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작가의 개인전 '깊은 시간']

오래 사용된 흔적과 함께 위아래에 눈금이 남아 있는 칠판에 해맑은 아이들을 그린 김명희 작가의 ‘분수놀이 2011’ (2011). 120 × 360 × 4㎝. / 갤러리현대
수십 년 된 칠판에 생생한 빛으로 그려낸··· 그 시절 우리네 풍경
"지워도 흔적 남는 칠판··· 인생과 닮아"
여러 시대와 공간을 살아간 얼굴들이 칠판 위에 신기루처럼 피어난다. 화가의 상상력을 보탠 회화 작품이지만, 비전공 인류학도가 나름의 노력으로 세상을 기록한 흔적을 보는 듯한 전시. 작가 김명희 (77)의 대표작과 신작 등 40여 점을 만나는 ‘깊은 시간’ 이 이달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캔버스 대신 블랙홀처럼 검고 고요한 칠판이 벽에 걸렸다. 일부는 수십 년 전 판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칠판들. 그 위로 정겨운 군상이 환하게 떠오른다. 1950년대 전후 순박한 서울의 아이들 모습부터 우편물 가득 실은 오토바이 앞에 선 우체부, 산업화 시기 분수대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 등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분필과 비슷한 느낌을 내는 오일 파스텔로 그렸다. 간담회에서 만난 작가는 “그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칠판 그대로의 색” 이라며 “검은 바탕 위에 빛을 그리다 보니 눈이 부신 느낌의 그림들이 나오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작가와 칠판의 인연은 199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회화과 졸업 후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는 1990년 귀국해 남편 김차섭(1940~2022) 화가와 강원도 춘천 내평리의 한 폐교를 개조해 살게 된다. 이때 칠판 위에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작품을 통해 인간 삶의 방식, 이주사(移住史) 등을 탐구해 온 작가는, 쓰고 지워지지만 동시에 흔적이 축적되는 인간사와 닮은 칠판의 속성에 매료된 것이다.

김명희, '내가 결석한 소풍날 09' (2009). 119 × 356 × 3.5㎝. / 갤러리현대
작가의 이러한 인류학적 관심은 더 넓은 시대와 공간으로 펼쳐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당시 만난 고려인들의 모습을 담은 대형 인물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며 세계 곳곳의 봉분 (封墳)을 탐방한 과정을 지도 위에 표현한 작품 등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갤러리현대는 “인간의 삶과 역사, 개인의 경험과 집단적 기억을 엮어온 작가만의 독특한 작업법” 이라고 부연했다.
전시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선사하는 동시에, 익살스럽고 현대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70대 작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를 더한다. 2000년대부터 작가는 칠판에 영상을 결합한 미디어 예술로도 주목받고 있다. 가사 노동 중인 여성을 그린 그림 중앙에 화면을 설치해 공항 가는 길의 서울 풍경 영상을 트는 식이다. 이를 통해 그림 주인공의 마음속 생각이나 이미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그림’ 구성을 저는 비디오를 활용해 만들었다” 며 “플랫한 모니터가 대중화된 이후로 정지된 화면과 움직이는 화면을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고 설명했다.

칠판 그림에 LCD 모니터를 결합한 '김치 담그는 날 2025' 앞에 선 작가 김명희. / 갤러리현대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칠판 위 그림의 운명은 시대의 변화도 대변한다. 김치 재료를 손질하는 자화상이 등장하는 ‘김치 담그는 날’에는 뒷 배경에 여성의 올바른 행실에 대해 나열한 18세기 ‘오륜행실도’ 구절이 적혀 있다. “오륜행실도가 이제 지워져 나가고 있는 상태를 그린 거예요. 결국 거기서 난 벗어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김민정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6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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