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⑪ 병사가 많았던 옛 땅 군우리

드무2 2021. 5. 2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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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⑪ 병사가 많았던 옛 땅 군우리

 

 

 

중공군들이 1950년 11월 30일 평북 개천 군우리 남쪽의 계곡에서 퇴각하는 미 2사단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미군들이 나중에 ‘시련의 길’로 불렀던 이 지역에서 미 2사단은 2개 연대와 공병대대 등 전체 병력의 3분의 2가 궤멸하는 타격을 입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전쟁 내내 국군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이 여러 면에서 미군에 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 2사단, 10㎞ 길고 긴 협곡으로 퇴각 … 비극은 시작됐다

 

 

2차 대공세를 펴는 중공군의 노림수는 우선 동쪽 전선에 있었다. 국군 2군단이다. 2군단은 운산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 큰 피해를 봤다. 압록강 물을 뜨러 올라간 2개 연대가 고립되면서 궤멸 상태에 빠져 결국 국군 6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는 위기를 낳았다. 국군 7사단과 8사단도 인원과 장비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렸다. 동쪽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서 그 서쪽에 있던 미군의 형세가 매우 위험해졌다. 그곳에서 드디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운산(雲山) 이북은 험준한 적유령산맥이 동에서 서쪽으로 지나간다. 이 산맥은 순우리말로 ‘되너미 고개’로, 중국 쪽에서 쳐들어온 적이 이곳을 넘어 남녘으로 내려간다는 뜻에서 지어진 게 분명하다. 그 아래쪽에는 군우리(軍隅里)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개천이라는 곳에 속해 있는 작은 땅이다. 이 땅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은 병력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라는 한자 지명의 우리말 원전은 ‘모루’다. 모퉁이를 뜻하는 말이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곳을 일컬을 때 ‘솔모루’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군우리는 즉, 군모루다. 과거 조선 때 늘 병력이 주둔하던 곳이라는 얘기다. 지명 관련 책을 나중에 찾아 봤다. 역시 그런 해석이 붙어 있었다.



되너미 고개에서 넘어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항상 병력이 머물렀던 곳이 군모루, 즉 당시의 군우리다. 군우리는 그 남쪽으로 긴 협곡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지나면 순천이라는 곳으로 직접 통한다. 순천은 평양과 인접한 곳이다. 군우리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면 북으로부터 쳐내려온 적군들은 순천으로 나가 평양까지 단숨에 치달을 수 있다. 이를테면 군우리는 군사적인 요충이었다.

 

 

 

 

 

 

잘못된 판단이 거듭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곳에 진출해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나섰던 미 9군단의 사령탑 안에서 말이다. 역시 그들은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에 대해 방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군우리에 진출하면서 미군은 그 지형적 조건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나선 이 지역의 미군은 2사단과 25사단이었다. 미 25사단은 강력한 중공군의 반격에 직면해 신속하게 후퇴한다. 그러나 미 2사단이 문제였다. 생각보다 강한 중공군의 공세를 보고서는 당황한 채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후퇴하는 길은 두 갈래다. 서쪽으로 우회한 뒤 남하하는 길과 군우리 남방에서 몇 ㎞ 떨어져 있으면서 길이는 10여 ㎞ 정도 되는, 산과 산 사이로 난 길을 지나는 두 가지 방법이었다. 미 2사단은 우회하는 길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길에는 이미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퇴각하는 미군 등 연합군 부대와 피란민 행렬이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남쪽으로 난 계곡을 지나야 했다.



그 계곡은 두 가지 군사적인 의미를 지녔을 게다. 우선은 남북으로 직접 통하는 지름길이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이곳을 먼저 점령할 경우 공격적인 우세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군의 지휘부는 이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 계곡을 지나 북상하면서 최소한 작전상의 포석(布石)이 필요했을 것이다. 군데군데 병력을 남겨 계곡 위쪽을 지키면서 퇴로를 확보하는 개념의 작전이다. 미군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퇴로를 미리 확보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점이 군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을 통틀어 최악의 참패를 맞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의 하나다.



그 좁고도 험하며, 또 매우 길었던 좁은 계곡에서는 우회와 매복, 그리고 포위 공격에 능한 중공군이 밤안개처럼 들어차고 있었다. 전후에 미군들은 이 길을 ‘시련의 길’로 불렀다. 짧지만 희생이 컸던 곳에는 ‘죽음의 고개’란 별명을 붙였다.



1950년 11월 30일. 사단의 후미에서 따라오던 프리만 대령의 23연대를 제외한 미 2사단의 대부분 병력이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이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길로 침착하게 제 앞에 다가서는 제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쳐놓은 덫은 강하고도 모질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⑪ 병사가 많았던 옛 땅 군우리

 

 

 

[전쟁사 돋보기] 미 보병2사단

 

 

 

6·25전쟁 발발 뒤 미국 본토에서 한국으로 직접 투입된 첫 부대다. 1950년 8월 31일부터 16일간 낙동강 방어전투를 치르면서 군악병·기술병·보급병·행정병까지 전투에 참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50년 11월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전력의 3분의 2를 잃었으나 재정비해 51년 원주 전투와 양평 지평리 전투에 참가했다.



미 본토서 직접 투입된 첫 부대
지금도 한국 주둔하는 ‘전사 사단’

 

 

6·25전쟁 동안 7094명이 전사했고 1만6575명이 부상했으며 338명이 부상 치료 중 숨졌다. 양차 세계대전과 6·25 때 격전을 많이 치러 1만5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인디언 용사의 머리가 그려진 부대마크(사진) 때문에 ‘인디언 머리 사단’ ‘전사(戰士)사단’으로 불린다. 모토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second to none)’이다. 휴전 뒤에도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고 있으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했다.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미 보병2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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