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0

드무2 2023. 4. 3.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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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0

 

 

 

 

 

 

친일 협력자들

일본은 통치의 안정을 위해 영향력있는 한국인을 포섭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실종친과 고위관료에게 특혜를 주며 자문기구에 참여시켰고,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였다. 한국인 유력자는 이러한 지방자치선거에 참여해 식민지 체제 속에서 지위를 얻고자 하였다. 일부 한국인은 다양한 위치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봉사하였고,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몰았다.

 

 

 

 

 

 

 

 

 

한국병합기념화보

1910년 9월 28일 일본 오사카 신보에서 한국병합을 기념해 제작한 화보이다. 인물사진에서 대한제국 황족 이외에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이완용, 이하영, 송병준, 민병석, 김윤식, 윤덕영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중추원 / 서울역사박물관

 

 

 

 

 

 

 

 

 

중추원 일본사찰단 사진엽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사저를 방문한 중추원 참여자들이다. 중추원은 1910년에 설립된 총독의 자문기관이다. 일제는 친일세력 육성에 활용하였고, 한국인 전직 관료와 유지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참여하였다.

 

 

 

 

 

 

 

 

 

순사 월급 통지서

조선총독부 경상남도에서 1939년 7월 5일 순사 노한기에게 발급한 월급 통지서이다.

 

 

 

 

 

 

경성부회 의원 선거 투표소로 들어가는 사람들

 

 

 

벽에 붙여진 선거 후보자 입간판

 

 

 

● 부세를 줄여서 부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것

● 궁지에 빠진 부 재정의 타개책으로 전기사업을 속히 부 운영으로 할 것

● 수도 사용료를 내릴 것

 

홍필구의 선거공약 중에서, <경성부회의원선거록> (1931)

 

 

 

 

 

 

선거인 준수사항

투표절차와 주의사항이다. 오늘날 기표 방식과 다르게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이름을 자필로 써야 한다. 당시 선거는 제한선거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기본적으로 5원 이상 납세자에 주어졌다. 한국인 중 1% 미만에만 해당되었다.

 

 

 

 

 

 

선거 안내 전단

청주군에서 1931년 5월 21일 실시되는 읍회의원과 면협의회원 선거를 안내하고 있다. 3 · 1운동으로 충격을 받은 일제는 식민 통치의 안정을 위해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선거를 도입해 협력자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도평의원 후보자 김병희 지지 호소문

도평의회는 1920년 설치된 도의 자문기구이고, 의장은 도지사가 맡았다. 의원은 도지사가 임명하는데, 정원의 3분의 2는 부면협의회 의원이 선거로 뽑은 2배수의 인물 중에서 정하였다.

 

 

 

 

 

 

면협의회원 당선 고지서

1931년 선거에서 당선된 이서열에게 발급된 고지서이다. 면협의회는 3 · 1운동 직후인 1920년에 설치되어 군수가 임명한 이들로 구성되었으마, 1931년부터는 선거제가 시리되어 당선된 이들로 구성되었다.

 

 

 

 

 

 

 

 

 

병역은 국민의 의무 중에 최대한 의무다. 나라를 지키는 의무다.

폐하를 머리로 받들고서 이 몸 충복 肱股이 되어 황실을 보필하는 의무이다.

한번 병역의 의무를 치르고 나서야 완전한 국민이 된다.

병역을 안 치른 국민은 반편이다.

그러므로 징병이 고맙다는 것이다.

 

이광수, "앞으로 2년", <신시대> (1942)에서

 

 

 

 

 

 

김동훈 충북도지사의 담화문

담화문은 중일전쟁 발발 다음달인 1937년 8월 16일에 발표되어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동훈은 1909년 대한제국 학부 주사, 1910년 조선총독부 도서기로 근무를 시작해 1935년에 충청북도 지사가 되었다.

 

 

 

 

 

 

애국부인회 문패

애국부인회는 1901년 일본에서 군사후원과 군인유가족 후원을 위해 설립되었고 한국에 조선본부를 두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제동원 정책을 대변하며 자금동원과 특히 여성 노동력 동원에 앞장섰다.

 

 

 

 

 

 

애국부인회 천안군 분회 총회 기념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는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각각 그에 호응하는 조선총독부 조직의 고위관료 부인들로 구성하였다. 이에 일본인 중심이 관변단체로 활동하였으나, 전시동원을 위해 한국인 여성의 참여를 확대시켜 갔다.

 

 

 

 

 

 

조선군사령부 감사장

1937년 조선군 사령부 애국부장이 김성곤에게 발급한 감사장이다. 감사장에는 김성곤이 조선방공기자재비로 의연금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공로자명감>

강제병합 25년 기념으로 1910년부터 1935년까지 식민통치에 공헌한 인물을 정리해 발간한 책이다. 일본인 2,560명과 조선인 353명 등 총 2,913명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강제동원과 저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인에게 전쟁을 위한 삶을 강요하였다. 임금의 강제저축은 물론이고 생필품과 식량의 유통과 소비가 통제되어 궁핍한 일상이 이어졌다. 학생과 여성도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을 해야 하였다.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였고, 일본 국민으로서의 애국심이 요구되었다. 위험한 일터와 전쟁터에 동원되어 생명이 위협받고 인권이 짓밟혔다. 그러나 한국인은 반전 · 반일의 유언비어 유포와 낙서로 저항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1940년 동아일보사 동우회 해산기념 / 독립기념관

 

 

 

 

 

 

 

 

 

<애국반> 1943년 7월 1일

밀정을 경계하는 기사와 해군지원병 모집광고가 실려 있다. 기관지 애국반은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주민조직까지 전달하는 수단으로 후방에서의 마음가짐과 임무에 대해 선전하였다.

 

 

 

놋그릇 공출 / 눈빛아카이브

 

 

 

 

 

 

 

 

 

 

 

 

창씨개명 호적부

일제는 1940년 창씨개명을 실시해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학교진학과 취업 등 생활에 불이익을 받았다. 빨간줄 표시는 일본식 성을 한국성으로 다시 고친 흔적이다.

 

 

 

 

 

 

조선방공협회 찬조회원 문패

조선방공협회는 1938년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주도로 전시 사상동원을 위해 설립된 관변기구이다. 자료는 찬조회원 풍전락순에게 수여한 문패이다. 풍전락순은 조락순의 창씨명이다.

 

 

 

 

 

 

애국반상회 결정사항

애국반은 전시체제에 주민을 통제, 감시하기 위해 10호 戶단위로 조직된 국민총력연맹의 말단조직이다. 애국반은 정기적으로 반상회를 개최하였으며 자료에는 전시체제 하의 구체적인 생활규제 사항들이 적혀 있다.

 

 

 

 

 

 

국채저금통장

1943년부터 국채 발행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국채를 직접 사는 것을 대신하여 은행의 저금통장에 저금을 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저금한 금액은 인출할 때는 현금 대신에 국채를 주었다.

 

 

 

 

 

 

애국채권

조선식산은행이 1943년 12월 발행한 1원 채권이다. 1969년 2월 1일 원금상환에 무이자 조건이다. 다만 1944년 3월 1일 추첨으로 할증금을 준다. 1등 당첨금은 1만원이다. 전시 자금동원에 사행심을 활용하고 있다.

 

 

 

 

 

 

복권

조선식산은행이 전시 자금동원을 위해 발행한 2원 복표, 곧 복권이다. 1944년 12월 발행, 다음해 1월 추첨이다. 당첨금은 최고 1만원이지만, 일부는 국채저금으로 준다. 복권이지만, 원금을 1969년 12월 돌려주는 조건이다.

 

 

 

 

 

 

 

 

 

 

 

 

 

 

 

놋그릇 대용 사기그릇

일체는 군사용품에 사용할 금속 확보를 위해 민가에서 사용하는 숟가락, 놋그릇까지 공출하였다. 대용품 그릇에는 '결전'이라고 써 있고, 어뢰가 그려져 있다.

 

 

 

 

 

 

 

 

 

<조선징용문답>

한국인 징용에 대한 문답식 해설서로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사에서 1944년 발행되었다. 총독부 기사가 글을 썼고 조선노무협회의 이영근이 한글로 옮겼다. 이영근은 당시 대표적인 친일 이론가였다.

 

 

 

 

 

 

 

 

 

근로보국대원 출동명령서

면장과 경찰관주재소에서 1942년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사방사업소에 출근하라는 내용이다.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대를 조직해 지역의 단기사업에 한국인을 동원하였다. 근로보국대의 노동은 1941년부터 법에 의해 강제되었다.

 

 

 

쓰타 신궁 熱田神宮 참배에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소녀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1944년 강원도 평창군 징병제 실시 제1회 입영기념 / 독립기념관

 

 

 

 

 

 

 

농업보국청년대 완장

농업보국청년대는 조선총독부 주도로 1940년경부터 총15회에 걸쳐 한국의 농촌 청년들을 일본농가에 파견해 노동력을 제공한 제도이다. 청년들은 토목건축 노동현장까지 동원되어 무임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면화판매공출 실적기업표

일본이 전쟁 확대로 해외에서 면화 수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한국산 면화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면화에 대한 공출제를 실시하고 생산 농가의 자가 소비까지 제한하였다.

 

 

 

 

 

 

소 공출명령서 및 영수증

1944년 10월 해남군수와 해남경찰서장이 이유 여하를 묻지 말고 군수 통조림용으로 소 한 마리의 공출을 명령하고 있다. 공출영수증은 조선육군창고 검수관이 발급하였다.

 

 

 

 

 

 

양곡배급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1940년부터 생필품에 대한 배급통제가 시작되었다. 1944년 9월 20일 발급된 양곡배급표인데, 지정배급소에서 한 달에 세 번 배급받으며, 가족수에 따라 배급량이 결정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배급물품 장부

1944년 8월 충청북도 양산면 가곡리 상촌구 제5반의 배급 상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날자별로 배급 물품과 수량, 배급받은 사람의 이름을 적었고, 그 밑에 각자의 도장이 찍혀 있다. 배급 물품은 소금, 성냥, 여자고무신 등 다양하다.

 

 

 

 

 

 

육군특별지원병 명패

일본은 한국에서 징병제 실시 전인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만17세 이상 남자 한국인을 군대로 동원하였다. 1943년까지 지원자는 80만 3,317명, 입영자는 1만 7,273명으로 추정된다.

 

 

 

 

 

 

 

 

 

입대전 형제 사진

경상북도 안동의 금강사진관에서 찍은 박태호, 박태일 형제의 사진이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본 해군과 만주 관동군에 입대하였고 1944년 만주에서 사망했다는 글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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