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 세계자유수호전쟁] 03
흥남철수작전 Hungnam Evacuation 1950. 12. 15 ~ 24
미 해군 90상륙지원단, 기뢰 제거 수로, 77기동항모단, 함포지원
Safe Mine Swept Channel by the US Navy Task Force 90 and Fire Support by the US Navy Task Force 77 Fast Carrier Group
흥남철수작전 중 흥남항 인근에는 공산군이 설치한 수많은 기뢰가 해역에 깔렸었다. 미 해군 90상륙지원단이 기뢰를 제거하여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수로를 만들어 선박들이 지속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흥남항을 중심으로 남단과 북단에는 미 해군 77기동항모단의 함포지원 전단이 위치하여 흥남 교두보선 밖에 포진하고 있던 공산군을 향하여 지속적인 함포 지원사격을 하였다.
또한, 6척의 항공모함의 함재기들도 발진하여 공산군이 흥남항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지원하였다.
자료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During the Hungnam Evacuation, there were a great number of mines around the Hungnam port area placed by the Communist Forces. US Navy Task Force 90 cleared some of those mines and made a safe channel which vessels could move through.
There were channel north and south of Hungnam where the US Task Force 77ㅡFast Carrier Group supported the evacuation by continuing bombardment of the Connunist Force surrounding Hungnam. Also, they supported the Hungnam Evacuation through naval air strikes against the Communist Foeces.
흥남 교두보선 방어
미 육군 3, 7사단, 국군 수도사단, 국군 해병 1연대 2개 대대
Hungnam Perimeter Line
1950년 12월 15 ~ 24일 사이에 이루어진 흥남철수작전 덕분에 100,000여 명의 유엔군 및 국군이 성공적으로철수하였고, 전쟁 물자를 포기하더라도, 피란민을 구출하라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호소로, 전쟁과는 무관한 100,000명에 가까운 북한 피란민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흥남 교두보선은 미 육군 3사단과 7사단이 주력으로 방어하였고,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 2개 대대도 각각 흥남항 우측방과 연포 비행장 외곽 방어에 참여하였다.
By the Hungnam Evacuation on December 15 ~ 24, 1950, more than 100,000 UN and ROK Forces were successfully evacuated and almost 100,000 North Korean refugees were rescued to the Republic of Korea, a liberal democratic country.
Thanks to the command of General MacArthur, UN Commander and President Syngman Rhee's strong appeal to save lives even if war materials were abandoned, nearly 100,000 North Korean refugees could be saved to the Republic of Korea.
The Perimeter Line was hold mainly by US 3rd and 7th Infantry Division. The Capital Division, ROK 1 Corps and 2 Battalions of ROK Marine Regiment participated at the defense.
중공군의 공격으로 흥남항에 집결하여 철수를 위해 대기하여야 하는 것은 군 병력 뿐만 아니라 각종 군수물자와 장비도 마찬가지였었습니다. 일자 : 1950년 12월 11일 자료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Supplies and equipment are also evacuated from the onslaught of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bearding down Hungnam port, Korea. Date : December 11,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1950년 12월 13일 흥남항에서 철수하기 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를 추모하는 미 해병 1사단 사령관 올리버 스미스 소장과 지휘부의 모습. 미국 정부는 지금도 장진호 전투 당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미군들의 유해발굴작업을 진행,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일자 : 1950년 12월 13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Major General Oliver P. Smith, Commander of the US Marine Corps 1st Division, and his command post commemorating the soldiers killed in the Jangjin Reservoir Battle before withdrawing from Hungnam Port on December 13, 1950. The US government is still conducting excavation and repatriation of the remains of American soldiers who died or went missing during the Jangjin Reservoir Battle. Date : December 13,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흥남항을 출항하여 동해에 접한 강원도 묵호로 떠나려는 국군 수도사단 병사들이 운집해 있다. 일자 : 1950년 12월 16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안재철 저)
Troops of the ROK Capital Division await their evacuation from Hungnam to Mukho on East Sea at Gangwondo Province, Korea. Date : December 16,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피란민 탈출 ㅡ 대한민국 해군의 상륙정 (LST) 단양함에 흥남항에서 탈출하는 북한 피란민들을 태우고 있다. 일자 : 1950년 12월 12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Refugees Evacuation ㅡ An Lst (City of Tanyang) of ROK Navy takes aboard a load of Korean refugees, evacuating Hungnam, Korea. Date : December 12, 1950. Date : December 11,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흥남철수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태우고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난 미국 화물선 매러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에 도착하는 모습으로, 3일간의 항해 기간에 물, 먹을거리, 화장실도 없는 배에서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고,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이것은 레너드 라루 선장의 회고처럼, "주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 라는 '생명의 항해' 를 기록하였다. 일자 : 1950년 12월 25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SS Meredith Victory, a US Merchant Marine Vessel, which left Hungnam port at the last minute of the Hungnam Evacuation Operation, finally arriving at Geoje Island, South Korea.
There was no water, food, and no sanitary facilities during the three days sailing, even five babies were born. This recorded the 'sailing for life', like the recollection of Captain Leonard LaRue, "The hand of the Load was at the helm of my vessel". Date : December 25,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 당시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기록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샘명을 구출한 세계최고기록' 으로 기네스북 인증을 받았다.
1958년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원들에게 대통령 단체표창을 수여하였다. 다음은 그 표창의 내용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일자 : 1958년 5월 20일
내용 : 대통령 단체 표창
대한민국 대통령은 1950년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간부 선원과 선원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창하는 바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22일 오후, 공격하는 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협에 처한 수많은 피란민이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인 바닷가로 몰려있는 흥남항에 입항하였습니다. 압도적인 공산군의 공격 위협아래 유엔군으로부터 간청을 받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은 전력을 다하여 14,000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7,636톤의 화물선에 태우고 안전한 곳으로 운송하였습니다.
위험한 바다를 지나 사흘 동안의 항해 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이 인도주의적인 구조작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이 표창을 통해서 1950년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에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에게 대통령 단체 표창 휘장을 부착하는 명예를 부여합니다."
1950년 12월 24일 흥남항 폭파 ㅡ 유엔 해군사령부 소속의 미 해군 90상륙지원단과 미 해군 77기동항모단이 철저한 준비로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미 해군 90상륙지원단 폭파팀 비고르호가 흥남항에 남긴 모든 군수물자와 항구 설비를 폭파하였다. 미군은 앞으로의 전투에 필요한 폭약과 군수물자 대신 피란민을 구출하는 인도주의적인 생명구출작전을 전개하였다. 피란민을 구출하는 인도주의적인 생명구출작전을 전개하였다. 피란민을 구출하는 대신 부두에 남긴 폭약과 군수물자를 이렇게 폭파해서 남긴 물자나 항구를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자 : 1950년 12월 24일 자료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USS Begor (APDㅡ127), in charge of demolition of Hungnam port facilities, stands offshore and is ready to embark the last UN landing craft on 24th of December, 1950. Because US military evacuated almost 100,000 North Korean civilians instead of ammunition, military supplies, equipment as a humanitarian rescue operation, they need to demolish all of these materials and port facilities, not to be used by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Date : December 24, 1950.
트루먼 미국 대통령, 국가비상사태 선언
1950년 12월 16일 미국 국가 국가비상사태 선언문에 서명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6 · 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7일, 미 해, 공군 뿐만 아니라 지상군의 사용을 승인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대한민국을 북한 공산주의들의 위협에서 지켜 내도록 지원하였다.
이제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통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손에서 구출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일자 : 1950년 12월 16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US President Truman Declaration of State of National Emergency over Korean War, December 16, 1950
At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US President Harry S. Truman authorized the use of US naval, air, and ground forces on June 27, 1950, to help defend the Republic of Korea, which had just been born as a free democratic country, from the threat of Communist Forces of North Korea.
Now, with the declaration of State of National Emergency, President Harry S. Truman is once again committed to rescuing the Republic of Korea from the hands of Chinese Communists.
Date : December 16, 1950.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지평리에서 만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영웅적인 프랑스 랄프 몽클라르 중령
미 육군 2사단 23연대, 프랑스군 1개 대대, 국군 카투사 1개 중대 병력이 중공군 18,000여 명과 치른 치열한 지평리 전투 (1951. 2. 13 ~ 15)에서의 유엔군의 승리는 중공군에 밀리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1년 2월 20일 미 2사단 소속 프랑스 대대를 방문해 랄프 몽클라르 중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프랑스 대대를 이끄는 영웅적인 지휘관인 랄프 몽클라르 (Ralph Monclar) 중령은 6 · 25전쟁 이전의 원래 계급은 중장이었으나, 6 · 25전쟁에 참전하는 프랑스 대대를 이끌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해서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켜낸 영웅이다.
일자 : 1951년 2월 20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General MacArthur and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Heroic Commander of the French Battalion
General Douglas MacArthur (left), CommandeㅡinㅡChief of UN Forces, speaks with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right), Commander of the French Battalion attacked to the 23rd Regimental Combat Team (RCT), US 2nd Infantry Division, after the victory in the battle of JipyongㅡRi (Feb. 13 ~ 15, 1951) between offensive 18,000 Chinese Communist Forces and defensive US 23rd RCT, the French Battalion and a Company of ROK soldiers (KATUSA).
The Commander of the French Battalion, Ralph Monclar, was originally a Lientenant General before coming to the Korean War, and voluntary took a demotion to Lieutenant Colonel to lead the French Battalion. He was a real hero who saved the Communist Forces' attack.
Date : February 20, 1951.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제한된 전투 : 고지쟁탈전 Limited Offensive Operation : Battle of the Outposts
1951. 7. 10 ~ 1953. 7. 27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시작된 시점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을 상대로 한 대부분의 전투를 지금의 비무장지대 (DMZ)의 중부전선에서 제한된 전투로 치렀다.
이 지역의 전투에서 6 · 25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철원 (鐵原), 김화 (金化), 평강 (平康)을 잇는 지도상의 개념인 '철의 삼각지' 는 도로망이 여러 곳으로 발달한 전략 요충지로 6 · 25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곳이다.
철의 삼각지 ㅡ 철원 (鐵原), 김화 (金化), 평강 (平康)을 잇는 지도상의 개념인 '철의 삼각지' 는 도로망이 여러 곳으로 발달한 전략요충지로 6 · 25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곳
이 사진은 6 · 25전쟁 당시 단장의 능선 지역의 모습.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시작된 후 현재의 비무장지대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있었고, '단장의 능선 전투' 는 국군, 유엔군과 북한 공산군, 중공군 간의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가 있었던 전투 중의 하나로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5일까지 전투가 치러졌고, 쌍방간에 28,700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일자 : 1951년 자료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6 · 25전쟁 당시 1951년 4월 22일 ~ 5월 20일까지의 중공군 춘계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7월 10일경에는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을 현재의 휴전선 가까운 선까지 다시 북쪽으로 몰아붙였다.
이제 공산군은 유엔군과 국군을 상대로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깨닫기 시작했고, 이렇게 가다가 결국 자신들이 점령한 북한 영토마저 더 잃기 전에 전쟁을 중단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대사 자콥 말릭은 유엔에서의 연설을 통해서 전쟁을 중단하고 휴전할 것을 제안하였고, 1951년 7월 10일, 38선 인근 개성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을 상대로 휴전협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미군이 워낙 강해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을 물리치고 반드시 북진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이 소식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더군다나 북한 공산정권을 탈출하여 자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는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듯이 휴전협정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희망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국민들은 휴전협정에 절대 반대하였다.
사진은 20,000여 명의 서울시민이 덕수궁에 모여 통일 없는 휴전협정에 절대 반대한다는 정견발표를 하는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통일 없는 정전 절대 배격 Refuse the Stop of War without Union 중구 필동 2, 3가동회"
일자 : 1951년 7월 11일 자료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고지쟁탈전의 국군 ㅡ 중부전선의 현재의 군사분계선 인근에 형성된 주 저항선 가까이 있는 고지쟁탈전에서 공산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적군을 격퇴하고 고지를 확보한 국군 박격포 중대 병사들. 휴전협상이 2년 이상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의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일자 : 1952년 9월 14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고지쟁탈전의 국군 ㅡ 철원 인근의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국군 88야포대의 포병들이 중공군에 맞서 155밀리 곡사포를 발사하고 있다. 이러한 전투에서는 야포가 전장을 뒤덮었지만, 고지쟁탈전에서는 마지막에는 보병들이 진입하여 진지를 장악하여야 해서 보병들의 피해가 유난히도 컸다.
일자 : 1952년 10월 30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고지쟁탈전의 유엔군
중부전선의 고지쟁탈전인 후크고지 탈환전에서 나팔을 불어대면서 공격하는 중공군 600여 명과 밤새 수류탄이 난무하는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중공군을 격퇴하여 고지를 탈환한 미 해병 1사단 병사들.
후크고지는 서부전선의 고랑포 서쪽, 연천 북서쪽에 위치한 미 해병대의 주 저항선이었다. 미 해병 중대원들이 다음 임무를 부여 받기 위하여 후크고지에 모여 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38선 인근의 주 저항선에서 6 · 25전쟁의 희생자 절반이 발생하였다. 일자 : 1952년 11월 11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사진 왼쪽) 스나이퍼 릿지 전투에서 국군 수도사단에 체포된 부상당한 중공군 포로가 국군 의무병의 도움으로 급한 수혈을 받고 있다.
Chinese Prisoner of War captured by the ROK Capital Division, during the battle along Sniper Ridge sector, in Korea, is given blood plasma for his wounds. Date : April 2, 1953
(사진 오른쪽) 수도고지 전투에서 국군 수도사단 26연대 장병이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A wounded member of the 26th Regiment, ROK Capital Division, receives first aid treatment during the fight for the 'Capital Hill' in the sector of controlled by the 26th Regiment. Date : September 2, 1952 Data : World Peace Freedom United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전쟁 포로 수용소
유엔군 포로수용소와 공산군 포로수용소의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의 차이점
북한 공산당은 세 유형의 전투를 전개했다. 최전선에서의 전투 외에도 지리산 공비전투와 포로수용소에는 1950년 12월 ~ 1952년 6월, 최대 17만 명의 공산군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 중 친공포로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반공포로들도 많았다.
1951년부터 1952년 초까지 공산군 고위 첩자들이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위장 잠입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포로들을 공개재판이나 공개처형하는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결속하였다.
또한, 휴전협상에서 공산군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포로들이 학대를 받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퍼뜨리기도 했다.
심지어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폭동을 일으켜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도 했다.
국군과 유엔군 포로수용소와 공산군 포로수용소에서의 대우는 큰 차이가 있었다.
국제적십자연맹에서는 사전 통보없이 유엔군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전쟁 포로들의 위생상태, 건강 검진 수준, 음식물 공급 등 다양한 조사를 하고는 했다. 그들은 포로들과 대화를 통해 포로수용소의 현황에 대해서 의견을 듣기도 했으며, '전시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대해서 알려주고 포로들에게 신발, 비누, 그리고 포로들이 요청한 제품을 공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산군 포로수용소에서의 국군과 유엔군 포로의 대우는 정반대로 굶주림, 수면 부족, 엉망인 의료 수준, 심지어 고문으로 고통을 겪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포로수용소 경비병들이 포로들을 위해 국제적십자연맹이나 구호 단체 등에서 보내온 구호물품과 음식물을 빼돌린 후 자신들이 사용하기까지 했다.
북한 공산군은 국군 포로들을 정말 가혹하게 다루었다.
(사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와 환자 ㅡ 부산의 미 육군 3야전병원의 외과 과장인 조시브 콘로이 소령이 간염으로 위에 물이 찬 북한 공산군 포로 두 명의 상태를 조사하고 있다. 이들은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고, 왼쪽의 사진과 같은 상태가 치료되어, 오른쪽과 같이 고쳐졌다. 이 순간 이들은 적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와 환자였을 뿐이다. 일자 : 1951년 1월 8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왼쪽 위) 데이브 도노반 일등병이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6 · 25전쟁 고아 둘을 무릎에 안고서 고아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자 : 1951년 12월 17일
(오른쪽 위) 우유 배급 ㅡ 서울 마포구 공덕초등학교에서 유엔 민사원조사령부 (UNCACK) 관계자들이 아이들에게 우유를 배급하는 것을 참관하고 있다. 일자 : 1953년 2월 12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왼쪽 아래) 유엔 민사원조사령부 (UNCACK)의 서울지역 교육담당자 리스 스트레들리가 서울 영등포 남부훈련소의 계원학 선생이 진행하고 있는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사진 : 1953년 2월 25일 자료 :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오른쪽 아래) 주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과 유엔 민사원조사령부 (UNCACK) 찰즈문스키 대령 (왼쪽0이 서울의 골롬반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6 · 25전쟁 고아원을 방문하였다. 일자 : 1952년 4월 14일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Armistice Agreement and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ROK and USA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과 공산군 측의 중국과 북한은 6 · 25전쟁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성립되면 통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고 믿었기에 어떠한 휴전협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국제 외교의 달인인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이 조약은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한다는 군사지원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지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을 체결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조약에 힘입어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 간의 이 조약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줄 것입니다."
(사진) 1953년 7월 27일 마크 클라크 3대 유엔군 사령관 휴전협정 서명.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과 공산군 측의 중국, 북한은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서명을 거절하였다.
대한민국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미국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일자 : 1953년 8월 7일 자료 :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 · 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
While Byun, Youngta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Republic of Korea and John Foster Dulles, US Secretary of State are signing the initiating of the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Republic of Korea and USA at the President Office in Seoul, Korea. Dr. Syngman R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s looking on their signing. Date : August 7, 1953. Data :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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