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한국근대문학관] 02

드무2 2023. 6. 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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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관] 02

 

 

 

1894 ~ 1910

신소설과 역사전기물로

이야기의 새 장을 열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 고전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소설이 등장한다. 신소설과 역사전기물이 그것이다.

신소설은 고소설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근대소설의 형식을 실험한 대표적인 소설 양식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 (1906)가 그 첫 번째 사례이다. 이해조 역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신소설 작가이다. 신소설은 전통 고전소설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고전소설과 달리 사건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시간을 거슬러 서술한다거나 언문일치에 가까운 묘사체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시도했다. 또 이를 통해 당시의 현실적 문제를 담아내었다.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1908)과 이해조의 「자유종」 (1910)은 연설과 토론 형식을 활용한 신소설로 계몽적 내용과 민족국가 수립, 세태 비판을 효과적으로 담아 내었다.

역사전기물은 전통소설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이 시기 대표적 소설 양식이다. 우리나라가 외세 열강의 침략을 받던 시기였으므로 민족의 위기를 구한 영웅이나 외국의 사례를 소설로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알리려 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역사전기물의 창작자와 번역자들은 이를 통해 민중을 각성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1908), 「수군제일위인 이순신」 (1908)과 잔다르크를 다룬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1907), 베트남과 스위스의 역사를 다룬 「월남망국사」 (1906)나 「서사건국지」 (1907) 등이 대표작이다.

 

 

 

 

 

 

신소설 ㅡ 문명개화 Vs 역사전기물 ㅡ 자주독립

신소설은 당시 세태를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양반 비판과 부정부패 고발, 미신타파, 신학문과 신교육 장려, 남녀평등, 조혼 폐지 등을 주제로 삼았다. 형식면에서는 완전한 근대소설은 되지 못했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을 당한 이후에는 통속적 흥미 위주로 흘렀다.

 

주요 작품

「은세계」, 「빈상설」, 「추월색」, 「목단화」

 

 

역사전기물은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맞서 근대 문화에 대한 찬양보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강하게 내세웠다. 이 작품들은 한글과 한자가 섞인 국한문체로 쓰였으며, 묘사가 거의 없어 사실성이 부족했다. 역사전기물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발행금지 처분을 받아 그 생명을 다했다.

 

주요 작품

「을지문덕」, 「강감찬전」, 「이태리건국삼걸전

 

 

 

"신소설과 역사전기물, 최초의 모습을 감상해보세요"

 

「구마검 (驅魔劒)」

이해조, 『제국신문』 1908. 4. 25. ~ 7. 23. 연재

대한서림 (1908) 단행본 출간

 

이해조가 1908년 순한글신문 『제국신문』에 발표한 신소설. 제목은 '귀신을 쫓는 칼'이란 뜻이다. 여기에서의 '귀신'은 아픈 아이를 위해 병원에 가는 대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나 자식을 얻기 위해 조상의 무덤을 옮기는 행위와 같은 미신과 미신을 숭배하는 일체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이러한 미신숭배 비판을 통해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했다.

 

 

 

 

 

 

대안동1) 네거리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한참 내려가면 베전2) 병문3) 큰길이라. 좌우에 저자하는 사람들4)이 조석으로5)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여 인절미를 굴려도 검불6) 하나 아니 묻을 것 같으나, 그 많은 사람, 그 많은 마소7)가 밟고 오고 밟고 가면 몇 시 아니되어 길바닥이 도로 지저분하여져서 바람이 기척만 있어도8) 행인이 눈을 뜰 수가 없는데, 바람도 여러 가지라. 삼사월 길고 긴 날 꽃 재촉하는 동풍도 있고, 오뉴월 삼복 중에 비 장만하는 남풍도 있고, 팔월 생량할 때9) 서리 오려는 동북풍과 시월 동짓달에 눈 몰아오는 북새10)도 있으니, 이 여러 가지 바람은 절기를 따라 으레 불고, 으레 그치는 고로, 사람들이 부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아니하고 그치는 것을 보아도 희한히 여길 것이 없지마는, 이날 베전 병문에서 불던 바람은 동풍도 아니요 남풍도 아니요 서풍, 북풍이 모두 아니요, 어디로조차 오는 방면이 없이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먼지가 솔솔솔 일어나더니, 뱅뱅뱅 돌아가며 점점 언저리11)가 커져 도래멍석12)만 하여 정신차려 볼 수가 없이 팽팽 돌며, 자리를 뚝 떨어지며 어떠한 사람 하나를 겹겹이 싸고 돌아가니,···

 

「구마검」의 시작 부분

 

 

1)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2) 육의전의 하나로 베를 팔던 시전. 3)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나 그 주변의 길가. 4)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5) 아침저녁으로. 6) 마른풀이나 가랑잎, 지푸라기 따위를 모두 이르는 말. 7) 말과 소. 8)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9) 가을이 되어 시원해졋을 때. 10) 북풍. 11) 가장자리. 12) 짚을 엮어 만든 방석.

 

 

 

"신소설과 역사전기물, 최초의 모습을 감상해보세요"

 

「수군제일위인 (水軍第一偉人) 이순신 (李舜臣)」

신채호, 『대한매일신보』 (국한문본) 1908. 5. 2. ~ 8. 18.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다룬 역사전기소설. 저자인 단재 신채호는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이순신의 모습을 크게 강조했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반 (半)식민지로 전락한 현실에서 이순신과 같이 나라를 위해 노력할 것과 이순신과 같은 민족적 영웅이 나타나기를 갈망했다. 국한문본과 순한글본 두 종류가 있다.

 

 

 

오호라! 섬나라 별다른 종족1)이 대대로 우리나라에 피맺힌 적이 되어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독살스럽게 쏘아보아, 이런 오랜 원수를 갚기로 원한이 뼈에 깊이 맺혀, 한국 4천년 넘는 역사에 외국이 침략한 것을 세어보면, 왜구2)라는 두 글자가 거의 열에 아홉을 차지하였다. 그 때문에 변방에 봉화가 오르고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편안히 잘 수 있는 날이 드물었다. 왜구가 쳐들어 오면 놀라 달아나고 물러가면 좋아하여, 주먹과 힘으로 싸운 적이 없이 한 때의 고식지계3)로 대처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다. 그리하여 바닷가 각 지방에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끊이지 않았으니 단군 자손의 치욕이 극도로 심하였다. ···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의 시작 부분

 

1) 일본을 가리킨다. 2) 13 ~ 16세기 중국과 우리나라를 노략질하던 일본 해적. 3)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임시 방편의 대책.

 

 

 

 

 

 

 

 

 

서사건국지 瑞士建國誌

정철 (鄭哲) 저, 박은식 (朴殷植) 역

대한매일신보사 1907

 

 

 

 

 

 

 

 

 

월남망국사 越南亡國史

소남자 (술), 양계초 (찬) / 현채 역

1907 [1906 첫 발표]

 

 

 

 

 

 

 

 

 

자유종 自由鐘

이해조 (李海朝) 광학서포

1910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혈의 누 血의 淚

이인직 (李人稙) 최초의 신소설

광학서포

1908 [1906 첫 발표] 아단문고 소장

 

 

 

 

 

 

 

 

 

이순신 전 李舜臣 傳

신채호 (申采浩)

1910 [1908 첫 발표]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

 

 

 

 

 

 

금수회의록 禽獸會議錄

안국선 (安國善)

황성서적업조합 1908

 

 

 

 

 

 

한국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옥련이 조선을 떠나다❞

 

「혈의 누」란?

이인직이 천도교 신문 <만세보>에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연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작품이다. 일본군을 선하게 묘사하는 등 친일적 내용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① 청일전쟁으로 고아가 된 옥련 (7세)이 일본군 의사의 양녀가 되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

 

 

 

② 일본 양어머니의 구박으로 가출한 옥련 (11세)이 미국으로 유학가는 구완서와 만나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③ 옥련 (16세)은 미국에서 아버지와 극적으로 만나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하며 구완서와 결혼을 약속한다.

 

 

 

 

 

 

 

1894 ~ 1910

왕조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열망 속에서

신문화의

씨앗을 뿌리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근대국가 건설의 기회가 도래하는 이 시기는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민중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 9동학농민운동)과 지배계층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1894년 동시에 일어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근대문학은 이러한 사대상황을 반영하며 등장하였다. 새롭게 전래된 근대문명 속에서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문학도 출현하였다.

이 시기 우리 문학은 근대문학의 형태를 드러내면서도 옛 체제의 특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내용상으로는 근대적 계몽을 강조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였지만 옛 문학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은 오늘날의 시, 소설, 비평과 같은 '문학' 개념이 정착된 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문 표기체계에서 벗어나 한글을 중심으로 한 국문운동과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 시도되었다. 아울러 신문과 잡지의 창간, 근대적 인쇄출판과 교육기관의 등장은 근대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전통적 가사체를 이어받아 자주독립을 노래한 개화 계몽가사, 문명개화를 노래한 창가, 근대시 형식을 실험한 신체시, 자주독립을 강조하였으나 국한문체를 유지한 역사전기소설, 근대소설 양식을 실험하며 문명개화를 역설한 신소설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최남선, 『경부철도노래』, 신문관, 1908.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汽笛) 소리에

남대문(南大門)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內外親疎) 다 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關王廟)와 연화봉(蓮花峰) 둘러보는 중

어느덧에 용산 역(龍山驛) 다다랐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이천여 명(二千餘名) 일인(日人)이 여기 산다네

 

서관(西關) 가는 경의선(京義線) 예서 갈려서

일산(一山) 수색(水色) 지나서 내려간다오

옆에 보는 푸른 물 용산(龍山) 나루니

경상(慶尙) 강원(江原) 웃물 배 뫼는 곳일세

 

독서당(讀書堂)의 폐(廢)한 터(攄) 조상하면서

강(江)에 비낀 쇠다리 건너 나오니

노량진 역(鷺梁津驛) 지나서 게서부터는

한성(漢城) 지경(地境) 다하고 과천(果川) 땅이라

 

호호 양양(浩浩洋洋) 흐르는 한강(漢江) 물소리

아직까지 귓속에 처져 있거늘

어느 틈에 영등포(永登浦) 이르러서는

인천 차(仁川車)와 부산 차(釜山車) 서로 갈리네

 

예서부터 인천(仁川)이 오십여 리(五十餘里)니

오류(梧柳) 소사(素砂) 부평 역(富平驛) 지나간다네

이다음에 틈을 타 다시 갈 차로

이번에는 직로로 부산(釜山) 가려네

 

관악산(冠岳山)의 갠 경(景) 우러러보고

영랑성(永郞城)의 묵은 터(攄) 바라보면서

잠시 동안 시흥 역(始興驛) 거쳐 가지고

날개 있어 나는 듯 안양(安養) 이르러

 

실과 같은 안양(安養) 내 옆에 끼고서

다다르니 수원 역(水原驛) 여기로구나

이전에는 유수도(留守道) 지금 관찰부(觀察府)

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觀察使) 있는 곳이라

 

경개 이름 다 좋고 서호(西湖) 항미정(杭眉亭)

그 옆에는 농학교(農學校) 농사(農事) 시험장(試驗場)

마음으로 화영전(華寧殿) 첨배(瞻拜)한 후에

대성인의 큰 효성 감읍(感泣)하도다

 

달 바라는 나각(螺閣)은 어찌 되었나

물 구경터 화홍문(華虹門) 변이 없는지

운담(雲淡) 풍경(風輕) 때맞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양어(養魚) 상연(賞蓮) 겸(兼)하는 만석거(萬石渠)로다

 

광교산(光敎山)을 옆 하고 떠나 나가서

잠시간에 병점 역(餠店驛) 이르렀도다

북(北)에 뵈는 솔밭은 융릉(隆陵) 뫼신 데

이름 높은 대황교(大皇橋) 거기 있다오

 

이다음의 정거장 오미 역(烏山驛)이니

온갖 곡식 모이는 큰 장거리(塲巨里)요

그다음의 정거장 진위 역(振威驛)이니

물새(水禽) 사냥하기에 좋은 터이라

 

서정리(西井里)를 지나서 평택(平澤) 이르니

물은 늦고 산(山) 낮아 들만 넓도다

묘(妙)한 경개 좋은 土産 비록 없으나

쌀(米) 소출(所出)은 다른 데 당하리로다

 

게서 떠나 성환 역(成歡驛) 다다라서는

해가 벌써 아침때 훨씬 겨웠네

오십(五十) 년 전 일청전(日淸戰) 생각해 보니

여기 오매 옛일이 더욱 새로위

 

일본 사람 저희들 지저귀면서

그때 일이 쾌하다 서로 일컬어

얼굴마다 기쁜 빛 가득하여서

일본(日本) 남자(男子) 대화혼(大和魂) 자랑하는데

 

그중에도 한 노파(一老婆) 눈물 씻으며

그때 통에 외아들 잃어버리고

늙은 신세 표령(飄零)해 이 꼴이라고

떨어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니

 

말말마다 한(恨)이요 설움이어니

외국 사람 나까지 감동 되거늘

쓸데없는 남의 공 자랑하기에

저희 동포(同胞) 참상(慘狀)을 위로도 없네

 

척수루(滌愁樓)의 빈 터(空攄)는 볼 수 있으나

월봉산(月峰山)의 싸움터(古戰塲) 자취 없도다

안성천(安城川)의 다리를 얼른 건너서

순식간에 직산 역(稷山驛) 와서 닿았네

 

백제 국(百濟國)의 첫 도읍(初都邑) 위례성(慰禮城) 터는

성암산(聖巖山)에 있으니 예서 삼십 리(三十里)

천오동(天奧洞)에 놓았던 구리 기둥은

돌 주초(石柱礎)만 두 개가 남았다더라

 

이편저편 보는 중 모르는 틈에

어느덧에 천안 역(天安驛) 다다랐도다

온양 온천(溫陽溫泉) 여기서 삼십 리(三十里)이니

목욕하러 가는 이 많이 내리네

 

인력거(人力車)와 교자(轎子)가 준비해 있어

가고 옴에 조금도 어려움 없고

정결(精潔)하게 꾸며 놓은 여관(旅館) 있으나

이는 대개 일본인(日本人) 영업이라니

 

이런 일은 아무리 적다 하여도

동포(同胞) 생업(生業) 쇠함(凋殘)함을 가히 알지라

그네들이 얼마나 잘하였으면

이것 하나 보전(保全)치 못하게 되오

 

백제(百濟) 때에 이 지명(地名) 탕정(湯井)이라니

그때부터 안 것이 분명하도다

수천 년(數千年) 간 전하던 이러한 것을

남을 주고 객(客) 되니 아프지 않소

 

소정리(小井里)와 전의 역(全義驛) 차례로 지나

갈거리(葛居里)를 거쳐서 조치원(鳥致院) 오니

낙영산(落影山)의 그림자 멀리 바라고

화양 서원(華陽書院) 옛일을 생각하도다

 

내판 역(內板驛)을 지나서 미호천(尾湖川) 건너

몇 십(十) 분이 안 되어 부강 역(芙江驛)이니

충청(忠淸) 일도(一道) 윤내는 금강(錦江) 가이라

쌀 소금의 장터로 유명한 데요

 

사십 리(四十里)를 격조(隔阻)한 공주(公州) 고을은

충청남도(忠淸南道) 관찰사(觀察使) 있는 곳이니

내포內浦 일판(一局) 너른 뜰 끼고 앉아서

이 근처의 상업상(商業上) 중심점(中心點)이오

 

계룡산(鷄龍山)의 높은 봉(峰) 하늘에 닿으니

아(我) 태조(太祖) 집 지으신 고적(古蹟) 있으며

금강루(錦江樓)의 좋은 경(景) 물에 비치니

옛 선배의 지은 글 많이 전(傳)하네

 

마미(馬尾) 신탄(新灘) 지나서 태전(太田) 이르니

목포(木浦) 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

오십오 자(五十五尺) 돌미륵(彌勒) 은진(恩津)에 있어

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오

 

증약(增若) 지나 옥천 역(沃川驛) 다다라서는

해가 벌써 공중에 당두하였네

마니산성(摩尼山城) 남은 터 바라보는 중

그동안에 이원 역(伊院驛) 이르렀도다

 

속리사(俗離寺)가 여기서 삼십 리(三十里)라니

한번 가서 티끌 마음 씻을 것이오

운연(韻連) 죽던 양산(陽山)이 육십 리(六十里)라니

쾌남아(快男兒)의 매운 혼 조상하리라

 

고당포(高唐浦)를 바라며 심천(深川) 이르니

크지 않은 폭포(瀑布)나 눈에 띄고

그다음에 영동 역(永同驛) 다다라서는

경부(京釜) 사이 折半을 온 셈이라

 

이십사 번(二十四番) 화신풍(花信風) 불어 올 때에

때 좋다고 꽃피는 금성산(錦城山)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 하여

꽃다운(芳) 혼(魂) 스러진(消散) 낙화대(落花臺)로다

 

미륵(彌勤) 황간(黃澗) 두 역을 바삐 지나서

추풍령(秋風嶺)의 이마에 올라타도다

경부선(京釜線) 중(中)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

예서부터 남편을 영남(嶺南)이라오

 

얼마 안 가 김천 역(金泉驛) 다다라 보니

이전부터 유명한 큰 장거리라

사통(四通)하고 팔달(八達)한 좋은 덴 고로

이 근처에 짝 없이 굉장하다데

 

그다음의 정거장(停車塲) 금오산(金烏山)이니

이름 있는 도선굴(道詵窟) 있는 곳이라

산 아래에 지었던 길재(吉再) 사당은

지낸 세월 오래다 저리되었네

 

금오산성(金烏山城) 너른 곳 지금 어떠뇨

세 연못과 한 시내 그저 있는지

무릉도원(武陵桃源) 깊은 데 역사(役事) 피하듯

이전부터 그 근처 피란(避亂) 곳이라

 

약목 역(若木驛)을 지나면 왜관 역(倭館驛)이니

낙동강(洛東江)의 배편이 예가 한이요

삼백 년(三百年) 전(前) 당하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일본(日本) 군사(軍士) 수천 명(數千名) 머물던 데라

왜관(倭館) 지나 신동(新洞)에 신동(新洞) 지나면

영남(嶺南) 천지(天地) 제일 큰 대구군(大邱郡)이라

경상북도(慶尙北道) 모든 골 작고 큰 일을

총할(總轄)하는 관찰사(觀察使) 여기 있으니

 

부하(府下) 인구(人口) 도(都) 총합(總合) 사만 오천(四萬五千)에

이천오백(二千二百) 일본인(日本人) 산다 하더라

산 이름은 연귀(連龜)나 거북 못 보고

집 이름은 영귀(詠歸)나 관원 있도다

 

해해(年年)마다 춘추(春秋)로 열리는 장은

우리나라 셋째의 큰 교역(交易)이니

대소(大小) 없이 안 나는 물건(物件)이 없고

원근(遠近) 없이 안 오는 사람이 없네

 

누구누구 가리켜 팔공산(八公山)인지

일곱 고을 너른 터 타고 있으되

수도동(修道洞)의 폭포(瀑布)는 눈이 부시고

동화사(桐華寺)의 쇠북은 귀가 맑도다

 

달성산(達成山)의 그윽한 운치 끼고서

경산군(慶山郡)을 지나서 청도(淸道) 이르니

청덕루(淸德樓)의 불던 적(笛) 소리가 없고

소이서국(小伊西國) 끼친 예(禮) 영자(影子)도 없네

 

성현(省峴) 터널(壁道) 빠져서 유천(楡川) 다다라

용각산(龍角山)을 등지고 밀양(密陽) 이르니

장신동(塲信洞)의 기와집 즐비한 것은

시골 촌에 희한한 경광이러라

 

밀양군(密陽郡)은 영남(嶺南)의 두서넛째니

예전에는 도호부(都藷府) 두었던 데라

상업상(商業上)의 조그만 중심(中心)이 되어

상고(商賈)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네

 

객관(客館) 동편(東便) 영남루(嶺南樓) 좋은 경개는

노는 사람 지팡이 절로 멈추고

만어산(萬魚山)에 나는 돌 쇠북과 같이

두드리면 쟁쟁(錚錚)히 소리 난다네

 

그다음에 있는 역(驛) 삼랑진(三浪津)이니

마산포(馬山浦)로 갈리는 분기점(分岐點)이라

예서부터 마산(馬山)이 백 리(百里) 동안에

여섯 군데 정거장(停車場) 지나간다데

 

작원관(鵲院關)을 찾으며 낙동강(洛東江) 끼고

원동 역(院洞驛)을 지나서 물금(勿禁)에 오니

멀지 않은 임경대(臨鏡臺) 눈앞에 있어

천하(天下) 재자(才子) 고운(孤雲)을 생각하도다

 

통도사(通度寺)가 여기서 육십 리(六十里)인데

석가여래(釋迦如來) 이마 뼈 묻어 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절 으뜸이 되니

천이백칠십 년(千二百七十年) 전(前) 이룩한 배라

 

물금 역(勿禁驛)을 지나면 그다음에는

해륙(海陸) 운수(運輸) 연하는 구포 역(龜浦驛)이라

낙동강(洛東江)의 어귀에 바로 있어서

상업(商業) 번성(繁盛)하기로 유명한 데라

 

수십 분을 지난 후 다시 떠나서

한참 가니 부산진(釜山鎭) 거기로구나

우리나라 수군(水軍)이 있을 때에는

초선(哨船) 두어 요해처(要害處) 방비하더니

 

해외 도적 엿봄이 끊이었는지

남의 힘을 빌려서 방비하는지

해방함(海防艦) 한 척 없이 버려두었고

있는 것은 외국 기(外國旗) 날린 배로다

 

수백 년(數百年) 전(前) 예부터 일인 살던 곳

풍신수길(豊臣秀吉) 군사가 들어올 때에

부산으로 파견(派遣)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혈전(血戰)하던 옛 전장(前塲) 여기 있더라

 

범어사(梵魚寺)란 대찰(大刹)이 예서 오십 리(五十里)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時)에 왜구(倭寇) 십만(十萬)을

의상(義湘)이란 승장(僧將)이 물리치므로

그 정성을 갚으려 세움이라데

 

삼십 리(三十里)를 떨어진 동래 온정(東萊溫井)은

신라(新羅)부터 전하는 옛 우물이라

수 있으면 도상(道上)의 피곤한 것을

한번 가서 씻어서 눅이리로다

 

영가대(永嘉臺)의 달구경 겨를 못 하나

충장단(忠壯壇)의 경배(敬拜)야 어찌 잊으리

초량 역(草梁驛)을 지나면 부산항(釜山港)이니

이 철도의 마지막 역이라 하데

 

부산항(釜山港)은 인천(仁川)의 다음 연 데니

한일(韓日) 사이(間) 무역(貿易)이 주장이 되고

항구(港口)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닿네

 

수입(輸入) 수출(輸出) 총액이 일천여 만 환(一千餘萬圜)

입항(入港) 출항(出港) 선박(船舶)이 일백여 만 톤(一百餘萬噸)

행정(行政) 사무(事務) 처리(處理)는 부윤(府尹)이 하고

물화(物貨) 출입(出入) 감독(監督)은 해관(海關)이 하네

 

일본(日本) 사람 거류민(居留民) 이만 인(二萬人)이니

얼른 보면 일본(日本)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從船)도 일인이 부려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 하네

 

한성(漢城) 남산(南山) 신령(神靈)이 없기 전부터

윤산(輪山) 신령(神靈) 없은 지 벌써 오래니

오늘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강개함도 도리어 어리석도다

 

검숭하게 보이는 저기 절영도(絶影島)

부산항(釜山港)의 목쟁이 쥐고 있으니

아무 데로 보아도 요해지지라

이충무(李忠武)의 사당을 거기 모셨네

 

인천(仁川)까지 여기서 가는 동안이

육십 시간(六十時間) 걸려야 닿는다는데

일본(日本) 마관(馬關)까지는 불과 열 시에

지체 없이 이름을 얻는다 하데

 

슬프도다 동래(東萊)는 동남(東南) 제일 현(第一縣)

부산항(釜山港)은 아국(我國) 중 둘째 큰 항구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게

저렇듯한 심(甚)한 양(樣) 분통하도다

 

우리들도 어느 때 새 기운 나서

곳곳마다 잃은 것 찾아 들이어

우리 장사 우리가 주장해 보고

내 나라 땅 내 것과 같이 보일까

 

오늘 오는 천 리(千里)에 눈 뜨이는 것

처진 언덕 붉은 산 우리 같은 집

어느 때나 내 살림 넉넉하여서

보기 좋게 집 짓고 잘살아 보며

 

식전(食前)부터 밤까지 타고 온 기차

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

어느 때나 우리 힘 굳세게 되어

내 팔뚝을 가지고 굴려 보나

 

이런 생각 저 생각 하려고 보면

한이 없이 뒤 대어 연속 나오니

천 리(千里) 길을 하루(一日)에 다다른(抵達) 것만

기이하게 생각코 그만둡시다

 

 

 

 

 

『소년』 창간호, 신문관,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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