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8

드무2 2023. 12. 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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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8

 

 

 

 

제주읍성 이야기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10보 (步) 라

 

『세종실록지리지』 권 151, 제주목조

 

 

 

 

 

 

 

제주읍성, 축성되다 사라지다

읍성은 행정적 · 군사적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으로, 이곳에는 지방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관아시설 및 민가 등이 형성되어 있었다. 제주읍성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1105년 (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당시 읍성은 이미 주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일부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은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을 자연 해자 (垓字)로 삼고 그 안쪽에 성벽을 쌓아 만들어졌다. 그러다 1565년 (명종 20) 곽흘목사는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겪는 불편함을 없애고,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쪽 성을 가락천 밖으로 넓혀 축성함으로써 이로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599년 (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등 제주성의 대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남 · 북수구에 무지개다리 (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를 건립하여 남수각 · 북수각으로 불렀다. 하지만 겨울철 공사가 이루어져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고 사상자도 발생하여 '원축성 (怨築城)'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내려진 1910년 읍성철폐령으로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골재로 사용되면서 제주읍성은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현재 오현단 위쪽 (제주시 이도1동)에 일부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을 제주도 기념물 제3호 (1971. 8. 26.)로 지정 · 관리해 오고 있다.

 

 

 

 

 

 

 

1900년대초 산지천과 제주읍성

 

 

 

 

 

 

 

남수구 서남쪽의 제주읍성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제주성지

 

 

 

 

 

 

 

제주읍성,

성곽구조를 살피다

 

제주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 (石城)으로 '허튼층쌓기 (층을 이루지 않고 수평줄 눈을 허트려 쌓는 일)' 의 축조방법을 하고 있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의 규모는 성 둘레가 4,394척, 높이가 11척으로 기록되며, 곽흘 목사가 확장한 후 성 둘레는 5,489척, 높이는 11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에는 동 · 서 · 남문 3문과 남 · 북수구 (水口)가 있었고, 성곽시설로 옹성 (甕城)과 치성 (雉城), 해자 (垓字), 여장 (女墻) 등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 성곽조에는 치성이 27개, 타첩이 404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은 조선 태종 때에 성을 수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 축성된 듯하며, 세종 때에 성의 부속시설인 옹성, 치성, 해자 설치가 전국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이 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 옹성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큰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

* 치성 : 성벽으로 올라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 구간을 돌출시킨 구조물

* 해자 : 성벽 바깥을 둘러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시설

* 여장 : '성가퀴', 몸을 숨기고 적병을 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북수구 (위), 동문 (아래)

 

 

 

 

북수구

 

 

 

동문

 

 

 

 

남수구

 

 

 

 

현존 제주성지 (위), 치성 (아래)

 

 

 

 

서문 (위), 남문 (아래)

 

 

 

서문

 

 

 

남문

 

 

 

 

 

 

 

 

 

 

1950년대 남수각

 

 

 

 

 

 

 

제주읍성, 옛 기억과 마주하다

과거 제주성 내를 '대촌' 이라 칭하였고, 이때 대촌은 일도 · 이도 · 삼도 지역을 통틀었다. 이들 지역은 제주성 안에 있었으므로 '성안', 혹은 민간에서는 '목안 [牧內]', '모관' 으로 불렀다. 이에 지금의 삼도동인 제주목 관아지 일대를 성내의 중심으로 하여 제주사회의 구심 역할을 하는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에는 도청과 경찰서 등의 식민통치기구를 비롯 우체국, 금융조합, 일본인 상점 등 상업건축물들이 들어섬과 동시에 제주읍성이 철거되면서 제주 성내의 전통경관이 바뀌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빛바랜 옛 사진에 담긴 제주읍성 내의 역사 · 문화유산, 그리고 그 흔적들과 마주하면서 잊혀져가는 제주읍성의 모습을 추억해보자.

 

 

 

2009년대 항공사진

 

 

 

1967년대 항공사진

 

 

 

1979년대 항공사진

 

 

 

1985년대 항공사진

 

 

 

제주도립의원

 

 

 

 

 

 

제주도청

 

 

 

 

 

 

제주도청

 

 

 

제주면사무소

 

 

 

 

 

 

제주무신전신국

 

 

 

제주무선전신국

 

 

 

제주세무서

 

 

 

제주우체국

 

 

 

제주읍사무소

 

 

 

 

 

 

 

 

 

 

 

 

 

 

 

 

 

 

 

제주, 고지도 속에 담겨지다

고지도에 나타난 제주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당시 제주의 행정구역 · 방어시설 · 자연 · 생활상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통치와 지역방어, 그리고 특산물 조달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8 ~ 19세기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1650

1689 ~ 1703

여지도 중 제주목 (국립중앙도서관)

목장의 천자문의 천 (天)으로부터 윤자 (閏子)까지 명칭을 띠고 있으며 과원도 둥근 원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25개의 봉수, 38개의 연대, 9개의 방호소도 잘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명칭까지 기록하고 있다.

 

 

 

1700년대

전라남북도여지도 중 제주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의 여지도 속의 제주목 지도와 영남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남전도 중의 제주목 지도와 동일 계열에 속하는 지도이다. 지도책으로 되어 있고 뒷면에 제주도에 관한 지리적 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된 점이 눈에 띈다.

 

 

 

 

1700년대

호남전도 중 제주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의 여지도 속의 제주목 지도나 영남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주목지도와 같은 계열의 제주도지도이다.

 

 

 

 

1702

탐라순력도 중 한라장촉 (제주시)

현존하는 독립된 제국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서,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도 전역을 순시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린 탐라순력도의 총 41장 중의 일부이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삼읍과 해안을 돌아가며 설치한 9개의 진 (鎭)의 위치는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다.

 

 

 

 

 

 

 

1709

탐라지도병서 (제주도민속자연사 박물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과 하단에는 제주도의 지리적 상황을 기록하였으며 중간에 제주도를 목판으로 새겼다. 맨 마지막에 '강희기축 (康熙己丑)'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는 제주목사 이규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지도는 현재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1750년경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① (서울대학교 규장각)

1709년 (肅宗 35년) 간행된 '탐라지도병서 (耽羅地圖幷序)' 를 모사한 지도로, 지도의 상하에 있던 설명을 제외하고, 채색을 적절히 가미하였다.

 

 

 

 

 

 

 

1750년경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②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주삼현도 ①에 비하여 제주도 윤곽이나 지형의 묘사가 부정확하나 지형의 정확한 표시보다 오히려 인문적인 내용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1770년대

제주삼읍도총지도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제주목이 있는 해안이 큰 만을 이루며 내륙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을 입체화시켜 한라산의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한라산 봉우리의 명칭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로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1834

청구도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도로, 제주도는 청구도의 제28층 14도와 15도, 제29층의 14, 15, 16도에 걸쳐서 그려져 있다. 26층과 27층은 바다이기 때문에 그려져 있지 않다.

 

 

 

 

1841

탐라지도병지 (개인소장)

이 지도는 현종 7년 (1841)에 부임한 이원조 제주목사에 의해 제작된 탐라지도병서를 그대로 모사한 지도이다.

 

 

 

 

1861

대동여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1861년 (哲宗 12년)에 고산자 (古山子) 김정호 (金正浩)가 제작, 간행한 '대동여지도' 초간본 (初刊本)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이다. 원래 흑백의 목판본인데, 뒤에 소장자가 알아 보기 쉽도록 군현경계와 군현명 윤곽에 적색, 바다와 백록담에 청색 등을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1872

제주삼읍전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1872년 (高宗 9년)에 『군현지도집 (郡縣地圖輯)』 중에 제주도 지도로, 제주도 전체의 안내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지도는 앞 시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전의 지도에 비하여 정확하다.

 

 

 

 

 

 

 

 

1800년대 후반

해동여지도 중 제주 정의 대정 (국립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방안도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수 표시는 적색의 횃불 모양으로 되어 있고, 명칭도 기록되어 있다. 십소장 (十所場), 과원, 그리고 포구가 표기되어 있다.

 

 

 

 

1899

제주군읍지 중 제주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1899년 (光武 3년) 5월에 전국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제주군읍지' 첫머리에 수록된 제주군 지도로, 읍지의 내용은 이해하기 위한 안내 역할을 하는 지도이다.

 

 

 

 

 

 

 

1914년 이후

탐라약도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정의군이 정의면으로 대정군이 대정면으로 바뀐 것은 일제가 1914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한 이후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일제 초기에 제작된 듯하며, 군대 지도인데도 경위선이 표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라산도 그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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