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별전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2024. 12. 06. ~ 2025. 02. 16.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F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My Story, Our History
우리는 오늘도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매순간 소중한 자신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두의 시간이 모여서 역사가 됩니다. 이제는 교과서에 실린 굵직한 사건들만이 아니라 개인이 겪은 일도 역사의 주제로 주목받습니다.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특별전에서는 개인의 인생 흔적이 담긴 소장품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는 여러 이야기들로 켜켜이 쌓아온 역사, 마치 강물과 같이 여러 갈래에서 합쳐지고 나뉘기도 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흘러온 우리 역사를 조명합니다. 여러분도 전시를 감상하시는 동안 자신만의 이야기를 더해,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우리 현대사를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1부
나의 인생, 역사를 쌓다
1부에서는 24명의 소장품을 통해 현대사의 중요한 다섯 가지 주제를 살펴봅니다. 광복과 우리말, 민간 국제교류, 전통과 역사, 민주주의와 자유, 이념 갈등과 화해가 그것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격동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정부를 수립하고, 우리말과 전통, 역사를 되찾고, 이웃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는 시련도 잇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해왔습니다. 남북 간의 갈등 속에서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광복과 되찾은 우리말
1945년,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국내 곳곳에서 해방의 기쁨을 널리 알리는 신문이 발행되었고,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힘썼던 동포들도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광복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우리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말을 연구한 이들, 문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개개인들, 우리말을 더욱 정확하고 아름답게 사용하기 위해 매 순간 정진했던 사람들의 모든 순간이 중요했습니다. 일곱 명의 소장품에 담긴 이야기로 광복과 되찾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돌아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기념사진
1945. 11. | 이종찬 (광복회장)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15명이 고국에 돌아오기 직전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중앙에 꽃목걸이를 걸고 안경 쓴 이가 백범 김구이고, 그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이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고, 오른쪽에 감격하며 눈물을 닦고 있는 이가 그의 작은 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다. 광복 직후 귀국을 앞둔 독립운동가들의 감격이 드러난다.
복제
"한글을 집에서 배웠기 때문에 국민학교 때
다른 친구들보다 제 독해력이 좋았어요.
그때는 한 반에 한글을 네댓 명밖에 몰랐습니다."
ㅡ 강인숙
(해방 직전 고국으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한국어 문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구나!"
"나의 우리말 공부는 그때부터 독학으로 시작됐다."
ㅡ 김형석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
73년 12월 18일
어머니의 방명록
1973. 12. | 신달자 (시인)
신달자의 어머니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찾아와 적은 방명록이다. "일생의 잊지 못할 날일세 / 엄마늬 기뿜이다" 라고 적혀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20일 동안 글을 외워서 베껴 그려서라도 딸을 축하해주고자 했다.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자, 오타와 그 수정 흔적 속에서 딸을 향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문맹퇴치 및 국문재교육계획
1. 본 계획은 각 시, 도별 공민학교에 성인반을 설치하여 실시완수토록 함
2. 4292년 말 현재 잔존 문맹자수 206,000은 취학 불가능자 임
3. 4292년도 중 계획 재교육자수 580,000명 (추산) 국문해득력 부족자로서 문맹퇴치 교육과 같이 실시함
국가기록원, 1959
문맹퇴치 및 국문재교육계획
약 58만 명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교육을 실시하여 1959년도 사이에 문맹자 수가 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터를 순례하는 틈틈이 산간오지로 들어가 오랫동안 대처의 문명과 등지고 살아온 사람들의 예스런 말을 채집했다. (···) 옛 사람들이 항용 사용했음직한 낱말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우리말 사전의 첫 장부터 뒤지며 밤새우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 우리말 갈래사전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나는 벌써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12권의 노트에 채집된 우리말 갈래사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김주영 조선일보, 1999. 12. 15.
건국시보 창간호
1945. 8. | 최정호 (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창간한 신문이다. 기사 제목을 "조선 독립이 당당히 시작되다 (朝鮮獨立堂堂出足)" 로 뽑은 이 신문은 1945년 8월 17일 전주에서 발행되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방송은 '항복' 이라는 표현도 없었고, 특유의 문어체에 잡음도 심해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최정호의 아버지인 최한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신문 발간을 결정하였고, 신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광복을 알게 되었다.
조선 독립 당당 출족
팟쇼와 나치를 타도한 민주주의의 승리는 약소 민족 해방의 위대한 역사적 조건하에 (···) 삼천만 우리 조선동포도 해방을 보게 되였다. (···) 동녘에서 떠오른 태양이 찬란한 여름 아침이었다.
ㅡ 건국시보
『백록담』 초판본
1941. |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강인숙이 좋아했던 시집으로, 작가 정지용은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산을 묘사함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했다. 정지용은 잘 다듬고 정제한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우리 고유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강인숙은 6 · 25전쟁 피란가는 가방에 이 시집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집에서 한글을 배울 수 있었던 덕분에 또래보다 독해력이 높았다고 한다.
영인문학관
『영원과 사랑의 대화』, 『정과 인식의 계절』
1969. | 김형석 (철학자,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철학자 김형석의 수필집이다. 그가 1960 ~ 70년대에 쓴 많은 에세이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앗다. 1940년대 초 일본에서 공부했던 그는 '한국적인 것' 과 한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광복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글을 쓸 때마다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어사전
1961. | 이계진 (전 아나운서)
이계진이 몇 번이고 정독한 국어사전이다. 그에게 아나운서란 한국어를 지키는 직업이자 언어문화를 선도하는 직업이었다. 따라서 국어사전에 나온 뜻과 용법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사전은 1957년 한글학회의 『큰사전』이 처음으로 완간되고 4년 뒤, 민중서관에서 발간한 책이다.
『객주』 육필 원고와 우리말 갈래 사전
1970년대 | 김주영 (소설가)
조선 후기 상인사회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소설 『객주』의 자필 원고이다. 김주영은 19세기 말부터 변화해 온 상인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내기 위해 5년 동안 200여 곳의 시골 장터를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언어를 수집했다. 그는 당시 쓰던 어휘, 특히 장터에서 쓰는 말을 정확하게 되살리기 위해 '갈래 노트' 를 꼼꼼히 기록하여 조선 후기의 말투와 지역 방언을 소설에 표현해냈다.
객주문학관
전통과 역사의 재발견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대대적인 문화재 복원사업이 추진되었고, 인문학자들은 지역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찾아내어 기록하였으며, 뼈아픈 식민지배의 과거사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예술계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재창조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갔습니다. 다섯 명의 소장품과 작품으로 그 과정을 살펴봅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모습 조선일보, 1971
조유전 무령왕릉 발굴 관련 구술 조선일보
"장구한 우리 삶의 뿌리와 정체성을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발굴"
ㅡ 조유전
"국악과의 만남이 없었으면, 국문학자로서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은 국어부터 가르치면서 음악은 양악부터 가르치는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엄청난 문화적 양분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조동일 조선일보 1994. 3. 28.
"이번 (독립기념관) 모금 운동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에요. (···) 이번 독립기념관 건립운동은 정신적으로 흔들리고 기울어진 민족 정신을 바로잡고 민족의 기개를 펴자는 제2의 독립운동이 아니겠어요."
조선일보, 1982. 8. 31.
(좌)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충남 목천 일대의 산세가 드러난 옛 풍수 지도
(우) 독립기념관 신축 현장
국가기록원, 1986.
"(이우환) 편지에 의하면 7월 25일 뉴욕에서 김환기 선생님이 작고하셨단다.
애석하고 서글퍼 죽겠다. 바로 저러한 생애가 화가들이 자기 일을 평생토록 밀고 나가다가 당하는
운명이라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ㅡ 박서보
박서보 재단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종이는 중국식 화선지보다는 닥원료로 직접 만들고 안료도 화공안료 대신 치자, 감초, 자운영, 땡감 등을 우려내 만든 천연안료를 씁니다. 뭔가 눈부시도록 매끈매끈한 것보다는 장판지에 손 때가 묻은 것 같은, 우리 미감의 표현에는 역시 인공보다는 자연의 재료들이 어울리죠."
김병종 조선일보, 1995. 11. 16.
『무령왕릉 발굴조사보고서』
1973. |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이 참여한 무령왕릉 발굴조사 보고서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당시 신입 학예연구사였던 조유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무령왕릉은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었기에 의미가 컸다. 비록 단시간에 발굴이 끝났지만 이때의 시행착오는 이후 한국 고고학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서사민요연구』
1970. | 조동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조동일이 경상북도 지역에 전승되는 서사민요를 현장에서 직접 녹음하여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서사민요는 노래와 이야기가 섞인 복합적인 장르의 문학으로, 주로 부녀자들이 길쌈이나 밭매기 등 단조로운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부르는 긴 노래이다. 당시 사라져가던 우리 문학을 기록하여 역사로 남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독립기념관 및 독립공원기본계획』
1983. | 김원 (건축가)
김원이 참여하여 작성한 독립기념관의 최초 기본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립기념관 구조 배치와 기와로 된 '겨레의 집' 구상 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독립기념관의 기본을 제시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8월 일본 교과서 왜곡 사건 이후 건립이 추진되었다. 서울과 대전 사이에 교통이 좋은 100만 평 부지를 찾기 위해 김원이 제시한 곳은 현재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충청남도 천안 목천면 일대였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일기장
1974. | 박서보 (화가)
단색조 화가 박서보가 매일 작성하던 일기장이다. 단색조 회화는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회화를 거부하는 한국 추상미술의 한 갈래로 단일한 색을 중심으로 그린다. 박서보는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 탐구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런 정신의 연장 선상에서 그는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는데,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박서보재단
붓, 벼루, 닥종이
1980년대 | 김병종 (화가, 서울대 동양화과 명예교수)
김병종이 한국적 미학을 탐색하며 작품 활동하는데 썼던 붓과 벼루, 닥종이이다. 그는 다양한 크기의 붓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벼루에 직접 먹을 갈았으며, 한국 전통의 닥종이에 농담을 자유자재로 표현하였다. 한국화 고유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소재와 재료의 한계를 벗어나 한국화의 현대화를 이끌어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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