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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영원한 집] 02

드무2 2023. 8. 2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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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영원한 집] 02

 

 

 

 

 

 

서울 아틀리에 (1959ㅡ1973)

 

 

귀의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사진 (왼쪽)

이 자료는 김복진 사후 윤호중과 권진규가 마무리 작업을 해서 1948년 완공한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을 촬영한 사진을 재촬영한 사진이다.

 

 

 

권진규 신문기사 스크랩 (가운데)

MC 2014. 01 / I a003 / 0003,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62년 10월 3일 「동아일보」에 실린 「하늘에서 본다 6 : 속리산 법주사 俗離山 法住寺」 기사 스크랩을 촬영한 사진이다.

 

 

 

권진규 신문기사 스크랩 (오른쪽)

MC 2014. 01 / I a003 / 0003,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62년 10월 2일 「** 일보」에 실린 「두 석굴암의 비교」 기사 스크랩을 촬영한 사진이다.

 

 

 

 

 

 

<드로잉 북 18> (왼쪽)

1971, 종이에 혼합매체, 25.3 × 35.5㎝,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 자료는 권진규가 <드로잉 북 18>에 그린 불상 드로잉 중 하나이다.

 

 

 

권진규가 조카 허명회에게 보낸 편지 (오른쪽)

MC 2014. 01 / V c / 0008, MC 2014. 01 / V c / 0012,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권진규가 1971년 2월 28일부터 3월 29일까지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기거하면서 목조 불상 제작에 전념할 때 조카에게 보낸 편지를 재촬영한 사진이다.

 

 

 

<철조여래좌상> 사진 (위 왼쪽)

MC 2014. 01 / b 003 / 0002,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전시 중인 고려시대 철불을 촬영한 사진이다.

(내용 출처 : 2015년 박형국 서면 인터뷰)

 

 

 

<입산> (위 오른쪽)

1964, 종이에 연필, 19.8 × 27㎝,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 자료는 권진규가 목조 <입산> (1964)을 제작하기 전에 그린 드로잉이다.

 

 

 

권진규가 이혜상에게 보낸 편지 초안 (아래)

MC 2014. 01 / V c / 0014,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71년 4월경 권진규가 이혜상 (혜상 스님)에게 보낸 편지의 초안으로 추정된다. 밀양 출신 승려 이혜상은 불사를 진행하면서 불상 제작을 권진규에게 부탁하고 통도사와 표충사 등 권진규가 산사에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알선한 인물로 1970년대 초반 권진규의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스님이다. 권진규는 1971년 2월 28일부터 3월 29일까지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목조불상 제작에 전념하고 서울에 복귀하지만 군부독재반대 데모로 인해 대학이 휴강하자 다시 입산을 계획한다. 이 편지에는 권진규가 이혜상에게 수양과 불상 제작을 할 수 있는 암자 주선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권진규는 조용한 암자에서 불상을 조각하면서 수양할 생각이었지만 결국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내용 출처 : 2015년 박형국 서면 인터뷰.)

 

 

 

 

 

 

<드로잉 북 9> (위)

1960년대, 종이에 혼합매체,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 자료는 권진규가 <드로잉 북 9>에 그린 불상 드로잉들이다.

 

 

 

제3회 개인전 《권진규 테라코타 : 건칠》 (1971. 12. 10. ㅡ 16., 명동화랑)

 

 

 

권진규와 김문호를 촬영한 사진 (위 왼쪽)

MC 2014. 01 / I a 002 / 0003,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71년 12월경 권진규와 명동화랑 김문호 사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내용 출처 : 2015년 박형국 서면 인터뷰)

 

 

 

아틀리에에서의 권진규 (위 오른쪽)

MC 2014. 01 / I b 005 / 0009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권진규가 아틀리에에서 석고틀을 이용하여 건칠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내용 출처 : 2015년 박형국 서면 인터뷰.)

 

 

 

《권진규 : 테라코타 : 건칠》 (1971. 12. 10. ㅡ 16. 명동화랑) 개막식 사진

MC 2014. 01 / I a 002 / 0042,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71년 12월 10일부터 12월 16일까지 명동화랑에서 열린 《권진규 테라코타 : 건칠》 개막식을 촬영한 사진이다. 권진규, 권옥연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내용 출처 : 2015년 박형국 서면 인터뷰.)

 

 

 

《권진규 : 테라코타 : 건칠》 브로슈어 (위)

MC 2014. 01 / II a / 0003,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71년 12월 10일부터 12월 16일까지 명동화랑에서 열린 《권진규 TERRA COTA : 건칠 權鎭圭 TERRA COTA : 乾漆》 브로슈어를 촬영한 사진이다.

서문 (유준상 「권진규 權鎭圭, 그 예술세계」), 작가 약력, 작품 이미지 등이 실려 있다.

 

 

 

<드로잉 북 13> (왼쪽)

1973년경, 종이에 혼합매체, 26 × 34.5㎝,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 자료는 권진규가 1973년경 그린,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자화상 드로잉이다.

 

 

 

《현대미술실 개설 기념전 1973 現代美術室 開設 紀念展 1973》 (1973. 5. 3. ㅡ 12., 고려대학교 박물관) 개막식에서의 권진규 (오른쪽)

MC 2014. 01 / I d 001 / 0001,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과천, 대한민국.

이 자료는 1973년 5월 3일 《현대미술실 개설 기념전》 개막식에 참석한 권진규를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권진규이다.

(내용 출처 : 《권진규》, 국립현대미술관, 2009, 322쪽.)

 

 

 

<가사를 걸친 자소상>

1969ㅡ1970, 테라코타, 49 × 23 × 3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서울.

ⓒ 박명래,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이 자료는 권진규가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작품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촬영한 사진이다. 가사를 걸치고 길게 뻗은 목 위로 맑은 두 눈을 위로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에서 이미 생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인연

권진규는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여성 두상과 흉상을 많이 제작했다. 1963년 어머니가 춘천에서 11세 박영희를 데려왔는데, 가사를 돕는 가운데 종종 그의 작품 모델을 서곤 했다.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그에게 영희는 훌륭한 모델이었다. 그는 1965년 신문회관에서 수화랑 초대로 첫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출품작품은 주로 부조, 남성상, 자소상, 작은 여성상 등이었다. 이 전시는 미문화원장 부부, 평론가, 작가, 언론인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관람했고, 작품판매와는 상관없이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기서 만난 인연들로 고유한 미감의 여성 흉상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시를 보고 감동한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학생 이선자가 아틀리에를 찾아와 조각을 배우고 모델을 서면서 그는 1966년에 작품 <선자>를 다수 제작했다. 또한 선자의 고등학교 친구인 남명자, 강애자, 최명자 등이 자주 놀러 오면서, 쉽게 모델을 구하게 된 그는 여성 두상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전의 작품처럼 두상에는 쪼갬 볼 사용으로 생긴 선이 살아있는데, 이는 흉상에도 이어졌다. 한편 그는 전시장에서 친척 권옥연의 소개로 당시 신문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유준상을 알게 됐다. 유준상은 미대생 이순아, 연극배우 지망생 나혜정, 신문회관 직원 등을 모델로 소개했다. 그는 이들과 홍익대학교 제자들의 흉상을 제작했다. 그는 모델의 내적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기 위해 알고 지내는 여성들을 작업 대상으로 삼았고, 특히 입체적인 얼굴을 선호했다. 그중 제자 장지원을 모델로 한 <지원의 얼굴> (1967, 국립현대미술관)은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약간 들어 시선을 위로 하고 긴 목을 앞으로 살짝 뺀 모습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주는 강한 정신성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고대 이집트 미술이 대상을 표현할 때 세부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의 본질에 집중했던 것처럼, 정면을 향한 얼굴과 시선을 가진 여성 흉상은 지극히 단순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정수 精髓를 드러내 마치 구도자처럼 보인다. 1968년 일본 니혼바시 화랑 개인전 관련, 7월 18일자 『요미우리신문 読売新聞』 기사 「권진규 개인전 : 강인한 리얼리즘」에서 그의 여성 흉상에 관해 "모두 모델을 두고 제작한 것인데,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살을 최대한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 forme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로 긴장감이 표현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 고 언급했다. 그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기존의 테라코타 석고 틀, 어머니의 삼베 그리고 옻칠을 사용하여 건칠 여성 흉상을 제작했다. 그는 건칠 표면이 가질 수 있는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버리고, 고택의 기와와 같은 색과 질감을 위해 삼베를 거칠게 붙이고 색을 어둡게 칠했다. 이로서 같은 틀에서 나온 테라코타 작품과 비교했을 때 보다 더 고양된 정신성이 느껴진다. 그의 건칠 작품은 석고 틀을 깨는 일본 건칠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테라코타와 달리 단 하나의 작품만 존재한다.

권진규는 테라코타로 시작해서 건칠로 거듭나는 독자적인 여성상을 구현했는데, 이는 그가 개인전을 계기로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내적 교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선자>

1967, 석고, 29 × 14 × 15.9㎝,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선자> (1967)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이선자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 머리카락을 최대한 생략하여 입체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권진규가 제작한 여성 인물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특징은 두상 頭像의 머리 가운데 선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데 있다"고 한 도모 여사의 말처럼 이 작품은 코를 중심으로 상하 좌우로 형틀 선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예선>

1968년 10월, 테러코타, 46 × 31.7 × 25.2㎝,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소장

<예선>은 당시 신인 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신예선은 1966년 『에뜨랑제여 그대의 고향은』을 출간했다. 권진규는 이 책을 읽은 뒤 그에게 모델을 제의, <예선>을 제작했다. 이는 그가 소설가로 활동하면서도 권옥연, 김흥수 화백과도 예술적으로 깊이 교류했기에 중간에서 권옥연이 다리 놓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 꾸준히 글을 썼고 극작가, 음악인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 역시 일찌감치 그의 문학에의 열정을 이해하고 내면의 단단함을 작품에 담았음을 알 수 있다.

 

 

 

 

 

 

 

 

 

 

 

 

 

 

 

 

 

 

<경자>

1971년경, 건칠, 46.4 × 36.4 × 27.7㎝,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소장

<경자>는 1967년 홍익대학교 제자 최경자를 모델로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의 틀을 이용해 1971년경 다시 건칠로 제작한 작품이다. 권진규는 일찍부터 건칠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69년 집 근처 부흥교회에서 의뢰한 그리스도상을 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칠 작업을 시작했다. 권진규는 주로 삼베를 사용했는데 권경숙에 따르면 집에 삼베 이불이 많기도 했고, 그가 삼베가 오래 가고 한국의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작업을 했다고 한다. <경자>는 마치 삼베가 다 일어나고 빛이 바랜 듯 보이지만, 실은 그의 건칠 작품의 고유 특성이다. 건칠 작품은 재료가 천과 옻칠인 데다가 속이 비어 가볍지만 작품의 느낌은 내면의 무게감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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