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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1951년 3월 말 이제 38선을 넘어야 할 때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의 정가에 형성된 기류는 분명히 우리와는 달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뭔가 멈칫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북진해서 적을 섬멸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그대로 북진을 밀어붙이고자 했지만 워싱턴과 다른 연합국은 38선으로 전선을 고착화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51년 3월, 38선 재돌파 앞두고 워싱턴은 멈칫했다 1951년 3월 27일 38선으로 전선이 일단 굳어지는 시점에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여주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석했던 한·미 야전지휘관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앨런 미 8군 참..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㉕ 퇴로 막아 적을 분산시켜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㉕ 퇴로 막아 적을 분산시켜라 미 187공수전투단이 1951년 3월 23일 문산 지역에 낙하하고 있다. 적의 퇴로를 끊는다는 차원에서 벌인 이 공수 작전은 보병인 국군 1사단이 서울에서 밀고 올라가는 지상 작전과 연계해 벌어졌다. 아군은 이 작전으로 임진강 북방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1년 3월 23일 경기도 문산에 투하된 미 187공수전투단의 단장은 프랭크 보웬 준장이었고, 부단장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훗날 베트남전 초대 미군 총사령관) 대령이었다. 투하에 앞서 미 1군단 부군단장 페러 준장은 급기야 내게 “한국군이 미 공수부대와의 링크업(link-up: 연계) 작전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평안..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㉔ 맥아더의 통 큰 선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㉔ 맥아더의 통 큰 선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1951년 3월 중순에 국군 1사단 사령부로 찾아 왔다. 지프에 앉은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당시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과 악수를 하며 대화하고 있다. 그는 당시 71세의 고령이어서 웬만하면 차에서 내리기 싫어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국군 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한 뒤 사흘이 지난 1951년 3월 18일, 만리동 고개의 한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차린 사단 사령부로 큰 손님이 찾아 왔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전쟁 기간 중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한마디로 거물이다. 구사하는 전략의 단위가 평범한 장군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퍼 히어로’다. 그 점은 나중에 서술..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㉓ 수도 재탈환, 중공군 역습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㉓ 수도 재탈환, 중공군 역습 여기저기서 ‘펑-’ ‘펑-’ 폭발음이 들렸다. 곳곳에 매설했던 지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눈에 들어오는 전신주는 모두 쓰러져 있었다. 전깃줄은 바닥에 헝클어져 있었다. 전차(電車) 철로도 엉망이었다. 1951년 3월 중순 다시 찾은 서울의 모습이었다. “서울 세 번은 못 내줘” 중앙청서 마포까지 대포 400문 배치 태극기를 들고 나와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힘에 겨워 보였다. 중공군 점령하의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20만 명 정도였다. 대개는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거지의 행색과 다름없었다. 개전 이후 수도 서울은 이렇게 병들고 지쳐..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저기 멀리 한강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떠나 북상하면서 점차 내 앞으로 다가온 파란 물결이 바로 한강이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다. 전쟁 기간 동안 그곳을 두 차례 적의 수중에 내줬다. 개전 초기의 북한군과 1951년 1·4 후퇴를 있게 했던 중공군에게 한 번씩 점령됐다. “서울로 진격” 한강 도하 상륙정 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 국군과 미군·연합군의 공세는 더 강해졌다. 전선(戰線)을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이 시작됐다. 이번 작전명은 ‘톱(Ripper)’이었다. 과감한 톱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일차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하는 게 일이었다. 한강 남안에 진출해 있..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㉑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㉑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1951년 2월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서 다리를 건너다 무게 때문에 바닥이 기울어지자 멈춰서 있다. 공병들이 다리 아래에 버팀목을 대고 구난전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의 4차 공세(1951년 2월 11~18일)는 이렇게 끝났다. 50년 12월 31일에 벌여 이듬해 1월 10일까지 이어진 공격이 3차 공세였다. 우리는 이 공세로 북위 37도까지 밀렸지만, 다음에 벌어진 중공군 4차 공세에서는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중공군 기습 무력화시킨 ‘킬러 작전’ … “다시 서울이 보인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원 겸 정치위원’이라는 직함으로 중공군을 총지휘했던 펑더화이(彭德..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⑳ 연합군의 영웅들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⑳ 연합군의 영웅들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에서 격전을 치렀던 프랑스 대대원들이 재정비를 하던 중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미 2사단 23연대 전투단에 배속됐던 이들은 고립 상태에서 중공군 39군을 물리치고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은 개활지(開豁地:탁 트인 땅)에서는 승산(勝算)이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1951년 2월 그들은 산악지대인 동쪽으로 공격해 왔다. 미 10군단이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것도 무기와 보급이 약한 한국군을 주요 타깃으로 잡았다. 6·25전쟁에 참전하는 자국 병사들에게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내렸다는 지시가 있다고 들었다. “(화력이 좋은) 미군을 피하고 철저하게 한국군을 공략하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⑲ 서울을 탈환하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⑲ 서울을 탈환하라 유엔군의 거센 반격이 1951년 1월 15일 시작됐다. 미 25사단의 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이 선두에 나섰다. 1개 전차대대와 3개 포병대대 등 막강한 화력을 마이켈리스 연대에 지원해 연대전투단(RCT)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항공과 공병의 지원 아래 수원 방면으로 위력수색을 펼쳤다. 리지웨이, 후퇴작전 짠 참모 즉각 경질 … 반격이 시작됐다 위력수색은 적의 무력 상황을 가늠해 보기 위해 펼친다. 적의 저항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떠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모든 작전에 독립 명칭을 붙이기 좋아했던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이번 작전을 ‘울프하운드(Wolfhound: 늑대)’로 명명했다. 연대전투단은 늑대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평택에서..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⑱ 반격의 칼을 갈다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⑱ 반격의 칼을 갈다 전선은 마침내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다. 1951년 1월의 일이다.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워낙 거셌고, 한 번 밀리기 시작한 국군과 연합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남하했다. 그러나 전열을 갖춰야 했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한 뒤에 반격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미 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가슴에 항상 수류탄을 걸고 다녔다. 워커 장군에게 뒤지지 않는 맹장(猛將)이었다. 그는 반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안성까지 밀린 뒤 ‘중공군 잘 아는 중국인’ 화교 수색대 투입 그는 부임 직후인 51년 1월 초에 중공군의 공세가 다시 불붙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의정부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국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⑰ 떨어진 6 · 25의 별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⑰ 떨어진 6 · 25의 별 월튼 워커 장군(지프 위에 올라선 사람)이 1950년 7월 낙동강전선의 국군 1사단을 방문한 모습이다. 지프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이다. 번쩍거리는 철모를 쓰고 전선을 누빈 워커는 낙동강 전선 방어로 북진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는 특급 소방수였다. 밀려오는 불길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그 앞으로 달려가는 특급 소방수. 그가 출동하면 불길은 맥을 못 추고 기세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6·25전쟁이라는 거센 불길 앞에서 그는 타고난 전사(戰士)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낙동강 전선 지킨 ‘불독 장군’ 워커 … ‘지프 사고 전사’ 날벼락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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