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창경궁 2026년 4월 9일] 02



주목
Taxus cuspidata Siebold & Zucc.
주목과

주목
주목은 나무줄기와 가지가 붉은 빛을 띠어 붙여진 이름이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이라는 말대로 천 년을 훌쩍 넘겨 살고, 죽은 다음에도 천 년이 넘도록 썩지 않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주목은 18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023년 고사하였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방부 처리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서 있다.





향나무
Juniperus chinensis (L.)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남쪽, 울릉도,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로도 불린다. 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쓴다.
향나무는 궁궐이나 능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창덕궁 봉모당에 있는 향나무 (천연기념물)를 들 수 있다.
이 향나무는 19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도 그려져 있다.







앵도나무
Prunus tomentosa Thunb.
장미과




풀또기
Prunus triloba Lindl. var. truncata Kom.
장미과





5. 경춘전과 환경전 景春殿, 歡慶殿
경춘전은 대비의 일상 생활공간인 침전이고, 환경전은 왕의 침전이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산실청 (産室廳 :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誕生殿 (탄생전)' 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건물 내부에 있는 경춘전 현판은 순조 임금의 솜씨이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며, 건물 뒤편 북쪽은 여러 대비들의 침전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았다.


경춘전 景春殿







환경전 歡慶殿
















6. 통명전과 양화당 通明殿, 養和堂
통명전 (보물)은 1834년에 다시 세운 일상 생활공간인 내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다. 가운데 세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4년에 다시 지은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돌아와 거처하기도 하였다.



통명전 通明殿

보물 제 818 호 통명전




양화당 養和堂







철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878년 (고종 15) | 1878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878년 (고종 15) 철인왕후 (1837 ~ 1878)의 장례를 기록한 자료입니다. 국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왕릉이 완성될 때까지 5개월 동안 관을 모심 곳을 '빈전' 이라 합니다. 철인왕후의 빈전은 환경전, 혼전은 문정전이었습니다.


자경전진작정례의궤
1827년 (순조 27) | 1827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27년 (순조 27) 효명세자 (1809 ~ 1830)가 부모인 순조 (1790 ~ 1834, 1800 ~ 1834)와 순원황후 (1789 ~ 1857)에게 존호를 올리고, 이를 기념하여 자경전에서 열린 잔치를 기록한 의궤입니다.



철종의 상여가 나가는 모습
1864년 (고종 1) | 186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철종 (1831 ~ 1863, 재위 1849 ~ 1863)의 장례를 기록한 「철종대왕국장도감의궤」에 실린 그림입니다. 환경전에서 상여가 나가는 모습으로, 철종의 관을 모신 빈전은 환경전이었습니다.


동궐, 창경궁의 시간
동궐도 속 창경궁, 600년의 시간이 펼쳐진다
창경궁은 조선의 이궁 離宮으로, 창덕궁과 함께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동궐' 이라 불렸습니다. 세종 (1397 ~ 1450, 재위 1418 ~ 1450)이 아버지 태종 (1367 ~ 1422, 재위 1400 ~ 1418)을 위해 지은 수강궁에서 시작된 창경궁은 왕실의 생활공간이자 국정의 중심 무대로서 오랜 세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창경원' 으로 격하되며 훼손의 아픔을 겪었고, 광복 이후에는 복원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 왔습니다. 전시를 통해 창경궁이 걸어온 역사와 오늘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혜빈궁 일기
1764년 (영조 40) ~ 1765년 (영조 41) | 1764 ~ 1765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장조 (사도세자, 1735 ~ 1762)의 아내이자 정조 (1752 ~ 1800, 재위 1776 ~ 1800)의 어머니인 헌경황후 (혜경궁 홍씨, 1735 ~ 1815)가 혜빈 惠嬪이던 시절 겪은 일을 적은 글입니다. 전시된 부분은 1765년 (영조 41) 9월 중양절을 앞두고 장원서에서 국화를 혜빈에게 진상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한중록
19세기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헌경황후가 자신의 생애와 60여 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며 남길 글입니다. 전시된 부분은 혼인 전인 1743년 (영조 19) 두 번째 간택 날, 궁에서 환대를 받던 어린 헌경황후가 경춘전에서 옷 치수를 재기 위해 웃옷을 벗기려는 궁녀들 앞에서 놀라 울음을 참았던 일화를 전합니다.

1656년 (효종 7)
혼인한 공주들의 거처 건립

동쪽을 바라보는 궁궐
<동궐도>로 본 창경궁의 시간
창경궁은 1483년 (성종 14) 창건 이후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 역사적 사건, 그리고 화재로 훼손되었을 때마다 중건을 거듭하여 그 모습을 지켰습니다. 창덕궁과 경계없이 맞닿아 있어 시대에 따라 그 영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창경궁의 현판들




❶ 자손의 번창을 경축하는 시를 새긴 현판
1730년 (영조 6) | 1730 여조 어제처필
국립고궁박물관 23.3 × 62㎝
1727년 (영조 3) ~ 1729년 (영조 5)에 옹주들이 해마다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영조 (1694 ~ 1776, 재위 1724 ~ 1776)가 지은 시를 새긴 현판입니다. 집복현 안 북쪽 좌우로 나란히 걸었습니다.


❷ 현사궁 현판
1823년 (순조 23) | 1823 순조 어제어필
국립고궁박물관 56 × 130.5㎝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 (1790 ~ 1834, 재위 1800 ~ 1834)의 친어머니인 유비 박씨 (1770 ~ 1822)의 혼궁 (魂宮, 혼전)에 걸었던 현판입니다. 유비 박씨는 1822년 (순조 22)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사망하였고, 관을 모시는 빈전 (殯殿)을 창경궁 환경전에 마련하였습니다. 이듬해 신주를 모시는 혼전을 창경궁의 도총부에 설치하여 '현사궁' 이라 하였습니다.


❸ 양화당 현판
19세기 전반 순조 어필
국립고궁박물관 148.5 × 296.5㎝
양화당은 왕이 신하들을 접견하던 편전이자 대비나 왕비, 후궁 등 왕실 여성의 거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양화당은 '조화로움을 기르는 집' 이라는 뜻입니다.


❹ 연희당 현판
19세기 전반 114.2 × 260㎝
연희당은 헌경황후 (혜경당 홍씨)의 거처였습니다. 1795년 (정조 19) 아들 정조는 연희당에서 헌경황후의 회갑잔치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연희당은 '기쁨을 길게 하는 집' 이라는 뜻입니다.


❺ 보양청 현판
조선 후기 61 × 194.2㎝
국립고궁박물관
보양청은 왕의 어린 아들 (세자)이나 손자 (세손)가 태어난 순간부터 글을 배우기 이전까지 보육을 담당하던 기관입니다.


❻ 장경합 현판
18세기 전반 영조 어제어필
국립고궁박물관 43.5 × 100.2㎝
장겹합은 창경궁 동쪽에 잇던 작은 건물로, 영조가 효장세자 (1719 ~ 1728)의 공부 공간으로 삼아 '장경합' 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장경합' 은 '장엄하고 공경스러운 건물' 이라는 뜻이며, 영조는 세자의 교육을 맡은 춘방의 관리들에게 학문을 바르게 지도하도록 당부했습니다.


❼ 임풍척번 현판
조선 후기 인조 어필
국립고궁박물관 32.5 × 127㎝
창경궁 북쪽 왕의 별당인 건극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임풍척번은 '숲 속의 바람이 번뇌를 씻어준다' 는 뜻입니다. 건극당은 현종 (1641 ~ 1674, 재위 1659 ~ 1974)대 지은 건물이지만 임풍척번 현판은 인조 (1595 ~ 1649, 재위 1623 ~ 1649)의 글씨로 만든 것입니다.


군주의 자질을 길러낸 공간
국왕의 후계자인 세자는 창경궁에서 학ㄱ문을 닦고 군주의 소양을 기르며 일상을 보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동궁일기』에 따르면, 창경궁은 단순한 생활공간을 넘어 교육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동궁일기
1762년 (영조 38) ~ 1776년 (영조 52) | 1762 ~ 1776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의 왕세손 시절의 일상을 적은 글입니다. 전시된 부분은 1764년 (영조 40) 어린 정조가 왕릉으로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영조를 교외로 맞이하자, 영조가 크게 기뻐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경춘전기
연대미상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가 1783년 (정조 7) 경춘전을 수리한 뒤 걸어둔 현판의 글을 탁본한 것입니다. 정조가 경춘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조 왕세자 책봉 봉인
1800년 (정조 24) | 1800
국립고궁박물관
정조 (1752 ~ 1800, 재위 1776 ~ 1800)의 아들 순조 (1790 ~ 1834, 재위 1800 ~ 1834)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옥인이다.





<회강반차도>
연대미상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왕세자가 배운 내용을 스승에게 평가받는 회강 會講의 절차를 그린 그림입니다. 전시된 부분은 왕세자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서 스승인 사부 師傅와 이사 貳師, 빈객 賓客을 맞이하고, 이윽고 서당 書堂에 들어가 왕세자는 동쪽, 사부와 이사, 빈객은 서쪽에 마주 보고 서로 인사한 뒤, 왕세자가 배운 내용을 평가받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궁궐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1911년 이름을 '창경원 昌慶苑' 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창경궁은 궁궐로서의 오랜 전통과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당시의 사진과 문서를 통해 근대 도시의 유원지로 훼손된 창경궁의 비극적인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찾는 동궐, 창경궁의 시간
광복 후 창경궁은 1983년 다시 이름을 되찾고 복원 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창경궁의 복원은 잃어버린 우리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서의 가치를 되살려 준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wYP3_SQc0

왕실 여성의 일상이 깃든 공간
창경궁에는 왕후와 후궁, 세자빈 등 왕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궁중예법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계절마다 세시풍속을 이어 갔습니다. 헌경황후 혜경궁 홍씨 (1735 ~ 1815)가 지은 『혜빈궁일기』와 『한중록』에는 당시 왕실 여성들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국왕을 보좌하는 집무공간
창경궁 안에는 국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이 있었으며 이를 '궐내각사' 라 불렀습니다. 이들 관청은 국정 운영의 실무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고, 그 중심에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도총부 都摠府가 자리했습니다.



도총부 都摠府 당번에 대한 전교를 새긴 현판
1790년 (정조 14) | 1790
국립고궁박물관
정조가 군사 기관인 도총부의 당번들이 순서를 미루는 것을 질책하는 글을 새긴 현판입니다. 정조는 한 사람이 오래 임직 당번을 선 것을 예로 들며, 임직자의 고충을 염려하고, 당직의 순번과 책임을 미루는 관리들을 크게 책망하였습니다. 또한 기강을 바로 잡는 전교를 내렸습니다.


판당 현판
1858년 (철종 9) 추정
국립고궁박물관
책판 冊板과 활자를 보관하는 판당의 현판입니다. 판당은 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하던 주자소의 부속건물로, 홍화문 서쪽,
주자소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의례 (인문휼민의 臨門恤民儀)
1749년 (영조 25) 영조 (1694 ~ 1776, 재위 1724 ~ 1776)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위로하며 쌀을 나누어주는 의례를 정하였습니다. 왕이 직접 궁궐의 정문에 나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해 8월 15일 영조는 아들 장조 (사도세자, 1735 ~ 1762)와 함께 홍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정조 (1752 ~ 1800, 재위 1776 ~ 1800) 또한 이 의례에 따라 1795년 (정조 19) 6월 18일에 어머니 헌경황후 홍씨 (혜경궁 홍씨, 1735 ~ 1815)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의례의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자가 먼저 홍화문 안 막차 幕次 (의례시 왕이나 세자가 잠시 머무는 곳)로 나아가고, 왕이 가마를 타고 홍화문에 도착한다.
② 왕이 홍화문 위에 올라간다.
③ 승지와 사관, 영의정과 좌의정이 차례로 홍화문에 올라가면 홍화문의 삼문 三門을 연다.
④ 세자가 홍화문에 오른다.
⑤ 신하들이 왕을 향하여 인사를 올린다.
⑥ 선혜청의 관원들이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






7. 영춘헌과 집복헌 迎春軒, 集福軒
이 일대는 생활공간이 밀집된 영역이었다. 집복헌은 후궁의 생활공간이었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834년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이 나무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이어진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하나의 나무가 된 것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나 연인끼리의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고 상서로운 일이나 길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회화나무는 18세기 초, 느티나무는 20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부 동부 관아터 漢城府 東部 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동쪽 지역의 주민 행정을 담당하던 관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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