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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99

[둘레]

[둘레]    일러스트 = 김하경    둘레 산은산빛이 있어 좋다먼 산 가차운 산가차운 산에버들꽃이 흩날린다먼 산에저녁 해가 부시다아, 산은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ㅡ 박용래 (1925 ~ 1980)   요즘 산빛이 참 좋다. 풀이나 나무에 새로 돋은 싹은 미려 (美麗)하다. 완두콩 빛깔이다. 그렇다고 산빛이 한 가지의 빛깔만을 띠는 것은 아니다. 산벚꽃은 피어 산빛을 보탠다. 송화는 피어 산빛을 보탠다. 작은 풀꽃도 산빛을 보탠다. 봄의 산빛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새뜻한 기운이 찰찰 넘친다. 그에 맞춰 그늘도 자리를 차차 넓히며 산내 (山內)를 흐른다. 시인은 가까운 산과 먼 산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꽃이 봄바람에 이쪽저쪽으로 날린다. 산등성이엔 아름다운 잔광 (..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일러스트 = 김성규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조약돌 주워 호수에 퐁 ! 던졌더니동그랗게 무늬가 생긴다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끝도 없이 생긴다 종소리 같다 물무늬처럼 번지는 종소리종소리처럼 번지는 내 마음 종소리 안에 온종일네가 서 있다 ㅡ 장옥관 (1955 ~)   작고 동글동글한 돌을 주워서 호수에 던져보는 시인이 있다. 호수의 수면에는 물방울이 튀고 물무늬가 생겨난다. 동심원의 물결은 연달아 일어나고 차차 넓게 퍼져 간다. 시인은 파문 (波紋)을 보면서 아득한 허공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를 떠올린다. 물의 공간이 대기의 공간으로, 시각의 감각이 청각의 감각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둥근 물무늬의 번짐과 종소리의 울림이 나의 마음에 ..

[꽃을 따르라]

[꽃을 따르라]    일러스트 = 김성규    꽃을 따르라 돈을 따르지 말고꽃을 따르라 봄날에 피는 꽃을 따르지 말고봄날에 지는 꽃을 따르라 벚꽃을 보라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꽃잎에봄의 슬픔마저 찬란하지 않으나 돈을 따르지 말고지는 꽃을 따르라 사람은 지는 꽃을 따를 때가장 아름답다 ㅡ 정호승 (1960 ~)    꽃이 오고 있다. 꽃이 와서 봄에게 새 의상 (衣裳)을 입히고 있다. 산과 들에 헐벗은 구석이 사라지고 있다. 시인은 봄날에는 꽃을 좇아서 꽃 가는 대로 같이 가라고 말한다. 돈을 선호하지 말고 꽃을 애호하라고 말한다. 꽃을 맘껏 완상하라는 권유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을 숭상하라는 속뜻은 무엇일까. 꽃에게는 개화와 낙화의 일기 (日記)가 각각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 아닐까. 우리..

[돌멩이들]

[돌멩이들]     일러스트 = 양진경     돌멩이들 바닷소리 새까만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책상 위에 풀어놓고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혼자 매인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낮달처럼저나 나나살아간다는 것이,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ㅡ 장석남 (1965 ~)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늬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깎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

[극명 (克明)]

[극명 (克明)]    일러스트 = 김성규    극명 (克明)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서는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마당을 종종걸음치기도 하고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아 언제 날아들 갔나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이 가지 저 가지가 반짝이고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 (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ㅡ 신현정 (1948 ~ 2009)   극명은 무엇인가, 매우 분명함이요, 깊은 속까지 샅샅이 똑똑하게 밝힘이다. 아주 뚜렷함을 본다는 것이니 시인은 이른 아침에 반짝임의, 광채의 현현 (顯現)을 보았다는 것이겠다.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 가지를, 마당을 옮겨 난다. 그 옮겨 나는 것에는 반짝임이 있다. '..

[장]

[장]    일러스트 = 양진경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업고 지고······ 안고 들고······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버려놓고밀려가고 밀려오고······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ㅡ 윤동주 (1917 ~ 1945)    이 시의 여인은 윤동주의 다른 시 ‘슬픈 족속’ 에 등장하는,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라고 표현된, 고난을 견뎌내는 강인한 여인의 풍모, 그리고 성정과 닮아 있다. 온종일 장사를 하는..

[3월]

[3월]     일러스트 = 김하경    3월 못자리 볍씨들 파랗게 눈뜨리풀풀 흙먼지 날리고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날아든꽁지 짧은 새숲 흔들어 연초록 파문 일으키리이마에 뿔 솟는 아이간지러워 이마 문지르리 ㅡ 이재무 (1958 ~)    새봄의 시간이 도래했다. 차갑고 단단하던 대지는 탄력을 회복하고 있다. 봄이 열쇠를 쥐고 자물쇠를 열어서 묶이고 감긴 것을 풀어주는 것만 같다. 논에 보드라운 흙을 붓는, 객토를 하는 농가도 있다. 봄의 기운이 더 완연해지면 물꼬로 봇물이 졸졸 흘러 논으로 들어가고, 농부는 볍씨를 성심껏 고르고, 또 파종을 할 것이다. 들판이며 언덕이며 숲은 어떠한가. 새순이 움트고 만화 (萬花)가 피어나리라. 시인은 꽁지가 짤따랗고 몸집이 작은 새의 날갯짓만으로도 연둣빛 신록이 번지고 ..

[농담 한 송이]

[농담 한 송이]    일러스트 = 양진경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끝끝내 서럽고 싶다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 ㅡ 허수경 (1964 ~ 2018)    비탄에 잠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설움이 괴어 있다. 마음의 동굴에는 비애가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다. 빛이 차단된 우묵한 곳. 시인은 그 사람 마음의 공간을 바꾸려고 애쓴다. 그와 나 사이에 오가는 한마디 농담을 통해서. 화사한 꽃송이 같은 농말의 언어를 던지고 건넴으로써. 다른 시에서 썼듯이 그것을 “가장 마지막까지 반짝거릴 삶의 신호” 로 여겨서. 갓 딴 농담은 생것이므로 비릿할 테다. 게다가 농담은 곧 시들 것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일러스트 = 김하경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 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ㅡ 백석 (1912 ~ 1996)    이 시의 인용은 이숭원 문학평론가의 책 ‘백석을 만나다’ 에 실린 현대어 정본을 따른 것이다. 백석은 이 시를 1938년에 발표했다. ‘잠풍 날씨’ 는 바람이 드러나지 않게 ..

[성주 (城主)]

[성주 (城主)]    일러스트 = 김성규    성주 (城主)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그가 되었다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당신의 고독은 깊어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겸허히 기도하라 ㅡ 김남조 (1927 ~ 2023)    김남조 시인은 2020년에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 를 펴냈다. 시인의 열아홉 번째 출간 시집이었다. 이 시는 그 시집에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에게 시 (詩) 혹은 시심 (詩心)은 “한 덩이의 작은 흙이었으면서 기적처럼 풀씨가 돋아나는 신비를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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