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된 설화의 원작자]
▲ 뮤지컬 '이솝이야기' 에서 이야기꾼 노인 '페테고레' (가운데)가 주위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심을 끌고 있어요. / 컴인컴퍼니
추한 노예 · 편견 피해 여성··· 차별 뛰어 넘은 삶 무대 올렸죠
뮤지컬 '이솝이야기' '여기, 피화당'
이솝, 소크라테스도 읽고 연구
여성 영웅이 청나라 이기는 상상도
"늑대가 나타났다!" 는 거짓말을 일삼다가 도움 요청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된 양치기 소년 이야기, 끝까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서 토끼를 이긴 거북이 이야기 등을 통틀어 '이솝이야기' 라고 합니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애독할 정도로 사랑받는 이야기죠.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박씨전' 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장수를 물리치는 박씨의 통쾌한 활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17세기 조선의 작자 미상 (이야기 만든 사람을 알 수 없음) 이야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웅소설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든 이야기꾼은 누구일까요? 흥미로운 상상력을 동원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원작자를 찾아나서는 창작 뮤지컬 두 편을 소개합니다. 뮤지컬 '이솝이야기' 와 '여기, 피화당' 입니다. 둘 다 4월 14일까지 공연합니다.
평범한 삶 다룬 이야기··· 고대 그리스서 명성
'이솝이야기' 원작을 지은 '이솝 (Aesop)'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 사모스섬에 살았던 노예라고 알려져 있어요. 그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당시 귀족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나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속에 삶의 깨달음을 담았어요. '이솝이야기' 는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도 읽으며 그 교훈을 연구할 정도였다고 해요.
이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이야기' 가 완성됐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며 여러 판본이 소실되고 복원되길 반복했어요. 그러다 1484년 '근대 인쇄술의 아버지' 윌리엄 캑스턴 (William Caxton)이 이렇게 흩어져 있던 판본들을 모두 집대성해 지금처럼 정리된 이야기책으로 출간했답니다.
그러나 원작자 '이솝' 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적어요. 이솝은 세상 제일가는 추남에 말더듬이였다고 합니다. 또 그가 이야기할 때면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재미있게 말했다고 해요. 이솝 사후인 기원전 5세기에 '역사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책 '역사' 에도 짤막하게나마 이솝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있어요. 이솝의 주인은 사모스 시민 '이아도몬' 이었고, 재치 있는 입담과 재주로 이아도몬을 돕던 이솝은 그 명성이 점차 그리스 전역에 알려졌다고 해요.
뮤지컬 '이솝이야기' 는 이런 이솝의 생애를 모티브로 삼아 사모스섬의 귀족 딸 '다나에' 와 노예의 아들 '티모스' 라는 가상의 연인 한 쌍을 등장시켜요. 다나에는 부모의 과잉보호로 집 밖에 나올 수 없고, 그런 다나에를 위해 티모스는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줘요. 티모스 곁에는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허리 굽고 늙은 노인 '페테고레' 가 있어요. 하지만 티모스는 이야기 내용이 아테네 왕을 신성모독했다며 사형당할 위기에 처해요. 페테고레는 티모스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이름이 '페테고레 이솝' 임을 밝히죠. 이 뮤지컬은 '이솝이야기' 가 당시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더해져 구전됐음을 이야기해요. 그 많은 사람 모두가 이야기를 함께 만든 주인공인 거죠.
▲ 같은 공연에서 남자 주인공인 '티모스' (왼쪽)와 여자 주인공인 '다나에' (오른쪽)가 어린 시절에 티모스의 엄마인 '한나' (가운데)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모습. / 컴인컴퍼니
차별받던 조선 여성 인생, 소설로 쓴다면
한국에도 또 한 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웅소설 '박씨전' 이죠. 조선 시대 문신이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의 위기마다 공을 세운 이시백이라는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로 등장하는 이시백의 아내 박씨가 주인공입니다. 이시백은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박씨와 결혼하는데, 새색시 박씨의 얼굴이 흉측하기 짝이 없었어요. 이시백이 이런 아내를 멀리하자 결국 박씨는 뒤뜰에 따로 조그만 집을 짓고 '피화당' 이라 이름 붙인 후 그곳에 몸을 숨긴 채 몸종 계화와 외로이 살게 되죠. 하지만 3년 뒤 박씨가 추한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자 이시백은 외모만 보고 아내를 멀리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박씨도 이런 남편을 꾸짖다 용서하죠.
이후 세월이 흘러 박씨는 청이 조선을 침략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게 됩니다. 바로 '병자호란' 이에요. 하지만 여자가 조정의 일에 간섭한다며 아무도 박씨의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청의 장군과 병사들이 피화당에도 쳐들어오지만, 박씨가 도술을 부려 나무가 용과 범으로 바뀌고 결국 패한 청군은 돌아가게 돼요. 임금이 나라의 어려움을 물리친 박씨를 충렬 부인이라 부르고 그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청에 대패하고, 인조는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박씨전' 은 그 혹독했던 겨울을 보낸 민중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당시 지배층인 남성의 무능함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비판한 이야기였어요.
▲ 뮤지컬 '여기, 피화당' 에서 세상의 핍박을 피해 동굴에 숨은 여성들. 익명으로 이야기를 써서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어요. / 홍컴퍼니
뮤지컬 '여기, 피화당' 은 이런 '박씨전' 을 소재로 새롭게 창작한 이야기입니다. 뮤지컬 제목에서 '피화당' 이라는 단어는 바로 박씨 부인이 몸을 숨겨 지냈던 별채의 이름을 의미하지요. 뮤지컬은 확실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박씨전' 의 저자를 세 여성으로 상상해요. 이들은 병자호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에서는 정절을 잃었다며 모욕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아요. 이에 동굴에 몸을 숨긴 채 '박씨전' 을 써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는 거죠. 뮤지컬에서는 가상의 세 여성이 겪는 험난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중간중간에 실제 소설인 '박씨전' 의 내용을 겹쳐지게 해 몰입도를 더하지요.
▲ 같은 공연에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선비 '후량' (왼쪽 위)이 동굴로 찾아가 저잣거리에서 유행하는 이야기를 썼다는 여성 작가들에게 아버지 사연을 이야기로 써달라고 부탁해요. / 홍컴퍼니
뮤지컬 '이솝이야기' 를 쓴 주인공이 노예를 비롯한 이름 없는 민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작가들도 온갖 고초를 겪은 여성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시대상에 따라 차별받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겠지요. 그 사람들은 모두 '글 속에서 용기 있던 사람' 이었습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 · 구성 = 장근욱 기자 (muscle@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4년 3월 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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