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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 (石耳)]

석이 (石耳)
눈먼 바위가 입을 닫은 채 그대로
굳어버린 제 몸에 수천 개의 귀를 틔웠다
정상을 향해 숨을 곳 없는 절벽에
떠도는 불안한 시력을 거둔 지 오래
묵묵히 굽은 등을 내준 자리마다
수직을 타고 흐르며 팽팽하게 그을린
바위의 귓바퀴를 할퀴며 난청으로 읽어내는
얇은 연골들이 미역귀처럼 달린 거야
어느 방향으로든지 팔랑이며 듣고 있는
저 고요한 청력
천 길 낭떠러지를 떨어지지 않고 올라가
그만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울음
너머의 적막까지 붙들고 있는 거지
ㅡ 권성훈 (1970 ~)
석이버섯은 모양이 사람의 귀를 닮았다. 험준한 절벽 위에서 피는 꽃이라고도 부른다. 시인은 석이를 바위가 틔운 귀라고 표현한다. 바위는 입을 다문 채 묵언으로 지내며 미역귀 같은 귀를 달고 무언가를 듣고만 있다고 생각한다. 바위는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를 지녔으니 번개와 천둥, 땡볕과 혹한, 비바람과 눈보라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풍파 (風波)에도 바위가 중심을 잃지 않아서 평온과 안정에 이르렀다고 바라본다.
그런데 ‘저 고요한 청력’ 으로 들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들려오는 아픔과 고통의 소리가 아닐까. 바위에도 마음이 있고, 귀를 열어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니, 이러한 바위의 면모는 성스럽기까지 하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2월 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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