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박사 박상진이 들려주는 청와대의 대통령 나무 <上>]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3월 25일 청와대 (당시 경무대) 녹지원 서쪽 계곡에 전나무를 심고 있다 (왼쪽). 오른쪽 사진은 한 아름 둘레의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의 현재 모습. 박상진 교수가 “키가 25m나 된다"고 손을 높이 올려 보였다. / 국가기록원 · 이태경 기자
소나무 몇 그루뿐이던 70년 전 청와대··· 이승만이 심은 나무는 숲이 됐다
1948년 황폐했던 녹지원 서쪽에
빨리 자라고 줄기 곧은 전나무와
미국 동부에서 친숙하게 봐왔던
백합나무 · 루브라참나무 등 심어
나무 뒤로 보이는 본관 지붕 덕에
1960년 심은 기념식수로 확인돼
"관람객들 산책하다 절경에 감탄···
'이승만 대통령 숲' 으로 불리기를"
청와대에는 역대 대통령의 사연이 깃든 나무가 있다. 대통령 기념식수에는 국정 철학과 국가적 염원이 담겼다. 청와대 경내의 나무를 조사한 ‘나무 박사’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를 통해 청와대 속 대통령 나무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래픽 = 양인성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청와대 (당시 이름 경무대)를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그가 처음 입주할 즈음 북악산 자락인 청와대 일대는 소나무 몇 그루만 있는 황폐한 야산이었다고 한다. 전국의 산들도 마찬가지여서 이 대통령은 식목일을 제정하고 임기 내내 나무 심기를 강조했다. 조선일보 1959년 4월 6일 자에 대통령이 식목일을 맞아 “경무대 경찰서원과 함께 전나무, 잣나무, 낙엽송 등 6000여 그루를 경무대 일대에 기념식수했다” 는 기사가 있다.
◇ 1960년 심은 전나무, 아름드리 거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3월 25일 청와대 (당시 경무대) 녹지원 서쪽 계곡에 전나무를 심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60년 3월 25일, 이 대통령이 직접 나무를 심는 사진이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수종은 전나무. 이 나무가 지금 녹지원 서쪽 계곡에서 키 25m, 한 아름 둘레의 거목으로 자라 있다. 나이는 73살이다. 박 교수는 “남아 있는 사진 덕분에 이 대통령의 기념식수임을 공식 확인한 유일한 나무” 라며 “사진 속의 수형 (樹形), 가지 뻗음, 잎 모양은 물론이고, 사진 위쪽 왼편 능선으로 옛 본관의 지붕 일부가 보이기 때문에 나무를 심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고 했다.
이 전나무 부근에는 크기가 비슷한 전나무들이 몇 그루 더 있고, 잣나무와 낙엽송도 함께 자라고 있다. 박 교수는 “크기나 나이로 봐서 이 대통령이 1959년에 심은 나무 일부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고 했다. 지난해 ‘대통령, 청와대에 나무를 심다’ 를 출간한 박 교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협조를 얻어 지난 5월부터 청와대를 매일 출퇴근하며 추가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그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몰랐던 부분” 이라며 “요즘 조사를 계속하면서 이 일대 나무들이 이 대통령이 심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 했다. 모두 빨리 자라고 줄기가 곧으며 무리를 이루어 숲을 만드는 특성이 있는 나무들이다. 박 교수는 “이 대통령은 산을 푸르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자란 나무의 쓸모를 생각해 곧게 자라는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 고 했다.
◇ 녹지원 서쪽은 '이승만 대통령의 숲' 으로 불러야
박상진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 전나무 앞에서 “키가 25m 되는 거목으로 자랐다” 고 설명하고 있다. / 이태경 기자
박 교수는 “이 대통령이 직접 심거나 가꾼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20그루가 녹지원 서쪽 계곡에서 아름드리 거목이 돼 숲을 이루고 있다” 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숲’ 으로 이름 지어 특별히 보호할 가치가 있다” 고 했다.
녹지원 서쪽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어 그윽하고 운치 있는 곳이라 관람객들이 산책하면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서울 시내에 이렇게 좋은 숲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고 감탄했다. 우리 전통 수종인 전나무, 잣나무, 낙엽송만 있는 게 아니다. 백합나무, 루브라참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말채나무 등이 섞여서 자라 절경을 이룬다.
이승만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합나무. 올해 나이 70살 전후다. / 박상진 교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합나무. / 박상진 교수
숲을 거닐다 보면 매끈한 줄기가 하늘로 곧장 치솟아 오르며 자란 20m 넘는 백합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합나무는 꽃이 튤립 모양이라 튤립나무라고도 한다. 모두 9그루이고, 올해 나이 70살 전후에 이른다. 숲의 남쪽에는 루브라참나무도 4그루 보인다. 박 교수는 “백합나무와 루브라참나무는 미국 동남부가 원산지” 라며 “나이나 굵기로 봐서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고 했다. “이 대통령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대학을 비롯해 석사과정을 거친 하버드대, 학부를 졸업한 조지워싱턴대 등 미국 동부 일대에 널리 자라는 나무들이다. 교정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어서 그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동안 친숙했을 것” 이라는 얘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루브라참나무. / 눌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낙엽송. 바늘잎나무이지만 노란 단풍이 든다. / 눌와
이 대통령은 또 가로수로 흔히 심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했다. 시인 조지훈이 1956년 ‘신태양’ 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서울에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무성하게 된 것은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박 교수는 “청와대 경내에도 플라타너스를 심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경복궁 서쪽 효자로에 이 대통령 지시로 심은 20여 그루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 고 했다.
허윤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2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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