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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운산 전투 며칠 뒤인 1950년 11월 초 연예인 위문단이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에 주둔했던 국군 1사단을 찾아 공연을 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우리는 미군의 희생을 뒤로하고 평안북도 운산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내려왔다.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立石: 영변 주변의 입석과는 다른 지역)이라는 곳에 도착해 재정비를 했다. 청천강 남쪽에는 반격을 위한 교두보가 만들어졌다. 청천강을 자연적인 방어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곳에는 청천강을 건너 서북쪽인 신의주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해 내려온 미 24사단, 평북 구성 방향으로 진출하다 역시 무사히 퇴각한 영국군 27여단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13병단의 병사들이 1950년 10월 말쯤 평안북도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중공군 1차 공세’로 불리는 당시 공격으로 미군은 1개 대대 병력과 적잖은 무기를 잃었으나 국군 1사단은 비교적 온전하게 운산 지역을 빠져나왔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0년 11월 초가 되면서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일단 주춤해졌다. 국군 1사단은 운산 남쪽의 입석(立石)이라는 곳으로 후퇴했다. 교전을 해보니 중공군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중공군, 생각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군대 아니었다 중국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중공군의 습..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1950년 11월 1일 새벽 1시쯤이었다. 나는 길을 재촉했다. 영변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향해 지프를 달렸다. 밤길을 달리는 지프 뒤로 스쳐가는 바람이 차가웠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스쳤다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끊임없이 내 얼굴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운산으로 나가 있던 3개 연대의 철수는 순조로울까. 이들은 8기병 연대처럼 무지막지한 공격에 노출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밤새 포탄 1만3000발 엄호했지만 미군 600명 전사 · 행불 그러나 운산 쪽에선 포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윌리엄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의 고사포와 박격포들이 불을 뿜고 있는 소리였다. 다행이었다. 아군 포병이 지원 사격..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1950년 10월 말 벌어진 운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의 모습이 중공군 사진사의 앵글에 담겼다. 중국이 펴낸 전사자료집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잡힌 포로들은 그해 10월 31일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미 1기병사단 소속 8기병연대 3대대 대대장과 부대원들로 추정된다. [백선엽 장군 제공] 후퇴를 건의하는 미군 10고사포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나와 대구 북방의 낙동강 전선에서 처음 만나 이곳 최전선까지 함께 전투를 겪어왔다. 그전까지 그는 늘 여유가 있었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당황하는 기색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운산에서 본 그의 표정은 예전과는 확연히..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1950년 10월 31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 1차 공세에 직면한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왼쪽)이 미군 10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앞줄 오른쪽)과 함께 걸으며 후퇴 작전을 상의하고 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하복 차림인 것이 눈길을 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내가 타고 있던 지프에서 불과 300m 앞에서 중공군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굽은 길 저 앞이었다. 1만여 명의 병력과 배속 미군을 지휘하는 국군 1사단장인 내가 적의 총구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었다. 차 안에는 운전병과 문형태 사단 참모장 등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라는 낭패감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웠다. 커브 길 돌자 30..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③ 이상한 명령들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③ 이상한 명령들 1950년 10월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공군 병력이 군악대의 연주 속에 압록강을 줄지어 건너고 있다.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그해 10월 중순쯤 한반도로 잠입했다. [중앙포토] 군인은 명령에 따라 살고 죽는다. 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다. 살고 죽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때로 이해하기 힘든 명령도 있긴 하다. 압록강 ‘물 뜨기’ 서두르다 고립 … “탄약 바닥” 다급한 무전 평안북도 운산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나타나고, 뒤 이어 중공군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면서 대규모 공세를 예고할 즈음이었다. 이때 내게 명령이 하나 내려왔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② 미군 - 중공군 첫 교전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② 미군 - 중공군 첫 교전 6·25전쟁 당시 미 8군 예비대의 6전차대대 C중대의 한 전차 위에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올라타고 작전에 나서고 있다. 이 6전차대대 C중대 소속 1개 소대 탱크 다섯 대가 1950년 10월 말 운산 지역을 정찰하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두 대가 핏빛으로 변해 돌아왔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 포로를 잡아 일차 심문한 뒤 내 마음은 급해졌다. 포로가 자기 입으로 중국 남부 지역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대규모 중공군 부대가 적유령 산맥 곳곳에 매복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미군 측에 신속히 알리는 게 최우선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일까? 정찰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① 새로운 전쟁의 시작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① 새로운 전쟁의 시작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북진하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중순 청천강에 놓인 나무 다리를 지나고 있다. 얼마 뒤 1사단은 영변 북쪽 운산에 서 몰래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백선엽 장군 제공] 너무도 조용했다.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국군 1사단이 진출한 평안북도 운산(雲山)에는 이상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길에서 늘 보아 오던 피란민 행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일선 1사단장이던 나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운산 전투서 중공군 첫 생포 … “수만 명 매복”에 가슴 철렁 1사단은 남침한 북..

9강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대전쟁들

9강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대전쟁들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은 대전쟁들 (1) 한 시대 세계 챔피언을 결정한 전쟁들 전쟁은 그 규모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국가의 대사(大事)다. 아무리 소규모의 전쟁이라도 젊은이들의 생명과 국민의 재산이 피해를 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작은 전쟁이 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들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에 임했을 것이다.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들은 낙관론에 근거해서 전쟁에 빠져드는 경우가 대단히 많기는 했다. 사실 많은 국가들이 전쟁을 쉽게, 그리고 빨리 이길 수 있다고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 『전쟁과 국제정치』 (2020.5.30) by 이춘근 p. 134 큰 전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전쟁이 많이 있지만 정말..

8강 인간의 자연상태 논쟁 / 전쟁의 빈도

8강 인간의 자연상태 논쟁 / 전쟁의 빈도 Correlates of War (COW) project 전쟁 관련 변수 연구계획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3) 인간의 자연상태는 전쟁상태였을까? 평화상태였을까? 1) 원시사회의 전쟁 전쟁은 문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있었다고 말해지지만 정말 우리 인류의 선조들은 전쟁을 많이 치렀고 또 싸움하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문명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그것은 바로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연상태에 보다 가까운 시대였을 것이다. - 『전쟁과 국제정치』 (2020.5.30) by 이춘근 p. 102 1940년대부터 본격적인 인류학,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된 이래 원시인들은 평화스럽게 살았다는 견해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지속적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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