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4



1990년, 80년 만의 귀환
하얼빈 취원창에 묻혀 있던 이상룡의 유해는 1990년 9월 13일, 비행기를 통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고향 안동의 임청각을 거쳐서 같은 해 10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6년 5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의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옮겨 다시 안장되었다.
이상룡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이유로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2009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이 개정되면서 이상룡을 포함한 62명의 독립운동가에게 국적이 공식적으로 회복되었고,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한 지 77년 만에 그의 본래 호적지인 임청각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상룡 건국공로훈장증
1962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자료 (기탁처 :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 복제
이상룡에게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과 함께 수여한 훈장증서이다.
'건국공로훈장 단장' 을 추서하여 길이 표창한다고 했다.




이상룡 건국공로훈장
1962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자료 (기탁처 :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이상룡에게 1962년 3월 1일, 1949년에 공포된 '건국공로훈장령' 에 따라 수여한 '건국공로훈장 단장' 이다. 이 서훈은 상훈법의 개정에 따라 1967년 4월 '건국훈장 국민장' 이 되었다가, 1990년 7월 다시 '건국훈장독립장' 으로 변경되었다.




만주 무장 독립투쟁의
정신적 지주
1919년 3 · 1 운동 직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남쪽 상해 上海로 향했지만, 이상룡은 서간도에 남아 체계적인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조직 구성에 힘을 쏟았다. 만주가 우리 선조들의 터전이자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이곳을 지키는 것이 곧 조국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해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를 운영하며 유능한 독립군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서로군정서 조직도

서로군정서의 활동


서로군정서 독판 督辦
1919년 4월 유하 柳河 · 통화 通化 · 흥경 興京 · 환인 桓仁 · 집안 輯安 등지의 한인 지도자들이 모여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총본부인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5월 상해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정부는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으며, 조직은 독판부 · 사령부 · 참모부 · 정무청 · 군무청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이상룡이 독판, 여준이 부독판으로 선출되었다.
서로군정서는 한족회 회원들의 헌금과 평안도 · 경상도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국내 및 서간도 일대의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 세력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는 보다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대한 독립단 · 한교민단 · 대한광복군총영 · 평안북도 독판부 등과 통합되어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로 개편 되었으며, 다시 1924년 11월에는 독립운동 연합체인 정의부 正義府로 통합되었다.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상 분류도
1923년 | 독립기념관 | 복제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 작성한 비밀문서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의 현황을 도표로 정리한 자료이다. 총독부는 이들 단체를 '순독립파 純獨立派', '공산파 共産派', '온건파 穩健派' 로 나누고 색깔별로 구분해 도식화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들을 '불령선인 不逞鮮人', 즉 국가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조선인이라 불렀지만 우리에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였다. 이 분류도는 1920년대 초반 해외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상룡이 김좌진에게 보낸 편지
1919년 | 독립기념관 | 복제
1920년 (경신 庚申) 2월 춘은 (春殷)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의 책임자 독판 督辦 이상룡이 북로군정서 책임자인 사령 司令 김좌진 金佐鎭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상룡은 글이 첫머리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업무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며, 사령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 자신은 감당하기 벅찬 책임을 맡아 진전이 없다고 겸손히 밝히며 글을 이어갔다. 본론에서는 " 이장녕 李章寧에 대해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자 하나이므로··· 부득이 맡고 있던 직책을 거두고 그를 보내겠다" 고 하였다. 이장년은 이후 김좌진의 참모로 활동하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편지가 쓰인 당시 이상룡은 63세, 김좌진은 32세였다.




서로군정서 의용대 재무부 발행 군자금 영수증
1919년 | 독립기념관 | 복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 의용대 재무부에서 작성한 군자금 관련문서로, 실제 사용한 원부 原簿 2건과 사용하지 않은 원부 및 영수증 양식 1건이다. 원부 2건은 1919년 작성된 것으로, 하나는 1월 28일 김유림이 집안군 輯安郡에 거주하던 계근섭에게서 47원 70전을 받은 사실을 기록한 문서이며, 다른 하나는 1월 28일 김유림이 이종식으로부터33원 30전을 받은 내역을 담고 있다. 또한 함께 전하는 문서는 아직 내용을 기입되지 않은 대한민국 3년 (1921년) 원부와 영수증 양식이다. 이 문서들은 서로군정서가 독립군 자금을 어떻게 모금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만주 독립군 주요 무기 독림기념관 제공
박격포 (좌), 모신나강 소총 (중), 수류탄 (우)

박격포

모신나강 소총

수류탄




모신나강 소총
20세기 초 | 개인소장 | 복제
모신나강 Mosin ㅡ Nagant 소총은 러시아에서 1891년 기존의 베르단 소총과 같은 단발식 소총의 성능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신 Mosin 대위와 나강 Nagant 형제에 의해 개발되었다. 5발 탄창의 연발식 소총으로 소비에트 연방군의 주력 화기였다. 러시아 내전, 제 1 · 2차 세계대전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 독립군도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베르단 소총
19세기말 | 서울역사박물관 | 복제
미국인 히람 베르단 Hiram Berdan이 1868년 처음 발명했는데 나중에 러시아에서 주로 제작 · 사용했다. 그 외에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관파천 이후 처음 도입되었고, 이후로는 독립군의 주력 화기로 사용되었다.



마우저 권총
19세기 말 | 서울역사박물관 | 복제
독일의 마우저 Mauser 사가 1896년부터 1937년까지 생산한 반자동 권총으로 100만 정 이상 제조되었다고 한다. 독일뿐만 아니라 스페인, 중국 등에서도 복사 및 제조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다. 홍범도 장군이 사용하였던 권총으로 알려져 있다.






사독판 辭督辦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독판직을 사임하다"
1924년 (67세)
1919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민족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기꺼이 임시정부와 손을 잡았다. 그때 군정부 軍政府를 군정서 軍政署로 바꾸고 군정서의 독판 督辦 (대표)을 맡았었다. 오랜 만에 반석에서 한가한 기간을 보내고 싶다. 독판도 사임한다.
'독판이란 이름으로 융숭하게 떠받드나,
털끝만 한 권리는 없고 비방만 수레에 가득.
오늘 아침 겹겹 오라 풀어 던졌으니,
이제부터 어깨 펴고 강호를 걸으리라.'



만주 독립군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처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경제적 어려움과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1912년 7월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되었고, 1913년에는 신흥중학교로 개칭되어 애국청년들에 대한 교육을 이어갔다. 이후 1919년에는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로 다시 옮겨,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었다.
3 · 1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 池靑天 (1888 ~ 1957), 김경천 金擎天 (1888 ~ 1942),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신팔균 申八均 (1882 ~ 1924), 운남 육군강무학교 출신의 이범석 李凡錫 (1900 ~ 1972) 등 유능한 지도자들이 합류하였고, 입학생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1920년 가을, 결국 폐교에 이르게 되었다.
약 10년 동안 이 학교에서 배출된 3,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무장 독립군으로 성장해 봉오동 · 청산리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의열단에 들어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1940년대 초에 결성된 한국 광복군의 핵심 전력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유하현 삼원보 전경 |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군 영농모습 (백서농장) | 독립기념관 제공


신흥무관학교
교장 : 이세영 · 여준 · 이봉희 등
교욱대장 : 지청천
교관 : 오광선 · 신동천 (신팔균) · 이범석 · 김경천 · 박영희 · 이장녕 등
성과
ㅡ 1911년부터 운영하던 신흥중학교를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ㅡ 3,500명의 졸업생 신흥학우단으로 활동
ㅡ 이장녕과 교관 150명 파견하여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을 지원
ㅡ 1921년 친일단체 거류민회 습격과 보민회 保民會 토벌 해체
ㅡ 1922년까지 유하현 · 해룡현 등의 친일기관들을 완전 소탕
ㅡ 1923년에는 강계군 경찰주재소 영림서 營林署와 광산을 습격, 파괴

KBS 역사스페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만주벌 이름없는 독립전사들
상영시간 | 27분 30초
영상 제공 KBS미디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들

청산리 전투 당시 제2제대 지휘관
이범석 李範奭 (1900 ~ 1972)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池靑天 (1888 ~ 1957)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경천 金擎天 (1888 ~ 1942)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신팔균 申八均 (1882 ~ 1924)



원병상 원고, 「신흥무관학교」
『신동아』1969년 6월호 | 개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원의상 (원병상 元秉常, 1895 ~ 1973)이 학교의 운영과 생활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이다. 내용은 조국 광복을 위해 해외에 독립운동의 중심지를 마련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이철영 李哲榮, 이시영 李始榮 등 3형제를 비롯해 이상룡, 이동녕 李東寧 등이 자금을 모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던 장면으로 시작된다. 항일무장투쟁의 산실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운영, 참여 인물 등을 생생히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신흥학우보
제2권 2호 | 1917년 | 독립기념관 | 복제
『신흥학우보』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졸업생이 만든 신흥학우단에서 발행한 기관지이다. 이 단체는 1913년 창립된 '신흥교우단' 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기관지의 명칭도 '신흥교우보' 에서 '신흥학우보' 로 바꾸어 계속 발간된 것으로 보인다. 제2권 제2호는 『신흥교우보』를 편집, 발행했던 강일수 姜一秀가 1917년 1월 13일에 간행하였다. 내용은 논단 論壇, 학원 學苑, 문림 文林, 소설 小說, 잡조 雜俎, 사전 史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전의 『신흥교우보』와 비슷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신흥학우단의 존재와 활동을 보여주는 드문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대한신지지 건곤 大韓新地誌 乾坤
1908년 | 서울역사박물관
장지연 張志淵이 1907년에 지은 우리나라 지리 교과서로 '건 乾' 과 '곤 坤'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정철 南廷哲과 유근 柳瑾이 글을 고치고 다듬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발행은 남장희 南章熙가 맡았으며 인쇄는 휘문관 徽文館에서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지리서를 바탕으로 근대적 한국 지리의 내용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 大東歷史』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대동역사 大東歷史
1905년 | 고려대학교 도서관
처음 1896년 (건양 建陽 1) 독립협회가 설립되면서 협회 회원들이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 교재로 제작하기 시작하여 1905년에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최경환 崔景煥이 편집하고 정교 鄭喬가 평열 評閱하였으며, 유호식 劉鎬植, 한백원 韓百源이 교정하였다. 금속활자인 전사자 全史字에다가 목활자를 혼합하여 인쇄하였다. 대한신지지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지청천 친필일기 『자유일기』自由日記
1950년대 | 독립기념관 | 이준식 기증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지청천 池靑天 (1888 ~ 1957)이 1951년 5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쓴 국한문 혼용의 친필 일기이다. 본래 그는 1919년부터 일기를 써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국전쟁 중 분실되어 지금은 다섯 권만이 전해진다. 당시에 판매되던 '자유일기 自由日記' 라는 제목의 일기장에 기록된 이 글에는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기억과 광복이후 정치인으로서 겪었던 고뇌가 담겨 있다.




이범석 회고집 『한국의 분노』
1946년 | 서울역사박물관
청산리 전투 당시 제2제대 第二梯隊 지휘관이었던 이범석 李範奭 (1900 ~ 1972)이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에 대한 소회를 담아낸 기록으로 부제는 '청산리혈전실기 靑山里血戰實記' 이다. 처음에는 1941년 중국 서안 西安에서 중국어로 '韓國的 憤怒 (한국적 분노)' 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며, 해방 후인 1946년에 서울 광창각 光昌閣에서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해방 직후 청산리 대첩의 성과와 의미를 국내에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우리의 독립이 단지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의 결싱이었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봉오동전투 상보 鳳梧洞戰鬪 詳報
1920년 | 독립기념관 | 복제
1920년 6월 7일 일본군 야스카와 추적대가 봉오동전투에서 패전하고 작성한 봉오동전투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식 소총을 갖추고 상당한 탄약을 휴대했으며, 사격훈련도 상당히 받았고 방어전투를 치를 때 용감히 싸운다' 라고 하여, 독립군이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하였다.



봉오동 전황 약도 鳳梧洞戰況 畧圖
독립기념관 | 복제
봉오동전투 당시 주변 지형과 일본군이 진입한 경로가 그려져 있는 약도로,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 ㄱ구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마을로 진입한 일본군을 골짜기로 유인해서 전투를 벌인 상황이 도해되어 있는 약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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