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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일러스트 = 이진영
능소화
능소화가 저녁의 관을 길게 울리고
산비둘기 울음이
부풀었다 사그라진다
길아래 어둠이 천천히 고일 때
운구차 한 대가
빛을 가만히 끌고 지나갔다
ㅡ 문혜진 (1976 ~)
능소화는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 꽃이 핀다. 나팔 모양의 꽃이 피는 덩굴나무이다. 능소화가 핀 것을 보고 있었을 때 시인은 누군가 관악기를 불고 있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어 시인은 관악기처럼 생긴 능소화에서 울려 퍼져 나올 법한 소리를 산비둘기 울음소리와 절묘하게 겹쳐 놓는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부풀었다 꺼지는 것은 관악기를 부는 사람의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호흡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집 담장 아래 피었을 능소화와 먼 산에서 우는 산비둘기 사이에 놓여 있는 원근 (遠近)의 거리감을 자유자재로 감각하는 시인의 역량도 잘 느껴진다.
저녁이 더 깊어져 어둑어둑해지고, 능소화의 환한 꽃이 떨어지고, 그것을 시인은 운구차가 빛을 끌고 지나가는 것으로 표현한 듯하다. 이 대목은 여러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텐데, 빛의 사라짐은 꽃의 낙화, 일락서산 (日落西山), 계절의 지나감, 한 사람의 별세 (別世)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꽃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은 맑은 음악과 밝은 빛을 지니고 있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5월 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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