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궁중현판] 02

드무2 2022. 6. 2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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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현판] 02

 

 

 

 

 

 

인화문 현판

仁化門 懸板

조선 후기

 

경운궁 (현 덕수궁) 남쪽 정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어진 마음 [仁]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궁궐 정문에 조선에서 중시했던 도덕적 가치인 '인仁'을 담아 그 뜻을 되새기고자 했다. 궁궐 바깥 정문 이름에는 광화문光化門과 같이 '될 화化'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백성을 유교적 가치로 교화하고자 했던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仁化門 懸板

조선 후기 | 나무, 121.7 × 353.7cm

 

 

 

 

 

 

궁궐을 포함한 옛 건축물의 처마 아래에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판에는 건축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해당 건축물의 기능과 용도를 알려줍니다.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거는 것은 건축물이 지닌 의미를 밝히고 건축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궁궐을 비롯해 종묘, 왕릉 등 조선 왕실 관련 건물에 걸린 현판에는 조선이 지향한 유교적 이상 사회의 모습이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해당 건물의 성격과 건립 목적에 어울리는 글귀와 좋은 뜻을 담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궁중 현판은 분야별 최고의 장인이 참여해 완성했습니다. 현판의 색상, 글씨, 무늬 등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적인 미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조 궁중 현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조선 왕실이 궁중 현판을 통해 널리 내걸고자 했던 유교적 이상과 가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이 궁중 현판을 우러러보며 마음속에 되새겼을 이상 정치의 참뜻을 함께 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담다

Embodying Ideals :

A Path to a Kingly Way of Governance

 

 

조선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에서는 성인聖人 군주가 인仁과 덕德으로 다스리는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이상적 정치로 여겼다. 궁궐은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조선의 의지가 담긴 공간이었다. 정도전은 왕명으로 경복궁과 궁궐 안 건물의 이름을 정하면서 궁궐의 장엄한 외관에 맞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서 보고 듣는 자를 감동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건물 곳곳에 걸린 현판에는 왕도 정치를 이뤄내기 위한 바람과 구체적인 노력이 자연스레 담겼다. 
궁중 현판에는 참다운 왕인 성군聖君을 목표로 학문에 매진하는 왕과 세자의 모습,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인륜人倫을 가르치기 위한[교화敎化] 노력, 효孝를 실천하고자 부모와 조상을 모시고 추모한 모습, 왕권과 신권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자 한 왕의 노력 등 당대 정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은 궁궐 건축에 걸려 있는 다양한 현판을 우러러보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겼을 것이다.

 

 

 

 

 

 

 

 

 

삼봉집

三峯集

정도전

조선

국립중앙도서관

 

정도전鄭道傳 (1342 - 1398년)이 지은 문집으로, 왕명에 따라 궁궐과 전각 이름을 지으며 쓴 글이 수록되어 있다. 궁궐 이름은 『시경詩經』에 실린 시구에서 발췌해 나라가 만년토록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다. 정치의 중심 공간이었던 정전正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근정전勤政殿이라 지었다. 다른 전각의 이름도 유교 경전 구절에서 따오거나 성군의 도리를 담아 공들여 지었다.

 

 

 

신이 살펴 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궁궐을 장엄하게 지어 존엄성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서 보고 돕는 이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기記」 『삼봉집三峯集』 권4

 

 

 

 

 

 

궁궐지

宮闕志

조선, 1834 - 1849년 (헌종 연간)

 

조선시대 궁궐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각 궁궐에 있는 전각의 이름, 위치, 연혁, 관련 글과 시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잇다. 이 중 창덕궁 이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이 보인다. 창덕궁과 각 전각의 이름에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담겨 있으므로 단순히 아름답게 꾸며 감상할 것이 아니라, 되새겨 교훈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 창덕궁의 명銘이 어찌 단순한 궁의 이름일 뿐이겠는가,

인군人君은 창덕昌德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옛적 신하가 전호殿號로써 임금의 덕을 힘쓰게 하였으니,

전호라는 것이 어찌 금판에 새겨 단청으로 장식하여

한갓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도구일 뿐이겠는가

이에 명銘하노라.

창昌은 창昌하게 성盛은 성盛하게 하라는 뜻이다.

창의 뜻이 크니 이 전호의 교훈에 힘쓰라.

 

순조純祖 (재위 1800 - 1834년), 『어제창덕궁명병서御製昌德宮銘幷序』, 『창덕궁지昌德宮誌』

 

 

 

 

 

 

성군의 도리를 담다

Demonstrating the Duties of a Sage Ruler

 

왕이 정치를 하는 공간이나 왕위 계승자인 세자가 지내는 공간에는 성군聖君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담긴 현판을 걸어 현판을 볼 때마다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했다. 부지런히 정치할 것 [근정전勤政殿], 어질게 정치할 것 [인정전仁政殿], 덕을 기를 것 [양덕당養德堂]처럼 올바른 정치와 어진 마음, 덕을 중시했다. 전각의 이름뿐 아니라 문이나 부속 건물에도 이러한 의미를 담아 공간 전체에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를 담았다.

세자가 성리학적 도리를 몸소 체험해 깨닫는 것은 곧 왕위 정통성과도 연관되었기 때문에 역대 왕은 세자의 교육을 중요시했다. 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인 춘방春坊에서는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를 스승으로 두었다. 왕은 세자의 교육 현황을 수시로 검토하고 기념해 현판으로 제작했는데 하루 일과 동안의 공부법, 교재를 읽는 횟수 등 사소한 내용까지 지시한 현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는 경연經筵을 수시로 향해 끊임없이 올바른 정치를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수양해야만 했다.

 

 

 

 

 

 

 

 

 

융문루 현판

隆文樓 懸板

김병학 글씨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동행각의 누樓에 걸었던 현판이다. '문文을 융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행각에는 융무루를 걸어 문文과 무武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이처럼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물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공간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씨는 고종 대 영의정인 김병학金炳學 (1821 - 1879년)이 썼다.

 

 

 

 

 

 

1. 양덕당 현판

養德堂 懸板

영조 또는 정조 어필 추정

조선, 18세기

 

경희궁慶熙宮 양덕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양덕당은 '덕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왕세자가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궁正宮인 경현당景賢堂 북쪽에 위치했다. 조선은 덕으로 하는 정치 [德治]를 이상으로 여겼다.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의 공간에 걸렸던 현판 이름을 통해서 세자 역시 성군의 덕목을 길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養德堂 懸板

영조 또는 정조 어필 추정 | 조선, 18세기 | 나무, 41.2 × 108.3cm

 

 

 

 

 

 

2. 계인문 현판

啓仁門 懸板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正殿인 근정전 동행각 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어짊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치 공간으로 문 이름에도 성군의 기본 도리인 인仁을 담았다. 주요 전각뿐 아니라 공간 곳곳에 정치적 이상을 내재해 우러러 보며 되새기도록 했다.

 

 

 

 

 

 

3. 융무루 현판

隆武樓 懸板

신관호 글씨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서행각의 누樓에 걸었던 현판이다. '무武를 융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행각에는 융문루를 걸었다. 두 누각의 이름은 조선 건국 후 경복궁이 완성되자 태조太祖 (재위 1392 - 1398년)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지었는데, 문무를 함께 힘써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글씨는 고종 대 훈련대장 신관호申觀浩 (1810 - 1884년)가 썼다.

 

 

 

 

 

 

4. 태조실록

太祖實錄

조선, 1448년 (세종 30) | 영인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보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경복궁이 완성되자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한 내력이 실린 실록이다. 정도전은 정전의 동서쪽 누를 각각 융문루, 융무루라 지으며 문文과 무武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된 정치 공간인 정전 양편의 건물에 문무를 함께 높여야 나라가 오래 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융문루隆文樓, 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자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인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전하께서는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8, 태조 4년 (1395) 10월 7일

 

 

 

 

 

 

 

 

 

춘방에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

下春坊綸音 懸板

영조 어필, 조명정 글씨

조선, 1747년 (영조 23)

 

영조英祖 (재위 1724 - 1776년)가 세자 교육 기관인 춘방에 내린 명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세자를 철저히 교육할 것을 신하에게 당부하며 강독 시 규칙을 춘방에 걸도록 했다. 세자가 오전과 오후에 각각 공부할 내용과 횟수 등 세세한 규칙까지 지시하고 있다. 휴식 시간에도 복습하고 강론할 것을 명해 영조가 세자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1. 서연회강식 현판

書筵會講式 懸板

조선 후기

 

왕세자가 한 달에 두 번 그동안 배웠던 내용을 시험하는 회강會講 때의 규칙을 새긴 현판이다. 강론講論을 담당한 문관인 강관講官과 세자가 번갈아 가면서 음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회강은 여러 사람 앞에서 학문을 시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세자가 질문을 받고 대답할 만한 능력을 갖출 만큼 학문이 무르익어야 행할 수 있었다.

 

 

 

 

 

 

2. 회강반차도첩

會講班次圖帖

조선 | 영인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각연구원

 

왕세자가 회강하는 절차를 그림으로 남긴 첩이다. 그림으로만 이루어져 구체적인 절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신하가 참여한 가운데 배운 내용을 시험하는 왕세자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회강은 일정한 절차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식 의례였기 때문에 배운 내용을 숙지해야 할 뿐 아니라 절차 역시 몸에 익혀야 했다.

 

 

 

 

 

 

 

 

 

3. 춘방 현판

春坊 懸板

효명세자 예필

조선, 1829년 (순조 29)

 

왕세자 만을 위한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곧 춘방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선은 유교적 도리가 체화된 성군을 기르기 위해 세자를 어려서부터 교육했다. 현판에는 보도계옥輔導啓沃이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는데 신하가 충성스러운 의견을 아뢰어 왕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자를 좋은 말로 잘 보필해 성군이 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왕세자입학도첩

王世子入學圖帖

조선, 1817년 (순조 17)

 

왕세자가 조선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첩帖이다. 왕세자는 춘방에서 따로 교육 받았으나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례를 치러 세자 역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였다. 왕위 계승자인 세자가 조선의 정치 철학인 유학을 익히는 것은 왕실의 정통성 확보와도 연결되었다.

 

 

 

 

 

 

 

 

 

5. 효명세자가 쓴 천지장남궁

    글씨를 탁본한 첩

睿筆天地長男宮帖

조선, 1829년 (순조 29)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순조純祖 (재위 1800 - 1834년)의 왕세자인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 - 1830년)가 쓴 춘방 현판 글씨를 탁본한 서첩이다. 세자가 직접 쓴 현판 글씨를 통해 춘방과 세자의 긴밀한 관계를 책봉되어 유교 경전이나 역대 국왕의 모범적 사례를 담은 서적 등을 공부하며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길렀다.

 

 

 

 

 

 

경연학사지서 현판

經筵學士之署 懸板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경연經筵을 하는 학사의 관청'이라는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경연은 왕이 성군이 되기 위해 신하 중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공부하는 제도이다. 조선 왕은 인仁과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성군이 되어야 했다. 틈틈이 경연을 열어 스스로 수양하고 자신의 학습 상태를 확인했다. 경연 때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는 한편 신하와 정책을 의논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열성조계강책자차제

列聖朝繼講冊子次第

조선, 19세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역대 왕이 공부했던 책과 공부 기간을 정리한 책이다. 효종孝宗 (재위 1649 - 1659년)부터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년)까지 왕세자 시절의 공부인 서연書筵, 왕이 되고 나서의 공부인 경연經筵, 불시에 열렸던 공부인 소대召對 때 기록이 실려 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책을 공부하며 성리학적 도리를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위한 마음을 담다

Communicating a King's Affection for His People

 

조선은 백성의 삶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보았다. 왕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조세租稅를 균등히 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사법을 전국에 전파하고, 백성을 동원할 때 농사로 바븐 철은 피하였다. 가뭄이 들면 왕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 백성과 어려움을 함께 했다.

현판에 이러한 노력을 새겨 두고 백성을 항상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왕이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 내용이 담긴 현판에는 자연재해를 겪은 백성의 어려움을 함께 하고자 한 다음이 담겨 있다. 세금을 관리하는 호조戶曹에는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글귀를 새겨 걸게 하였고, 조세가 백성에게 끼치는 영향을 항상 염두에 두도록 했다.

왕은 백성의 생활을 평안하게 하는 한편, 성리학적 가치를 교육해 모두가 좋은 나라의 구성원이 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 역시 현판에 남아 있어 백성을 기르는 데서 나아가 교화를 이루어 애민愛民을 완성하고자 했던 왕의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영조 어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81세 때 백성을 위하여 쓰다

 

 

 

 

왕과 백성 간 소통의 상징, 홍화문

Honghwamun(Gate), A Symbol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King and His People

 

 

 

 

 

 

 

 

 

 

 

 

1. 수원 새 고을의 부로 및

    백성에게 내린

    글을 새긴 현판

諭水原新治父老民人 懸板

정조 어제

조선, 1790년 (정조 14)

 

정조가 수원의 새 고을 백성을 배려한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정조는 새 고을에 내렸던 기존의 조세 면제가 살림이 미천한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실정을 파악해, 10년 동안 조세가 면제되는 토지 500결을 하사하고 부족한 곡식을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백성에게 식량이 하늘 같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한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2. 기우재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며 지은

   글과 시를 새긴 현판

爲民行祈雨有作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43년 (영조 19)

 

영조가 기우제를 지내고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백성을 생각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비는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영조는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기우제를 지내 백성을 위로하고 항상 백성을 생각해야 함을 강조했다. 현판에 새긴 글을 세자에게도 내려 백성을 중히 여길 것을 훈계했다.

 

 

 

爲民行祈雨有作 懸板

영조 어제어필 | 조선, 1743년 (영조 19) | 나무, 47.9 × 126.0cm

 

 

 

 

 

 

3.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홍화문에서 쌀을 하사한 장면

園幸乙卯整理儀軌 中 弘化門賜米圖

조선, 1796년 (정조 20)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 (1735 - 1815년)의 회갑을 기념해 행한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 실린 그림이다. 정조는 수원 화성에 행차해 잔치를 연 뒤 신풍루新豊樓에서 탄신 당일에는 창경궁 연희당延禧堂에서 잔치를 연 후 홍화문弘化門 앞에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조선 왕실은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열고 백성에게 쌀과 음식 등을 나눠주며 기쁨을 함께 했다.

 

 

 

 

 

 

 

 

 

4. 호조에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

書下戶曹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34년 (영조 10)

 

영조가 나라의 재정을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이다. 절약하며 힘을 비축하고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이다. 국가가 세금을 공평히 거두고 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백성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조는 백성이 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다각도로 노력했다.

 

 

 

書下戶曹 懸板

영조 어제어필 | 조선, 1734년 (영조 10) | 나무, 26.8 × 46.5cm

 

 

 

 

 

 

5. 패문경직도

佩文耕織圖

중국 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백성의 농사일과 길쌈 등 노동 풍속을 그린 그린 책이다. 중국 청나라 황제 강희제姜熙帝 (재위 1661 - 1722년)의 명으로 처음 편찬되었다. 황제가 백성의 노동을 이해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간행되었다. 조선에도 유입되어 조선 왕은 이러한 경직도를 두고 보며 백성의 농사짓는 고충을 생각하고 성군의 의지를 다지고자 했다.

 

 

 

 

 

 

 

 

 

염자보민 현판

念玆保民 懸板

철종 어필

조선, 1860년 (철종 11)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을 새긴 현판이다. 조선의 정치 철학인 유학에서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 백성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생각했다. 왕이 직접 쓴 이 현판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 즉 보민保民의 기본 임을 강조한 조선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念玆保民 懸板

철종 어필 | 조선, 1860년 (철종 11) | 나무, 50.4 × 158.0cm

 

 

 

 

 

 

 

 

 

 

 

 

 

 

 

 

 

 

 

 

 

6.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소학 · 오륜행실도 등을

    반포하면서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

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

懸板

정조 어제, 김근순 글씨

조선, 1797년 (정조 21)

 

정조가 유교의 기본 도리를 담은 서적을 반포하며 훈계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조선 왕실은 백성이 올바른 도덕을 익히도록 교화하는 것을 왕의 책임으로 여겨 관련 서적을 반포해 교육했다. 정조는 유교의 도리를 잘 지킨 모범적인 예를 담은 책인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 다양한 서적을 반포하도록 하면서, 특히 노인을 부모 섬기듯 하라고 강조했다.

 

 

 

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酒禮鄕約綸音
王若曰 予聞之夫子觀於鄕而知王道之易易觀政在朝觀俗在野政之所及者淺俗之所得者深 故善乎觀人之國者必先其野 而後其朝肆予膺天之蝦恭逢 慈宮週甲期與八方臣庶共其樂尊年錫類之典無所不用其極 而觀於朝政無可紀 觀於野俗不維新 惟予一人否德 不敢比先王觀也 每中夜以思忘寢屢興憫近俗之難矯 慨初心之多負予之所自期 豈欲如斯而止乎哉 人心安則逸 逸則玩 玩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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縱而浪遂至沉酣豢養於積累昇平之樂而幼違蒙養之正長乏師受之益指拘撿爲迂詭視靡誕爲活計自少至老若不知天叙天秩之有典有則三杯揖讓固尙矣風流之篤厚亦難乎一變而至夫愛親者不敢惡於人敬親者不敢慢於人以其廣敬而因本也 故虞夏商周之相承富德親爵之有殊而齒則不遺者蓋年之爲貴次於事親也 凡今之人不畏遺年也 故其弊也 爲五品之不遜 經曰先王有至德要道以順天下故忠可移於君順可移於長治可移於官傳曰人人親其親 長其長 而天下平廣敬因本之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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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方反求之不暇而物候窮則天根露習氣盡而眞情見意者時雍日新之機迨其今乎小學一書卽學校始敎之次第節目也以予寡昧尙賴先大王導迪之恩記在童習之年粗收日講之力世之子弟雖不及遍通六經或庶幾勉勉持循於做人樣子而邇來學日益渝敎日益弛此書隨而束閣予爲是瞿爰命內閣之臣就訓義而攷證之且三綱二倫行實等篇爲輔治勵世之具與小學書 不可偏廢釐爲一編 命之曰 五倫行實 予又思之一日 禮行風動四方惟鄕飮酒 近之是禮也 休老而勞農導歡而序齒明貴

어윤2ㄴ

賤而 辨隆卑正身安國之要率是以興也 粵我 世宗盛際創行養老宴三綱行實之頒下亦在其時民到于今擧切親賢樂利之思而不能諼予小子其敢不修述焉然
鄕約之於化民成俗亦易爲力朱夫子蓋嘗月朝讀約三代之制如復可見予故曰 因今之民變古之俗被之以仁義示之以本實鄕約之效不差於鄕飮酒此規亦不可不講而明之幾務之暇彙成鄕飮儀式鄕約條例欲其委曲周摯文質俱備偕我同胞之民油然起感肅然知序苟使是擧不歸於徒法徒言則何頑之敢梗何愚之不明乎咨爾有衆

어윤3ㄱ

毋侮古訓毋迂予言 俛焉孶孶惟玆飮玆約是講是遵其君子若生三古而秉周禮其小人若捧乘矢而游矍圃一切知菽粟可去而親親長長之不可斯須去以爲人乎何暇他求 卽此而民志壹世敎靖 予與爾有衆共享无疆之祚以對越天地之耿光以丕承祖宗之謨烈尙克時忱其永有賴觀乎朝野彬彬改觀則受豊福而享勳力其在斯乎故曰老老而民興孝又曰老吾老以及人之老値三元之嘉會祝萬壽於 慈宮仰瞻韶顔喜騰難老推而廣之休寧羣老羣老之休且寧顧不係於豐年之多黍多

어윤3ㄴ

稌乎故勞農爲休老之本四日得辛則熟十日得辛則稔熟旣驗於昨歲稔可占於今年天以錫我康功我亦勤玆田功徯志之應 庶可質諸歲歲年年如昨如今以至萬斯年無斁農夫之慶人子之慶也人子之慶朝廷之慶也
上之二十一年正月初一日

 

 

 

어제 양로 무농 반행 소학 오륜행실 향음주례 향약 윤음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부자(夫子)는, ‘시골 풍속을 보면, 왕도(王道)의 쉬운 것을 알겠다. 정치하는 것은 조정에서 봐야 하며, 풍속은 민간에서 봐야 한다. 정치로 해서 미치는 것은 얕지만, 풍속으로 해서 얻는 것은 깊기 때문에 한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그 민간에서 먼저 보고, 그 조정은 나중에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하늘이 주신 복으로 어머님의 회갑날을 맞이하여, 온 나라[八方]의 백성들과 그 즐거움을 함께하게 되었으니, 늙은 사람을 높이고,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법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정에도 기록할 만큼 좋은 정치를 한 것도 없고, 민간에도 새로운 풍속으로 세울 만한 것이 없으니, 오직 덕이 없는 나 한 사람은 감히 선왕(先王)들이 하던 일에 비교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밤중에도 이런 생각으로 잠마저 잊고, 여러 번 일어나 앉아서, 근세의 풍속을 바로 잡기 어려운 바를 민망히 여기고, 처음 기대한 바에 많이 어긋나는 일을 개탄하게 되니, 내가 스스로 기약한 바가 어찌 이와 같은 데에서 그쳐 버리고 말겠는가.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면, 놀기 마련이고, 놀기를 좋아하면, 희롱(戲弄)을 좋아하게 되며, 희롱을 일삼으면, 방종(放縱)과 낭만(浪漫)에 빠지게 된다. 드디어는 승평(承平) 시대에 즐겁게 지내는 것이 쌓여서 습관이 된다. 이래서 어려서는 올바른 교양을 어기게 되고, 장성해서도 스승의 유익한 가르침이 결핍되어, 짜임새 있는 선비를 오활하고, 괴벽하다고 손가락질하며, 이익에 끌리고, 허탄한 것만을 삶의 계획으로 삼게 된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만약 하늘이 만든 질서와 하늘이 낸 법칙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술 세 잔을 마시는 데에도 사양하는 예법이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이러한 독실하고, 후덕한 풍류도 한번 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더군다나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감히 미워하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남을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에 이른다면, 이는 그 공경하는 마음을 넓게 하여서, 근본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와 같은 나라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덕(德)이 있는 사람을 부자가 되도록 하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친절하게 한 것은 비록 달랐지만, 연륜이 높은 이를 잊지 않았는데, 이것은 대개 늙은 분을 부모 섬기는 것 다음으로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늙은 분들을 잊어버리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폐단은 오품(五品)에 관해서도 공손하지 않게 되었다.
『효경(孝經)』에서 말하기를, ‘선왕(先王)들은 지극한 덕과 필요한 도(道)로서 천하를 순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임금에게 옮길 수 있고, 순한 도리를 어른들에게 옮길 수 있고, 다스리는 정치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옮길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시전(詩傳)』에서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부모를 부모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 천하가 평화로워진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공경하는 마음을 넓히고, 근본에 바탕을 둔다는 책임을 내가 바야흐로 반성하고 구해서, 다른 일에 마음 쓸 겨를이 없다. 물후(物候)가 다하면 천근(天根)이 발로(發露)되며, 습기(習氣)가 다하면 진정(眞情)이 나타난다. 생각해 보건대 때로 화평해지고, 날로 새롭게 되는 기회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소학(小學)』 한 편은 곧 학교에서 처음 가르치는 순서와 절목(節目)이다. 덕(德)도 적고, 식견도 없는 나도 오히려 선대왕(先大王)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에 힘입어, 어려서 배울 때에 날마다 강의를 들어 힘을 거두게 되었다. 세상의 자제(子弟)들이 비록 육경(六經)을 두루 통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는 있다는 이 『소학』만은 혹시 힘쓰고 따르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학문이 나날이 엷어지고, 교화(敎化)가 날로 해이해지면서, 이 책 『소학』도 역시 내려놓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두렵게 여겨서, 내각(內閣)의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훈의(訓義)에 따라 고증(攷證)하라.’ 하였으며, 또 삼강(三綱)과 이륜(二倫)의 행실 등의 글도 또한 정치를 돕고 세상 일을 장려할 도구가 되겠으므로, 『소학』과 같이 출판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하나의 책으로 정리해서,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하루만 예를 행하여도 온 사방이 마치 바람에 움직이는 듯하다는 것은, 오직 향음주(鄕飮酒) 만이 그러한 듯하다. 이 예법은 늙은이를 쉬게 하고, 농사를 짓는 이를 위로하며, 기쁜 마음으로 인도하고, 연치대로 질서를 정하며,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밝히고, 높고 낮은 것을 분별하게 되기 때문에 몸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편하게 하는 요령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우리 세종(世宗) 조의 융성할 무렵에 양로연(養老宴)을 처음 행했고, 『삼강행실』을 반포(頒布)한 것도 역시 그때에 있었던 일이다.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모두 어진 사람을 친하게 하고, 이로운 일을 즐겨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 능히 잊어버리지 못하게 되니, 소자(小子)인 나로서 어찌 몸을 닦아 계술(繼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향약(鄕約)이라는 규칙도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만드는 것에 역시 쉽게 되기 때문에, 주부자(朱夫子)께서도 일찍이 매월 초하루가 되면, 이 향약을 읽고 말씀하시기를, ‘삼대(三代)의 제도를 이제 다시 보는 듯하다.’ 했다.
이런 까닭에 나도 말하기를, ‘이제 백성을 옛날 풍속으로 변화시켜서, 인의(仁義)로 근본과 실상을 보여준다면, 향약(鄕約)으로 가르치는 효과는 향음주와 다름이 없을 것이니, 이 규약도 또한 강론해서 밝히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여러 직무를 보살피는 여가에 향음의식(鄕飮儀式)과 향약조례(鄕約條例)를 만들어, 여러 가지로 곡진(曲盡)하게 하고, 두루 지극하게 하여, 문체와 바탕을 구비하게 됨과 동시에 우리 동포 백성들과 함께 감동된 생각이 자연히 솟아나서, 엄숙한 질서를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로 이것을 잘 거행하여, 한갓 법으로만 하지 않고, 한갓 말로만 돌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완악(頑惡)한 자라도 길이 잡힐 것이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지각이 밝아질 터이다.
아! 너희 여러 백성들은 옛사람의 훈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나의 이 말도 오활(迂闊)하다 하지 말고, 머리를 숙여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게 오직 이 향음주와 향약만을 강론하고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 군자(君子)로서는 마치 삼고(三古)때에 나서 『주례(周禮)』를 잡은 듯이 하고, 그 소인(小人)으로서는 마치 수레와 화살을 만들고 확포(矍圃)에 노는 듯이 해서, 모두가 숙속(菽粟)은 버릴지라도, 부모를 부모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도리를 잠깐이라도 버려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 무엇을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니 곧 여기에서 백성들의 뜻이 하나가 되게 하고, 세상의 교화(敎化)도 밝게 될 것이다.
나도 너희 여러 백성들과 함께 무강(无疆)한 복록(福祿)을 같이 누려서, 천지의 밝은 빛을 대하고, 조종(祖宗)에 끼친 법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이럴수록 더욱 정성껏 서로 힘입을 수 있게 하여,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옛 풍습을 고쳐서 모두 빛나게 된다면, 풍성한 복록을 받고, 공훈도 길이 누리게 될 터이니, 이 모든 것은 실로 여기에 있는 바이다.
이런 까닭에 이르기를, ‘늙은이를 늙은이답게 섬겨서 대우해야만 백성들이 효도하게 된다.’라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자기 집 늙은이를 늙은이답게 섬겨서, 남의 집 늙은이에게까지도 미친다.’라고 한 것이다.
이제 삼원(三元)의 좋은 시절을 만나, 자궁(慈宮)께 만수(萬壽)의 축배(祝盃)를 올리게 되니, 우러러 소안(韶顔)을 뵈올 때 기쁜 마음이 난로(難老)라는 문자에 뛰논다. 이 마음을 미루고 넓혀서, 나라 안의 모든 늙은이들을 편하게 쉬게 할 생각이다. 이 여러 늙은이를 쉬게 하고 편안케 하자면, 해마다 풍년이 들어 기장도 많고 벼곡식도 많아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농사에 힘쓰는 것이 늙은이를 편안케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대략 나흘만에 신일(辛日)이 닿으면, 풍년이 들고, 열흘 만에 신일이 닿으면, 곡식이 잘 여문다고들 하는데, 작년에 이미 풍년이 드는 것을 징험(徵驗)해 보았으니, 올해도 큰 풍년이 드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풍년을 내리시는 동시에 우리 여러 백성들도 더욱 이 농사에 힘쓴다면, 하늘이 우리 뜻대로 순응해 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며, 앞으로 해마다 작년과 올해같이 만대(萬代)에 이르러 계속할 것이므로, 농부의 경사는 남의 자식된 자의 경사이며, 남의 자식된 자의 경사는 온 나라 조정의 경사가 될 것이다.
정조 21년(1797) 정월 초하루.

 

 

 

 

 

 

7.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

조선, 1797년 (정조 21)

 

유교의 도리를 잘 지킨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합하고 일부를 수정하여 편찬한 책이다. 풍속을 두텁게 하여 나라 안에 유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편찬햇다. 주요 관청, 지방의 주州 · 현縣까지 배포해 교화가 두루 미치도록 했다. 그림, 한자, 한글을 함께 구성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8.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

조선, 16세기

 

왕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본 도덕인 삼강을 잘 지킨 사례를 모은 책이다. 1434년 세종世宗 (재위 1418 - 1450년)의 명으로 처음 편찬된 뒤 성종成宗 (재위 1469 - 1494년) 대에 한글 해석을 더해 편찬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유교에서는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방도라 생각했다. 조선은 다양한 교육 서적을 발간하여 백성을 교화하고자 했다.

 

 

 

 

 

 

9.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거행할 때 지은

    글을 새긴 현판

洛南軒行養老宴吟示群老求和 懸板

정조 어제, 홍낙성 글씨

조선, 1795년 (정조 19)

 

정조가 낙남헌에 노인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고 지은 글과 시를 새긴 현판이다. 왕은 양로연에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노인을 초대하여 공경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임으로써 백성의 효성과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을 북돋고자 했다. 정조는 직접 일어나 술을 돌리는 등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을 몸소 보이고 노인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지었다.

 

 

 

효를 담다

Mirroring Filial Piety toward Parents and Ancestors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인 효孝는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였다. 효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정성껏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를 갖춰 장사지낸 뒤 때에 맞춰 제사 지내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왕은 효를 철저히 수행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정조는 어머니 회갑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열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잔치 공간에 봉수당奉壽堂이라는 이름을 내려 현판으로 거는 등 살아계실 때 정성을 대하는 모습을 널리 보였다.

왕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시신은 왕릉王陵에, 혼魂은 종묘宗廟에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궁 안에는 선원전璿源殿을 지어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선원전에서 아버지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현판에는 왕의 효성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난다. 왕릉과 종묘에서는 기일, 계절의 순환과 같이 예禮에 맞는 날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 왕실은 역대 왕과 왕비 전체를 대상으로 제사 지내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조상 계승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 또한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의 이름과 위치 등을 현판에 새겨 왕릉과 종묘, 관청 등에 걸고 제삿날을 고려해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현판 아래에서도 언행을 조심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게 하였다.

 

 

 

 

 

 

 

 

 

 

 

 

 

 

 

 

 

 

 

 

 

1. 아버지를 추모하는

    내용을 새긴 현판

曉頭夢拜父王紀懷 懸板

영조 어제, 구윤명 글씨

조선, 1762년 (영조 38)

 

조가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에서 아버지 숙종을 추모하며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8월 8일 꿈에서 숙종을 보고 창덕궁 선원전으로 찾아갔다. 현판에서는 어진을 보며 아버지를 다시 본 듯 생생한 기분을 느꼈으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다.

 

 

 

 

 

 

2.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봉수당 잔치 장면

園幸乙卯整理儀軌 중 奉壽堂進饌圖

조선, 1796년 (정조 20)

 

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행한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 실린 그림이다. 정조는 윤2월에는 수원 화성 봉수당에서, 탄신 당일에는 창덕궁 연희당에서 잔치를 열어 어머니의 회갑을 축하했다. 회갑기념 잔치뿐 아니라 과거시험, 양로연, 백성에게 쌀 나눠주기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모두 어머니의 덕과 은혜로 돌려 지극한 효성을 드러냈다.

 

 

 

 

 

 

3. 영회각소지 현판

永懷閣小識 懸板

조선 후기

 

조선 왕실 사당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현판이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살아 섬기는 정성과 돌아가심에 추모하는 정이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내용을 새겨 효의 근본적인 의미를 담아냈다. 조선시대에는 신주를 사당에 모셔 조상에 대한 효를 다하였다. 사당 이름에는 오래 생각한다는 뜻을 지닌 '영회永懷'와 같이 조상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봉수당 현판

奉壽堂 懸板

조윤형 글씨

조선, 1795년 (정조 19) 추정

 

화성행궁의 정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지어질 당시에는 정조가 한양 남쪽에 위치한 수원을 장엄하게 하라는 의미를 담아 장남헌張南軒이라 이름 짓고 글씨를 썼다. 이후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윤2월 장남헌에서 회갑기념 잔치를 열었는데,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궁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정당의 이름을 봉수당으로 고쳐 효심을 드러냈다.

 

 

 

 

 

 

 

 

 

4. 종묘의궤

宗廟儀軌

조선, 1667년 (현종 8) | 영인본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종묘 건축을 비롯해 종묘제례 때 사용되는 제기, 제복, 악기와 같은 물품, 제사 상차림 등 종묘 관련 내용을 모아 종합한 책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조상에 대한 효와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종묘대제는 국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로 왕이 직접 주관했다. 영조 때부터는 제사에 사용될 희생과 제기를 살피는 일도 왕이 직접 행하였다.

 

 

 

 

 

 

 

5. 조선을 개국한

    임신년을 추억하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

追億壬申開國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54년 (영조 30)

 

영조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능에서 개국한 해를 되돌아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1392년 건국된 조선이 지금까지 이어져 태조 능에 임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조선의 역대 왕은 태조 능을 찾아가 조선 역사에 대한 감회를 읊곤 했다. 조선의 시작이자 뿌리인 태조를 찾아 왕실의 정통성을 되새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6. 국기판

國忌板

대한제국

 

조선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의 이름과 위치 등을 새긴 현판이다. 왕과 왕비의 제삿날은 국가의 기일로 여겨 유흥이나 도살 등이 금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종묘, 왕릉과 같이 왕과 왕비를 모신 곳을 비롯해 관청에도 국기판을 걸어 신하가 국가 제사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국기판이 걸린 곳에서는 언행을 바로하여 현판 앞에서도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國忌板

대한제국 | 나무, 82.0 × 241.0cm

 

 

 

신하와의 어울림을 담다

Reflecting the Ties between a King and His Subjects

 

조선은 왕과 신하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왕은 독단하지 않고 신하와 합의하여 정책을 결정했다. 조선초부터 정책 심의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두어 재상宰相과 결정 권한을 나누고, 홍문관弘文館처럼 왕이 자문하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의정부 삼정승三政丞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정치의 근본이 되는 공간'이라는 뜻의 정본당政本堂 현판을 걸어 조선 정치에서 신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상징했다. 신하와의 교류와 화합을 중시했던 정조正祖 (재위 1776 - 1800년)는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해 학술 연구 · 정책 논의기관으로 활용하며 정치 혁신을 도모하기도 했다.

왕은 신하의 의견을 듣고 하나로 모으는 한편, 신하와 함께 하는 행사를 열어 어울렸다. 신하와의 활쏘기를 통해 서로 간의 화합을 꾀하며 이상적인 정치 구현에 힘썼다. 왕의 사적 공간인 창덕궁 후원 안까지 신하를 초대해 친밀감을 높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왕과 신하가 함께 시를 지어 공통된 지향점을 확인하였다. 행사 과정, 행사 후 포상 내용, 함께 지은 시 등을 현판으로 만들어 왕과 신하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드러냈다.

 

 

 

 

 

 

 

 

 

 

 

 

 

 

 

1. 정본당 현판

政本堂 懸板

고종 어필

조선, 1865년 (고종 2)

 

조선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삼정승이 근무한 곳에 걸었던 현판이다. 의정부는 역할이 축소되기도 했으나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다. 삼정승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일컫는 말로 의정부의 우두머리, 곧 조선 백관이 우두머리다. 이들이 근무했던 건물 이름에 '정치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담아 의정부의 역할, 즉 조선 정치에서 신하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2. 의정부의 역할과

    중요성을 기록한 현판

敍議政府之職 懸板

어필

조선 후기

 

'백관을 통솔하고 온갖 정사를 바로 잡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니 국정과 관계됨이 긴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성종成宗 (재위 1469 - 1494년) 대에 완성된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중 의정부의 역할을 규정한 항목에서 발췌한 것이다.

 

 

 

敍議政府之職 懸板

어필 | 조선 후기 | 나무, 73.2 × 264.0cm

 

 

 

 

 

 

 

 

 

3. 옥당 현판

玉堂 懸板

이정영 글씨

조선, 1652년 (효종 3)

 

옥당이라고도 불렸던 홍문관의 현판이다. 옥당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이다. 홍문관은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 서적을 관리했다. 현판 글씨는 홍문관 관원이었던 이정영李正英 (1616 - 1686년)이 썼다. 전해지는 옥당 현판 중에서는 유일한 세로 형태이다.

 

 

 

 

 

 

4. 옥당 현판

玉堂 懸板

김진규 글씨

조선, 1699년 (숙종 25)

 

옥당이라고도 불렸던 홍문관弘文館의 현판이다. 옥당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이다. 홍문관은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 서적을 관리했다. 홍문관 관원은 왕과 학문, 국정을 논의했던 자리인 경연經筵의 준비를 겸하기도 하며 왕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현판 글씨는 홍문관 관원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년)가 썼다.

 

 

 

 

 

 

5. 홍문관에 당부한

    글을 새긴 현판

臨玉署有感 懸板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60년 (영조 36)

 

영조가 홍문관 관원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글을 새긴 현판이다.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때 일화와 세종 때 세자가 학문을 연마한 일화를 언급하며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조는 직접 지은 글을 첩으로 만들어 홍문관 관원에게 내리고 현관으로도 만들도록 하였다. 성리학을 정치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신하도 지속적으로 학문을 연마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내각선사일록

內閣繕寫日錄

조선, 1795 - 1798년 (정조 19 - 2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의 영리營吏인 권계만權啓萬 (1767 - 1849년)이 규장각으로 출장와서 겪은 일을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다. 이 중 1797년 6월 일기에 규장각의 풍경, 현판의 위치와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이 어떤 건물에 걸쳐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문 안쪽에는 '내각內閣' 두 글자가 걸려 있고, 대문 안쪽에는 중문이 있는데 삼승포三升布로 된 푸른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문 위에는 '내각비부비각속무득출입內閣秘府非閣屬毋得出入 [내각은 비부秘府이므로 소속되지 않은 자는 출입할 수 없다]' 11자가 걸려 있다. 『내각선사일록內閣繕寫日錄』, 1797년 6월 28일

 

 

 

규장각은 영첨정領籖廳에서 떨어져 잇으며 나란히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푸른 글씨로 '규장각 학사지서奎章閣 學士之署'가 걸려 있고, 바깥 기둥에는 분자粉字로 쓴 수교受敎 현판 '수대신문형 비선생부득승당雖大官文衡 非先生毋得升堂 [비록 대신과 대제학이라도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12자와 금자金字로 쓴 수교 현판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4자가 있다. 『내각선사일록內閣繕寫日錄』, 1797년 윤6월 초2일

 

 

 

 

 

 

규장각학사지서 현판

奎章閣學士之署 懸板

정조 어제, 김종수 글씨

조선, 18세기 후반

 

규장각 관원인 각신閣臣의 근무처에 걸었던 현판이다. 정조는 규장각 학사의 관청, 즉 '규장각학사지서'라는 이름을 짓고 현판을 만들 때 형태까지 상세히 지시하여 규장각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규장각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기본 기능 외에도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을 고심하고 정조와 경연을 통해 교류하는 등 왕의 보좌기관 역할을 했다.

 

 

 

 

 

 

 

 

 

1. 춘당대에서 문무과 시험을

    실시하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

臨御春塘臺親試文武科後諸臣聯句 懸板

정조 어제 등

조선, 1792년 (정조 16)

 

정조가 창덕궁 후원 춘당대에서 문무과 시험을 실시하고 신하와 함께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시는 시험 후에 거행한 활쏘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시를 통해 활쏘기가 다툼이 아니라 덕을 확인하고 왕과 신하가 화목을 다지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춘당대에서는 과거 시험, 활쏘기, 군사훈련, 경연 등 왕과 신하가 화합하는 다양한 행사가 행해졌다.

 

 

 

 

 

 

2. 경이물훼첩 중 명종 때

    서총대에서 행한

    문무과 시험을 그린 그림

敬而勿毁帖 中 明廟朝瑞悤臺試藝圖

조선, 19세기

 

조선 왕실의 역대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첩으로, 창덕궁 후원 서총대瑞悤臺에서 행한 문무과 시험 장면을 그린 그림이 실려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왕과 신하가 참여했던 행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서총대는 과거 시험, 활쏘기 등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후원 공간이 개편되면서 서총대의 역할은 점차 춘당대春塘臺로 옮겨졌다.

 

 

 

 

 

 

3. 갱재축

賡載軸

조선

 

정조와 신하가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지은 시와 세심대에 올라 지은 시를 수록한 책이다. 조선의 왕과 신하는 나라에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른 후 이를 기념하는 시를 함께 지어 공통된 지향점을 확인했다. 정조는 왕실 가족의 내밀한 공간인 후원 깊은 곳에 신하를 초대하고, 아버지를 떠올리는 세심대에 신하와 함께 올라 시를 짓고 즐기며 친밀함을 높였다.

 

 

 

 

 

 

4. 연사례를 행한 후

    지은 시를 새긴 현판

燕射賡載歌 懸板

정조 어제 등, 장세경 글씨

조선, 1783년 (정조 7)

 

정조가 신하와 잔치하며 활을 쏘는 의례인 연사례燕射禮의 예행연습을 한 뒤 지은 시와 신하의 화답시를 새긴 현판이다. 활쏘기는 덕을 확인하고 예를 연마하는 행위로 왕과 신하가 서로 화합할 때 유용했다. 단순히 활을 잘 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다름이 군자답다고 했다.

 

 

 

 

 

 

5. 세심대에 올라

    지은 시를 새긴 현판

登洗心臺賞花口占 懸板

정조 어제, 이만수 글씨 추정

조선, 1791년 (정조 15)

 

정조가 신하와 세심대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연로한 신하가 내년에도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세심대는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운 때 처음 염두에 두었던 장소이나 사당은 다른 곳에 세워졌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심대에서 아버지를 여읜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이때 신하와 함께하며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해기사계첩

己亥耆社契帖

조선, 1719 - 1720년 (숙종 45 - 46)

개인 소장

국보

 

숙종이 59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갔던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첩이다. 행사 장면 중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에 숙종이 참여한 잔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잔치 후기를 남긴 김유金 (1653 - 1719년)의 글을 통해 숙종이 나이든 신하를 예우하고자 베푼 잔치에서 왕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궁궐에 걸려 있는 옛 현판

Ancient Hanging Boards at Royal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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