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주요 인물의 사진]
▲ 1882년 일본 나가사키 우에노 사진관에서 촬영한 김옥균의 사진. / 위키피디아
안중근 의사 사진엽서로 인기, 김옥균은 '사진 동판' 남겨
安 순국 후 추모 열기 힘입어 판매돼
김옥균 · 민영환 사진 당시 신문에 실려
유관순 열사, 체포 후 정면 · 측면 찍어
독립기념관이 이번 광복절에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인공지능 (AI)으로 복원한 영상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인물 사진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아 전문 성우가 더빙할 예정이라고 하니 사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역사적 인물의 사진은 어떻게 촬영돼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을까요?
▲ 1926년 3월 29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옥균 관련 기사와 사진. / 조선일보뉴스라이브러리
▲ 1904년 촬영한 민영환의 사진. 문치장이 남긴 사진 속 민영환은 이 사진과 달리 칼을 몸 중심 쪽에 짚고 있어요. / 위키피디아
김옥균과 민영환의 '쇠사진'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2년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등은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어요. 이때 김옥균은 일본 나가사키의 우에노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의 복제본이 김옥균의 모습을 대표하게 됐어요.
민영환은 1878년 과거 급제 이후 승진을 거듭했고, 대한제국 출범 후에는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했습니다. 미국 특명전권공사, 유럽 6국 특명전권대사로서 외교관 역할도 수행했어요. 대한제국은 민영환의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하고 사진을 촬영했고, 이 사진이 민영환의 모습을 대표하게 됐어요. 사진 속 민영환은 군복에 훈장을 달고 있어요. 모두 알고 있듯 을사늑약 체결 후 자결 순국했지요.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 등 신문 매체는 김옥균과 민영환의 생애를 기사화했습니다. 기사와 함께 김옥균과 민영환의 인물 사진이 신문에 실렸지요. 당시 사진기자는 편집자가 원하는 크기로 사진 인쇄용 동판을 제작했는데, 이 사진을 '쇠사진' 이라고 불렀어요. 송덕수와 문치장 기자는 일제 강점기 사진기자이면서 쇠사진을 제작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어요. 특히 문치장 기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사진 인쇄용 동판, 이른바 쇠사진을 집에 잘 보관했어요. 김옥균과 민영환의 쇠사진을 비롯해 근대사회의 여러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 현재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됐을 때 모습, 뤼순 감옥에서의 모습, 순국 직전 모습. / 안중근의사기념관 · 위키피디아
안중근 의사의 원판 사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사진, 유묵 (생전 남긴 글씨나 그림) 등이 대표적이에요. 인물 사진은 10여 장이 있는데, 출처가 분명한 사진은 3장 정도라고 해요.
첫째 사진은 하얼빈 의거 직후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후 찍힌 것입니다. 하얼빈 어느 사진사가 러시아 검찰 의뢰로 찍었을 것으로 추측해요. 의거 당시 복장을 확인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사진은 뤼순 감옥에서 찍었어요. 가슴에 달린 하얀 리본은 감옥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지예요. 양손을 가운데 모았는데 자세히 보면 잘린 손가락을 볼 수 있어요. 셋째 사진은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하기 직전 찍었어요.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준 하얀 명주 두루마기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어요. 둘째와 셋째 사진은 뤼순 감옥 부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어느 사진사가 찍었을 것으로 추측해요.
그렇다면 사진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일제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인물의 사진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러시아와 일본처럼 근대적인 사법 체계를 갖춘 국가에서는 범인을 체포, 재판, 수감하는 과정에서 사진을 촬영했어요. 전속 사진사가 없는 경우에는 근처 사진관의 사진사를 불렀어요. 사진사는 촬영 후 인화한 사진을 납품하고, 원판은 보관했어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안중근 의사 추모 열기가 대단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안중근 의사를 촬영했던 사진사는 원판을 다시 인화해 판매했어요. 특히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엽서 형태로 제작해 판매했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소장한 사람이 많았다고 해요. 반면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비하할 목적으로 사진 엽서를 제작하기도 했어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유입니다.
▲ 유관순 열사 수형자 기록표 앞면. / 국사편찬위원회
유관순 열사의 '머그샷'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자 기록표는 가로 15㎝, 세로 10㎝의 종이 카드입니다. 앞면에는 두 장의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 신장, 지문 번호 등이 적혀 있어요. 앞면 사진의 한자 '三七一(371)'은 사진 번호예요. 신장 칸에 적힌 '5척'은 확실하지만 6촌(치)인지 0촌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요. 6촌이면 키가 169.7㎝이고 0촌이면 151.5㎝인데, 일반적으로 169.7㎝로 알려져 있어요. 옆면 사진은 얼굴이 많이 부어 있는데, 일제의 고문 흔적이지요. 뒷면에는 본적, 신분, 직업, 죄명, 형량 등이 표에 적혀 있어요. 직업은 정동 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학당) 생도, 죄명은 보안법 위반, 형량은 3년으로 기록돼 있어요.
일제 경찰과 검찰은 유관순을 체포한 후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구치소 수감, 인적 사항 조사, 신체검사, 죄수복 입히기 등 절차를 거친 후 사진을 촬영했어요. 이때 찍는 사진을 '머그샷 (범인 식별용 인물 사진)' 이라 불렀어요. '머그샷' 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범죄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개발한 사진이에요. 일반적으로 인물 사진을 촬영하는 사진사가 범죄자를 찍으면 신체적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개발했다고 해요. 얼굴의 앞면과 옆면을 같은 각도와 위치에서 찍고, 신체 기록을 표로 남겼어요. 일제가 범죄자로 취급해 촬영한 유관순 열사의 '머그샷' 이 3 · 1 운동의 주역 유관순 열사의 사진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어요.
▲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 옛 사진에 인공지능 (AI) 기술을 적용해 만든 동영상 시연 장면. / SK텔레콤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8월 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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