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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4. 이봉창 의거의 진실

드무2 2021. 7. 2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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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4. 이봉창 의거의 진실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0년 11월 10일 방송

 

 

 

 

 

 

김구의 신화 (4)

 

이봉창 의거의 진실

 

- 의거인가, 폭거인가 -

 

2020. 11. 11 (수)

 

정안기

 

 

 

 

 

 

1. 신화의 공간

 

 

 

 

 

 

 

 

 

 

 

 

 

 

 

 

 

 

 

1.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5분 동경 代々木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고자 했지만, 미수에 그쳤던 폭탄테러 사건!

 

2. 피고인은 1901년 경성부 출생 조선인 이봉창(李奉昌 / 木下昌藏 등), 9월 30일 사형 판결 / 10월 10일 사형 집행, 일본 = 테러리스트! 한국 = 義士 / 烈士!

 

3. 사주 및 공모자는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상해 임시정부 재무국장 및 상해민단장 백정선(白貞善 / 金九)

 

 

 

2. 자료와 연구

 

 

 

월일 문서명 건수 검판사 요지
1. 10 청취서 1 龜山愼一 테러경위
1. 12 검증조서 2 秋山高彦 테러현장 2번마차
1. 13 상신서 1 이봉창 테러경위 진술
1. 8~6. 27 신문조서 9 秋山高彦 테러사건 전반
6. 30 의견서 2 秋山高彦(예심)
鳥田鐵吉(대심)
범죄성립 /
적용법률
7. 19~9. 16 공판조서 3 鳥田鐵吉(대심) 형법 제72조 대역범
9. 30 판결문 1 和仁貞吉 심리 / 판결

◆ 증인조서 32건 / 감정조서 2건 존재! 개인정보 / 미공개

 

 

 

회수 월일 장소 예심판사 요지
제1회 1. 8 경시청 秋山高彦 신원확인
제2회 1. 11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테러실상
제3회 1. 12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동경 / 거사 계획
제4회 1. 28 豊多摩 형무소 中里龍 1928년 검속 / 차별
제5회 2. 9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가족 / 직장 / 도항
제6회 2. 12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생활 / 취직 / 차별
제7회 2. 13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상해 / 백정선 / 테러 공모
제8회 3. 11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테러 자금 / 물증 확인
제9회 6. 27 豊多摩 형무소 秋山高彦 동기 / 사상 / 반성

 

 

 

1. 한시준(2001),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과 그 의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7집.

 

2. 이봉창의사장학회 편 (2002), 『이봉창 의사와 한국 독립운동』 단국대학교, (한시준, 논문)

 

3. 홍인근 (2002), 《이봉창 평전 - 항일 애국 투쟁의 불꽃, 그리고 투혼》 나남출판

 

4. 동양학연구소 편 (2004), 『이봉창 의사 재판 관련 자료집』 단국대학교 출판부, (한시준, 해제)

 

5. 배경식 (2008),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너머북스.

 

 

 

 

 

 

한시준 교수

 

보통인간 / 평범한 청년 / 신 일본인, 1928년 11월 京都, 御大典 / 검속 / 구류 (9일) = 민족차별 / 독립운동, 1931년 상해 망명 / 테러리스트 변신 => 1932년 1월 8일 천황 폭살테러 감행!

 

1. 그는 과연 보통 인간 / 평범한 청년이었는가?

 

2. 그는 민족차별 때문에 비범한 독립운동가 / 테러리스트로 변신했는가?

 

3. 1932년 이봉창의 폭살테러는 과연 민족적 의거 / 독립운동의 쾌거였는가?

 

=> 한시준 교수는 과연 자신이 편찬하고 해제한 이봉창 재판 관련 자료집을 제대로 검토했는지 의문!!!

 

 

 

출생, 가족, 성장

 

● 부친 이진구(李鎭球), 부인 / 첩 2명 = 6난 1녀

    손씨 (처) = 범태 (장남) / 봉창 (차남) / 점동 (삼남)

    주씨 (첩) = 봉준 (장남) / 봉운 (차남) / 종대 (삼남)

    정씨 (첩) = 이덕희

 

● 용산구 원정 (1~12세) : 건축청부업 / 우마차 운송업 / 목재상 = 유복하고 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

 

● 용산구 금정 (13~25세) : 부친 = 악성매독 / 사업부진 / 목재유실, 집문서 사기, 양친 별거, 가계빈곤, 27년 모친 / 부친 사망 = 장례식도 불참!

 

● 이봉창 = 1901년 출생 / 08년 서당 3년 / 11년 문창보통학교 입학 (4년제), 14~15세 말라리아 / 관절염, 주량 = 한 되, 취미 = 야구 / 탁구 / 바둑

 

 

 

취업, 전직, 사직

 

● 1914년 3월 보통학교 졸업, 일본인 과자점 和田衛生堂 취업, 3년 근속, 식사 / 월 7~8원

 

● 1917년 村田 약국, 취직, 숙식 / 월 13~14원, 업무부진 / 싫증 / 사직!

 

● 1919년 8월 용산역 試庸夫 취직.

 

● 1920년 1월 驛夫, 2월 轉轍手, 10월 連結手, 월급 47~48원 ? 가계안정!

 

● 1924년 4월 용산역 사직, 주색잡기 차입금 400~500원, 관절염 사칭 = 의병 퇴직, 더 많은 퇴직수당 취득. 차별대우 = 용원 승진 좌절! 조선인 친구 용원!

 

● 1924년 5월 25년 11월, 關帝廟 보존 봉사활동 / 청년회 결성 / 공공봉사, 빈둥거림

 

 

 

전직, 횡령, 도주

 

● 1925년 11월 조카딸 은임 / 大阪 도항 ? 식모 / 급료가불

 

● 1926년 2월 大阪가스 취직 (木下昌藏!) 9월 각기병 발병 / 장기요양

 

● 1927년 5월 복직 / 무단 휴직 / 싫증! 12월 사직

 

● 1928년 2월 住友伸銅所 尼ケ崎출장소 常傭夫 취직, 11월 천황 즉위식 / 검속, 자포자기 / 방탕, 12월 사직

 

● 1929년 2월 山野비누 상점 취직, 9월 매상금 100원 횡령 / 도주 / 東京 (松井一夫!)

 

● 1930년 3월 坂口해산물 도매상 취직, 싫증! 7월 사직.

 

● 1930년 8월 大木가방상회 외판원, 매상금 50~60유용 (주색), 자포자기 / 11월 50~60원 횡령 / 도주 / 大阪

 

● 1930년 12월 상해 영국인 전차회사 취직 = 조선인 우대 / 假政府 도움, 상해행 결심

 

 

 

상해, 백정선, 테러 공모

 

● 1930년 12월 6일 大阪 출발 / 10일 도착 (松村昌藏)

 

● 1931년 1월 김동호 (노종균) / 백정선 (김구) 1차 대면,

 

● 1931년 3월 2차 대면, 明善철공소 취직

 

● 1931년 4월 3차 대면, 일본 / 천황 동정 등

 

● 1931년 5월 4차 대면, 천황 폭살 / 의기투합

 

● 1931년 9월 5차 대면 / 榮昌 공사 전직 / 폭탄 입수 촉구

 

● 1931년 12월 13일 6차 대면 / 300불 + 사진촬영 / 매춘

 

● 1931년 12월 15일 7차 대면 / 합숙, 폭탄 입수 / 사용법 설명, 테러 일정 / 장소 논의 = 이봉창 일임!

 

● 1931년 12월 16일 8차 대면 / 합숙, 시계 (8원 80전)

 

● 1931년 12월 17일 9차 대면 / 폭탄운반법 설명 / 永川丸 승선

 

 

 

 

 

 

 

선서문

 

 

 

1931년 12월 24일 이봉창이 백정선 앞으로 보낸 편지

 

 

 

빈털터리 테러리스트

 

● 1931년 12월 19일 神戶-大阪, 梅丿屋 투숙 / 매춘!

 

● 1931년 12월 일 大阪-동경 浅草尾張屋 투숙

 

● 1931년 12월 23일 백정선 100엔 송금 요청 1차 타전

 

● 1931년 12월 27일 시계 저당 (1원 50전), 백정선 전보 수취, "正金 100엔 송금!" 우편환 / 은행환 무분별!

 

● 1931년 12월 28일 『朝日新聞』, 1월 8일 관병식 천황 참석기사 확인, 백정선 = 거사일 / 제2차 송금 요청

 

● 1932년 1월 3일 옷 저당 (1원 30전), 제3차 송금 요청

 

● 1932년 1월 4일 백정선 송금 100엔 출금, 神奈川현 川崎市 유곽 玉木樓 투숙 (松井一夫!) / 매춘!

 

● 1932년 1월 6일 代々木연병장 답사, 헌병조장 명함 입수, 테러장소 原宿 확정, 朝日 호텔 투숙 (朝山昌一!), 매춘!

 

● 1932년 1월 7일 골프, 마작, 음주, 매춘! 川崎市 玉木樓 창기 靜技 = 7시 기상 알람 부탁!

 

 

 

1931년 12월 28일 요꼬하마정금은행 상해지점이 백정선 앞으로 송금 영수증.

 

 

 

테러자금 회계

(단위 : 엔)

수입 지출
항목 금액 항목 금액
상해(31. 12. 15) 150 (상해-고베) 승선료 50
동경(33. 1. 04) 100 (상해) 유흥비 / 선물 등 50
    (대판) 숙박 / 유흥비 등 10
    (대판 동경) 교통비 40
    (동경) 숙박 / 유흥비 등 100
합계 250 합계 250

 

 

 

3. Mission Impossible

 

 

 

아마추어 테러리스트

 

● 1932년 1월 8일 오전 7시 기상 / 原宿역 도악 (8시 50분), 관병식 입장 / 천황 폭살, 아침 식사 / 형사들 조우, 삼엄한 경비, 테러 장소 변경

 

● 四ツ谷見付 이동동, 천황 행렬 불통과 장소변경

 

● 赤坂見付 도착 (10시경), 천황 행렬 이미 통과, 테러 계획 변경 / 귀행길 테러, 근처 식당 음주, 11시 30분

    赤坂見付 도착 / 천황 행렬 이미 통과!

 

● 지름길 확인, 택시 이용, 11시 40분경 경시청 정문 앞 순사 검문 = 헌병 명함 제시 / 통과!

 

● 櫻田門역 / 경시청 정문 = 천황 접근, 배관자 5-6열 18m 폭탄 투척

 

● 표적 = 궁내대신 마차 / 소리만 요란 / 미미 피해, 자수 / 체포 / 경시청 신문

 

 

 

 

이봉창과 천황의 이동경로

 

 

 

경시청 현관 앞, 사건 현장

 

 

 

실패한 테러

 

● 빗나간 표적, 제1번 마차 = 일본 천황 탑승, 제2번 마차 = 궁내부 대신(一木喜德郞) 탑승, 천황 인상 착의 / 행차 코스 미확인!

 

● 11시 44~45분 투척, 약 18미터 거리, 폭탄 낙하 지점 = 2번 마차 뒤편 마부 발 받침대 아래쪽 지면 폭발, 지점 부적당!

 

● 백정선, 폭탄 = 파열 방경 11~13미터 이내 풍지박살 / 폭음만 요란! 근위병 / 마차도 무사, 천황 행렬 5분 뒤 궁성 도착, 자살용 미투척!

 

● 폭탄 = 낮은 파열 강도 / 저성능! 마차 밑바닥 / 바퀴 타이어 파손, 근위병 말 2필 가슴 / 코 = 경미한 파편상 / 출혈, 준비 / 연습부족 + 대상 미식별 + 불량 폭탄!

 

 

 

제2번 궁내부대신 마차

 

 

 

테러 당일 연행되는 내복 차림의 이봉창

 

 

 

1932년 1월 8일 오후 2시 30분부터 경시청 현관 주변, 경관들의 현장 검증

 

 

 

1932년 10월 10일 사형이 집행된 이치가야(市ヶ谷) 형무소

 

 

 

5. 신문조서

 

 

 

[문] 머릿병을 앓은 적은 없는가?

[답] 머릿병을 앓은 적은 없습니다.

[문] 가까운 친척에 정신병을 앓은 자가 있는가?

[답] 없습니다. (제5회)

[문] 피고는 대정8년 (1919년) 3월 경성에서 만세 소동을 목격했는가?

[답] 그때 나는 고용살이 중이어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무엇때문에 했는지 까닭도 모르는 채 듣기 만 했습니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제2회)

[문] 1월 7일의 행동은?

[답] 尾張屋 여관 뒤쪽 편 베이비 골프장에서 1시간 가량 논 뒤 松竹座 옆의 마작 구락부에서 오후 2시 반경까지 놀고 건너편 음식점에서 오후 5시 반경까지 음식을 먹고 朝日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川崎의 玉木樓에 가서 靜技와 1박 했습니다··· 그리고 靜技에게는 "내일 비가 오면 천천히 깨워도 되지만 날씨가 맑으면 7시경 깨워 달라"고 부탁하고 잤습니다. (제3회)

 

[문] 五條경찰서에서 석방된 뒤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답] 그 후 자포자기하여 급료를 받으면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本間茂一의 도움으로 大坂市 山野비누상점에 취직했습니다··· 수금한 매상금 100圓을 갖고 東京으로 도망했습니다. (제5회)

 

[문] 坂口해산물 도매점은 왜 그만 두었는가?

[답] 나는 坂口해산물 도매점에 고용되어 당분간 제조부에서 일했으나··· 동업자와의 경쟁에 싫증이 나 친구집에 머물거나 吉原에서 여자를 사거나 하며 이틀 사흘 밤 주인집에 돌아가지 않아 한심스럽다는 질책때문에. (제6회)

 

[문] 大木가방점은?

[답] 나는 大木가방점에서 판매 외교를 했는데 橫須賀에 출장가 술마시고 여자를 사는 등 하여 5, 60圓을 써 버렸습니다. 그 돈은 갚을 길이 없어 자포자기 다시 5, 60圓의 판매 대금을 가지고 大阪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제6회)

 

[문]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주원인이라면 피고는 상당히 일찍부터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내가 조선의 독립을 바라게 된 것은 차별대우가 그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京都 五條경찰서의 검속으로 말미암아 처음 조선의 독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6회)

 

[문]조선 독립 운동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上海 도항의 한 원인이었다는 것은 앞서 진술한 대로인가?

[답] 실은 그때는 上海에서 독립 운동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들어가 앞으로 떳떳하게 조선인으로 생활에 나가고자 하는 생각만으로 上海에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제6회)

 

[문] 이러한 결심을 한 뒤 조선인임을 감추거나 품행이 나쁜 짓을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 검속된 뒤부터 사람들은 나를 불량분자로 보는 것 같이 생각됐고··· 자포자기의 기분으로 마시고 때리는 등 품행이 나쁜 짓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고급스러운 생활도 해보고 싶은 기분도 있어···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었습니다. (제6회)

 

[문] 조선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답] 사진관에서 백정선이 잠깐 읽어 주었지만 당시 나는 취해 있기도 했고 또 사진에 찍히니까 나중에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어서 주의하여 듣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었는지 모릅니다. (제7회)

 

[문] 백정선은 상당히 훌륭한 인물인가?

[답] 나는 백정선을 그렇게 학문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 인격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조선인들이 백정선을 보면 인사한다는 점 등에서 나는 백정선을 上海에 있는 조선인의 총 대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7회)

 

[문] 피고는 上海에 가고 나서 조선의 독립 문제에 관해 특별한 연구라도 했는가?

[답] 나는 上海에서 조선 독립에 관해 연구하고 싶었으니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나는 천황 폐하를 죽이는 일을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이 멋대로 벌이는 난폭이 아니라···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 결행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가정부 사람들로부터 송별을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만 백정선은 그런 일을 하면 시끄러워져 안 되니··· 나를 가정부 사람과 만나게 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제7회)

 

[문] 이것들을 알고 있는가?

[답] 그것들은 내가 던진 폭탄의 파편과 쇠붙이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파편을 경시청에서 보여주어 백정선이 엄청난 효력이 있다고 한 것이형편없는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때문에 화가 나 사진에 관한 것까지만 말하고 백정선에 관한 것 등은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결심을 번복하여 모든 사실은 그대로 진술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7회)

 

[문] 그 두 번째 마차에는 누가 타고 있다고 생각하여 폭탄을 던졌는가?

[답] 첫 번째 마차를 천황 폐하가 타고 계시는 마차라고 생각하여 봤더니 그 마차에는 한 사람이 타고 계셨는데 그 분은 천황 폐하와는 다른 분이라 생각됐습니다. 두 번째 마차의 뒤에 의장병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두 번째야말로 확실하게 천황 폐하가 타고 계시는 마차에 틀림없다고··· 폭탄을 끄집어내어 겨냥하고 던졌습니다. (제2회)

 

[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죽을 각오로 천황 폐하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上海에서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만 백정선이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라며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에 이를 믿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백정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3회)

 

[문] 이것은? 앞과 같은 암호의 23가운데 2에서 8을 제시

[답] 5는 내가 上海에서 상대했던 遊女 사진, 6은 그 유녀와 같은 집에 있는 여자 사진, 7은 내가 상대했던 上海의 유녀 사진, 8은 大阪의 壽樓에서 상대했던 창기 壽의 사진입니다. (제8회)

 

[문] 백정선은 본명인가?

[답] 나는 본명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8회)

 

[문] 조선독립문제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형무소에 들어가고 나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 (제9회)

 

[문] 그렇다면 조선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답]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은 없고 또 이해력도 낮다···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일본 국민으로서 생활··· (제9회)

 

 

 

櫻田門投彈義擧全般에 관한 在上海日本領事館報告

 

1932년 1월 9일 在上海村井總領事發 犬養外務大臣宛 電報

 

昭和七年 一月 八日 陸軍始觀兵式으로부터 御還幸의 鹵簿가 櫻田門外에 다달았을 때 拜觀者 中에서 突如 爆彈을 投擲한 者가 있었다. 右는 炸裂하였지만도 多幸히도 供奉車의 一部及 御警衛者의 騎馬를 若干 傷하였을 뿐으로 陛下는 無事還御하시고 大逆犯人은 直時 逮捕되었는데 右는 本籍 朝鮮京城府新錦町一一八李奉昌이라는 者로 數年前부터 日本內地를 流浪한 後 昭和六年 中부터 上海에 居住 同年末 本邦에 再渡來하여 秘密히 機를 窺하고 있었던 者로 取調 結果 同人은 在上海韓國假政府財務部長 大韓僑民團長 金九의 使嗾에 基하여 大逆行動을 敢行하게 된 것이 判明되었다.

 

 

 

1932년 1월 9일

김구, 한국독립당 명의 성명서

 

본당은 삼가 한국 혁명용사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는 천둥번개와 같은 소리로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새해의 행운을 준 것을 축복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리로 환호하며, 바로 제국주의자의 아성을 향해 돌격하여 모든 폭군과 악정치의 우두머리 범죄자를 샅샅이 제거하고 民族的 自由와 獨立의 실현을 도모할 것을 바란다.

 

1932년 1월 9일 한국독립당

 

1932년 1월 10일 김구, 한국독립당 명의 성명서 발표

"이봉창의 일황 저격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선언"

 

 

 

1932년 중국 언론의 "不幸不中"

 

각지 중국지들은 본 건 기사를 보도함에 있어, 때가 왔다는 듯이 혹은 흉한 李를 지사라고 부르고 의사라고 칭하며 그 범행을 찬양하고, 그 쾌거의 실패를 애석해 하거나 혹은 우리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민으로서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

 

제국 정부 영사들은 각지 해당 지방 당국에 엄중항의 (1) 해당 지방장관 진사 (2) 신문사장 진사 (3) 책임자 처벌 (4) 신문사 정 / 폐간과 앞으로 불경기사 단속 및 재발방지 보장 등··· 국민정부에 엄중 항의··· 1월 9일 上海 民國日報 시작으로 일파가 멈추면 또 다른 일파가 일어나듯··· 31개지 상당, 北平 (3개), 天津 (4개), 靑島 (4개), 上海 (2개), 南京 (3개), 漢口 (2개), 長沙 (1개), 福州 (2개), 夏門 (2개), 汕頭 (1개), 廣東 (6개) =>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해사변 발발!

 

 

 

● 1932년 1월 8일 일본 국내, 相愛會 거두 박춘금, 궁내성 등 고위층 사죄 방문, "불경한 범인이 조선인이라서 송구합니다" 1월 9일 이른 아침 상해회 회원 120명 동원, 황성 입구 二重橋 앞에 줄지어 서서 "우리 동포 가운데 불령자가 나온 것에 충심으로 사죄드립니다"

 

● 1932년 1월 9일 : 동민회 = 박영철, 한상룡, 신석린 등 7명, 이봉창 대역사건 사죄 방안 논의 = 조선총독, 총리대신 앞으로 사죄 전보 발송 = "어제 발생한 불경 사건에 대해 송구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 모르겠으며 적성으로써 근신하겠습니다" 조선 총독부, 조선군사령부, 신문사 사죄 방문, 不逞不義의 逆徒 = 狂人의 醜態, 참회 / 근신 / 내선융화 노력하겠다.

 

 

 

동민회 성명서

 

지난번 한 조선인이 저지른 불상사가 모든 조선인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실로 狂人이 저지른 일이 不狂人이 저지른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범인을 색출해서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불상사는 한 사람의 狂人이 저지른 狂態이며, 우리는 이를 唾棄하고 배척하는 동시에 스스로 깊이 경계해서 다시는 이런 狂人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함은 물론 더욱 內鮮融和, 一家入國의 정신을 향해 百尺竿頭의 一步를 前進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1932년 1월 9일 동민회 본부

 

 

 

1930년대 김구 사주 암살 / 테러

회차 년월 행위자 장소 대상 무기 결과
1 1932. 1 이봉창 동경 천황 폭탄 미수 / 검거
2 1932. 4 윤봉길 상해 군수뇌부 폭탄 성공 / 검거
3 1932. 4 이덕주 등 경성 총독 권총 미수 / 검거
4 1932. 5 최흥식 등 대련 만철총재 등 폭탄 / 권총 미수 / 검거
5 1933. 1 오면직 상해 옥관빈 권총 성공 / 미검
6 1933. 3 백정기 등 상해 有吉공사 폭탄 / 권총 미수 / 검거
7 1933. 12 - 상해 옥성빈 권총 성공 / 미검
8 1935. 3 엄순봉 등 상해 이용로 권총 성공 / 미검
9 1935. 11 김창근 상해 이태서 권총 성공 / 미검

 

 

 

7. 창작된 역사

 

 

 

초간본 / 1947. 12

 

 

 

중어판 / 1932. 12

한글판 / 1946. 3

 

 

 

<중앙일보> / 1932. 10. 15

 

 

 

《도왜실기》 (1)

 

● (1) 이 사건을 발표하는 이유, (2) 한인애국단의 최선봉, (3) 용산에 영걸이 났도다, (4) 피눈물을 참으며 청춘을 보내다, (5) 장한 뜻을 동쪽 섬나라로! (5) 시국이 불리하여 상해로 떠나다, (6) 밤에 반주를 든 후에야 진정을 토로, (7) 왜 늙은이, (8) 아! 영국의 참모습, (9) 최후의 작별! (10) 천지를 진동시킨 폭탄 한 발, (11) 늠름히 대의를 위해 죽다. 문고판 15쪽 분량

 

● 19세 때 용산 주추장 기차운전 견습생이 되었다··· 왜놈들의 횡포와 압박을 직접 목도할 때마다 의분이 가슴에 차고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언제나 기회를 보아 의로운 일을 일으켜 국치를 씻어버리고자 하였다.

 

● 용산에서 일하던 때가 바로 1919년 이었으니··· 이 운동에서 자극을 받아 심지가 더욱 견고해졌고··· 비분강개하여 뜻을 세워 내 한 몸을 희생함으로써 조국의 광복을 도모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도왜실기》 (2)

 

● 의사의 나이 30세, 어찌 여성에 대한 애욕이 없었으리오마는 이리저리 전전하면서도 끝내 독신을 지켜온 것은 자나깨나 정성으로 일관된 憂國之心이 머리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 의사의 성품은 마치 봄바람과 같이 온화하였으나 의지는 굳고 열정이 불꽃처럼 뜨거웠다··· 술을 마심이 호걸이었으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 1932년 1월 8일 의사는 일본 임금이 가슴을 서늘케하고··· 그 자리에서 품 속의 태극기를 꺼내들고··· 소리높이 "대한독립만세"를 3번 부르고 당당하게 놈들의 체포를 받고···

 

● 아! 의사의 죽음이야말로 민족의 크나큰 영광이요, 만인에게 敬仰 받을 것이며··· 의사의 위대한 정신은 日月과 함께 영구적인 것이며, 긴 세월동안 찬연히 빛날 것이다.

 

 

 

《백범일지》 (1)

 

● 하루는 중년의 동포가 민단을 찾아와···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해에 假政府가 있다기로 일전에 상해로 왔습니다"··· 그는 경성 용산 출생으로 성명은 이봉창이라 하였다.

 

● 며칠 후 그는 민단 주방에서 민단 직원들과 술과 국수를 사서 같이 먹다가 술이 얼큰하여 반쯤 취기가 돌자···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 나는 주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씨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 과연 이씨는 의기 남자로 殺身成仁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신의 포부를 털어 놓았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을 맛 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 (2)

 

● 민단 직원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는 취하면 곧장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았다··· 그는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은 일본인 행색으로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쫓겨난 일도 있었다.

 

● 1931년 12월 중순경 나는··· 하룻밤 같이 자면서 일본행에 대한 제반 문제를 상의하였다.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히였다. 하나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 마지막 밤을 같이 잘 때, 이씨는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백범일지》 (3)

 

● 나는 폭탄 두 개와 돈 300원을 주면서··· 10여일 후 동경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1월 8일 물품을 방매하겠다는 내용··· 200원을 마지막으로 부쳐주었더니··· "돈을 미친 것처럼 다 써버려서 주인댁에 밥값까지 빚이 져 있었는데···"

 

●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 전권을 위임받았고, 다만 성공, 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받았다. 그래서 제1착으로 이봉창의 동경 사건을 주관하였다.

 

● 1월 8일 신문에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라는··· 나는 천황을 죽이지 못한 사실이 극히 불쾌하였으나 여러 동지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그들은 일황이 즉사한 것만은 못하나 정신적으로 우리 한인이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족히 성공으로 칠 수 있다···

 

 

 

8. 마무리

 

 

 

 

 

 

김구는 중국인!?

 

● 무국적자! 26년 중국 생활 / 활동 큰 불편 감수, 안창호 / 김립의 사례, 약 26년의 상해 생활 / 암살 테러활동 불가능!?

 

● 중국국적자! 상해 거주 조선인 = 대부분 중국 국적자, 1966년 임종국 《친일문학론》, 이봉창의 폭살테러 = 중국 사회의 반향 + 장개석 막대한 지원, 김구 행위 = 중국 독립운동, 대한민국이 중국인 독립운동가 김구를 추모 / 헌창한다!!!

 

●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무국적의 거칠고 척박한 삶을 감내! = 진정한 독립운동가 면모! 대한민국 국민들은 과연 누구를 추모 / 헌창해야 하는가?

 

 

 

1. 평범한 조선인 청년이 아닌 부패타락한 自抛者!

 

2. 독립운동가 아닌 천박한 쾌락주의자!

 

3. 의열투쟁이 아닌 '狂人의 暴擧!'

 

4. '백범신화' 창작의 인테리어 / 들러리!

 

5. 테러리스트 = 김구, 임정 내 위상제고!

 

 

 

https://www.youtube.com/watch?v=dureIUOrP7w&t=270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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