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군정기 한미 친선모임 '낙랑클럽' 의 역사적 공헌]
일러스트 = 한상엽
"말 안 통해 한미 외교 멈춰" 미군 지프차로 '부인 통역관' 모셔갔다
불안정한 정부 수립기
고급 인재 모은 모윤숙
"세계 평화 번영에 기여"
격조 높은 사교 파티로
주한 외국인에 한국 홍보
국군 위문과 예술 후원도
UN한국임시위원단 단장은 인도인 정치가 메논이었다. 1948년 1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난 모윤숙과 이승만의 거듭된 설득으로, 한 달 후 UN소총회에서 남한의 단독선거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낙랑클럽은 바로 이 모윤숙과 메논의 만남과 우정을 이어준 단체였다. 그 과정을 연구한 서울대 최종고 교수는 낙랑클럽을 “영어를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 사교 단체”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낙랑클럽은 ‘비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너무 많은 공개 행사를 주관했다.
“모윤숙, 최예순씨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낙랑구락부에서는 이 대통령 재미 (在美) 중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은 세 귀빈 스테거씨, 윌리엄스씨, 올리버 박사를 중심으로 환영간담회를 20일 하오 창덕궁 인정전에서 개최하였다.” (동아일보 1949. 5. 22) 낙랑클럽 회장 모윤숙은 ‘주최자 (hostess)’로서 “한국과 여러 민주주의 국가의 공고한 제휴를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자” 는 개회사를 했다. 문화행사와 세 귀빈의 답사에 이어 단상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은 세 귀빈과의 추억담을 소개한 후 “동양 전체의 암담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것” 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비슷한 시기, 개성에서는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국군 제1사단 특공대 10명이 인민군 토치카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산화한 ‘육탄 10용사 사건’ 이 일어났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방문해 유가족들에게 가구당 10만원씩 후원해 달라며 100만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이튿날에는 제1사단을 ‘위문 방문’ 했고, 일주일 후에는 이화여대 동창회 주최로 ‘10용사 유가족 원호 음악회’ 를 열어 수입금 전액을 유가족에게 보냈다. (자유신문 1949. 5. 25)
그 밖에도 그해 8월 재경 (在京) 외국인클럽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내외빈을 ‘위문’ (entertain)하기 위해 덕수궁 광장에서 고전극 ‘선덕여왕’ 을 비롯한 음악, 무용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경향신문 1949. 8. 7), 로버트 미국 군사사절단장을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하는 (동아일보 1949. 8. 26) 등 한국과 미국, UN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주관했다.
회원들은 낙랑클럽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수필가 전숙희도 그중 하나였다. 전숙희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제펜클럽 종신 부회장을 역임했고, 동생인 파라다이스 그룹 전낙원 회장과 함께 계원예술고등학교와 계원조형예술대학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전숙희는 남편이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포항 인근 안강읍에서 해방을 맞았다. 26세에 불과했지만 2남 2녀의 어머니였다. 포항에 설립된 군정청은 통역관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안강읍 병원장 아내가 영문과 출신임을 알게 된 군정청 미군 장교는 병원으로 찾아와 통역을 부탁했다. “네 아이를 키우기도 벅차다” 고 완곡히 거부하자, 장교는 “우리는 생명을 내놓고 너희 나라를 구해줬는데, 말이 안 통해서 정치를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지프를 보내 통근시켜 주겠다.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데려와도 좋다” 고 설득했다. 전숙희는 그 조건대로 군정청에 나가 비서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2년 후 서울 군정청에 발탁돼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그리고 대학 선배 모윤숙의 권유로 낙랑클럽에 가입했다. 2005년 해방 60주년을 맞아 전숙희는 낙랑클럽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정 시기에 낙랑클럽이라는 단체가 생겼어요. 미군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를테면 한미 친선을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죠. 멤버는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외국 유학을 갔다 올 정도의 교육받은 사람들, 또 잘살고 좋은 일도 많이 한 사람들 있잖아요? 미혼은 한 명도 없었어요. 가정부인들 가운데에도 모습이 아름답고 영어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으며, 교육도 받고 매너도 좋은 사람들만 뽑았던 겁니다. (···) 어디에서 미군들의 파티가 열리면 낙랑클럽 회원들을 초대해요. 그럼 우리는 가서 같이 대화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으레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어요. (···) 모윤숙 선생이 클럽을 만들어서 다 모아 놓으니까 서로 신이 나서 여자들끼리 모여서도 재미있게 놀았지요. 이야기하고 춤추고 우리끼리 노래하고 교가도 부르고 그랬어요. 김활란 박사도 오셨죠.” (‘낙랑클럽이 한국을 알렸어요’)
미국 고위 간부들하고 친하고 싶어도 영어를 못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한국 군인과 정치인들은 낙랑클럽 회원들의 통역 덕분에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미국 고위 간부들은 낙랑클럽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 미풍양속을 알게 되었다. 전숙희는 “낙랑클럽은 한국과 미국이 우호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고 자부했다.
모윤숙은 1979년 인터뷰에서 낙랑클럽이 1951년 6 · 25 피란 시절 “외국 손님 접대할 때 기생파티를 열지 말고 레이디들이 모여 격조 높게 대화하고 한국을 잘 소개하라” 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부산에서 설립돼 약 2년간 지속됐다고 설명했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인터뷰였던 탓에 미군정기 활동을 빠뜨렸다.
“말하자면 낙랑은 정부의 부탁으로 이른바 ‘파티 대행업’ 을 한 셈인데···. 부산 송도 바닷가 돌멩이 위에 지은 집 (귀속재산)을 허정 장관에게서 빌려 ‘시 사이드 맨션’ 이라 부르고 파티 비용은 청구서에 따라 장면 총리실에서 지불해 줬죠. 국무위원들이 귀빈들을 초대하는 데 빈객으론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리지웨이 · 콜터 · 밴프리트 장군에 무초 미국대사 등이 온 것 같고, 그때 장 총리와 무초 대사가 뜰 모퉁이 버드나무 밑에서 쑤군쑤군하는 모습을 보고 우린 전쟁이 멎고 통일이 되는 줄로만 알았었지.” (서울경제 1979. 4. 12.)
낙랑클럽은 로비와 정보 수집 등 한국 정부의 이익을 대변한 단체였던 만큼,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위가 없는지 미군방첩대 (CIC)의 내사를 받았다. 모윤숙의 절친한 대학 후배였던 낙랑클럽 회원 김수임은 미군 헌병감과 동거하며,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죄목으로 6 · 25 직전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미군 CIC 보고서의 결론은 낙랑클럽은 1952년 12월에 활동을 중지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낙랑클럽은 이화여대 출신 상류 집안 기혼여성 150여 명이 봉사활동과 ‘나라를 위해’ 외국 귀빈과 파티를 벌인 단체였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낙랑클럽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명백한 ‘사실’ 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4월 1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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