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5

드무2 2023. 11. 1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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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5

 

 

 

오현고등학교 개교 72주년 기념

34th 五賢人의 날

 

새로운 도약 하나된 오현

 

 

 

 

 

 

 

 

 

 

 

 

 

 

 

 

 

 

 

 

 

 

 

 

 

 

 

 

 

 

 

 

 

 

 

 

 

 

 

 

오현고등학교 70주년 연혁

 

1951년 19월 25일  도내 최초 일반계 고교 오현고등학교 개교

1951년 09월 25일  본교 축구부 창단

1952년 09월 21일  오현고 교악대 창설

1953년 03월 25일  1회 졸업생 89명 배출

1953년 07월 22일  오현단에 길버트 음악관 건립

1959년 09월 25일  도내 최초 학교 도서관 개관

1972년 09월 01일  현 화북일동 위치로 학교 신축 이설 (일주동로 101)

1981년 09월 25일 「學行一致」 교훈비 건립

1995년 09월 24일  '포효하는 호랑이像' 건립

1998년 01월 31일  실내체육관 준공

2001년  11월 19일  우정학사 (기숙사) 개관

2004년 10월 03일  교문 「오현의 문」 건립

2008년 04월 19일  海維 (해유) 음악관 준공

2008년 06월 12일  백운기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

2016년 03월 06일 청음홀 준공

2021년 01월 29일  제69회 졸업식 (343명) (졸업생 누계 26,431명)

 

 

 

1951

오현고등학교의 시작

1950년대는 오현고가 개교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에 학교 발전의 기반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음악 · 문예 · 체육 분야 및 대학입시에서 두각을 나타내 본도의 명문고로 자지를 굳혔고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지는 오현사의 '정초기 (定礎期)'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 가서 이미 '체육 오현', '음악 오현', '문예 오현' 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오현고는 새로운 역사와 전통을 수립해 나가기 위한 대장정에 들어섰던 것이다.

 

 

 

본관 완공 기념 사진 (1952, 왼쪽)

황순하 이사장 (한복차림)과 교직원 (1952, 오른쪽)

이사장 왼쪽 이경수 교장 오른쪽 김석호 재단이사

 

 

 

제주시 이도동. 지금의 오현단에서 개교했던 오현고등학교

1951년 개교 당시 1 · 2학년 4학급에 17명의 교사가 재직하였다.

 

 

 

 

 

 

1953년 역사적인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오현고 교악대가 출전한 개천예술제 우승기념 (1953, 왼쪽)

제1회 종합예술제 (오른쪽)

1954년 11월 진주개천예술제에서 2연승을 계기로 본토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종합예술제가 본교 주최로 개최되었다.

 

 

 

 

 

 

민속 가장행렬 (1968, 관덕정, 왼쪽)

가장행렬 (오현 선생, 1968, 오른쪽)

 

 

 

가장행렬 (직원실 풍경, 1968)

 

 

 

1960

도전을 이겨낸 오현

 

1950년대가 오현고 역사의 정초기라고 한다면 1960년대는 시련기라고 부를 만큼 내외의 도전이 거세었던 시기였다. 1962년에는 폐교 위기에 직면했었고, 1969년에는 학원 분규로 인해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현고는 1950년대에 이룩한 '체육 오현', '음악 오현', '문예 오현' 의 전통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학력면에서도 오현고는 타교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종합체육대회에서 도내 최초로 시도한 카드섹션 (1962)

 

 

 

시가행진 모습 (1962)

 

 

 

농구부 (1967)

 

 

 

 

 

 

1970

새로운 시작

 

오현단 일대에 있었던 구 교정 시절을 끝내고 제주시 화북동으로 신축 이설하면서 1951년 개교한 이래 21년만에 새 둥지를 틀어 오현학원의 화북벌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과정을 통한 교육과정 혼란이 있었던 시기이지만 학생과 학교의 노력으로 극복해 나간 시기였다. 또한 오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학생들에게 도덕심 · 정의감을 심어주기 위해 「오현인의 수양 목표」를 제정하였다.

 

 

 

교련실기대회 우승 기념 (왼쪽 위)

교련실기대회 분열조 입장 (1976, 왼쪽 아래)

제주 일주도로 포장을 기념하는 '제1회 도일주 역전 마라톤대회' 우승기념 (1971, 오른쪽)

 

 

 

화북벌로 학교가 이전되자 통학버스가 등장했다. (1973)

 

 

 

통학버스 승차 장면 (왼쪽)

구 교정 도서관 (오른쪽)

 

 

 

한라문화제 때 본교 교악대와 제주여중 · 고 교악대와 함께 시가행진 (1975)

 

 

 

 

 

 

1980

재도약하는 오현

 

1980년대는 오현고 역사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도약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본교 교육이 두드러진 성과는 학력 향상이다. 대입 수험지 「진학」 (진학사 발간) 1983년 5월호에 따르면 1983년에 오현고는 서울대에 50명이 진학하여 학급당 평균 5.6명이 진학한 셈이 되어 전국 상위권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좋은 성적으로 높은 합격률을 얻을 수 있었던 주요 원인으로 교사와 학생 간의 일체감, 밀도 높은 수업 진행, 진지한 자율학습, 매일고사 실시에 따른 계획 · 평가 · 실천과 교사들의 충고에 호응한 학생들의 노력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던 수학여행이 1988년부터 재개되었다.

 

 

 

80년대 초반,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기 전 졸업식 모습.

 

 

 

교악대 반주에 맞춰 분열을 하고 있다.

 

 

 

카드섹션 응원 (위)

교내 체육대회에서 씨름대회 중인 선수들 (아래)

 

 

 

 

 

 

1990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오현

 

오현고 역사에서 1980년대를 도약기라고 한다면 1990년대는 그 도약의 연장선상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보여준 발전기라고 할 수 있다. 학력면에서는 꾸준한 향상을 보여주었고 문예 · 체육 활동면에서도 다양한 성과가 있었다. 또한 국내 및 국제수학경시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했으며 별관, 체육관, 급식실 등의 신축 및 증축으로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하였다.

 

 

 

'오현 ! 한라에서 백두까지' 도보행군에서 백록담 물을 백두산 천지에 합수하는 모습 (1997)

 

 

 

백호기 축구대회에서 전교생이 하나되어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백호기 경기에 앞서 재학생과 서로 경례하는 선수들 (위)

제26회 백호기 우승 기념 (1996, 아래)

 

 

 

첫 해외 수학여행 제주공항 출발 (1996, 위)

체육관 신축 (1998, 아래)

 

 

 

교내 체육대회에서 줄다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2000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오현

 

뉴밀레니엄 시대라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첫해, 2000년을 맞아 학교 교육 환경 변화의 필요성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2002년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됨에 따라 이에 대비하기 위해 2001년 2월 26일 본관 4층을 증축하였고 특별교실 11실, 관리실 4실, 화장실 5동 등을 신축하여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했다. 또한 생활관인 우정학사, 다목적 코트 (테니스, 배구 등), 디지털자료실 등을 건립 확충하여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오현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현축제에서 응원부의 공연 모습 (왼쪽)

남도문화 진로체험 학습 (2007, 오른쪽)

 

 

 

1951년 개교 이래 해마다 진행된 '오현축제'는

재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끼를 마음껏 보여주는 축제가 되었다.

오현축제에서 댄스공연을 보여주는 참가자들 (2000)

 

 

 

해유음악관 준공 (2008, 위)

오현고 교사로 재직했던 故 김영흥 선생의 유훈을 기리고, 학생들의 문예 활동 활성화를 위한 영흥문학상 (아래)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3학년 학생들의 모습 (2008)

 

 

 

우정학사는 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생활실 25개와 독서실, 식당, 샤워장 등을 갖춘 연건평 3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건립되었다.

 

 

 

 

 

 

2010 ~

빛나는 미래로

 

1951년 오현단에서 시작된 오현고는 오랜 시간 동안 제주 도민과 함께 성장해 온 제주교육의 중요한 역사이다.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오현고등학교는 6 · 25 전쟁 속에서도 학구열을 불태웠던 시기부터 격변의 대한민국 역사를 거쳐 글로벌 인재를 길러내는 제주의 명문사학으로 우뚝 서 있다. 지난 7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역경과 도민을 딛고 왓던 것처럼 앞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제주역사문화기행' 에 참가한 학생들이 힘차게 뛰어오르는 포즈로 찍은 사진.

이들의 활기찬 모습처럼 오현고등학교의 미래가 밝게 빛나기를 ~

 

 

 

글로벌 오현 ! 해외연수 (2020, 왼쪽)

오현인의 날 기념 오현음악제 (2019, 오른쪽)

 

 

 

4 · 3 유적지 답사 활동 (2018, 위)

제주역사문화기행 (2015, 아래)

 

 

 

 

 

 

 

이 달의 제주어

 

아시날

어제, 전날

 

그지게 ㅡ 아시날 ㅡ 오널 ㅡ 넬 ㅡ 모리

(그저께 ㅡ 어제 ㅡ 오늘 ㅡ 내일 ㅡ 모레)

 

[예문]

 

아시날의 그지게민 그직아시날이 뒈여.

(어제의 그저께면 그직아시날 (그끄저께)이 돼.)

 

 

 

 

2023년 8월

제주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생존기간 : 1911. 08. 11. ~ 1948. 11. 10.

본적 : 제주도 제주 북제주 조천 함덕 1054

운동계열 : 국내 항일

훈격 (연도) : 건국포장 (2019)

 

김태근

 

비밀결사 함덕독서회에 참여해 활동하다

 

1934년 4월 상순경 김원근 (金元根) · 부생종의 지도 아래 비밀결사 함덕독서회 (咸德讀書會)를 조직했다.

10월경까지 김두성 (金斗性)과 함께 20회에 걸쳐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등을 교재로 연구하면서 동지 규합 활동을 전개했다. 10월 18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5년 2월 7일 기소유예 (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이후 전시체제기에 이른바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 (造言飛語)' 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한 차례 더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1940 ~ 1941년경 이웃에 사는 이노우에 츠요시 (井上烈)에게 "이번에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상당히 병대 (兵隊)가 부족한 게 아닐까" 등의 이야기를 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1년 10월 27일 광주지법법원 (光州地方法院) 제주지청 (濟州支廳)에서 이른바 '육군형법 (陸軍刑法) 위반' 으로 금고 ( 禁錮) 6월을 연도 받고 1942년 4월 29일에 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시 조천읍 소재)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건립했다.

 

 

 

 

 

 

 

 

 

 

 

 

 

 

 

牛公 黃舜河先生像

 

 

 

 

 

 

 

 

 

건학이념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

자신을 다스리는 겸손

미래를 창조하는 오현인의 기상

 

 

 

 

 

 

 

 

 

 

 

 

 

 

 

 

 

 

 

 

 

 

 

 

 

 

 

 

 

 

 

 

 

 

 

 

 

 

 

 

 

 

 

 

 

 

 

 

 

 

 

 

 

 

 

고승천 (高承天, 1871 ~ 1909)

제주 출신으로 본명은 고사훈 (高仕訓)이다.

 

고승천은 1905년 을사조약 (乙巳條約)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자, 호남 의병장인 최익현 (崔益鉉), 신돌석 (申乭石)과 거사계획을 협의 하였으며,

 

1908년 제주(齊州) 및 광양 (光陽)에서 효과적인 의병운동 전개를 위하여 김석윤 (金錫允), 노상옥 (盧尙玉), 기우만 (奇宇萬), 기삼연 (奇參衍) 등과 비밀리에 무기를 제조 및 공급하는 한편

 

김석윤 (金錫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참모 (參謀) 및 모병책 (募兵責)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909년 2월 의병운동을 거도적 (擧道的)인 규모로 확대하여 대규모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인 김만석 (金萬石)과 대정 (大靜0에서 창의격문 (倡義檄文) 작성 및 살포, 의병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에게 잡혀 서광리 (西廣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의병항일기념탑이 건입동에 세워져 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국가보훈처)

 

 

 

 

 

 

 

 

 

자청비와 두 남자, 제주의 신이 되다.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정수남이는

가축을 돌보는 하세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상세경 문도령은 하늘의 천기와 우순풍조 雨順風調를 조절하게 하고,

중세경 자청비는 하늘과 땅을 오가며 물과 농경 세시를 조정하게 하였다.

정수남은 하세경으로 세경테우리 [牧畜神]가 되어

많은 목자를 거느리고 7월 마불림제를 받아먹게 하였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 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11. 인간 세상에 농경의 신으로 내려오다

오곡의 씨앗을 하사받은 자청비는 문도령과 칠월 보름 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오늘날 칠월 보름날에 백중제 (百衆祭 : 농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자청비는 오곡씨를 뿌리더 보니 씨앗 한 가지가 빠져 있어 하늘 옥황에 올라가서 받아오니 여름 파종이 지나 버렸다. 그래도 씨앗을 뿌려보니 다른 곡식과 함께 가을에 수확하였다. 이것이 바로 메밀씨이다. 그리하여 자청비와 문도령은 농신 (農神)인 세경이 되었다. 그리고 정수남이는 축산신 (畜産神)이 되어 오늘날 음력 칠월에 마불림제 (곡식의 풍요를 기원하는 무속의례)를 받아 먹는다. 따라서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정수남이는 하세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개미허리가 가느다란 까닭

자신을 겁탈하려한 정수남을 죽인 자청비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종을 죽인 사연을 이야기했다.

"집안 망할 일이로구나. 하루 콩 석 섬가는 힘 좋은 머슴을 죽이다니 당장 정수남이를 살려내라."

 

부모님은 독설을 퍼부으며 넓은 밭에 좁쌀 씨를 닷 말 닷 되 뿌려 놓고, 그 좁쌀 씨를 하나 남김없이 주워 오라 했다.

눈에 질문이 나도록 좁쌀 씨를 찾았으나 딱 한 알만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도 보이지 않아 단념을 하고 밭담을 넘는데 개미 한 마리가 그 좁쌀 한 알을 물고 바지런히 기어기고 있었다.

"아무리 말 모른 벌레지만 정말 야속하구나." 중얼거리던 자청비는 좁씨를 빼앗으며 개미허리를 말로 지끈 밟아주었다.

 

그때 난 법으로 개미허리는 홀쭉하고 가느다란 법이다.

 

'설문대할망 손가락... 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자청비와 농사 짓는 노인들

자청비가 정수남이와 걸어가는데 가난한 두 늙은이가 사이좋게

호미로 밭을 갈고 있었다. 정수남이가 밥을 달라고 하니

두 늙은이는 자신들은 조금만 먹는다며 밥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밤 먹은 값을 하려고 정수남이는 밭을 씽씽 갈고 자청비는

씨앗을 뿌렸다. 할망이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끼어들었다.

"나도 심심하니 잡초 씨라도 하나 내려주오. 심심하니 소일이나 하게."

 

그 때 난 법으로, 농사지릉 때는 밭에 잡초가 생기게 된

것이다. 잡초를 매는 것도 농사다.

 

자청비는 두 가난한 노인들에게, 비록 호미농사를 지어도

대풍년이 되게 해 주었다. 할망이 다시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게 많을 걸 어찌 다 먹습니까? 암쇠에 싣거든

등이 조금 오그라질 만큼이면 됩니다."

 

 

그때 난 버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데도 겨우

먹을 만큼의 소출만 나게 되었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메밀이 다른 곡식과 다른 이유

하늘에서는 난을 평정한 대가로 땅 한 조각 물 한 조각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자청비는 사양하고 꼭 상을 내리시려면 땅과 물 대신

오곡의 씨앗을 내려주라 했다.

 

오곡의 씨앗을 받고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그런데 씨앗 하나가 모자랐다. 도로 올라가 메밀 씨를 받았는데 담을 그릇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속에 입었던 소중이를 벗어 거기에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법으로 메밀은 다른 씨앗보다 늦게 뿌리거나 거친 땅에 뿌려도

수확을 하는 강한 곡식이 되었다. 또 여름 장마나 태풍에 농사를 망치게 되면,

그 대신에 뿌려 흉년에도 먹을 수 있게 짧은 기간에 열매를 맺는 곡식이 되었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10. 자청비, 하늘의 난을 평정하다

주변의 시기로 인한 시련을 이겨낸 자청비. 이때 하늘 옥황에서 난이 일어난다. 삼만 명의 병사가 활로 칼로 치열하게 서로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 자청비는 서천꽃밭으로 가서 멸망꽃을 얻어 왔다. 그리고 천자님을 만났다.

"소녀가 이 난을 막겠습니다."

자청비는 멸망꽃을 동서로 뿌렸다. 삼만 병사가 동서로 나자빠져 쓰러졌다. 난은 수습되었다. 천자는 크게 기뻐하며 땅 한조각, 물 한조각을 하사한다. 하지만 자청비는 사양한다.

"소녀에게 오곡의 씨앗이나 주십시오."

 

 

 

 

 

 

 

직녀 자청비 비단으로 하늘에 연통하다

자청비는 놀랄만큼 베를 잘 짜는 여자였다.

그녀는 문도령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하늘과 땅 사이 하늘길이

드리워진 하늘 연못에 이르렀고 하늘에 납품할 비단을 짜는

주모 할머니를 만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짜는 비단이 문도령이 혼인할

서수왕 따님의 폐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청비는 눈물로 비단을 짜 나갔다.

 

"가령하다 가령비, 자청하다 자청비" 라 짜 넣은 비단을

하늘에 바쳤다. 문도령은 이에 자청비가 짠 비단임을 알고

그녀를 만나려 내려왔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다정한 부부를 시기하는 원한을 지닌 새

문도령 부모님이 혼인을 위해 요구한 칼선다리 건너기를 실패한 서수왕 따님은 그날부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물 한 모금, 쌀 한 톨 먹지 않더니 시름시름 기어이 죽고 말았다.

 

그 죽은 몸에서 새가 날아올랐다. 머리로는 두통새, 눈으로는 흘긋새, 코로는 악숨새,

입으로는 해말림새가 나와서 서수왕 따님 애기는 원한을 지닌 채 이곳저곳 다니며

흉힘을 주고 얻어먹는 새가 되었다.

 

그 때의 일로 오늘날도, 이 새가 들어서 다정한 부부간의 살림을 분산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혼인할 때 신부상을 받으면 먼저 음식을 조금씩 떠서 상 밑으로 놓는 법이 생겼다.

 

이는 서수왕 따님 애기에 대한 대접인 것이다.

 

'설문대할망 손가락...문무병의 제주신화 이야기 1, 문무병 지음'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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