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6
제주에서 전승되는 무속 신화 ㅡ 세경본풀이
「세경 본풀이」는 농경신으로 좌정한 자청비와 문도령, 정수남 세 명의 이야기를 큰 줄기로 하여 풀어 나가는 무속 신화이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오곡씨가 전해져 농사를 짓게 된 경위가 들어 있어 우리 민족의 농결 기원 신화로도 볼 수 있다.
제주 큰 굿 때 '시왕맞이' 다음의 제차로 행해지는 데, 심방이 주로 농사와 가축의 풍년과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구송하는 본풀이로서, 다른 본풀이와 달리 길이가 무척 길고 내용이 풍부해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다른 본풀이 제차와 마찬가지로 평복 차림의 심방이 기본 제상 앞에서 앉아서 장구를 치면서 농경신의 내력을 노래한다. 먼저 굿을 하는 이유를 노래하고, 이어서 본풀이를 한 다음 기원을 하고 굿을 끝낸다.
며느리가 되기 위해 작도에 오르다.
문도령의 며느리를 정하기 위해 문도령의 부모님은 서수왕따님과 자청비를 불려들여 무서운 과제를 내걸었다. 쉰자 구덩이를 파 놓고, 숯 쉰 섬에 불을 피워 작도를 걸어 놓고 작도를 타 나가고 타 들어와야 며느릿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서수왕 막내딸이 와들와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자청비는 작도 위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칼날 위로 걸어 나갔다.
작도 끝에 다다라 한 발을 땅에 내리려는 순간 발뒤꿈치가 슬쩍 끊어졌다. 붉은 피가 불끈 솟았다.
자청비는 속치맛자락으로 얼른 싹 쓸었다.
그 법으로 여자 아이 열다섯 살이 넘어가면 다달이 몸에 생리 오는 법을 마련했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9. 문도령과 자청비의 시련
문도령과 자청비는 혼인 후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하늘 옥황에선 자청비가 살림을 알뜰하게 한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데 시기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문도령을 죽이고 자청비를 괴롭히자고 모의했다. 자청비는 주변의 시기하는 자들의 모의를 눈치 채고 대비를 한다. 하지만 문도령은 할머니가 건넨 독주를 마시고 급사를 한다. 마음씨 고운 문도령이 할머니를 가엾게 여겨 한푼 주고 받아먹은 술이었다. 자청비는 주변의 의심을 침착하고 슬기럽게 넘겼다. 그리고 서천꽃밭으로 가서 환생꽃을 얻어와 문도령을 살려낸다. "서방님, 이제 잠에서 깨어나시오! 어여 일어나시오!"
인간세상의 모든 생명이 피어나는 서천꽃밭
과거를 핑계대고 떠나기에 앞서 자청비는 부인인 꽃감관의 딸과 서천꽃밭을 구경하였다.
꽃밭을 들어서보니 오색찬란한 꽃들로 뒤덮인 언덕과 물과 계곡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 꽃밭에는 인간세상 생명의 숫자만큼 꽃이 피어 있답니다. 낭군님 꽃도 있을 겁니다."
"이 꽃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환생꽃입니다. 이 꽃은 무성하게 가지를 뻗게 하는 번성꽃입니다.
이 꽃은 시들시들하다가 죽게 되는 검뉴울꽃입니다. 이 꽃은 웃음 짓게 하는 웃음꽃입니다.
이 꽃은 살 오르게 하는 살오를꽃입니다. 이건 피오르게 하는 피오를 꽃입니다.
이건 죽음을 주는 수레멸망악심꽃입니다. 이건 싸움하게 하는 싸움할꽃입니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선바람' 으로 달려 나갔다.
예쁜 순우리말 지금 차려 입은 그대로의 차림새
청소년의 거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이문재 『어떤 경우』 中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 마저 잃었을 때도 나는 온다
아름다움만으로는 모자라
너는 그토록 많은 씨앗을 품고 있었구나
박람희 해바라기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中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윤동주 반딧불
행복은
삶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 만난다
김정한 『고마워용 내 사랑』 中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나태주 『행복 2』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서혜진 『너에게』 中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허허당 『머물지 마라』
우리가
신호등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곧 바뀔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곧 바뀔거야
좋게
김동혁 『신호등처럼』
사람이, 사는 것이
별것인가요?
다 눈물의 굽이에서 울고 싶고
기쁨의 순간에 속절없이
뜀박질하고 싶은 것이지요
사랑이, 인생이 별것인가요?
김용택 『인생』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진다
『법구경』 中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보면 보이리 길이
김규동 『해는 기울고』 中
씨 한 알의 덴 상처가
꽃이 됨을 너는 아니?
뜨거움을 참다가 터뜨린 하얀꽃
상처가 꽃으로 피는 걸 보여주고 있는거야
김영기 『붕어빵』 中
당신이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에 당신같은 존재가
당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혜민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中
그대에게
예쁘다고 말하니
말과 말 사이에 꽃이 피었다
흔글 『봄』 中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그걸 무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나호열 『 당신에게 말걸기 』 중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있기 때문이다
한상경 『나의 꽃』 中
미풍해장국
천주교 제주교구 주교좌
중앙성당
제주유배길 ㅡ 성내유배길
제주 유배길 : "제주 유배길에서 나를 찾다"
<제주 성안 유배길>
제주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옛 제주성을 중심으로 김정 (金淨) (1486 ~ 1520), 이익 (李翼) (1579 ~ 1624), 광해군 (光海君) (1575 ~ 1641),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김진구 (金鎭龜) (1651 ~ 1704), 김춘택 (金春澤) (1670 ~ 1717), 김윤식 (金允植) (1835 ~ 1922) 등 여러 유배인들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그들의 운명적인 삶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는 길이다.
목관아 > 김윤식 · 이승오 > 최익현 > 송시열 > 김진구 > 김춘택 > 서주보 > 이세직 > 김정 > 오현단 > 정병조 > 광해군 > 이승훈 > 이익
<면암유배길>
조선 말기의 역사적 격변에 앞장서서 부딪쳤던 지식인이자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인 면암 (勉菴) 최익현 (崔益鉉, 1833 ~ 1907). 그의 영향으로 제주 유럽들이 항일운동의 의지를 약속했던 조설대 (朝雪臺)와 그가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 들렸던 방선문 계곡을 둘러보며 그의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제주유배 시절의 이야기를 음미하는 길이다.
左 衛 廊 터
관덕정 앞에 길게 자리했던 좌위랑 ( 左衛廊) 터. 처음에는 객사 (客舍 · 제주북초등학교 자리) 앞에 있었으나 1511년 (중종 6) 목사 김석철 (金錫哲)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옛적에는 호남원병 (湖南援兵)이 들어왔을 때 주둔했으나 원병제도가 폐지된 뒤에는 심약방 (審藥房) 장춘원 (藏春院) 궁장방 (弓匠房) 철장방 (鐵匠房) 영나졸방 (營羅卒房)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
史蹟考證
漢拏日報社 遺蹟址 標石세우기 推進委員會
西紀 二十年 十二月 日
洪淳晩 짓고
金順謙 쓰다
제주목 관아 (濟州牧 官衙)
사적 제380호
소재지 : 제주시 관덕로25
조선시대 (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濟州牧) 관아 (官衙)는 지금의 관덕정 (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 (耽羅國) 시대부터 성주청 (星主聽) 등 주요 관아시설 (官衙施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 (世宗 16) 관부 (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 (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 (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 · 개축 (重 · 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 (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정치 · 행정 ·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의 관아를 원래의 양식 (樣式)으로 복구 (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 (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 (文化層)과 함께 문헌상 (文獻上)에 나타난 중심건물인 홍화각 (弘化閣) · 연희각 (延曦閣) · 우련당 (友蓮堂) · 귤림당 (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 (遺構)가 확인되고 유물 (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 (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 · 기단석 (礎石 · 基壇石)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 (耽羅防營總覽)』 등 당대 (當代)의 문헌 (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 · 향토사학가 · 전문가 등의 고증 (考證)과 자문 (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 (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특히, 제주 역사의 정체성 (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은 소요되는 기와 5만여장 전량 (全量)을 헌와 (獻瓦)해 준 30만 제주 시민의 혼 (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 (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 (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 (復元)을 완료하였다.
관덕정 観德亭
보물 제322호 소재지 :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은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안무사 신숙청 (辛淑晴)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위해 세운 제주도의 대표적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건립 이후 그 원형을 유지하며 여러 차례 수리되어 오던 중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이 수리하면서 지붕처마가 2척 정도 잘려 변형되었으나 2006년 보수를 통해 원래 모습을 다시 찾았다.
'관덕' 이란 명칭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 (射者所以 觀盛德也)' 라는 예기 (禮記)의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 는 뜻이며 문무 (文武)의 올바른 정신은 본받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돌하르방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ㅡ1호, 제2ㅡ2호 (제주 관덕정 앞)
옹중석 翁仲石, 우석목 偶石木, 벅수머리 등으로 불리는 돌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제주읍성 동 · 서 · 남 세 개의 문 밖에 각 8기씩 24기와 정의현성, 대정현성 세 개의 문 밖에 각 4기씩 12기가 설치되어 모두 48기가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관덕정, 삼성혈, 제주시청, 제주대학교 박물관 등 제주시내에 21기, 서귀포시 표선읍 성읍리에 12기,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에 12기 등 모두 45기가 남아 있다. 나머지 3기 중 제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1기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분실되었고, 동문 밖에 있던 2기는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든 돌하르방의 평균 키는 제주 187㎝, 성읍 141㎝, 대정 134㎝ 정도로, 문헌기록상 조선 영조 30년 (1754년)에 제주목사 김몽규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다른 지역의 성문이나 사찰 앞에 설치한 장승과 같이 수호신의 역할과 경계 금표적 禁標的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돌하르방 2기는 원래 제주읍성 서문 밖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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