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2

드무2 2023. 4. 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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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2

 

 

 

 

 

 

1937 ㅡ 41

 

 

 

①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를 활보하는 일본군 | NARA (위)

②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 독립기념관 | 1940. 9. 7. (아래)

 

 

 

 

 

 

 

 

 

 

 

 

1937

7 중일전쟁 ①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40

9 한국 광복군 창설 ②

   한국 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중국 충칭에서 창설되었다.

 

1941

4 재미한족연합위원회 ③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역량 결집을 위해 9개 단체가 연합하였다.

4 소련 · 일본 중립 조약 ④

   소련 · 일본 중립 조약은 소련과 일본이 양국간 불가침은 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③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 지도자 | 독립기념관 1942. 3. 8.

 

 

 

 

 

 

 

 

 

④ 소일 중립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외무대신 | 1941. 4. 13. (위)

⑤ 주미외교위원부 협찬회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 1944. 5. 28. (아래)

 

 

 

 

 

 

 

 

 

1941

6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⑤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는 이승만을 선임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며 대미외교의 전면에 나섰다.

12 진주만 공습 ⑥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집결한 미국 태평양함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 ~ 태평양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1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⑦

 

1942

4 한국 광복군, 조선의용대를 편입 ⑧

6 미드웨이 해전 ⑨

   하와이 북서쪽의 미드웨이 섬 해역에서 일본이 패배하며 전쟁이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 주었다.

 

 

 

⑦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 | 독립기념관 | 1941. 12. 10. (위)

⑥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피격당한 미군 구축함 | Getty Images | 1941. 12. 7. (아래 왼쪽)

⑨ 미드웨이 섬에서 일본군 전투기와 교전하는 미군 함대 | Getty Images | 1942. 6. 1. (아래 오른쪽)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 · 영국 · 미국 · 네덜란드 ·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 (擊敗)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 (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거듭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 (倭寇)를 완전히 구축 (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 (血栓)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 (長春, 만주국) 및 남경정권 (南京政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 · 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적용되기를 견결 (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만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대한민국 23년 (1941) 12월 10일

 

* '루스벨트 · 처칠선언'은 '대서양헌장'으로 '강탈된 주권과 자치권이 회복되어야 하며 침략국이 무장해제를 통해 세계평화를 확립한다'는 헌장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강탈 당한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성명서에서 밝혔다.

 

 

 

 

 

 

1943 ㅡ 44

 

 

 

⑧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 1942. 4. (위)

⑩ 영국군과 같이 활동한 한국광복군 대원들 | 독립기념관 | 1943. 8. 29. (아래)

 

 

 

 

 

 

영국군과 같이 활동한 한국광복군 대원들

1줄 왼쪽 : 김성호, 한지성, 영국군 연락장교 베이컨 대위, 송철 | 2줄 왼쪽 : 문응국, 김상준, 박영진, 최봉진, 나동규

 

 

 

1943

8 한국광복군 영국군과 공동작전 개시 ⑩

   인도 주둔 영국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파견해 버마 (지금의 미얀마)에서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12 카이로 선언 ⑪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urse)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처음 보장받았다.

 

1944

4 대한민국임시정부 좌우연합정부 구성

   1930년대 이래 중국에서 독자적 조직과 세력을 유지하던 다수의 좌우의 정당 및 단체가 임시정부 중심으로 통합하였다.

8 조선건국동맹 결성

   여운형을 중심으로 광복을 대비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⑪ 카이로 회담에서 회동을 갖는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 NARA | 1943. 11. 25.

 

 

 

 

 

 

1945

 

 

 

⑫ 얄타회담에 참석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 NARA | 1945. 2. (위)

⑬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국 OSS 대원 | 독립기념관 | 1945. 9. 30. (아래)

 

 

 

 

 

 

1줄 왼쪽 : 노태준, 사전트 (Clyde B.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

 

 

 

1945

2 얄타회담 ⑫

   미국 · 영국 · 소련의 정상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전후처리를 논의하였다. 얄타회담 이후 소련이 대일전선에 참전하게 되었다.

5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공동훈련 ⑬

   한국광복군은 미국 OSS (미국전략사무국, CIA의 전신)와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공동훈련을 진행했다.

7 - 8 포츠담 회담 ⑭

   독일 항복 후 포츠담에서 미국 · 영국 · 중국 · 소련의 정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의논한 회담으로 여기에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8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⑮

   얄타회담 이후 소련은 일본과 맺은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8월 9일에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했으며, 이후 한반도로 진입했다.

8 일본의 무조건 항복 ⑯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본 참전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였다.

 

 

 

⑭ 포츠담 회담 개회 | NARA | 1945. 7. 18. (위 왼쪽)

⑮ 일본에 대한 소련의 선전포고 소식을 담은 신문을 들고 있는 소년들 | NARA | 1945. 8. 8. (위 오른쪽)

⑮ 원산에 상륙한 소련군 | 경향신문 아카이브 | 1945. 8. 22. (아래 왼쪽)

⑯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군 대표 | NARA | 1945. 9. 2. (아래 오른쪽)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이곳은 오랜 시간 덮어 왔던 역사, 잊고자 했던 기억,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주름으로 가득한 생존자의 얼굴을 세밀한 선으로 묘사한 판화 작품과 생존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자기회복과 치유의 흔적을 남긴 할머니들의 미술작품이 연이어 등장하고, 진실을 구하기 위해 함께 분투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한국인 '위안부' 이야기는 식민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딸들의 이야기이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힘없는 여자들의 인생이었음에도, 함께 눈물 흘린 또 다른 여성들이 있었기에, 이 딸들의 이야기는 망각의 늪을 지나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성별을 넘고, 세대를 넘어, 이윽고 국경을 넘어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존재해 온 전시 성폭력과 여성 억압을 고발하는 외침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소망한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이 참혹한 역사의 상처가 아물어가기를. 지배와 폭력이 싹트지 않는 평화의 세계를 함께 열어가게 되기를.

 

 

 

정원철,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2001

15전이 초상 중 7점

리놀륨 원판, 나무 판넬에 납판

 

 

 

 

 

 

김학순 1924 ~ 1997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증언하다. 중국 길림 출생. 1939년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배봉기 1914 ~ 1991

충남 예산 출생. 1944년 11월 오키나와 도카시키섬 위안소로 끌려간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오키나와에 남겨졌다. 1977년 자신을 찾아온 가와다 후미코에게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다.

 

 

 

 

 

 

지돌이 1923 ~ 2008

경북 경주 출생. 열여덟 살에 결혼해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간 뒤 중국 방직공장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1945년 중국 흑룡강성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 갔고, 해방 후 중국에 거주하다 2000년 귀국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다.

 

 

 

 

 

 

강덕경 1929 ~ 1997년

경남 진주 출생. 1944년 열여섯 살 때 일본인 담임교사에 의해 근로정신대 1기로 끌려가 공장에서 탈출하던 중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다.

 

 

 

 

 

 

김순덕 1921 ~ 2004

경남 밀양 출생. 1937년 열일곱 살 때 일본 공장에서 일할 여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중국 상해로 끌려가다.

 

 

 

 

 

 

박두리 1924 ~ 2006

경남 밀양 출생. 1940년 열일곱 살 때 삼량진에서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대만으로 끌려 가다.

 

 

 

 

 

 

김복동 1926 ~ 2019

경남 양산 출생. 1941년 열다섯 살 때 군복 만드는 공장에 안 가면 배급을 끊는다는 동네 반장의 협박에 따라 나서 중국 광둥에서 싱가포르까지 여러 지역으로 끌려 다니다.

 

 

 

생존자들이 남긴 그림과 압화 작품

 

 

 

눈 내리는 풍경

강덕경

 

 

 

 

 

 

라바울 위안소

강덕경

 

 

 

 

 

 

 

빼앗긴 순정

강덕경

 

 

 

 

 

 

심술쟁이 우리 선생

강덕경

 

 

 

 

 

 

책임자를 처벌하라 (평화를 위하여)

강덕경

 

 

 

 

 

 

14세 소녀시 끌려가는 날

김복동

 

 

 

 

 

 

고향집

김복동

 

 

 

 

 

 

일본은 범하지 마라 (독도는 우리 땅)

김복동

 

 

 

 

 

 

한많은 여인이여 부처님께 기도하라

김복동

 

 

 

 

 

 

버섯공출

김순덕

 

 

 

 

 

 

끌려감

김순덕

 

 

 

 

 

 

만남

김순덕

 

 

 

 

 

 

못다 핀 꽃

김순덕

 

 

 

 

 

 

씨앗공출

김순덕

 

 

 

 

 

봄날은 간다

김순악

 

 

 

 

 

 

순악

김순악

 

 

 

 

 

 

마음의 선물

김순악

 

 

 

 

 

 

소식

김순악

 

 

 

꽃의 향연

심달연

 

 

 

 

 

 

병화2

심달연

 

 

 

 

 

 

붕어1

심달연

 

 

 

 

 

 

전쟁, 없어져야 한다 2

심달연

 

 

 

 

 

 

소녀

심달연

 

 

 

 

 

 

중국에서

배춘희

 

 

 

 

 

 

끌려가는 조선처녀

이용녀

 

 

 

 

 

 

외롭게 살던 곳 퇴촌

이용녀

 

 

 

 

 

 

 

 

 

 

 

 

 

슬라이드 영상

그림과 압화 1993 ~ 1998 · 2005년 제작

나눔의 집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제공

 

 

 

증언 목소리

문필기 1925 ~ 2008

경남 진양 출생 열여덟살 때 만주로 끌려감

김순덕 1921 ~ 2004

경남 밀양 출생 열일곱살 때 상하이로 끌려감

김화선 1926 ~ 2012

평남 평양 출생 열다섯살 때 싱가포르로 끌려감

황금주 1922 ~ 2013

충남 부여 출생 열아홉살 때 만주 길림으로 끌려감

김복종 1926 ~ 2019

경남 양산 출생 열다섯살 때 중국 광저우, 홍콩, 싱가포르로 끌려감

안법순 1925 ~ 2003

경기도 양평 출생 열여섯살 때 싱가포르로 끌려감

윤두리 1928 ~ 2009

경남 부산 출생 열다섯살 때 부산 영도로 끌려감

심달연 1927 ~ 2010

경북 칠곡 출생 열두살 때 대만, 만주, 사할린으로 끌려감

최갑순 1919 ~ 2015

전남 구례 출생 열네살 때 중국 동안성으로 끌려감

김순악 1928 ~ 2010

경북 경산 출생 열다섯살 때 중국 베이징, 하얼빈, 내몽고로 끌려감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 아시아프레스 2002년 제작 영상에서 추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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