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 ㅡ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14)]
해동 용궁사
용궁사 입구
02하8467
투어지(TOURZY) 화이팅!
2021. 9. 1
원희룡
해동용궁사 입구
海東龍宮寺
시랑대 비빔밥
용궁사 앞에서 미역을 팔고 있는 할머니
十二支像(십이지상)
해동 용궁사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산 이름을 백운산, 절 이름을 백운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 후 구담사로 불리다가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수되면서 용궁사로 바뀌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 용황각, 칠성각, 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11m의 높이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 정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는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관음전 기둥에 쓴 글귀(주련)에는 근대 서화가이자 고종의 사진가였던 해강 김규진의 글씨가 남아 있다. 내부에는 옥석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했다. 시주자 명단에는 옛 구담사에 시주한 대왕대비 조씨 등의 이름이 있어 왕실의 후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조각한 아름다운 용궁사의 지질유산들
해동 용궁사 지질명소는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자 관광지로서 주변에서는 공룡이 살던 시대인 백악기의 마그마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암석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의 암석들은 아래와 같은 다양한 지질학적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에는 국립수산과학관, 시랑대 등 연계 인프라도 풍부해 지질, 역사, 생태, 문화유산을 아우르는 지질탐방로가 개발되어 있다.
해양 돌개구멍
용궁사 해안가에는 파도에 의해 침식된 편평한 파식대지가 나타나고, 파식대지 위에는 공룡발자국과 유사한 둥근 모양의 작은 웅덩이들이 잇다. 그러나 이 웅덩이들은 파도에 회전하는 자갈들로 인해 암석이 침식된 것으로 해양 돌개구멍이라 불린다.
체계적 절리군
용궁사 해안가의 암석들은 두부를 썰어 놓은 것처럼 한 방향으로 우세한 균열(절리)들이 있다. 이처럼 특정 방향으로 잘 발달하는 균열들은 체계적 절리군이라 불린다. 균열들은 암석의 형성 이후 주변에서 암석에 가해진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대로 이러한 균열들로부터 방향성을 측정하면 과거 용궁사 주변의 암석에 가해진 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포유암
용궁사 해안가의 암석들은 대체로 밝은 색을 띤다. 그러나 밝은색 암석 속에는 어두운 색을 띠는 것들이 관찰된다. 이렇게 특정 암석 속에 들어 있는 전혀 다른 성분의 암석을 총칭해 포유암이라 부른다. 포유암의 형태와 성분은 다양할 수 있다.
타포니
용궁사 내 돌탑공원 주변의 암석 표면에서는 벌집처럼 생긴 크고 작은 구멍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풍화질을 타포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타포니의 성인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염풍화작용이나 습윤건조의 반복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물리화학적 풍화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질공원이란?
지질공원(Geopark)은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과 동식물의 터전이 되는 지질과 경관(지형)을 보존하고자 만든 제도입니다. 지질학적 중요성과 생태, 역사, 문화자원이 어우러져 주민 스스로 보전하고 교육, 관광사업으로 활용하는 지질공원에는 참여하는 즐거움과 함께하는 배움으로 일상 속 쉼터가 되는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산의 고유한 멋과 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부산국가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도전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기장군 관광안내
학업성취
浮屠塔
海東龍宮寺 事蹟碑
오호라! 靑丘國의 東南端 萬境蒼波 굽어보는 奇巖 속에 신령한 터전이 잇고, 그 속에 아름다운 사원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海東 龍宮寺이다. 뒤는 山이요 앞은 푸른바다로 海東 제일 가는 觀音 도량이며 放生 도량이다. 또 慈悲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은 항시 바닷가 외로운 곳 (海岸孤絶處)에 상주하시며 龍을 타고, 化現하신다 하였다. 그래서 해동 용궁사는 한국의 三大 觀音聖地의 한 곳이며 民族의 영산(靈山)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을 타고 남으로 흘러 이곳에 멈추어서니 天下에 이런 도량이 또 있을까. 1376년 공민왕의 王師였던 懶翁和尙이 일찍이 이 터에 토굴을 짓고 수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壬辰倭亂을 겪으면서 戰火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雲岡和尙이 堂宇를 다시 짓고 普門寺로 復元하니 法香의 연기와 讀經의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정암스님(晸庵)이 주석하시면서 관음성지로 복원할 것을 서원하시고 기도발원 한 즉 회향일(回向日)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친견하시고 산 이름을 보타산(普陀山)으로 하고 절 이름을 해동 용궁사(海東 龍宮寺)로 개칭(改稱)하게 되었다. 일명 구룡사(龜龍寺)라고도 한다. 참으로 묘하고 묘한 일이로다. 江原道에 있는 낙산사 홍련암은 신라 義湘大師께서 七日七夜 기도 중에 觀音鳥를 親見하시고 紅蓮庵을 건립하셨고, 海東 龍宮寺는 晸庵 스님께서 기룡관음(騎龍觀音)을 친견하시고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셨으니 시간은 천년이 지나고 지역은 南北으로 달라도 <時異千年地域南北> 간절한 정성과 불보살님의 가피력은 동서고금이 어찌 다를 수 잇으리오. 오늘도 世界 各國에서 수 많은 참배객이 雲集해 오는 것은 부처님의 法香이 너무도 크고 참되기 때문이다. 朝鮮朝 영조 때 (1733년)에 이조참의로 있던 權樀은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어 이곳에 왔다가 풍광에 매료되어 세월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뒷날 다시 한양으로 가면서 너무 아쉬워하며 시를 지으니 귀양지가 도리어 蓬萊山 근처이니 (봉래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 사람은 본래 이조의 관리로 있다 왔다네, 석자(三字)의 붉은 글씨 푸른 벽에 선명하니 千年토록 시랑대에 머물리라 <謫居猶得近蓬萊人者天曹 貳席三字丹書 明翠壁千秋留作侍郞臺> 또 대문호인 春園 李光洙 선생도 일찍이 海東 龍宮寺를 신선의 세계(仙境)로 찬탄하셨다. 바다도 좋다하고 靑山도 좋다거늘 바다와 청산이 한곳에 뫼단말가. 하물며 淸風明月있으니 여기 곧 仙境인가 하노라. 위 두 시에서도 보다시피 해동 용궁사를 신선의 세계와 같다고 하셨으니 신령한 땅에 어찌 신령한 기운이 없겠는가. 이 도량에 와서 기도를 하면 신령한 기운을 받고 한 가지 소원을 꼭 이룬다는 영험 때문에 많은 佛子님이 이 도량을 찾고 있다. 海東 龍宮寺가 지금처럼 國內外에 이름난 名刹이 되기까지는 晸庵 스님의 피나는 노력과 지극한 誓願이 있기 때문이었다. 海東 龍宮寺의 事蹟을 대략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77년에 晸庵和尙께서 이 도량에 오셨으나, 寺勢는 너무도 貧寒하여 朝飯夕粥하고 晝耕夜禪하는 형편이었다. 스님께서는 이 도량을 海東 第一觀音聖地로 복원할 것을 誓願하시고 기도정진하시니 至誠祈禱면 何事不成이리요. 1982年 손수 도로를 닦으며 百八 돌계단을 쌓고 半月橋를 놓으셨다. 1989年 송정 유치원 설립, 1990年에는 三十三尺의 觀音大佛 奉安, 1991年 四獅子 三層 石塔을 봉안, 財團法人 海東佛敎振興院 설립, 2007年 포대화상 봉안, 2008年 4억 원 출자하여 晸庵奬學財團 설립, 같은 해 3월 中國少林寺와 姉妹結緣 行事, 2009年 放生터 紅龍橋 가설, 2010年 제3주차장 건설, 2011年 海東禪院 및 陽明堂 요사채 준공, 또 許南植 釜山市長, 崔賢乭 기장군수님의 도움으로 海東 龍宮寺의 최대 숙원사업인 進入道路를 정식 개통했다. (6년 소요), 2012년 제4주차장 완공, 민속박물관 新築, 또 사찰 부지 국유재산 千餘 坪 매입, 선원길 포장 완공 등 수 많은 大小 불사를 하였으며 현재 한국 최대 統一大佛 조성 불사를 진행 중에 있다. 이렇듯 큰 불사가 있기까지 方興植 고문님의 노고가 많았다. 海東 龍宮寺는 전체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손댈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도량불사를 추진하다 보니 그린벨트법 위반 혐의로 검찰과 경찰로부터 조사를 당한 것이 부지기수이며, 심지어는 구속을 당하면서도 도량불사를 계속하셨으니, 그 노심초사 힘든 역경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도다. 참으로 거룩하신 大中興祖이시다. 晸庵和尙은 忠南 鷄龍山 新都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儒家의 학문을 익혔다. 佛家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法住寺의 月山禪師를 만남으로 부터이다. 나이 열아홉이 되자 드디어 智異山 華嚴寺로 출가하여 導光禪師를 은사로 득도하셨으니 佛名은 宗基요 法號는 晸庵이시다. 스님은 항상 겸손과 하심으로 體를 삼으시고, 노력과 실천으로 用을 삼아 정진하셨다. 오늘을 사는 世人들은 괴롭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苦海衆生> 있다. 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고자 <離苦得樂>한다면 佛菩薩 님의 가피력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오직 佛心을 간절히 가지는 것이야말로 피안으로 가는 위대한 방편(方便)이라 하셨다. 앞으로 永劫토록 苦海의 慈航인이 도량에 오셔서 모든 사람이 괴로움을 여의고 소원을 이루는 大道場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頌曰 萬古蒼蒼無邊海 [만고창창무변해] 옛날 아주 멀고 먼 아득하고 끝없는 바다
一朝光明遍照天 [일조광명변조천] 하루아침 광명이 아침하늘에 두루 비추네
三佛入定滅海波 [삼불입정멸해파] 삼불이 선정에 드시니 바다의 파도가 잔잔해지네
衆生朝誠暮福地 [중생조성모복지] 중생이 아침에 치성드리니 저녁엔 선경(仙境)이네
海東龍宮寺重創主晸宗基大和尙功蹟碑銘
菩提達磨大師
해동 용궁사 역사
옛날부터 숱한 신비와 변화를 간직하고 인류와 역사를 함께 해온 바다!
잔잔함의 평화로움이 있는가 하면 폭풍우를 동반한 성냄도 있다. 대개의 사찰이 산중(山中)에 있는 것과는 달리 해동 용궁사는 이름 그대로 검푸른 바닷물이 바로 발 아래서 철썩대는 수상법당(水上法堂)이란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무한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은 이런 바닷가 외로운 곳(海岸孤絶處)에 상주하시며 용을 타고 화현하신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이 해안이나 섬에 형성되어 잇으나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해동 용궁사로 한국의 삼대(三大) 관음성지의 한 곳이며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랑을 타고 태백을 줄달음해 태평양을 건너기 전 동해의 최남단에 우뚝 솟아 멈춰 서니 이곳이 곧 해동제일대명지라, 해동 용궁사는 본래 고래 고려 우왕 2년 (1376년)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懶翁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
나옹스님이 법을 구하기 위해 전국토를 해맬 때 현 해동 용궁사 자리에 당도하여 지세를 살펴보니 배산임수(背山臨水) 조성모복지(朝誠募福地) 즉, 뒤는 산이요 앞은 푸른 바다로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에 복을 받는 신령스런 곳이다 하시고 이곳에 토굴을 짓고 고려 때는 봉래산(蓬萊山) 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됐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운강스님(雲岡和尙)이 보문사로 중창했고, 그 후 여러 스님이 거쳐 오셨으며 1970년대 초 정암화상(晸庵和尙)이 주석하면서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서원(誓願)하고 기도정진(祈禱精進)한 즉, 회향일 몽중에 백의 관세음보살님이 용을 타고 승천하신 것을 친견하시고 산 이름을 보타산(普陀山), 절 이름을 해동 용궁사(海東 龍宮寺)로 개칭하게 되었다.
앗 돌하르방이~~
데이트 하는 커플
❝너의 과거를 알고 싶거든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너의 미래를 알고 싶거든
네가 지금하고 있는 것을 보아라❞
이 몸이 어디서 왔는가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2016. 3. 3
해동 용궁사 일주문
觀音聖地
일주문 기둥 ㅡ 용이 감고 있다
百八 장수계단
내가 이 세상에 올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죽어서는 어느 곳으로 가는 고!
재산도 벼슬도 모두 놓아두고
오직 지은 업을 따라 갈 뿐이네
법구경~에서
16나한상(十六羅漢像)과 토끼와 거북상, 부처상, 동자상
萬福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평화의 불
해와 달이 다 하고
중생업이 다 해도
우리는 둘이 아닌
不二의 진리
이 도량 밝게 비춘 평화의 불
남과 북이 하나 되길 서원하오며,
무명 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평화, 열반 이루도록 발원하나이다.
선묵혜자 스님이
부처님 탄생 성지 룸비니를
밝히던 평화의 불을 채화하여
3만리 이운의 길을 통해
한국으로 모셔와 오늘
주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며
해동 용궁사에 평화의 불을
밝힌다.
불기 2561년 7월 7일
대한불교조계종 해동 용궁사 주지 정암
선묵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53기도도량 순례
해동 용궁사 대웅보전 현판
광명전(光明殿)
해동 용궁사 광명전 와불
대웅전 불사 방명록
팔상도 :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여덟 폭의 그림
1. 도솔래의생
잠을 자는 마야부인의 꿈 속으로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나타나 부처님의 잉태를 알리다.
2. 비람강생상
룸비니 동산을 지나는 중에 태기를 느끼신 마야부인은 무우수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부처님을 낳으셨다.
이 때 하늘에서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서기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키니 부처님은 일곱 걸음을 옮기신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우주 만물의 이치가 오직 내 마음에 달렸다)"라고 외치셨다.
3. 사문유관상
동서남북 사문 밖을 순시하던 중에 늙고 병든 자와 장례와 수도하는 이를 보고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신 후 출가를 결심하다.
4. 유성출가상
출가를 막기 위한 부왕의 수없는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마부 찬타카를 데리고 마침내 한 밤을 틈타 출가하시다.
5. 설산고행상
출가한 태자는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도를 구했으나 결국 스스로 깨우치는 길밖에 없음을 알고 설산으로 들어가서 6년간 고행의 길을 걸으신다.
6. 수하항마상
태자의 성도를 방해하려고 마왕 파순은 갖은 술수로 태자를 회유했지만 6년의 고행 뒤 마침내 성도를 이루셨다.
7. 녹원전법상
성도하여 부처가 되신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시니 최초의 설법 즉 "초전법륜"이라 칭한다.
8. 쌍림열반상
석가께서 성도한 지 45년 속세 나이 80이 되는 해에 사리수 숲에 들러 제자들을 불러두고 마지막 설법이자 유훈을 남가신 후 열반에 드시니 팔만사천 모든 사대부중이 모두 슬픔에 잠겼다.
석가불(중앙), 아미타불(왼쪽), 약사불(오른쪽)
여의주(如意珠)와 옴마니반메홈의 옴자가 대웅전 앞에서 부산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옴마니반메홈'의 뜻은
"연꽃처럼 피어나는 덧없는 세상에 변함없는 보주(寶珠)이시여 정결케하여 구원하소서"
용궁사 대웅전 중수시
법당 중건위해 천일기도 하던중에 간밤의 꿈에 큰용과 거북을 보았네
다음날 즉시 땅을 파지 아니하고 하나의 돌도 건들지 않고 열여섯 주추를 놓았네.
미륵불(彌勒佛) 일명 포대화상
미륵불(彌勒佛) 일명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말기(中國 唐代 末期)의 실존 스님(實存 禪僧)으로, 항시 초대(자루)를 메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시면서 세속(世俗)과 어울리며 탁발시주(托鉢施主)를 받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서 포대화상이라 이름지었으며 돌아가신 후(入寂後)에야 그이름이 더욱 유명해지신 분이다.
偈曰 항상 말씀하시기를!
我有一布袋(아유일포대) 나에게 한 포대가 있는데
虛空無罣碍(허공무괘애) 허공조차도 걸림이 없네
展開匯宇宙(전개회우주) 자루를 펴면 우주를 두루고도 남음이 있고
入時觀自在(입시관자재) 오무르면 자재로움을 보노라
이렇듯 스님은 자연과 더불어 행하시고 자연과 더불어 사시다가 서기 916년 3월 명주땅 악림사(岳林寺) 동쪽 반석 위에서 포대자루를 베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후에 대중스님이 자루를열어 보니 한 물품도 없는 빈 자루에 오직 한 글귀의 게송이 있으니,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은 참 미륵불인데
分身千百億(분신천백억) 몸은 천 백 억으로 나뉘었도다
時時示市人(시시시시인) 항상 세인들과 같이 있었건만
市人我不識(세인아불식) 세상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네
사람들은 이 게송을 보고 그제서야 그 분이 참 미륵불의 화신(化身)임을 알고 예배 공양하였으며 지극 정성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신다 하여 만덕불(萬德佛)이라고도 합니다. 여기 모신 포대화상은 2006년 11월 중국 태주(泰州)에서 조성하여 모셔왔으며 한국에서 제일 큰 불상입니다.
불기 2551년(2007년) 3월 28일 해동 용궁사 주지 정암(晸庵) 근식(謹識)
해동 용궁사 원통문
甘露藥水
迎月堂
돼지의 엉덩이와 여인의 엉덩이
해동 용궁사 황금돼지
海印三昧
雙香樹佛 ㅡ 藥師如來佛
인생(人生)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궂은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던가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활짝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고서 성불(成佛)하시겠다고 원력(願力)을 세우시고 지금도 지옥에 계시는 보살
학업성취불
득남불(得男佛), 포대화상(布袋和尙)
일주문 현판
앞면은 해동 용궁사(海東 龍宮寺), 뒷면은 자항문(慈航門)
바다도 좋다하고 靑山도 좋다거늘
바다와 靑山이 한 곳에 뫼단 말가
하물며 淸風明月 있으니
여기곳 仙境인가 하노라
춘원 이광수
용궁사의 밤
1999년 5월 3일 작사 정암스님 작곡 배신영 노래 최유나
파도소리 철석철석 밀려오는 용궁사에
수도승의 염불인가 용녀의 하소연인가
백팔계단 석불전에 슬피우는 여인은
꿈 같은 첫사랑도 떠나버린 그 사랑도
속세에 다 묻어놓고 백일정성 올리는데
아~ 아~ 용궁사에 풍경소리 나를 울리네
https://www.youtube.com/watch?v=c4lNoD6CCDg
申 잔나비띠
寅 범띠
子 쥐띠
十二支像(십이지상)
子자, 丑축, 寅인, 卯묘, 辰진, 巳사, 午오, 未미, 申신, 酉유, 戌술, 亥해
십이지(十二支)는 동양철학의 근본이며 우주의 진리(眞理)입니다. 또한 나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이기도 합니다. 현(現) 십이지석상은 중국에서 모셔왓으며 고대(古代) 능묘호석(陵墓護石)으로 추정됩니다. 옛날부터 절에서는 큰 불사(佛事)를 할 때 잡귀의 침범을 막아주고 인간의 오복(五福)을 빌어주는 뜻으로 십이지그림(佛書)은 잇었으나 실질적으로 인신수면(人身獸面)의 석상을 봉안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며 오직 해동 용궁사 한 곳 뿐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 순간 너부도 큰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반성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면 재앙은 멀어지고 복(福)은 가까워 질 것입니다.
부디 해동 용궁사에 오셔서 많은 공덕(功德)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불기 2547年 10月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부산역으로
부산 차이나타운에서 식사 후 응원가 제창
관우(關羽)
관우(? ~ 219년 12월*음력))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운장(雲長)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張飛(장비)
장비(? ~ 221년 6월(음력))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탁군(涿郡) 사람이다. 형제같은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이름을 떨쳤다. 무용이 뛰어나서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이라 불렸다.
패왕별희
우희(虞姬, 생년월 미상)
항우와의 비극적인 로맨스로 잘 알려진 항우의 연인으로, 그 아름다움과 항우에 대한 충심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결전에서 항우의 군대가 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패색이 짙어지자 우희는 자신이 항우의 짐이 될 것을 우려하여 가결한다.
漢兵己略地 한나라 병사가 이미 모든 땅을 차지했고
四面楚歌聲 사방에서 들리는 것은 초나라 노랫소리
大王義氣盡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賤妾何聊生 천첩이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부산역 광장
부산역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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