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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99

[남해 가는 길]

[남해 가는 길]    일러스트 = 양진경    남해 가는 길ㅡ 유배시첩 (流配詩帖)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선천 (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윤삼월 젖은 흙길을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화전 (花田)을 만들고 밤에는어머님을 위해 구운몽 (九雲夢)을 엮으며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ㅡ 고두현 (1963 ~)    고두현 시인은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이 시는 시인이 1993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품인데, 남해 노도 (櫓島..

[호수]

[호수]    일러스트 = 김하경   호수 네가 온다는 날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래도 네가 얼른와줘야겠다 바람도 없는데호수가 일렁이는 건바로 그 때문이다. ㅡ 나태주 (1945 ~)     짧지만 여운이 길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움이 크고 넓기 때문일 것이다. 그이가 온다는 기별을 받은 후로 시인의 마음은 가만한 상태로 있지 못한다. 애가 탄다. 조마조마하고, 마음을 졸인다. 시간을 끌지 않고, 지체 없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시인은 이 마음의 상태를 호수에 견준다. 바람이 한 점 없는데도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이 일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편은 우리 마음에 잠자고 있는, 사모하는 마음을 깨운다. 시인은 시 ‘그 집 1′ 에서 “그 집에는 그리움이 ..

[둥둥 걷어붙이고]

[둥둥 걷어붙이고]     일러스트 = 이철원    둥둥 걷어붙이고 둥둥 걷어붙이고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찔레꽃 무더기 속으로아부지 솨아 솨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한가마니 쏟아진 별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어여 둥둥 걷어붙이고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ㅡ 송진권 (1970 ~)    송진권 시인은 충북 옥천 사람이다. 이 시에도 옥천 사람의 성품과 말씨가 잘 배어 있다. ‘둥둥’ 이라는 시어에는 바짓가랑이의 끝부분을 듬성하게 말아 올린 모양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서두르는 의욕도 느껴진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는 무논에 들어가서..

[청송]

[청송]    일러스트 = 김성규   청송 병든 어머니 집에 두고 청송 갔다점곡, 옥산, 길안 사과밭들 지나 청송 갔다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과알들을놓치기만 하며 푸르른 청송 갔다주산지를 오래 걸으며 청송 갔다한밤중 동해를 향해 폭우 속,굽이굽이 태백산맥 넘어 청송 갔다청송 지나 계속 눈 비비며 청송 갔다 ㅡ 이영광 (1965 ~)    이영광 시인은 최근에 펴낸 시집의 ‘시인의 말’ 에서 “나는 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느끼지만 이 봄에도 어느 바람결에나 다시 살아나는 것들이 많다” 고 썼다.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은 현재 시간일 테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 시간일 테다. 그러므로 고성 (古城)과도 같은 옛 시간 속에 있는 옛사람 생각이 난다는 뜻일 것이다. 비록 그리워해도 옛사람은 옛 시간 속에 살 ..

[연애의 법칙]

[연애의 법칙]    일러스트 = 이철원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하얀 발가락으로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 선수처럼 ㅡ 진은영 (1970 ~)    향기가 백 리를 간다는 백리향 잎을 만지던 손가락으로 연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어 만지는, 이 시의 도입부는 감미롭고 아름답다. 그 향기는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의 빛나는 시간에 은은하게 머..

[버들피리]

[버들피리]    일러스트 = 양진경    버들피리 담쟁이덩굴은 집을 에워싸고온통 시퍼렇게 벽에 번지네. 피리 부는 자세로역에 기대앉아 쉬네. 저 주름투성이 늙은 사내,여차저차 꼬불꼬불한 길,그 숱한 곡조로 만면을 덮네. ㅡ 문인수 (1945 ~ 2024)    시인은 집 외벽을 타고 오르는 푸른 담쟁이넝쿨을 바라본다. 두 눈이 찬물로 씻은 듯 시원했을 테다. 담쟁이넝쿨은 집을 빙 온통 둘러싸고 있다. 집은 머잖아 담쟁이창문, 담쟁이처마를 갖게 될 것이다. 이윽고 시인은 그 집에 기대앉아서 쉬고 있는 늙은 사내를 발견한다. 그리고 버들피리 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실제로 늙은 사내를 보았을까. 또 버들피리 소리는 왜 무슨 이유로 들려왔을까. 시인은 담쟁이넝쿨을 보면서 그렇게 상상했을 수..

[아침에 인사]

[아침에 인사]    일러스트 = 박상훈    아침에 인사 안녕하세요제가 달맞이꽃이에요아침 안개 속에 있다가 부지런한 시인에게 들켰어요안개 속에서는 말소리를 죽여야해요소리가 멀리 가거든요조심하세요나는 곧 꽃잎을 닫을 시간입니다안녕 ! 근데,내가 사랑한다고 지금 조금 크게 부르면 안 되나요 ? ㅡ 김용택 (1948 ~)    내 집 돌담 아래에서도 달맞이꽃이 자란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좀 이르지만 머잖아 필 것이다. 달맞이꽃은 해가 질 때에 피고 아침이 되면 그 생기가 시든다. 달맞이꽃의 빛깔은 곱고 부드럽다. 마치 보름달의 월광 (月光)을 동그스름하게 폭 파인 유리 그릇에 한가득 담아 놓은 것처럼. 시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달맞이꽃 핀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안개 속에서 함초롬하게 핀 달맞이꽃이 시인..

[나 홀로 집에]

[나 홀로 집에]    일러스트 = 양진경    나 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창틀에 앞발 올려놓고방 안을 들여다본다집 안이 조용해서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무슨 기척이 있어밖으로 눈을 돌리니밤하늘에 높이 떠오른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모두들 떠나가고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혼자는 아닌 셈이다 ㅡ 김광규 (1941 ~)    복실이는 아마도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일 테다. 집이 하도 조용하니,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방 안을 살핀다. 시간이 흐르고 밤이 되어 이번에는 보름달이 둥실 떠서 창 안쪽까지 달빛이 흘러 들어온다. 집에 아무도 없나 궁금해하면서. 시인은 혼자 집에 남았지만, 이처럼 한데서 집 안쪽으로 마치 한솥밥..

[공연]

[공연]    그래픽 = 김성규    공연 막이 오르고 한 여자가 서 있다무대의 빛은 여자를 비추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빛을 바라보면서 여자는 드디어 입을 여는 것일까서서히 천천히 희미하게 몸이 너울처럼 흔들렸다모든 관객의 눈은 그 여자에게 쏠려 있다그 여자의 생 어디쯤일까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비가 되었다가 눈이 되었다가갑자기 울부짖으며 흐느끼며 온몸이 거센 파도가 된다침묵과 울부짖음 그리고 느린 여자의 형상뿐막이 내렸다다 알아들었는데 사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ㅡ 신달자 (1943 ~)    ‘나’라는 존재를 인생이라는 무대에 선 배우에 비유하곤 한다. 우리는 제각각 일인극 주연배우이다. 각본도 쓰고, 분장도 연기도 스스로 한다. 한 여자가 공연 무대에 섰다. 물너울 같은 동작이 있고, 공연은 막을 ..

[봄비]

[봄비]    일러스트 = 박상훈    봄비  조용히 젖어드는 초 (草) 지붕 아래서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月谷嶺) 삼십리 피는 살구꽃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 뒤에 더덕순담 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 안에서호박순 새 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ㅡ 박목월 (1915 ~ 1978)    봄비는 내리되 덜 요란하다. 소리는 작고 모양새는 찬찬하다. 떠들썩하지 않은 봄비 덕에 새순과 어린 움의 돋음이 한결 수월하다. 봄비는 내려 세계를 촉촉하게 적신다. 짚으로 인 지붕에도 봄비는 내려 지붕이 일층 낮아진 느낌이다. 사람 마음도 가라앉는다. 시인은 봄비 오는 내내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한다. 그는 시인의 거소 (居所)에서 떨어진 곳에, 강마을에 살고 있다. ‘월곡령’ 과 ‘삼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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