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고종
매국노 고종
우리는
그 시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고 종 정 권
賣 國
무능 + 부패 = 매국
1873년 11월 4일
"서무개친총 庶務皆親總"
"사무를 짐이 직접 관장하겠노라."
적 폐 청 산
나라에만 이롭고 백성에게 해가 된다
[利於國而害於民 리어국이해어민]
이때 대원군이 설치한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모두 개혁하였다.
- 황현, 매천야록
"그 장성이 나라에 무슨 해가 된다고 다 파괴하는가!"
- 매천야록, '진무영 철폐'
2. 경제와 진영
청전(淸錢) 폐지와 우글대는 민씨들
'長 城'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
쇄국
"청전(淸錢)을 통용시키면 공사 거래가 넉넉하게 될 방법이니 이 뜻을 널리 알려 편히 사용하게 하소서."
- 1867년 고종 4년 6월 3일
1873년 11월 4일 친정 선언
1874년 1월 6일 청전 혁파 선언
<1874년 1월 6일 의정부 보고>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필요한 경비가 모자라게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조와 선혜청, 각 군영에 알려서 한성과 지방 관용물품 수요와 관리들 봉급을 일단 조사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1874년 1월 13일 우의정 박규수>
"시원하게 하루 아침에 혁파하셨습니다. 참으로 지난 역사에 드문 성대한 일이니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할 것 없이 모두 우레같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재정은 밑천이 없고 민간 물품은 유통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근심이 절급합니다."
<1874년 1월 13일 국고 현황>
- 청전 300만냥 이상
- 상평통보 800냥
<1874년 1월 13일 국고 현황>
고 종 : "어찌해야 하는가."
영의정 : "호조의 일용 잡비도 조치할 계책이 없나이다."
<1874년 1월 13일 고종 代案>
환곡에 대한 이자만 아니라 원금까지 다 거둬서 [拔本 발본] 올리도록 하라.
호조판서 : 앞으로 경비가 염려된다.
<1874년 1월 13일 고종 代案>
고 종 : 평안도 곡총(곡식 장부)를 보니 기록에 없는 환곡이 있었다.
박규수 : "허깨비 문서에 불과한 곡총에는 실제 곡식은 없다.'
<1874년 1월 17일 고종 代案>
고 종 : 사창 (대원군이 만든 개혁 환곡)에 있는 곡식을 돈으로 바꾸라.
이유원 : 병인년별비곡 (대원군의 환곡 종자돈)이 섞여 있어 불가하다.
<1874년 1월 17일 고종 代案>
손 댈 수 있는 것은 손을 대야 한다. 일체를 돈으로 바꿔야 한다.
<1874년 1월 17일 고종 代案>
이유원 : "환곡은 수재나 가뭄 같은 뜻밖의 일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곡식을 모조리 돈으로 바꿔버리면 원대한 계책은 아닌 듯합니다."
<1874년 1월 20일 현황>
상평통보 800냥 > 100만 냥 입고
남은 청전 200만 냥 무용지물화
"환곡을 돈으로 바꾸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1874년 1월 20일 현황>
이유원 : "나라에 3년 먹을 저축이 있어도 방도가 없을 것인데, 눈앞의 소용도 계책이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나이까?"
고 종 : "호조에 상평전이 있어야 매사에 힘을 펼 수 있게 되느니라."
백성 구휼 정책인 환곡을 폐기 수준으로 축소시키고 곡식을 상평통보로 환수해 국고로 회수
청전 철폐로 벌어진 충격적인 재정적자를 메꾸려는 조치.
"일체를 돈으로 바꿔야 한다."
[一體作錢 可也]
- 1874년 1월 17일 고종
"경복궁 세 전각을 날을 택하여 다시 수리공사하겠다."
"매우 궁핍하여 경비를 어찌 마련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 고종 - 영의정 이유원 대화(1875년 3월 25일)
"재물이 모이는 곳은 원망이 일어나는 곳이니 왕께서는 절대 재물을 만들어 낼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경비로 인해서 원망을 사면서까지 재물을 마련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신하가 한다면 모르겠지만 지존 지위에서는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죽음을 무릅 쓰고 우러러 아뢰는 말씀입니다."
- 고종 - 영의정 이유원 대화(1875년 3월 25일)
1875년 3월 25일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뜻밖으로 쓸 일이 생기면 10만 냥에 달하는 재물이라도 호조와 선혜청이 어렵지 않게 마련했다. 그런데 근래에는 어찌하여 지난 날과 같지 않은가?"
1872년 12월 4일
"지금 중앙과 지방의 각 창고들을 보면 거의 다 차서 저장할 데가 없습니다. 신이 경희궁 숭정문 밖을 살펴보니 터가 널찍하여 충분히 창고를 지을 만 하였습니다. 내년 봄에 여기에 새로 200칸 건물을 지어 곡식을 저장하게 하되, 호조와 선혜청에서 융통하여 묵은 곡식을 쓰고 햇곡식은 저축하는 것이 좋겠기에 우러러 아룁니다."
1882년 원세개 보고
'조선 국고에 1개월치 비축분도 없다.
- 1882년 원세개, 이홍장에게 보낸 보고서
A "CASH" TRANSACTION IN KOREA
1904년 러일 전쟁 종군기자
2. 우글대는 민씨들
숭용산림과 물실국혼
계해년 1623년에 인조반정 공신 무리들이 이렇게 약조하였다.
'학자를 추천하여 장려하자[崇用山林]
'왕실 혼인을 놓치지 말자[勿失國婚]'
- 남하정 '동소만록'(1740)
왕가와 결혼한 것은 호화스러운 수레와 기름진 말과 외척 고관으로 부귀를 누리기 위한 일일뿐만 아니었다. 중전과 친하여 아무 때나 궁궐에 출입하면서 궁내 움직임을 엿보고 주상의 뜻에 영합하여 이익을 보려 하며, 치밀하게 모의하여 은총을 굳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사돈, 외척으로서 요직을 담당하고 주상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이것이 권력을 누리면서 놓치지 않은 방법이었다.
노론
▶ 만동묘 철폐
▶ 서원 철폐
▶ 남인 - 북인 중용
노론
▶ 노론 + 민씨 척족
▶ 만동묘 부활
민씨 정권
1. 영의정 이유원(소론)
2. 우의정 박규수(노론)
1874년 사표
권력기구 수뇌부 : 친위부대 무위소 - 통리기무아문(1880년) - 통리군국사무아문(1882년) - 내무부(1885년)
의정부 : 이조 - 호조 - 병조 - 형조
(인사, 재정, 군사, 치안, 사법, 형사 장악)
민태호(민비 항렬)
1883년 군국아문 수독판
주전당상
고주처 관리
전환국관리사무
개성유수
선혜청당상
공시당상
민영익(민비 조카)
육영공원(근대교육기관) 제외한 전 부서
민영익, 민겸호, 민치상, 민태호,
민종묵, 민영목, 민영환, 민영상,
민응식, 민병석
견제 불가능한 권력
견제 불가능한 부패
이 무렵 세상에서는 민씨들 가운데 세 사람을 도둑놈으로 지목했다. 서울의 민영주라는 도둑놈, 관동의 민두호라는 도둑놈, 영남의 민형식이라는 도둑놈이 바로 그들이다.
- 황현, '매천야록'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민씨들이 전국 큰 고을의 수령자리를 대부분 독차지했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미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저 형식이라는 놈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라고 불렀을까? 그것도 모자라 '미친 호랑이[狂虎 광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만큼 포악하다는 표현이었다.
임오군란(1882)
- 왕십리-이태원 하급 군인들의 반란
- 13개월 체불된 임금
盡殺諸閔 진살제민
(모든 민씨들을 다 죽인다)
청나라 군사를 불러 진압
군사정책 + 권력집중 + 부패
= 총체적 모순의 폭발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밤마다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광대와 무당과 수경들도 노래를 부르고 거드름을 피웠다.
대궐에는 등불을 대낮처럼 훤히 밝히고 새벽이 되도록 놀다가 4~5시 내지 7시경이 되면 휘장을 치고 어좌에 누워 잠을 자고 오후 3시나 4시에 일어났다.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하므로 나이 어린 세자는 습관이 되어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추면 두 사람 옷을 붙들고 "마마, 잠자러 가요?"하고 졸라댔다.
서울에 있던 부유한 상인들은 상납할 과거 대금을 내기 위해 주야로 돈을 거두어 바치느라고 난리를 만난 것과 같았다. 이때 급제자를 더 늘리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민응식이 민망히 여겨 그 폐단을 고종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고종이 말했다.
"잔말 말라. 조선 말기에 마을마다 급제자가 나고 집집마다 진사가 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게 대운大運이라는 것인데 집이 과거를 팔지 않으면 그들이 대운을 건질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서수붕 : "귀국은 기수(氣數,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
고종 : "칭찬은 감사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서수붕 : "청나라는 매관매직을 한지 10년도 안 돼 천하가 큰 난리를 겪고 종사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은 매관매직을 하고 20년이 돼도 아직 옥좌가 건재하다.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면 어찌 그리될 수 있겠는가."
고종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부끄러워할 줄 모르자 서수붕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민은 슬픈 민족이다"라고 하였다.
1883년 당오전 발행
- 전환국 민태호
정부 이익을 위해 백성의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백성의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고서 죽음을 무릅 쓰고 이익을 구하는 것은 몰래 주조하는 자나 하는 짓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엄금해야 마땅할 텐데, 어찌 나라를 다스리면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 김윤식
심장의 살을 도려내 눈병을 치료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지혜롭지 못하다.
- 김윤식
생선, 소금, 구리, 무쇠 등 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물건에도 세금을 매겼다 [市井百貨無物不稅].
더 나아가 홍삼 매매를 나라에서 독점하고 민영익을 시켜 중국에 팔아 이익을 챙겼지만, 여전히 재정은 부족했다. 결국 서양과 일본에서 빚을 냈는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 매천 황현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는 민씨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뒤덮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슨 좋은 팔자라고 난리를 볼 수 있겠나?"며 장탄식을 하기도 했다.
- 매천 황현
1905년 미국 공사 알렌이 우리나라에 10여년간 머무르다 귀국할 때 사람들에게 탄식했다. "한국 국민이 가련하다. 9만 리를 돌아다니고 상하 4000년 역사를 봤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 매천 황현
3. 독재와 폭정
https://www.youtube.com/watch?v=Lubu6kJxU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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