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5

드무2 2025. 8. 1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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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05

 

 

 

 

 

 

 

 

 

 

 

 

 

 

 

 

문청산일첩 聞靑山一捷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청산리에서 한번 쌔워 이긴 후

아군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1920년 (63세)

 

청산리 대첩에서 한 번의 싸움으로 수백 명의 적을 섬멸하였으나 끝내 병사들이 흩어져 버렸다.

지휘관의 잘못을 한탄한다.

 

 

 

 

 

 

 

 

 

 

자회 自悔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스스로 뉘우치다"

 

1920년 (63세)

 

일제가 독립운동을 더 탄압하기 시작하며, 만주에도 군대를 증강하였다. 독립군이 일본군과 무모한 전투로 많이 죽었다.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싸우게 하였으니,

좋은 청년들만 무수히 죽게 하였네.'

 

 

 

 

 

 

 

 

 

 

신흥무관학교 교가 新興武官學校 校歌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훈민정음체

 

이상룡이 작사한 신흥무관학교 교가 2절 부분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을 품에다품어

젖먹여준 이가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던피가 우리피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1절)

 

칼춤추며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세울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소리질러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3절)

 

✽ 전체 교가를 오디오 서비스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vZkPeBlv_ic

 

 

 

 

 

 

 

 

 

 

 

 

 

독립운동 통합의 상징,

국무령 이상룡

 

이상룡은 서로군정서 독판으로서 1921년 4월, 무장 독립투쟁 단체들의 군사적 통일을 모샛하기 위해 북경에서 열린 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침체기에 빠진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서로군정서의 김동삼이 의장을 맡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 1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회의였다. 그러나 5개월간 이어진 회의에서도, 임시정부 해체 후 새 정부 수립을 주장한 '창조파' 와 기존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 간의 갈등이 좁혀지지 않았다. 진영이 분열의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만주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적 지도자였던 이상룡은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적임자로 주목받았다.

 

 

 

 

 

 

 

(좌) 국무령 이상룡 취임식 기사와 취임사

 

독립신문 호외 | 1925. 9. 25

 

(우) 국무령 이상룡 취임기사

 

독립신문 | 1925. 10. 21

 

 

 

 

 

 

 

취임사 就任辭

 

나는 이에 일반 국민의 앞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직분을 맡고자 하나이다.

 

직무에 임하여 항상 헌법을 준수하며 민의에 근거하여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조속히 성취하여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되찾고자 하나이다.

 

우리 민족이 나라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힘써 싸워온 것은, 멀리 갑신개혁과 갑오개혁 이후 계속되어 온 운동이라. 그러나 혹은 외력에만 의존했고, 혹은 조직이 완전히 못하였음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경술국치 이후에 대의를 좇아 일어난 의병의 기치와 지사의 열혈로 운동이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온 민족이 깨어나 소생의 신기원이 삼일운동으로 나타나 민국의 임시정부가 건설된 바, 과거 7년 동안 한 뼘의 땅도 광복하지 못하였으니, 이에 대하여 누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그러나 돌이켜 생각컨대, 지난 시기는 주로 독립의 정신을 알리는 선전의 시기에 속하였기에, 전 민중의 조직적 단합을 이루지 못하여 운동의 효과가 더디었는지라.

 

이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시작점에서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돌단결하여 함께 힘을 다해 싸워야 하겠으며, 이를 신속히 이루려면 먼저 진정으로 희생하며 꾸준히 투쟁해 온 용감한 전사들이 신속히 최고기관 아래 완전하게 뭉쳐 운동의 기초를 단단히 하고 역량을 강화해야 할 줄 깊이 믿고, 이에 힘쓰려 하나이다.

 

평소 재주가 없고 아는 것이 적은데 더욱이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어 두려운 생각이 밤낮 떠나지 아니하옵는 바, 오직 모든 일은 여러 사람의 마음과 힘을 모으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땅히 합심동력하여 대업을 속히 성취함을 바라나이다.

 

대한민국 大韓民國 7년 9월 24일

국무령 國務領 이상룡 李相龍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이상룡은 서간도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다, 임시정부가 '창조파' 와 '개조파' 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위기를 맞이하자, 그는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25년 4월, 임시정부는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 책임제에 가까운 국무령제를 도입했다. 이 체제 아래 이상룡은 정부를 대표하는 국무령으로 추대되었고, 그해 9월 상하이에 도착해 23일에 3년 임기의 초대 국무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산동해조풍 山東海遭風

 

이상룡 지음 이동익 씀 | 지본묵서 | 행서

 

"산동해에서 풍랑을 만나다"

 

1925년 (68세)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유필이 와서 국무령에 출마하라고 간곡히 청하였으나, 늙은 사람이라며 사양하였다. 국무령에 피선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동지들의 의견이 서로 갈리고 사업은 정체되어 국면전환을 위해 국무령 취임을 간곡히 권하여 마지못해 상해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풍랑을 만났다. 그러나 위험을 오히려 즐긴다.

 

'산동의 바닷길 험하고 험하구나.

풍랑이 하늘로 치솟아 눈산을 이루고,

물과 하늘 닿는 곳으로 배가 들어가니,

이번 행차엔 반드시 신선 반열에 오르겠네.'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 통합 노력

 

국무령에 오른 이상룡은 임시정부 이유필 李裕弼을 비롯해, 만주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이탁 李鐸 · 김동삼 金東三 · 오동진 吳東振 · 윤병용 尹秉庸), 신민부 (현천묵 玄天默 · 김좌진 金佐鎭 · 조성환 曺成煥), 참의부 (윤세용 尹世茸) 출신 인사들을 고루 내각에 포함시켜,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방향과 지역 간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내각을 제대로 구성할 만큼 충분한 협력을 끌어내지 못하자, 이상룡은 1926년 2월 국무령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정의부 · 신민부 ·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위) 이상룡 국무령 선출과 국무원 선임기사 | 독립신문 | 1925. 10. 21

 

(아래)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 도산 안창호기념관 제공

 

 

 

 

 

 

 

 

 

 

국무령 이상룡의 추천으로 선임된 국무원 9인 (1925. 10. 10.)

 

 

 

 

임시정부 이유필 李裕弼

 

 

 

 

정의부 김동삼 金東三

 

 

 

 

정의부 오동진 吳東振

 

 

 

 

정의부 이탁 李鐸

 

 

 

 

신민부 김좌진 金佐鎭

 

 

 

 

신민부 조성환 曺成煥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불혹의 나이에 정통 유학자의 길을 버리고 과감히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새로운 길을 선택한 이상룡은, 50대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낯선 만주 서간도로 망명을 결단하였다. 그의 모든 선택은 오직 나라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고난을 견디며 평생을 바쳤지만, 끝내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을 살아서 맞이하지 못한 채 서간도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 묻히기를 바란 그의 유언에 따라, 망명한 지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위) 이상룡 묘역

 

(가운데) 이상룡 서거 90주기 추도식 | 2022년

 

(아래) 이상룡 서거 93주기 및 국무령 취임 100주년 기념식 | 2025년

 

 

 

 

 

 

 

 

 

 

 

 

 

만주에서 삶을 마치다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이 가진 한계와 내부의 모순에 실망한 이상룡은 국무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만주로 돌아가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31년 10월, 평생의 동지엿던 김동삼의 체포 소식과 이장녕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32년 5월 12일, 향년 75세로 서란현 舒蘭縣 소과전자 燒鍋甸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는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안동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그의 유해는 하얼빈 哈爾濱 취원창 聚源昶에 안장되었다. 해방 직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위) 이상룡 순국지 전경 (서란현 舒蘭縣 소과전자 燒鍋甸子)

 

(아래) 하얼빈 哈爾濱 취원창 聚源昶의 이상룡 묘터

 

 

 

 

이상룡 서거 기사 | 조선일보 | 1932년 6월 27일자

 

 

 

 

1990년 이상룡 유해봉안식장에서 헌화하는 손부 허은 許銀

 

 

 

 

 

 

 

 

 

 

 

 

 

석주유고 石洲遺稿

 

1933 ~ 1944 | 6책 | 필사본 | 고려대학교 도서관

 

이상룡의 시문집으로 아들 이준형 李濬衡이 편집, 필사하였다. 내용은 한말 선비로서의 생활, 구국운동가로서의 활동, 만주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권 1 · 2에 시 詩 413수를 비롯하여 사 辭, 소 疏, 서 書 등이 있고, 권 3 ~ 5에는 서 書 155편을 비롯해 정문 呈文, 고문 告文, 서 序, 기 記 등, 권 6에는 잡저 4편, 부록으로 행장, 만사, 제문 등이 있다. 이중 권 5 서 書 가운데 '답대한협회 答大韓協會' 는 대한협회가 변질되는 데 대해 시정을 촉구하고, 권 6에서 '서사록 西徙錄' 은 1911년 1월 5일부터 4월 13일까지 안동에서 만주에 이르는 정착 과정을 써나간 일기이다. 또한 '연계여유일기 燕葪旅遊日記' 는 1920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4월 29일까지 북경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고 북경을 둘러본 내용을 담고 있다.

 

 

 

 

 

 

 

 

 

 

 

 

 

국역 석주유고 國譯石洲遺稿

 

2008년 |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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