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숨어있는 세계사

[나폴레옹과 유럽의 변화]

드무2 2024. 3. 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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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유럽의 변화]

 

 

 

 1796년 앙투안 장 그로가 그린 '아르콜 전투의 나폴레옹'. / 브리태니커

 

 

 

근대 법률 · 세금 정착···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퍼트렸죠

 

 

 

1804년 국민투표로 황제 자리 올라

유럽, 나폴레옹 몰락 뒤 다시 구체제로

독일 · 이탈리아선 통일 운동 일어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 ~ 1821)의 모자가 지난달 19일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 192만2000유로 (약 27억3000만원)에 낙찰됐어요. 나폴레옹은 유럽 근대사를 송두리째 바꾼 인물이에요. 그는 군인으로서 혁명 직후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고, 이후 전쟁을 통해 프랑스혁명 정신을 유럽 전체에 퍼뜨리고 민족주의를 자극했어요. 프랑스와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아볼까요?

 

 

혁명에 휩싸인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에 미친 영향을 알기 위해 우선 1789년 프랑스혁명을 살펴봐야 합니다. 18세기 무렵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2%밖에 되지 않는 '제1 신분' 성직자와 '제2 신분' 귀족이 막대한 토지와 특권을 독점하면서도 세금은 거의 내지 않았어요. 반면 '제3 신분' 이라 불린 대부분 국민들은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면서도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죠. 이런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각 신분 대표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어요. 미국 혁명 지원 등으로 인한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삼부회는 신분별로 한 표씩 의결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제3 신분에겐 무척 불리했어요. 귀족과 성직자가 힘을 합하면 2대1로 우세하기 때문이죠. 결국 제3 신분 대표들은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독자적인 국민 의회를 구성했어요. 루이 16세가 이를 무력 진압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습니다. 프랑스에선 아직도 이날을 프랑스대혁명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어요. 구 (舊)제도와 전제 군주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 손에 무너진 날이기 때문이에요.

파리에서 일어난 시민 봉기는 전국으로 퍼졌어요. 국민 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 을 발표해 혁명 이념을 알렸어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재산권 보호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유주의 이념을 담고 있어요.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는데, 결국 발각돼 다시 파리로 잡혀 옵니다. 파리 시민들은 국왕이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1792년 9월 국민공회가 수립되며 프랑스 공화정이 선포됐고, 시민들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이 된 나폴레옹

프랑스 시민들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왕을 처형하는 데 이르자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등 주변국은 혁명이 자기들 나라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어요. 프랑스는 1792년부터 혁명을 진압하려는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를 혁명전쟁이라 불러요. 이때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여전한 경제적 궁핍 속에서 시민들은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할 영웅은 나폴레옹밖에 없다고 여겼어요. 1799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안정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권을 장악했어요.

나폴레옹은 쿠데타 이후 새 헌법을 공포했어요. 제1 통령이 법률 발의, 예산, 외교, 전쟁, 관리 임명 등 모든 영역에서 권력을 갖는 내용의 독재 헌법이었지만, 국민들은 나폴레옹이 가져올 평화롭고 안정된 미래를 기대했어요. 제1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바로 국내 개혁을 추진했어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해 효율적 세금 제도를 정착시켰고, '나폴레옹 법전' 을 편찬해 근대 법률 체계를 확립했어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했어요. 당시 영국 · 러시아 · 오스트리아는 제2차 대 (對)프랑스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대치했는데,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어요. 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자리에 올랐어요.

1805년 유럽 국가들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으면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전쟁이 시작됐어요.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했으나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했고, 1806년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격파했어요. 또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영국 상품이 유럽 대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유럽에 끼친 영향

그러나 곧 대륙봉쇄령은 한계를 드러냈어요. 영국과 무역이 어려워지자 유럽 국가들은 설탕 · 향신료 · 커피 등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어요. 결국 1811년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상선을 허가했어요. 이에 분개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죠. 하지만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퇴각했고,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로 진격해 파리를 포위했어요. 결국 나폴레옹은 항복하고 퇴위합니다.

1814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쫓겨난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군대를 모았어요. 다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국민에게 자유주의적 통치를 약속했죠. 하지만 유럽 군주들은 나폴레옹의 복귀에 반대했고,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며 다시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됩니다. 결국 1821년 사망했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혁명 이념인 자유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어요. 동시에 침략자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각국의 민족주의를 촉진했죠. 마침내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유럽 각국은 1814년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했어요. 이들은 유럽 정치 체제와 영토를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리는 데 합의했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어요. 이를 '빈 체제' 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역사적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어요.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 빈 체제가 무너졌어요. 또 민족주의 물결은 이탈리아와 독일 통일 운동으로 이어졌어요. 비록 유럽 전체를 지배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무너졌지만, 그가 심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씨앗은 계속 남아 꽃을 피웠답니다.

 

 

 

 2일 (현지 시각) 체코 슬라브코프우브르나 근처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 218주년을 기념해 전투를 재현한 모습. 가운데가 나폴레옹 역할을 맡은 배우. / AP 연합뉴스

 

 

 

 1808년 프랑수아 제라르가 그린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 위키피디아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12월 6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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