 빚, 사랑의 빚을 크게 진 우리
이제 약속된 말씀 위에서 성숙한 믿음을 안고
십자가 군병으로 일어서리니
믿음의 승리를 향한 출발의 나팔소리
크게 울리시리라.
땅끝까지 달려가 그곳에 계신 주님을 뵈오리니
주님 홀로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소서
주후 1986년 10월 10일
글쓴이 정영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Robert A. Hardie
1865 ㅡ 1949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대각성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에 뜻을 기리고자 한다.
2006년 5월 24일
존 웨슬리 회심 268주년
기독교대한감리회
하디 가족
Hardie Family (河鯉泳 家族)
Hardie, Maria (1893 ~ 1893)
Hardie, Margaret J. (1903 ~ 1909)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泳)는 1900년대 중반 전개된 한반도 성령대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영적 지도자이다.
하디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교사로 지내다가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을 의술로 돕겠다는 큰 뜻을 갖고 토론토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890년 의사가 된 그는 캐나다 대학생 선교회의 지원으로 한국에 와 부산과 서울 제중원 등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하디 선교사는 1898년 감리교 선교사로 소속을 옮긴 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수년 동안 선교에 온 힘을 쏟았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모든 수고가 헛됨'을 깨닫고 자신이 교만했음을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그의 회개는 선교사들은 물론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운동을 불러 일으켰고,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디 선교사는 성령대부흥 이후 목회자 양성과 문서선교에 공헌했다. 하디 선교사는 한국에서 45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한 후 은퇴하여 미국에서 지내다가 1949년 죽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지 하루 만에 죽은 큰 딸과 여섯 살에 죽은 둘째 딸이 안장되어 있다.
HOMER B. HULBERT
JANUARY 1863 ㅡ AUGUST 1949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일천팔백육십삼년 일월 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일천구백사십구년 팔월 오일 서울에서 별세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인
헐버트 박사의 묘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팔월 십일일
헐벝 박사 장의위원회 세움
헐버트
(Hulbert, Homer B. 訖法 1863 ~ 1949)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23세 때 국립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처음 한국에 와 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후, 귀국하였다가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헐버트는 주로 문서 선교에 헌신했는데, 그가 한국에 관해서 쓴 글들은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다. 그는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헐버트는 특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고종황제의 밀사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했으며, 1907년에는 고종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며 이준 등 세 사람이 밀사를 파견토록 하였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으로부터 비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 달라는 밀명을 받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노력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후에도 헐버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헐버트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다시 왔다가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은 아들 (Shelden Hulbert : 1896 ~ 1897)도 묻혀 있다.
CHARLES A. SAUER
1891 ㅡ 1972
MARGUERITE S. SAUER
1896 ㅡ 1981
ROBERT G. SAUER
1925 ㅡ 1995
MISSIONARIES
IN KOREA
1921 ㅡ 1990
BURIED IN OHIO, USA
이 분들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여
2대에 걸쳐 그들의 전 생애를 한국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임
베롱나무
묘역 내 단체참배객 안내수칙 공고
한국기독교 성지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묘역 훼손 방지와 경건한 참배를 위하여, 본 묘원의 '묘원 관리규정' 제12조(참배 및 성묘 방법에 관한 규정)와 동 규정 제15조 (묘원 참배 수칙)에 따라 단체 참배객 안내수칙을 아래와 같이 공고합니다.
1. 단체 참배객 안내자는 묘역 밖에서 묘역과 관련된 모든 설명을 마치고 참배객과 함께 입장합니다.
2. 단체 참배객은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최대 20명을 한 그룹으로하여 묘역에 입장하며, 한 줄로 질서있게 이동합니다.
한 그룹이 묘역 내 한 장소에 정체하여 다른 참배객의 통행이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합니다.
3. 안내자는 묘역 내에서는 다른 참배객의 경건한 참배를 위하여 각 기의 묘가 누구의 유택(무덤)인지만 조용히 밝힙니다.
4. 참배객이 몰리는 토요일과 공휴일에는 한 그룹의 묘역 내 참배시간을 20분으로 제한합니다.
5. 안내자는 참배객에게 이곳이 관광지가 아니라 기독교 성지임을 주지 시킵니다.
6. 안내자는 묘원관리 또는 선교 등의 이유로 묘역 안내와 관련하여 현금이나 대가를 받지 않습니다.
7. 본 공고는 2008년 9월 1일부터 시행합니다.
양화진봉사관
양화진 책방
쿰
홍성사
삼개나루 나들이길
제4길 망원시장길
양화진 외국묘원 · 망원정 · 망원시장 · 마포구청
성고등학교 동아리 연합
절두산순교성지
① 양화진(楊花津) · 잠두봉(蠶頭峰)의 유래와 역사
'양화진'은 순수한 우리말로 풀이하면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란 뜻이다..그리고 우뚝 솟은 '잠두봉'은 생김새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불렸던 이름이다. 양화나루 · 잠두봉은 15세기 태종 때부터 17세기 인조 때까지 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고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지어 놓고 풍류를 즐기던 이름난 명승자였다.
또한 지리적으로는 서울에서 양천 ·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이자, 삼남지방의 조운선(漕運船)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양화나루는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물품들을 조사하고 조적(盜賊)들을 단속하면 장소가 되었으며, 구한말(舊韓末)에는 청(淸) · 일(日)과 서구열강(西歐列强)에 의해 통상 개시장(開市場)으로 지목되면서 교통 · 상업 · 무역의 요충지가 되기도 하였다.
② 병인양요와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과 한강을 탐사하고,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패퇴한 사건으로, 위정자들에게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866년 10월 이전까지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지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갑자기 양화진으로 변경된 이유는 이 병인양요 때문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 왔고, 강화도에 원정할 수 있도록 천주교 신자들이 도왔으므로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듬해까지 양화진 · 절두봉에서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때부터 이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봉우리'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③ 절두산의 병인박해 순교자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와 교류한 일이 있거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와의 관련 혐의가 있는 신자들이었다. 그들이 포도청의 문초 때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받는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절두산 최초의 순교자 이의송(프랑치스코)도 포도청에서의 문초 때 이러한 추궁을 받고 "서양 선박이 조선에 올 것이라는 이야기는 1865년 12월에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었다."라고 진술하였다. 실제로 이의송 · 김이쁜(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봉익(베드로)는 천주교 신자로 서양세력을 불러들였다는 죄목 아래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또한 강요한은 체포될 당시에 선교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중죄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교회 순교록을 통해 추정되는 병인박해 당시의 절두산 순교자 수는 200명 내외이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 수는 29명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楊花津)은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기에 영조 30년(1754년)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 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양화진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 근대화를 위해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있는데, 이들은 복음전파와 성경번역, 교육과 의료사업,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다.
재단법인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재단은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양화진외국인묘지 소유권을 증여 받았다. 재단은 양화진을 개신교 성지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1986년 한국교회 성도들과 재계 인사들의 헌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했으며, 당시 선교사들이 출석하던 서울유니온교회로 하여금 묘지를 관리하면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하도록 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재단은 정부와 서울시에 명실상부한 개신교 성지공원으로 조성해 줄 것을 거듭 청원하였다. 그 결과 2003년 서울시와 마포구는 개신교의 양화진외국인묘지와 천주교의 절두산 성지를 아울러 '양화진 성지'로 명명하고, 두 성지 사이에 양화진 성지공원을 조성했다. 재단은 2005년 7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여 양화진외국인묘지와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여 명실공히 개신교 성지로 가꾸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재단과 100주년기념교회는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이 묘원의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정했으며, 관련 규정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묘원 개요
1) 명칭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2)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일대
3) 면적 : 13,224㎡
4) 안장자 수 : 417명(선교사 및 그 가족 : 145명)
5) 최초 안장자 : 1890년 7월 28일 존 헤론(John W. Heron), 미국 선교사
6) 안장자 출신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대한민국(15개국)
7) 선교사 출신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스웨덴,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7개국)
8) 소유 :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관리 :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지하철 2 · 6호선 합정역 7번 출입구
마포 걷고 싶은 길 4, 5코스 안내지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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