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선두, 전통 기법으로 현대적 한국화 그리다]
김선두, ‘낮별ㅡ장닭’ (2021). 장지에 먹, 분채. / 학고재
먹 위에 色을 쓴다··· 옛 방식으로 그리는 새 한국화
영화 '취화선' 서 장승업 그림 대역
소설 '남한산성' 표지 그려 유명
작년 교편 내려놓고 작업에만 몰두
먹으로 바탕 칠하고 분채로 색 올려
색 수십 번 쌓아 바탕 칠한 작품도
"먹을 치는 붓으로 색을 칠했으니
수묵화의 개념도 넓힌 것 아닐까"
튼실한 장닭 한 마리가 바닥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모이를 쪼는가 했더니 뜯겨진 과자 봉지다. 배경엔 오이꽃과 맨드라미가 탐스럽게 피었고, 하늘엔 별이 총총 박혔다. 옛 그림에서 볼 법한 소재이지만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한국화 거장 김선두 (66 · 중앙대 한국화과 명예교수)의 ‘낮별ㅡ장닭’. 꽃과 장닭은 분채 (전통 채색 안료), 하얀 별은 호분 (조개껍데기를 갈아 만든 백색 안료)으로 색을 내고 바탕엔 먹을 칠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김선두 개인전 ‘푸르른 날’ 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빈 과자 봉지에 집착하는 닭은 욕망을 쫓는 우리 모습을 투영한다” 며 “낮에는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별을 통해 현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 했다.
김선두, '낮별ㅡ옥수수' (2024). 장지에 분채. / 학고재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 에서 오원 장승업의 그림 대역을 맡고, 김훈 소설 ‘남한산성’ 표지화를 그려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한국화가 어떻게 하면 현대 회화로서 가능할까 고민하며 새로운 실험을 많이 해왔어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낡은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기, 다른 하나는 한국화만의 미감을 새로운 미디어로 풀어가는 겁니다. 이번 전시에선 첫 번째 방식을 선보이고자 했어요.”
그가 말하는 ‘낡은 방식’ 이란 전통 초상화를 그릴 때 쓰는 기법을 말한다. 장지에 분채를 수십 번 쌓아 올려서 색을 우려낸다. 장지는 촘촘하고 두터워서 물감을 머금으면 색이 투명하면서도 짙게 발색된다. 작가는 “수묵 실험도 계속 해왔다” 며 “수묵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먹이 아니라 붓” 이라고 했다. “먹을 치는 붓으로 색 (色)을 썼으니, 수묵화의 외연을 넓힌 것 아닌가.”
김선두 개인전 '푸르른 날' 전시장 전경. / 학고재
지난해 교편을 내려놓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가 학고재에서 4년 만에 여는 전시다. 이번 전시 주제는 ‘삶의 절정’. 꽃이 피는 찰나, 폭죽이 터지는 순간, 성취의 절정과 함께 허무해지는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제목 ‘푸르른 날’ 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로 시작하는 서정주 시인의 동명 시에서 따왔다. “절정 뒤의 허무를 이보다 더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가 없다” 고 했다.
김선두의 가로 8m 대작 ‘싱그러운 폭죽’ (2023)이 전시장 한쪽 벽면을 메웠다. 꽃이 피는 찰나를 폭죽 터지는 순간처럼 포착했다. 장지에 분채로 활짝 핀 꽃과 나뭇잎을 칠한 뒤 배경을 먹으로 채웠다. / 학고재
가로 8m 대작 ‘싱그러운 폭죽’ 이 전시장 안쪽 방, 벽면 하나를 메웠다. 이번 전시 주제를 가장 많이 함축한 작품이다. 폭죽이 터지는 순간을 꽃망울이 피면서 꽃가루가 휘날리는 모습에 빗대 형상화했다. 그는 “폭죽은 불꽃이 터지는 순간 절정에 이르고 즉시 소멸한다는 점에서 목표를 이룬 뒤 공허해지는 삶과 닮았다” 고 했다.
그가 인생의 스승으로 꼽는 이가 소설가 이청준이다. “2003년 이청준 선생 댁에 세배 드리러 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할미꽃 화분을 봤어요. 저는 할미꽃이 슬프고 힘 없는 꽃인 줄 알았는데 새싹인데도 대차게 올라왔더라구요. 굉장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모든 꽃은 대지에서 쏘아올린 폭죽이구나, 거기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에요.”
김선두, 'On the Way in Midnight' (2024). 장지에 먹, 분채. / 학고재
보름달 뜬 밤하늘 아래,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그린 ‘밤길’ 연작엔 유년시절 기억이 담겼다. “고향인 전남 장흥, 전기가 하나도 없던 시골에서 밤길을 다니다 보면 저 위에 떠 있는 달이 나를 따라왔다” 며 “밤은 무섭고 외롭지만 달이 떠 있으면 걸어갈 만했다” 고 했다.
가장 많이 나온 ‘낮별’ 연작은 새가 주인공이다. 참새, 곤줄박이, 검은머리 딱새가 옥수수 줄기 위에 앉아서 빈 과자 봉지를 노려본다. 배경엔 밤에만 보이는 별이 무수히 떠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낮에도 별이 존재하고 있지 않나. 빛은 현상이고, 별이 본질이라는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
김선두, '낮별ㅡ옥송이' (2024). 장지에 먹, 분채. / 학고재
새도, 닭도, 폭죽도, 꽃도 모두 작가 자신이다. 전시를 함께 둘러본 우찬규 학고재 대표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너머의 감정을 그려내는 작가” 라며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아름다움과 공허함이 교차되는 삶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든다” 고 했다. 시인 김수영, 야구선수 선동열 등 초상화를 그린 ‘아름다운 시절’ 연작까지 모두 36점이 나왔다. 전시는 17일까지. 무료.
한국화가 김선두. / 학고재
☞ 김선두 (66)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한국화과에서 학사 · 석사를 마치고, 1994년부터 30년간 같은 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길렀다. 한국화의 현대화를 고민하며 지평을 넓혀온 작가로 꼽힌다. 최근엔 유화 · 사진 · 영상 등 다른 장르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유튜버 침착맨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한국화 그리는 법을 소개했다. 젊은 세대에게 한국화의 매력을 더 많이 알리려는 노력이다.
허윤희 기자
[출처 : 2024년 8월 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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