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궁중현판] 01

드무2 2022. 6. 2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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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현판] 01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현판

Hyeonpan : Hanging Boards

Inscribing the Ideals of Joseon

 

 

 

전시기간

2022. 5. 19 ㅡ 8. 15.

 

 

 

장소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 02) 3701 - 7500    FAX 02) 734 - 0775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을 포함한 옛 건축물의 처마 아래에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판에는 건축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해당 건축물의 기능과 용도를 알려줍니다.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거는 것은 건축물이 지닌 의미를 밝히고 건축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궁궐을 비롯해 종묘, 왕릉 등 조선 왕실 관련 건물에 걸린 현판에는 조선이 지향한 유교적 이상 사회의 모습이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해당 건물의 성격과 건립 목적에 어울리는 글귀와 좋은 뜻을 담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궁중 현판은 분야별 최고의 장인이 참여해 완성했습니다. 현판의 색상, 글씨, 무늬 등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적인 미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조 궁중 현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조선 왕실이 궁중 현판을 통해 널리 내걸고자 했던 유교적 이상과 가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이 궁중 현판을 우러러보며 마음속에 되새겼을 이상 정치의 참뜻을 함께 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https://youtu.be/l0f-e3fRx-0?list=PLJZPw9kZ5QidA9c_3jJKwS6FhJ8tCMt4h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입구로 나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통하는 지하보도이다.

 

 

 

전시 안내판

 

 

 

 

 

 

지하보도에서 나와 고궁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

 

 

 

계단을 올라 바라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입구

 

 

 

 

 

 

한복을 입은 관람객들

 

 

 

 

 

 

영상물 : 궁중현판, 우리 곁으로 내려오다

 

 

 

궁중현판, 우리 곁으로 내려오다

Royal Hanging Boards Brought Down to Us

 

조선시대(1392 - 1910년) 궁중현판은 처음 궁궐을 세울 때, 화재나 전쟁 등 재해로 궁궐을 보수할 때 함께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상황을  반영하여 이름을 비꾸고 새로운 뜻과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 예로 1904년 화재로 훼손된 덕수궁을 1906년에 수리하면서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년)은 본래 있던 '대안문 현판을 대한문으로 바꿔 달도록 했다.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大漢'에 '한양이 창대해지라'는 소망을 담았다.

일제강점기 (1910 - 1945년)에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다섯 궁궐이 관광지, 박람회장 등으로 훼손되면서 현판 대다수는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다. 건물에서 내려온 현판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제실帝室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됐던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과 명정전회랑,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 진열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을 전전하던 현판은 1992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옮겨졌고, 이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다시 이동되었다.

조선왕실관련 건물에 걸렸던 현판 775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조선 왕실의 문화를 담은 소중한 유물로서의 의미를 되찾았다.

 

 

 

 

 

 

대안문 현판

大安門 懸板

민병석 글씨

대한제국, 1899년 (광무 3)

 

경운궁 (현 덕수궁) 정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크게 편안한 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본래는 경운궁 남쪽 인화문仁化門이 정문이었으나 1902년 철거되면서 대안문이 정문 역할을 했다.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년)의 명에 따라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고 현판 또한 새롭게 달았다.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의미로, '한양이 창대해지라'는 대한제국의 소망을 담았다.

 

 

 

 

 

 

 대안문, 『청한전시풍경사진첩淸漢戰時風景寫眞帖』 (1905년)

 

 

 

 

 

 

전시실 입구

 

 

 

 

 

 

 

 

 

 

 

 

 

 

 

 

 

 

만들다 


Making Hanging Boards

 
조선이 건국된 뒤 성리학性理學의 통치 이념을 담아 다양한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 궁중 현판도 함께 만들어졌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은 태조太祖(재위 1392~1398년)의 명을 받들어 경복궁 이름을 비롯해 궐 안 주요 전각과 문의 이름을  지었다. 1475년(성종 6), 성종成宗(재위 1469~1494년)은 아직 현판을 걸지 못해 이름 없는 문이 많은 것을 보고 현판을 더 만들게 했다.
현판은 궁궐 건물의 위계와 용도에 따라 크기, 형태, 색상, 제작 기법 등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 왕실은 백성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위엄을 지니되 사치스럽지 않게 장식한 궁궐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현판 또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조각이나 무늬 장식 등을 절제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전통을 계승하는 손길

Hands of the Inheritors of Tradition

 

오늘날 전통 현판 제작 명맥은 전통 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장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현판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장인간 협업이 필요하다. 현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글씨를 쓰는 서예가書藝家, 나무재료를 다듬고 조립하는 소목장小木匠, 바탕판에 글씨를 새기는 각자장刻字匠, 무늬를 그리고 채석하는 단청장丹靑匠, 설치에 필요한 철물을 제작하는 두석장豆錫匠 등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모여야 한다. 이중 소목장, 각자장, 단청장, 두석장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판을 제작한 사람

장천 김성태 (서예가)

고원 김각한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최모정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 전승교육사)

 

 

 

 

 

 

현판 형태와 장식

Shapes and Decorations of Hanging Boards

 

현판 크기와 형태는 현판을 걸 건물의 규모와 격, 글쓴이의 위상 등에 따라 정해졌다. 현판의 위계는 사용되는 나무 종류, 테두리 유무, 장식 무늬, 바탕판 및 글씨 색상과 기법 등에 따라 달라졌다. 위계가 높은 건물의 현판은 피나무나 잣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현판에 테두리를 만들고 봉 조각이나 화려한 무늬를 더할수록 위계가 높다.

테두리에는 칠보七寶, 연화蓮花 [육화六花], 과일, 문자 등 좋은 의미를 담은 다양한 무늬를 장식했다. 왕의 글씨를 새긴 현판에는 때로 봉황무늬를 장식해 격을 높이기도 했다. 바탕판은 옻을 칠한 칠질漆質을 최고로 하고 먹을 입힌 묵질墨質, 흰색을 칠한 분질粉質 순으로 등급이 낮다.

글씨는 금색을 최고로 하고 안료를 칠한 황색, 흰색, 검은색 순으로 등급이 낮다. 글씨를 새길 때는 글씨를 제외한 여백을 깎아내 글씨가 도드라지는 양각, 글씨 주변 윤곽만 파내는 반양각, 글씨 부분만 안으로 파서 음푹 들어가게 하는 음각 기법을 사용했다. 글씨에 나무나 금속을 부착하기도 했다.

 

 

 

 

 

 

현판 형태

Shapes of Hanging Boards

 

 

 

현판 테두리 무늬

Decorative Patterns of Hanging Board Frames

 

 

 

현판 바탕색과 글씨 색

Colors of the Backgrounds and Letters of Hanging Boards

 

 

 

현판 글씨 제작 기법

Different Techniques Used for Producing the Letters on Hanging Boards

 

 

 

 

 

 

1. 곤녕합 현판

坤寧閤 懸板

고종 어필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안 곤녕합에 걸었던 고종 어필 현판이다. 곤녕합은 고종의 비妃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의 처소로, '왕비가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활 모양으로 깎은 얇은 테두리에 연화당초蓮花唐草 무늬를 그려 장식했다. 검은 색 바탕에 글씨는 금색이며 양각했다.

 

 

 

2. 영훈당 현판

永薰堂 懸板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흥복전興福殿 북쪽 영훈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향기가 영원히 이어지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흰색 바탕에 글씨는 양각한 후 파란색으로 칠했다. 흰색 바탕 현판은 대부분 검은색 글씨인 데 비해 파란색 글씨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하재일기荷齋日記』 (1891 - 1911년)에 영훈당은 '대전 곳간'이라는 기록이 잇어 왕을 위한 곳간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3. 필수문 현판

必須門 懸板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동행각과 자선당資善堂 서행각 사이 담장문인 필수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반드시 필요한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네 모서리는 테두리 없이 활 모양 [弓樣]으로 깎고 흰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검은색으로 칠했다. 현판의 형태와 색으로 필수문의 위계가 낮음을 알 수 있다.

 

 

 

4. 가애죽림 현판

可愛竹林 懸板

숙종 어필

조선 후기

 

창덕궁 후원 영화당暎花堂에 걸었던 숙종肅宗 (재위 1674 ~ 1720년) 어필 현판이다. '사랑할만한 대나무 숲'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빗각으로 넓은 나무 테두리를 달고 봉황과 구름 무늬로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금색이며 양각했다. 현판 뒷면에 경첩이 남아 있어 어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여단이문의 흔적이 확인된다.

 

 

 

 

 

 

 

 

 

경운궁 현판

慶運宮 懸板

고종 어필

대한제국, 1905년(광무 9)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 당시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던 즉조당卽阼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테두리에 칠보七寶 무늬를 장식한 뒤 바탕은 옻칠로 검게 마감했고 글씨는 금박을 붙였다. 위계가 높은 현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현판 테두리에 어필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사롱紗籠을 고정했던 흔적이 보인다.

 

 

 

 

 

 

 

 

 

호조에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

書下戶曹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44년 (영조 20)

 

국가재정을 관리하던 호조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세를 고르게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 [均貢愛民 節用蓄力]'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용머리와 봉황 머리를 그린 봉을 갖춘 테두리에 꽃무늬를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금색이며 양각했다.

 

 

 

 

 

 

 

 

 

 

 

 

망묘루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심정을 기록한 현판

走筆寫懷題望廟樓 懸板

영조 어제, 김재로 글 · 글씨

조선, 1745년 (영조 21)

 

종묘 망묘루 벽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英祖 (재위 1724 - 1776년)가 건강이 좋지 못해 제사를 직접 지내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시가 새겨져 있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테두리에 꽃무늬를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음각한 후 붉은색으로 칠했다. 현판에 여닫이문을 달아 왕이 지은 시를 보호하고 소중히 보관했다.

 

 

 

走筆寫懷題望廟樓 懸板

영조 어제, 김재로 글 · 글씨 | 조선, 1745년 (영조 21) | 나무, 64.3 × 105.1cm

 

 

 

 

 

 

 

 

 

종정부 현판

宗正府 縣板

조선, 1894년 (고종 31)

 

조선 말기에 왕실 종친을 통솔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종정부에 걸었던 현판이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테두리에 칠보七寶 무늬를 장식했다. 글씨는 양각한 후 그 위에 금속판을 작은 못으로 박아 부착했다. 이러한 글씨 제작 방식은 경복궁 근정전勤政殿과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행한 일을 기록한 현판

春塘臺御射 懸板

조선, 1792년 (정조 16)

 

정조正祖 (재위 1776 - 1800년)가 창덕궁 후원 안에 있는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화살을 명중시키고 신하에게 포상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다른 현판과 달리 두루마리를 펼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음각한 글씨에는 파란색 안료가 일부 남아 있어 글씨 색을 추정할 수 있다.

 

 

 

春塘臺御射 懸板

조선, 1792년 (정조 16) | 나무, 32.9 × 73.2cm

 

 

 

 

 

 

2. 수라간 현판

水刺間 懸板

조선, 19세기 후반

 

왕실 가족의 음식을 준비하던 공간인 수라간에 걸었던 현판이다. 테두리가 없는 흰색 바탕에 글씨는 양각한 후 검은색으로 칠했다. 현판의 형태와 색을 보아 수라간이 낮은 위계를 지닌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가로로 긴 형태인 현판이 일반적이지만 이 현판처럼 세로 형태도 드물게 남아 있다.

 

 

 

현판의 제작 과정

The Oroduction Process of Hanging Boards

 

1. 왕이 현판 제작을 명함

2. 건축공사를 맡은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각 전당殿堂과 문 이름 후보, 현판글씨를 쓸 서사관書寫官 후보를 왕에게 올림

3. 건물의 위계에 따라 현판 형태 결정

4. 현판 제작에 사용될 나무 선정

    - 제작 규모에 따라 나무를 벨 지역과 나무 종류를 선정하고 목수木手 결정

    -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나무 활용

    - 훼철毁撤된 건물의 나무 활용

    - 사상私商이나 공인貢人에게 사들임

5. 글씨 쓸 사람에게 완성될 현판의 형태와 크기를 알려 주고 맞추어 쓰도록 지시

6. 소목장小木匠이 현판 몸체 제작

7. 각수刻手가 글씨를 받아 조각

8. 화원畵員이 현판 단청 장식

9. 건축 뼈대 완성 단계인 상량上樑을 전후하여 현판 설치

10. 현판 제작 참여자 포상

    

 

 

 

 

 

 

 

 

정화당 현판

正和堂 縣板

이병문 글씨

조선, 1880년 (고종 17) 추정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정화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올바르게 화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종이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純宗 (재위 1907 - 1910년)의 혼례를 위해 지은 건물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나비 모양을 한 나무 조각을 사용해 5장의 나무판을 이어 붙였는데 현판 뒷면에서 그 모습이 확인된다.

 

 

 

 

 

 

2.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鑄字監董諸臣題名錄 懸板

최응하 글씨

조선, 1858년 (철종 9)

 

태종太宗 (재위 1400 - 1418년) 대부터 철종哲宗 (재위 1849 - 1863년) 대까지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의 이름, 생년, 본관을 새긴 현판이다. 뒷면에 사자관 최응하 글씨 씀 [寫字官 崔應夏 筆], 소목장 송흥룡, 각수 이동욱, 고윤진 [小木匠 宋興龍 刻手 李東郁 高崙鎭]이라는 묵서가 있어 현판 글씨를 쓴 사람과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3. 일심재 현판

一心齋 懸板

순조 어필

조선, 1825년 (순조 25) 추정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 내 일심재에 걸었던 현판이다. 『현목수빈입묘도감의궤』에 따르면 검은색 바탕에 금박을 붙인 금색 글씨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금박은 남아 있지 않다. 넓은 테두리는 칠보 무늬로 장식했다. 현판 뒷면에는 어필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홍색 사롱 조각이 붙어 있는데, 기록에 적힌 일심재 현판의 제작 재료 중 홍운문사紅雲紋紗 [홍색 구름 무늬 비단]와 일치한다.

 

 

 

 

 

 

현목수빈입묘도감의궤

顯穆綏嬪入廟都監儀軌

조선, 1825년 (순조 2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수빈 박씨의 신주를 경우궁에 봉안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경우궁에 걸렸던 경우궁, 성일헌誠一軒, 일심재, 낙유당樂柔堂 현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수량, 완성된 현판을 이동할 때 사용하는 물품, 현판을 걸었던 날짜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기록에 나와 있는 재료를 토대로 현판의 제작 기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5. 현사궁 현판

顯思宮 懸板

순조 어제어필

조선, 1823년 (순조 23)

 

순조純祖 (재위 1800 - 1834년)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 (1770 - 1822년)의 신주神主를 창경궁 밖 경우궁景祐宮에 모시기 전까지 봉안했던 창경궁 현사궁에 걸었던 현판이다.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넓은 테두리에 칠보 무늬를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양각한 후 금박을 붙였다.

 

 

 

 

 

 

6. 현목수빈빈궁혼궁도감의궤

顯穆綏嬪殯宮魂宮都監儀軌

조선, 1822년 (순조 2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사궁 현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수량, 제작 방식, 테두리 무늬를 그린 화원 이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사궁 현판은 어필로 썼고 옻칠한 바탕에 글씨는 금색이며 양각했다. 바탕판과 테두리는 피나무판을 사용했고 칠보 무늬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현판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현판 글씨와 글씨 쓴 사람

Calligraphy on Hanging Boards and the Calligraphers

 

현판 글씨는 서사관書寫官으로 임명된 문관文官이 주로 썼으나 왕과 왕세자, 왕실 가족, 무관武官, 내관內官을 포함한 관청 소속 관리 등이 쓰기도 했다. 때로 중국 황제 글씨를 받아오거나 유명한 학자와 서예가 등 글씨를 찾아 모아 제작하였다.

왕과 왕세자가 지은 글과 글씨를 새긴 현판에는 각각 어제어필御製御筆, 예제예필睿製睿筆이라고 표시해 특별히 귀하게 여겼다. 현재 선조, 숙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필 현판이 전해진다. 어제 또는 어필 현판에는 여닫이 형태의 문을 설치하거나 비단으로 만든 사롱紗籠 · 斜籠을 씌워 외부 환경으로부터 현판을 보호하고 귀중히 여겼다.

 

 

 

 

 

 

 

 

 

 

 

 

현판의 글씨체

Calligraphic Styles on Hanging Boards

 

현판에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다섯 가지 글씨체가 모두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반듯하고 알아보기 쉬운 해서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현판의 글씨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어야 했기에 뚜렷하고 굵은 필획이 특징인 중국 원나라 (1271 - 1368년) 승려 설암雪菴의 해서 큰 글씨체 [대자大字]가 널리 사용되었다.

 

 

전서篆書

한자의 5개 서체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글씨체

 

예서隸書

전서를 변형하여 간결하고 부드럽게 쓸 수 있도록 만든 글씨체다.

 

해서楷書

예서를 개량하여 획을 반듯하게 만든 글씨체다. 대부분의 현판 글씨가 속한다.

 

행서行書

해서를 약간 흘려 쓴 모양의 글씨체다.

 

초서草書

글씨의 필획을 생략하여 흘려 쓴 글씨체다.

 

 

 

 

 

 

1. 규정각 현판

揆政閣 懸板

영조 어필 추정

조선

 

경희궁 규정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규정揆政은 '칠정七政 [해와 달을 비롯한 일곱 개 행성]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규정각은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인 선기옥형璣玉衡을 보관하던 곳이다. 글씨는 영조 어필로 추정되며 중국 고대학자 서체인 전서篆書로 썼다. 전서篆書는 석각石刻이나 전각篆刻에 주로 쓰였는데,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글씨 획의 두께가 균일하고 곧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2. 면복각 현판

冕服閣 懸板

조선, 19세기 후반

 

상의원 부속 전각으로 면복을 보관하던 면복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면복은 왕이나 왕세자가 즉위식이나 종묘 · 사직 제사와 같은 중요한 국가 의례 때 입었던 최고 등급 예복이다. 현판 글씨는 해서楷書로 썼는데 궁궐 현판에 가장 많이 사용된 글씨체이다. 해서는 글자의 획이 반듯하고 깔끔하며 알아보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3. 선원록아문 현판

璿源錄衙門 懸板

조선, 19세기

 

왕족 예우를 담당한 종친부宗親府의 내삼문內三門에 걸었던 현판이다. 1864년 종친부가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 관리를 맡게 되면서 '선원록을 관리하는 관청'이라는 뜻을 지닌 선원록아문 현판이 종친부 안에 걸리게 되었다. 현판 글씨는 전서에서 발전한 서체인 예서隸書로 썼는데 전서보다 획이 유려하고 단순한 특징을 보인다.

 

 

 

 

 

 

4. 복수당 현판

福綏堂 懸板

영조 어필 추정

조선, 1741년 (영조 17) 추정

 

경희궁 복수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복을 받아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글씨는 행서行書로 썼는데 반듯함이 특징인 해서보다 획을 흘려 쓴 느낌이 강하다. 행서는 해서의 보완적 서체로 궁궐 현판 글씨 중 해서와 더불어 많이 쓰인 서체다.

 

 

 

 

 

 

5. 윤집궐중 현판

允執厥中 懸板

어필

조선

 

창경궁 취운정翠雲亭에 설었던 현판이다.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글씨는 획을 생략해 자유롭게 표현한 초서草書로 썼다. 현판 오른쪽 상단에 새겨진 '어필御筆'이라는 글씨와 헌종대에 펴낸 『궁궐지宮闕志』 기록을 바탕으로 왕의 글씨 임을 알 수 있으나 어느 왕인지는 알 수 없다.

 

 

 

 

 

 

 

 

 

1. 용흥구궁 현판

龍興舊宮 懸板

숙종 어제어필

조선, 1693년 (숙종 19)

 

숙종이 글을 짓고 쓴 현판이다. '용龍 (왕)이 발흥한 옛궁'이라는 뜻인 '용흥구궁'을 헤서로 썼다.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孝宗 (재위 1649 - 1659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어의궁於義宮을 용의 궁으로 칭해 효종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를 다른 글씨보다 윌로 올려 배치하였다. 왼쪽에 숙종의 인장인 '신묵宸墨 [왕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龍興舊宮 懸板

숙종 어제어필 | 조선, 1693년 (숙종 19) | 나무, 54.8 × 216.5cm

 

 

 

2. 독포도덕 현판

獨抱道德 懸板

선조 어필

조선

 

창덕궁 후원 내 존덕정에 걸었던 선조宣祖 (재위 1567 - 1608년) 어필 현판이다. '홀로 도道와 덕德을 안고 있다'라는 뜻인 '독포도덕'을 해서로 썼다. 선조는 서예에 뛰어나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해서, 행서, 초서에 두루 능했다. 왼쪽 상단에 현판의 제작 · 수리 연도가 새겨져 있어 어필 현판에 문제가 생기면 거듭 고쳐 소중히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3. 어전친막 현판

御前親幕 懸板

정조 어필

조선, 18세기 후반

 

왕을 호위하는 친위 조직인 별군직別軍職 청사에 걸었던 현판이다. 정조가 '왕 가까이에 있는 군막'이라는 뜻인 '어전친막'을 당당한 기상이 느껴지는 행서로 썼다. 정조는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글씨를 한 사람의 성품을 드러내는 척도로 여겨, 기교적이거나 미적인 글씨보다 기풍氣風을 드러낼 수 있는 글씨를 추구했다. 정조는 글씨를 두루 잘 썼으며 특히 행서에 탁월했다.

 

 

 

 

 

 

4. 관문각 현판

觀文閣 懸板

고종 어필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관문각에 걸었던 고종 어필 현판이다. 글씨는 해서로 썼다. 관문각은 수정전에서 옮겨 온 어진, 교명, 어필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현판에는 고종의 인장인 '일천성두환문장弌天星斗煥文章 [온 하늘의 별이 문장으로 빛나다]', '주연지보珠淵之寶 [고종의 도장]'와 '만기지가萬幾之暇 [만 가지 정무 속의 여가]'를 함께 새겼다.

 

 

 

 

 

 

5. 어필현판첩

御筆懸板帖

조선, 1885년 (고종 2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종이 쓴 궁궐 현판 글씨를 모아 탁본하여 만든 첩이다. 매 면마다 글자를 하나씩 크게 썼는데 실제 현판 글씨와 같은 크기로 보인다. 경복궁 곤녕합坤寧閤, 관문각觀文閣, 창경궁 연춘헌延春軒, 창덕궁 보소당寶蘇堂 등 다양한 궁궐 현판의 글씨가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해서와 행서가 사용되었다.

 

 

 

 

 

 

 

 

 

양화당 현판

養和堂 懸板

순조 어필

조선, 19세기 전반

 

창경궁 양화당에 걸었던 순조 어필 현판이다. 글씨는 해서로 썼다. 양화당은 '화기和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를 접견하는 편전, 또는 비빈妃嬪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글씨에 네모난 금박을 이어 붙여 만든 자국이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창덕궁영건도간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기록을 통해 글씨에 금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어필을 보호하고자 덮는 사롱과 사롱을 고정했던 띠 모양 철물 일부가 남아 있다.

 

 

 

 

 

 

6. 영추문 현판

迎秋門 懸板

허계 글씨

조선, 1865년 (고종 2)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서문西門에 걸었던 현판으로 무신武臣 허계許棨 (1798 - 1866년)가 글씨를 썼다. 무신이 궁궐 현판의 글씨를 쓴 경우는 드물지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경복궁의 4개 대문인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門, 영추문, 신무문神武門 현판을 모두 무신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의 바깥문에 무신이 쓴 현판을 걸어 왕실을 안전하게 수호하고자 한 소망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7. 의열사기 현판

義烈祠記 懸板

류성룡 글, 한호 글씨

조선, 1582년 (선조 15)

 

백제 의자왕 때와 고려 공민왕 때 충신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義烈祠의 내력을 새긴 현판이다. 의열사는 1575년 홍가신洪可臣 (1541 - 1615년)의 건의로 세워졌으며 그의 벗인 류성룡柳成龍 (1542 - 1607년)이 그 내력을 글로 지었다. 현판 뒷면에 적힌 내용을 통해 글씨는 당대 뛰어난 서예가였던 한호韓濩 (1543 - 1605년)가 썼음을 알 수 있다.

 

 

 

 

 

 

 

 

 

 

 

 

8. 대은원 중수 내용을

   새긴 현판

戴恩院重修文幷小序 懸板

조한경 글, 이인재 글씨

조선, 1725년 (영조 1)

 

창덕궁 대은원이 낡아 수리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글과 글씨는 영조 대 내관內官 조한경曹漢卿과 이인재李仁栽가 썼다. 현판의 글과 글씨 모두 내관이 쓴 것으로 보아 대은원은 내시부內侍府와 관련된 전각으로 추정된다. 내관이 지은 글과 글씨로 제작된 현판은 희귀한 사례로, 조선 왕실 현판 제작 참여자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9. 개유와 현판

皆有窩 懸板

홍국영 글씨

조선 후기

 

규장각의 부속 전각으로 중국 도서를 보관하던 개유와에 걸렸던 현판이다. 개유와는 '모든 것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글씨는 문신文臣 홍국영洪國榮 (1748 - 1781년)이 행서로 썼다. 홍국영은 정조의 조력자 역할을 하며 신임을 얻었으나,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권력에 심취하고 부패하여 정계에서 실각되었다. 홍국영의 자신감있는 풍모가 글씨에서도 느껴진다.

 

 

 

 

 

 

 

 

 

1. 건구고궁 현판

乾九古宮 懸板

영조 어필

조선, 1730년 (영조 6)

 

영조가 37세 때 초서草書로 쓴 현판이다. 힘 있고 짜임새 있는 글씨에서 자신감 넘치는 젊은 왕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건구고궁'은 잠저 시절의 자신을 물 속에 숨어 있던 용으로, 왕이 된 자신을 날아오르는 용으로 비유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창의궁彰義宮에 걸도록 했는데 막 왕이 된 영조의 포부와 미래에 대한 야심을 엿볼 수 있다.

 

 

 

2. 억석회만 현판

憶昔懷萬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74년 (영조 50)

 

영조가 81세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옛일을 생각하니 만 가지가 그립다'는 뜻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도총부都摠府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다. 50여 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가 말년에 품고 있던 심정을 담고 있다. 영조가 노년에 남긴 어필 중에는 옛일을 추억한다는 '억석憶昔'이라는 문구가 빈번히 보인다.

 

 

 

 

 

 

3. 사직단의 재전에서

    지은 시를 새긴 현판

社壇齋殿作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42년 (영조 18)

 

영조가 1742년 8월에 사직단에서 가을 제사를 지내며 지은 시와 서문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숙종이 1702년 2월 '초2일'에 지낸 봄 제사와 영조 자신이 1742년 8월 '초2일'에 지낸 가을 제사 날짜가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숙종과 같은 공간을 같은 날짜에 방문한 것을 강조하여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壬午以來四十年    임오년 (1702) 이래로 40년이 지남에

追蹤古事社壇前    옛일을 따라 사직단 앞에 이르렀네.

齋中今予感懷切    재실 안에서 지금 나의 감회 간절한데

春二兩秋豈偶然    봄 가을 두 번 모두 2일에 행함이 어찌 이겠는가?

峕壬戌仲秋初吉    임술년 (1742) 8월 1일에 쓰다.

 

영조가 사직단에서 추향대데를 지내며 지은 시

 

 

 

4. 계석행 현판

繼昔幸 懸板

영조 어필

조선, 1750년 (영조 26)

 

수원 관아 건물인 어목헌禦牧軒에 걸었던 영조 어필 현판이다. '옛날의 행차를 계승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50년 영조는 온양 온천 행차를 위해 수원부에 머물렀을 때 어목헌을 침실로 삼았다. 현판은 숙종이 1717년 온천 행차 때 어목헌을 침실로 삼았던 선례를 영조가 계승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흔적을 담은 영조 어필 현판

Hanging Boards with King Yeongjo's Calligraphy Reflecting His Life

 

왕의 글씨인 어필御筆은 개인의 필적筆跡을 넘어 왕의 풍격風格과 위엄威嚴을 드러 내는 상징물이다. 어필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전하기 위해 목판, 석판 등에 새겨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중 현판은 특성상 걸어 두었기 때문에 '왕의 글씨'를 드높이는 데 적합한 매체였다. 전해지는 어필 현판 중 단연 돋보이는 현판은 영조英祖 (재위 1724 - 1776년) 어필 현판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775점 중 85점에 달한다. 이는 52년이라는 영조의 오랜 재위 기간과 어필을 남기기 좋아했던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영조 어필 현판은 재위 기간 동안 왕이 겪었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현판의 주제는 크게 공식행사 수행 후 남긴 생각, 궁궐 내외 여러 장소를 방문하고 남긴 생각, 신하와 함께한 활동, 선대先代 추모, 관청 근무 지시 사항 및 근무자 독려, 과거에 대한 회상 등으로 나뉜다. 특히 두드러지는 주제는 아버지인 숙종을 향한 추모로, 아버지에 대한 계승 의식을 밝혀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조가 젊을 때의 포부를 드러낸 현판과 노년의 감회를 드러낸 현판 사이의 상반된 감정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단청 안료 (광물 원석, 천연 석채)

(주)가일전통안료 소장

 

 

 

 

 

 

 

 

 

각자장, 단청장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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