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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20

[가을날]

[가을날] 일러스트 = 박상훈 가을날 좋지 가을볕은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가을볕은 차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피는 먼지구름 위로하늘빛은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ㅡ 김사인 (1956 ~) 가을볕의 감촉은 어떠한가. 시인은 까칠까칠하고 차다고 말한다. 가을볕은 마치 포플린으로 이불의 겉을 홑겹으로 짜서 씌운 듯해서 살갗에 닿으면 좀 거칠거칠하긴 해도 말쑥하고 시원한 느낌이 없지 않다. 가을볕은 차가우니 축축한 기운이 전혀 없다. 또 꽉 차 있지 않아 비어있는 것만 같으니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 막막하고 적적한 느낌이 생겨나게 한다. 가을해가 내리쬐는 기운을 참..

[뒤척이다]

[뒤척이다] 일러스트 = 박상훈 뒤척이다 허공을 향해몸을 던지는 거미처럼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울부짖음으로 위험을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바람 불 때마다 으악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불에 타면서 꽝꽝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나는 평생을천천히 서둘렀다 ㅡ 천양희 (1942 ~) 모든 생명과 존재는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집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열정을 다하면서, 소리 내어 울면서, 파도 같이 세차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살아간다. 우리도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거미처럼 텅 빈 공중에 몸을 던진다. 내 삶의 미래를 위해 땔감을 마련한다. 가을 억새처럼 질긴 의지로 억척스럽게 생활한다. 천천히 그러나 또 동시에 급하게 다그치면서, 이 느긋함과 급함..

[감을 따 내리며]

[감을 따 내리며] 일러스트 = 이철원 감을 따 내리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어디에다 가마 걸고이렇게 붉은 열매를 주저리로 구워 내렸나아흔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를 나는 몰라. ㅡ 정완영 (1919 ~ 2016) 가을 하늘이 푸르다고 이른 까닭은 그만큼 날씨가 맑고 밝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는 “하루 한 길씩을 높아가는 가을하늘” 이라고도 썼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 내리면서 시인은 감의 잘 익은 빛깔에 감탄하며 마치 숯이나 도자기처럼 가마에 넣어 구워 낸 것만 같다고 노래한다. 불을 땔 때의 붉은 빛과 열기가 잘 익은 감의 빛깔과 서로 어울려 멋스러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모든 열매를 구워 내는 어마어마한 가마터가 정말이지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서..

[가을]

[가을] 일러스트 = 김하경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작은 오두막이었네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어서 가 보게, 그대의 집으로······ ㅡ 강은교 (1945 ~) 오두막에 슬픔과 기쁨이, 이 둘이 살고 있는데 번갈아 집을 지킨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집에 오막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에는 찬바람이 불어 쓸쓸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니 세상의 모든 집이 오두막집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도 시월의 오두막에 살짝 가서 보았다. 조랑조랑 매달린 감이 발그스름하게 익고 감잎이 ..

[작은 샘]

[작은 샘] 일러스트 = 이철원 작은 샘 한없이 우뚝 솟은 히말라야 산정에작은 샘 하나 있어 맑기가 거울 같단다아무리 눈 내려도 금방 녹아 물이 되고휘몰아치는 바람도 모른 척 비껴간단다고요한 수면 위로 애기눈썹달 뜨는 밤별들도 따라 내려와 함께 배경이 된단다그런데 나는 누구의 무엇도 되지 못하고마음속 산정의 샘도 아직 만나지 못했단다 ㅡ 황청원 (1955 ~) 황청원 시인이 펴낸 신작 시집 ‘늙어서도 빛나는 그 꽃’ 에 실려 있는 시이다. 황청원 시인은 오랜 세월 동안에 방송 진행자 일을 했는데, 요즘은 안성 죽산 용설호숫가 귀범전가 (歸凡田家) 무무산방 (無無山房)에 머무르고 있다. 귀범전가라고 했으니 평범함으로 돌아가 밭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는 뜻이겠다. 우편으로 온 시집을 펼치니..

[봉평]

[봉평] 일러스트 = 김하경 봉평 내 뼈는 커서 어른이 되었는데내 속의 아이는 늘 거기서 자라고 있다풀씨가 자라고 들판이 자라고눈발 속에서 아버지가 돋아났다집이 사라졌어도 아이는 늘 거기서 놀고 있다핏줄이, 모발이, 다 사라져도 아이는 늘 거기서 자라고 있다뼛가루 같은 햇살 속에 내 뼈들이 묻힌 곳,내 몸이 점점 작아져서햇살 속으로 풀밭 속으로 흘러가는 몸쑥 버덩 속으로 들어가는 몸,쑥 버덩은 무덤이 되고 혈관이 되어내 몸 속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다쑥 버덩의 피를 퍼 올리고 있다 ㅡ 이영춘 (1942 ~) 이영춘 시인은 봉평에서 출생했다. 여러 시편들을 통해 봉평에 얽힌 기억과 봉평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올해 가을에 펴낸 시집에 실린 시 ‘봉평, 그 눈 길..

[거울 속의 거울]

[거울 속의 거울] 일러스트 = 이철원 거울 속의 거울 걸음마 시작한 손자 안고 거울을 본다손자도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잠시 얼굴 돌려 골똘히 나를 올려다본다거울과 현실 그 사이에, 내가 있다거울을 넘어온 손자의 눈동자에 내가 가득 찬다거울 속 얼굴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손자를 나도 본다내가 한결 더 맑아졌다그 눈길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ㅡ 김완하 (1958 ~) ‘눈부처’ 라는 말은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다.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바라볼 때 나는 그이의 눈동자에 비친다. 호수의 수면에 하늘이 그대로 고스란히 비치듯이. 발을 떼면서 걸음을 익히는 아기를 안고 시인은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 있는 아기가 시인을 바라볼 때, 눈을 맞출 때 거울 속에 있는 아..

[대설]

[대설] 일러스트 = 양진경 대설 소나무우산살이 부러졌다전봇대로 나앉아 잔뜩 움츠린 직박구리가 오석 같다목동처럼 저녁이 와서 흩어진 어둠을 불러 모으는데감나무 가지에 간신히 몸을 얹은 박새 고갯짓이 조급하다굴뚝새는 물수제비뜨듯 집집으로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포릉, 포릉, 포릉··· 참새, 멧새, 딱새, 곤줄배기도 부산하다 ㅡ 김영삼 (1959 ~) 한 그루 소나무는 먼발치에선 둥글게 펼친 우산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소나무의 가지가, 비유하자면 우산의 우산살이 대설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뚝, 부러졌다.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큰 눈이니 나무에 깃들어 있던 새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홀로 전봇대에 오도카니 앉은 직박구리의 겉모습과 황망함을 까만 돌에 빗댄 대목이나 굴..

[티끌이 티끌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일러스트 = 이철원 티끌이 티끌에게 ㅡ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ㅡ 김선우 (1970 ~) 티끌은 티와 먼지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니 아주 작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

[먹기러기]

[먹기러기]   일러스트 = 이철원    먹기러기 달에 눈썹을 달아서 속눈썹을 달아서 가는 기러기떼 먹기러기떼 수묵으로 천리를 깜박인다 오르락내리락 찬 달빛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도 차는 달빛 수묵으로 속눈썹이 젖어서 ㅡ 손택수 (1970 ~)    손택수 시인의 시에는 잔잔한 감응이 있다. ‘연못을 웃긴 일’ 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못물에 꽃을 뿌려 / 보조개를 파다 // 연못이 웃고 / 내가 웃다 //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 물주름에 웃다” 라고 쓴 시구가 있는데, 이런 대목을 읽노라면 마음이 가만가만히 따라 움직이게 된다. 잔물결이 일어서 퍼져가듯이. 눈썹 모양의 달이 뜬 밤에 시인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눈썹달은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뜻하니 그런 날의 밤하늘은 어둑어둑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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