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1
① 일본어 사용 장려 포스터
훌륭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 국어, 곧 일본어 생활을 실행하고자 적혀있다. 당시 일본어 사용과 보급은 징병제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어를 생활 전반으로 확대시키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② <매신 사진 순보>
조선총독부 기관지 발행처인 매일신보사가 1940년부터 발행한 잡지이다. 표지에서는 국민복을 입고 목검을 든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총독부는 전쟁 홍보와 정신교육을 위해 시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③ 애국기 헌납 모금 전단
자료에 '모두 헌금', '애국기 충남호 헌납'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충남호라고 이름이 붙인 것은 충남 지역민에게 '헌금'을 동원하려는 의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각 지역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④ 저축장려전단
전라남도 금융조합에서 만든 전단이다. 일제는 전시자금동원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축을 강요하였다.
⑤ 금융조합기념일 포스터
금융조합은 식민지 금융기관으로 각 지역에 설치되었고, 전시체제기에는 강제저축을 통해 전쟁비용 조달창구의 역할을 했다. 자료에는 '평화의 종소리 들리는 곳에 희망은 높고 인간은 즐겁네'라고 쓰여져 있다.
⑥ 애국반 포스터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기관지 '애국반'의 포스터로 전시체제기 후반의 임무를 선전하고 있다. 각 칸은 '으쌰, 결전생활' 구호와 함께 일찍 일어나기, 무지각, 무결근, 저축, 절약, 몸베 사용 등이 적혀있다.
⑦ 황국신민서사 전단
1937년에 제정된 서사, 곧 맹세는 공식적, 비공식적 행사에서 강제되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정신적 부담을 주었다. 첫 번째 내용은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이다. 아동용 맹세도 있었다.
⑧ 궁성요배 전단
궁성요배는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하도록 강요되었고, 이를 위해 전단에는 '보기 쉬운 벽에 부치시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⑨ 신사참배 전단
신사는 일본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이다. 1937년 일본에서 국민을 전쟁 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시작한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은 다음해 한국에서 철저히 관제 운동으로 실시되었다. 각종 지침으로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선동과 낙서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에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를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각종 선전물을 배포하며 한국인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하였다. 한국인은 이러한 선동과 통제에 저항하였다. 평범한 이들이 일제의 폭력에 드러나게 맞서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반전 반일이 낙서와 이른바 '유언비어' 유포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곳곳에서 시도된 일상의 저항은 동원체제를 조금씩 균열시켰고, 사람들은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식민지배자의 기록으로만 남겨진 이들의 소리없는 외침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광복의 준비
한국인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하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좌우합작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1935년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연합국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였고,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다. 광복을 향한 마지막 대일 항전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김구 피격 비밀유지 당부 서신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위한 1938년 5월 회의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 김구가 부상을 당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위원들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며 원활한 통합을 위해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혁명단체 대표대회 선언 및 해소 선언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항일을 기치로 좌우를 망라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노력이 있었다. 1935년 남경에서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단체가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좌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합의하고 발표한 내용이다. 기존 운동방법애 대한 반성과 10개의 정치정강 아래에 단일 조직의 수립을 강조하였다.
한국 광복군 제2지대 훈련모습
조선독립군가
조선독립군의 군가 1, 2절이 적혀있다. 1절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며 2절은 적과 싸워 독립을 이루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채원개 환송 기념사진
1933년 광저우에서 채원개가 항일전쟁 참여 전에 양우조 (좌), 김봉준 (우)과 찍은 사진이다. 채원개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34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고,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처장이 되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배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배지이다. K. I. A. Korea Independence Army와 숫자 2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건국강령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이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 아동의 전체가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1941년 11월 공포
1942년 좌우익 세력이 통일을 이룬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 / 독립기념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행사 참관기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행사가 거행되었다. 당시 실무 담당자 엄항섭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자료이다. 참석자들의 축하 인사말과 중화민국 군부 인사의 참석을 확인할 수 있다.
<투성한국청년신분장>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귀순한 한국청년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이다. 총 47명의 본적, 호주 이름 및 관계, 본인 성명, 나이, 약력, 건강상태 등이 적혀 있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반일 시위 / 눈빛아카이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및 임시정부 조직도
1940년 임시약헌의 제4차 개헌을 반영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도이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나 1940년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최고 지도자로서 주석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및 임시정부 역대일람표
1919년부터 1942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장의 명단과 임시정부의 정부형태, 그리고 각 행정부처 각료의 명단을 표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연합해 일본을 타도하자' 구호를 쓰고 있는 조선의용군 대원
조선독립동맹 성명서
조선독립동맹은 중국 화베이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사회주의자 중심의 단체이다. 성명서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산하 무장단체인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알리고,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는 인민총의의 정권만을 존중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내막을 파헤치다>
1941년 이승만이 펴낸 Japan Inside Out의 두 번째 판본이다. '침략야욕의 가면을 벗으려 하는 일본', '일본의 선전 책동을 막아야 한다',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등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잠행중앙관제>
등록문화재 제549호
1944년 5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 공포한 임시정부의 관제이다. 임시정부는 좌우연합 정부를 구성하면서 1944년 5차 개헌을 실시하고 행정조직과 권한을 변경하였다.
인구세 증가 및 징수에 관한 공문
인구세를 해당지역 통화 1원에서 10원으로 증액하였으니 만 18세 이상은 기간내에 납부하라는 내용이다. 1944년 6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장 조완구의 명의로 공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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