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 / 그래픽 = 진봉기
연간 닭 600억 마리 도축··· 닭뼈, 현 시대 지표 화석 될 수도
조상 닭보다 다리 크지만 뼈는 왜소
탄소 입자 · 미세 플라스틱 등에서도
지구가 급격한 모습 찾을 수 있어요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 지질학회에서 "우리는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 (世)에 살고 있다" 고 말했어요.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가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에, 현 지질 시대를 '인류세 (인류의 시대)' 라 부르자고 제안한 겁니다. 인류세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쓰이던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이 '인류세' 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어요. 빠르면 내년부터 공식적으로 이 용어가 사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류세란 무엇일까요?
지표 화석을 보면 시대를 알 수 있다
인류세를 알기 위해선 먼저 지질 시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지질 시대는 과학자들이 땅에서 발견되는 특징과 화석을 바탕으로, 지구가 태어난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시기별로 구분한 것을 말해요. 가장 큰 단위부터 순서대로 '누대 - 대 - 기 - 세 - 절' 로 나누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로 불러요.
지질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땅 모양이나 구성, 화석 종류가 달라요. 그중 화석은 특정 지질 시대에 살았던 몸체나 흔적이 땅속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해요. 보통 뼈나 이빨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드러운 다른 조직과 달리 단단하면서도 시간이 오래 지나도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 동물이 땅 위를 걸어 만들어진 발자국도 있고, 소나무에서 나온 수액 '송진' 이 굳어져 호박이 되는 동안 모기나 꽃가루가 그 속에 갇혀 그대로 화석이 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발견된 화석은 과학자들에게 일종의 '타임머신' 이 됩니다. 화석을 보면 그 생물이 살았던 시대의 특징을 알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지층에서 공룡의 뼈나 이빨 화석이 발견되면, 과거 그 장소에 공룡이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또 지구 환경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견된 암모나이트 화석이 대표적입니다. 암모나이트는 오랜 옛날 바다에서 살던 동물로, 조개와 비슷한 생물이에요. 이 화석을 통해 현재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히말라야 산맥이 아주 오래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답니다. 이처럼 특정 지층에서 발견돼 지질 시대를 특정할 수 있게 해주는 화석을 '지표 화석' 이라고 한답니다.
인류세의 지표 화석은 닭뼈?
먼 미래의 생명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화석을 통해 추측한다면, 어떤 시대라고 부를까요? 한 과학자는 지금이 '치킨의 시대' 로 불릴 거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2018년 영국 레이터대 지질학과 캐리스 베넷 교수팀은 '닭뼈' 가 지표 화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1년 동안 약 500억 ~ 600억 마리의 닭이 도축될 정도로 인류가 닭을 많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먹고 남은 닭뼈는 쓰레기장에 모이는데, 이곳은 산소가 부족해 뼈가 잘 썩지 않고 모습이 그대로 화석처럼 남을 확률이 높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조류인플루엔자 (AI)가 발생해 닭 1000만 마리 이상을 한꺼번에 땅에 묻기도 해요. 먼 미래에 후손이 이 닭뼈 화석 무더기를 발견한다면, 지금을 닭이 많이 살던 시대로 여길 수 있겠죠.
연구팀은 과거에 비해 닭의 크기가 눈에 띄게 달라진 점도 증거로 들었어요. 현재 우리가 식용으로 길러서 먹는 품종인 '육계' 와 오래전 지구에 살았던 직계 조상 닭인 '적색야계' 의 다리뼈를 비교해 본 결과, 육계가 2 ~ 3배 정도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원인은 1950년대 즈음 인간이 빨리, 크게 자라는 닭 품종을 집중적으로 키웠기 때문이에요. 연구진은 육계가 오래전 닭에 비해 다리와 가슴은 훨씬 크지만 심장과 뼈는 왜소해졌고, 너무 빨리 자라느라 뼈에 구멍이 많다는 특징을 찾아냈어요. 닭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도 지질 시대를 인류세로 구별하는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겠죠.
내년 부산에서 인류세 공식화?
최근 과학자들은 인류세를 보여주는 대표 지층인 '국제표준층서구역' 으로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선정했다고 밝혔어요. 또 그 증거가 되는 지표로 '플루토늄' 이라는 방사성 물질을 지정했습니다.
이 과학자들은 전 세계 지질학자 30여 명으로 구성된 '인류세실무그룹(AWG)' 으로, 이 모임은 2009년 만들어졌어요. 이후 세계 각국의 과학자가 제안한 인류세 후보지를 검토했지요. 호주 플린더스 산호초, 남극 파머빙하의 코어 등 총 12군데였습니다.
검토 결과 크로퍼드 호수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인류세실무그룹은 이 호수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현재 지질 시대의 특성을 나타내는 물질이 호수 바닥에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어요. 이 호수는 수심이 29m로 깊은데 면적은 작고, 동식물이 많지 않아 물질이 온전하게 쌓여 있어요.
인류세의 지표인 플루토늄은 인간 활동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물질이에요. 1940년대 후반 원자 폭탄 실험이 자주 있었고, 1945년에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이 터졌어요. 이로 인해 대기와 땅 등 지구 곳곳에 방사성 물질이 퍼졌죠. 미래의 지질학자는 현재 지구 지층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연구진은 화석연료 발전소에서만 나오는 탄소 입자와 미세 플라스틱 또한 인류세의 특징을 나타내는 물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인류세실무그룹은 내년 8월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지질학총회에 의견을 내고, '인류세' 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할 예정이랍니다.
이윤선 과학칼럼니스트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7월 25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