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시대 토목회사 '하자마구미'의 흔적]
서울 용산공원 부근 골목에 있는 식민 시대 토목 회사 하자마구미 (間組) 경성 지점 건물. 하자마구미는 한강 철교와 수풍댐을 시공한 식민 시대 대표적인 토목 회사다. 하자마구미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2012년 당시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위원회' 는 하자마구미를 포함해 299개 일본 기업을 전범 기업으로 규정했다. / 박종인 기자
북한 國章, 용산 건물, 무연고 묘비··· 수풍댐 만든 하자마구미 <間組> 흔적이 곳곳에
고양시 공동묘지에는
하자마구미가 세운
무연고분묘 합장비
서울 용산에는
경성지점 옛 건물
북한 國章에는
하자마구미가 만든
수풍댐 그림
흉터? 혹은 역사?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역사는 땅에 흔적을 남깁니다. 이 땅 곳곳에 남은 흔적에서 그 역사를 봅니다.
편집자주
경기도 고양시 항공대 옆에 공동묘지가 있다. 주소는 고양시 화전동 663ㅡ9번지다. 묘지 초입에 큼직한 묘비가 있다. 이렇게 새겨져 있다.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 (京城操車場 第三工區內 無緣合葬之墓)'. 연고가 없는 분묘를 한데 합장했다는 뜻이다.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조직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 (株式會社 間組水色出張所)'. 조차장은 열차 차량을 이동하고 연결하고 분리하는 차량기지를 말한다. 서울 용산역 건너 골목 안쪽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 있다. 지금은 민간기업이 입주해 사무실로 쓰고 있는데, 원주인은 일본 건축회사다. 그 건축회사가 하자마구미다.
휴전선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는 국장 (國章)이 있다. 타원 바깥으로는 곡식 이삭이 있는 전형적인 옛 소비에트 국가 국장 디자인이다. 북한 국장 가운데에 큰 공장이 그려져 있다. 수풍댐이다. 7년에 걸쳐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로 만든 수력발전소다. 수풍댐을 시공한 회사가 바로 이 하자마구미다. 공동묘지에서 경성으로, 경성에서 압록강과 평양 한복판으로 이어지는 흔적의 역사.
경기도 고양시 한국항공대 옆 화전동공동묘지에 있는 '경성조차장제3공구내무연합장지묘'.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가 1940년 열차기지를 만들면서 공사 구간 안에 있는 무연고 무덤을 합장한 묘비다. 뒤편에 봉분 2기가 있는데, 묘비와 관련 여부는 불명이다. / 박종인 기자
고양에서 발견된 무연고 분묘비
한국항공대 동쪽 야산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름은 화전동공동묘지다. 역사적으로 하나둘씩 무덤이 생겨나 만들어진 공동묘지다. 공동묘지는 수색역 차량기지에서 북서쪽으로 1km 거리에 있다. 2018년 이 공동묘지에서 큼직한 비석이 발견됐다. 비석을 세운 날짜는 소화 (昭和) 15년 (1940년) 3월이다. 앞면에는 '京城操車場 第三工區內 無緣合葬之墓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 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조차장 건설을 위해 공사 지역 내 분묘를 이장할 때 연고가 없는 무덤을 한꺼번에 합장하고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는 '고양군 구묘지 (舊墓地)' 라는 제목 아래 '식수면 수색리' '신도면 덕은리' 같이 분묘들이 원래 있던 주소 여섯 군데가 새겨져 있다. 맨 왼쪽 끝에는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 건립' 이라고, 세운 주체가 새겨져 있다. 비석은 그 흔한 6 · 25전쟁 총탄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경성조차장과 하자마구미
서울역과 용산역이 포화 상태에 이른 1936년 총독부는 경성을 비롯해 전국 5개 도시에 조차장을 신축하기로 계획했다. 경성지역 조차장은 수색역에 만들기로 확정했다. 경성조차장은 5만평 규모로 한 번에 열차 차량 2000량을 수용할 수 있는 조차장이었다. (1937년 6월 5일 '매일신보') 전국적으로 진행되던 조차장 건설 공사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완으로 끝났다. 이후 대한민국이 미완인 경성조차장을 수색 차량기지로 완성해 사용 중이다. 그 공사에 시공사로 참여한 회사가 하자마구미였다.
하자마구미는 니시마쓰구미 (西松組), 마쓰모토구미 (松本組)와 함께 식민시대 조선 내 주요 토목공사를 맡았던 토목회사다. 1889년 설립됐다. '組 (구미)'는 일본어로 토목회사라는 뜻이다. 세 회사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하자마구미는 안도 (安藤)ㅡ하자마로 사명을 바꿨다.
이들 대규모 토목공사 파트너는 흥남질소비료공장을 만든 일본 기업인 노구치 시타가우 (野口遵)였다. 노구치는 총독부 역점 사업인 소록도 한센씨병 요양소에 1만엔을 기부해 총독부와 가까워진 뒤 조선 내 전력사업을 독점하며 회사를 키웠다. (박상필, '일제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부전강, 장진강 개발과 노동자 통제', 서울대 사회교육과 석사논문, 2016) 경부선 공사를 비롯해 다양한 공사를 맡은 하자마구미는 노구치에게 '조선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풍부하고 귀중한 공사 경험을 쌓은' 회사였다. (정안기, '1930년대 조선형 특수회사,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연구', 중앙사론 통권 47호,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2018)
노구치는 1932년부터 1943년까지 연속 12년간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장을 지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 노구치가 흥남질소공장을 건설한 도시 흥남은 노구치와 하자마구미가 합작한 신흥 공업 도시였다. 흥남질소공장 전력 공급용으로 만든 부전강수력발전소도 이 하자마구미가 시공했다.
1947년 '김일성 지도하에 만들었다는' 북한 국장 (國章). 가운데에 만주국과 조선이 합작하고 하자마구미가 시공한 수풍댐과 발전소가 그려져 있다. 북한은 이를 자기네가 주체적으로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 위키피디아
하자마구미 경성지점과 수풍댐
조선 내 영업이 활황을 이루자 하자마구미는 1914년 조선과 일본 영업을 분리해 경성지점을 설치했다. 목조건물이었다가 1926년 을축년 홍수 때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신축했다. 그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서울 용산역에서 한강대로 건너 용산우체국 뒷골목에 있다. 주소는 한강대로 42길13이다. 베이지색 타일 외벽에 2층 창문을 아치형으로 꾸민 2층 건물이다. 현관 위편 베란다는 사무실로 개조됐지만 옛 형태는 그대로다.
하자마구미가 시공한 조선 내 주요 시설물은 압록강철교 (1911), 한강인도교 (1917), 대구사범학교 (1931), 용산공립중학교 (1932), 경성제1고녀 증개축 (1933), 반도호텔 (1937), 경성조차장 (미완) 등이다.
그리고 수풍댐이 있다. 수풍댐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과 조선총독부가 합자해 만든 수력발전소다. 1937년 당시 전력량이 세계 최대였던 미국 후버댐 (37만kW)보다 더 많은 64만kW 규모 발전소였다. 생산된 전기는 만주국과 조선 두 나라에 판매됐다. 만주국과 조선 양국에 각각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를 만들었는데 두 회사 사장이 노구치 시타가우였다. 만주 쪽 시공사는 니시마쓰구미, 조선 쪽 시공사는 하자마구미였다. 10만kW급 발전기는 일본 도시바와 독일 지멘스가 각각 5대와 1대를 제작했다. (정안기, 앞 논문)
노동자는 인구가 밀집한 중국 산동과 조선 남쪽 지역에서 확보했다. "노동자는 우마 (牛馬)처럼 취급하라" 는 노구치 가치관 (박상필, 앞 논문)은 이들을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내몰았다. 수풍댐과 발전소는 완공 전인 1941년 8월 25일 1호 발전기가 만주로 전기를 보냈고 9월 1일 2호기를 통해 조선으로 송전이 개시됐다.
1943년 댐이 완공됐다. 2년 뒤 일본이 항복했다. 수풍댐은 소련군이 접수했다. 소련군은 발전기 6기 가운데 2기를 전리품으로 뜯어갔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남 송전을 중단했다. 남한은 공포에 가까운 단전 시대를 보내야 했다. 그사이 북한은 댐 균열 보수와 소련 기술자를 통한 기계 수리 공사를 벌였다.
6 · 25 때 연합군은 B-29 폭격기 1300대를 동원해 수풍댐 70%를 파괴했다. 전후 북한은 소련 경제 원조와 체코인 기술자 도움으로 발전소를 복구했다. 소련은 10만kW 발전기 1기도 새로 만들어줬다. (양지혜, '수풍댐을 통해 본 북한 산업시설의 보존, 파괴, 역사', 역사비평143, 역사문제연구소, 2023) 이후 북한은 노구치 시타가우가 운영했고 하자마구미가 건설했던 수풍댐 전기와 흥남질소비료공장으로 먹고살았다.
북한의 수풍댐, 남한의 전범기업
태극과 무궁화 꽃잎이 그려진 대한민국 국장 (國章)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도 나름대로 국장이 있다. 소련이 탄생시킨 숱한 옛 소비에트 국가 국장은 타원형 바깥에 곡식 이삭이 있고 가운데에는 낫과 망치 또는 자기네 국가 상징물이 들어가 있다.
북한 정부가 발행한 '조선미술사2' 에 따르면 북한 국장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작 방향과 도안에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하여 명백히 밝혀주시고 친히 창작 과정을 지도해' 나온 작품이다. (최희선, '남북한 통일 과정에서 필요한 디자인정책 연구', 서울대 대자인학부 박사논문, 2015)
김일성이 평양미술대 학장 김주경에게 지시해 1947년 채택된 북한 국장은 이렇다. 벼이삭 한가운데에 붉은 별과 백두산과 천지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송전시설과 댐이 보인다. 바로 수풍발전소다. 수풍발전소는 '우리나라의 강력한 동력기지' (1955년 5월 26일 '로동신문'. 양지혜, 앞 논문 재인용)요 김일성이 지도한 주체적 성과라는 것이다. 김정은이 장(長)으로 있는 국방위원회 또한 이 국장을 상징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2012년 당시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는 조선인 강제동원에 간여한 소위 '전범기업' 299개 명단을 발표했다. 이후 각 지자체에는 전범기업과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조례 입안 사태가 났다. 시민단체에는 '노 (No) 재팬' 광풍이 불었다. 그 전범기업 가운데 하자마구미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저 흔적들은 무엇인가. 용산 하자마구미 빌딩과, 외딴 공동묘지에 하자마구미가 세운 무연고분묘 비석은 전범이 남긴 지워야 할 흉터? 혹은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9월 16일 자]
'박종인 기자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록에 나와 있는 고종 사망의 진실은] (1) | 2024.07.07 |
---|---|
[명월관에서 식도원까지 원조 외식사업가 안순환] (2) | 2024.06.14 |
[서울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의 벽수산장] (0) | 2024.04.27 |
['행방불명' 경복궁 영추문 소문 (小門)의 행방을 찾았다] (1) | 2024.03.22 |
[용두산공원에 얽힌 코미디 같은 역사] (1) | 2024.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