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부천시립박물관] ㅡ 옹기전시실 1

드무2 2022. 7. 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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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립박물관] ㅡ 옹기전시실 1

 

 

 

 

 

 

 

점말의 역사와 옹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옹기전시실

Onggi Exhibition Hall

 

  관람포인트  

 

| 옹기에 담긴 문화적 가치와 다양한 정보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수천 년 동안 사용해 온 토기, 질그릇, 오지그릇 등 용기의 역사와 종류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문화적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 옹기 굽던 서민의 삶을 통해 돌아보는 전통문화

부천시 여월동에는 정말 옹기가마터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1980년대까지 생활용기를 굽던 곳으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였다.

점말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의 전통 옹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 전통문화를 기본으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창출

건가에 이로운 전통문화의 우수성이 재조명되면서 전통옹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자연과 함께 하는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화적 흐름과 옹기의 만남 그리고 그 발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http://www.bcmuseum.or.kr/vrmuseum/VR_Museum_02.html

 

부천시립박물관 VR 투어

부천시립박물관 VR 투어

www.bcmuseum.or.kr

 

 

 

 

 

 

 

 

 

 

 

 

점말의 상징,

여월동 느티나무

수령 160년의 느티나무는 점말의 안녕을 지켜주는 노거수로서 높이는 15m, 둘레는 3.3m로 원래는 지금의 2배였으나 벼락을 맞은 후 반을 잘라내어 현재의 크기가 되었다.

1997년 7월 31일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2개 가지에 지지대를 설치하였고 나무 아랫부분이 괴사하여 보호장치를 하였다. 보호대 안에는 비석 기단석 같은 돌이 있고 보호대 바깥으로는 5개의 경계석이 있다. 현재 느티나무 주변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벤치를 설치하여 사람들이 쉴 수 있게 하였다.

 

 

 

마을의 수호신,

당산나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마을에 위치한 아름드리 고목을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서 신성하게 여겼다.

수년전까지 여월동이 점마을 주민들은 설, 정월대보름, 단오, 칠월칠석, 추석 등에 당산나무인 느티나무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당산신에 담긴

민속신앙

우리 조상들이 유독 커다란 고목을 신성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을 대신해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신(堂山神)'이 주로 마을의 큰 나무에 깃들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산신은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와 액운, 살, 재앙 등을 막아주고 마을에 평안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다. 때문에 당산나무는 함부로 베거나 꺾어서는 안 되었다.

 

 

 

일년의 풍흉을 점치는

당산나무 잎점

우리 조상들은 당산나무의 잎이 핀 모양과 상황, 시기 등을 통해 그 해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할 지,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를 점쳤다.

예를 들어 당산나무 잎이 한꺼번에 피면 비가 알맞게 온 징조이므로 풍년을 예상했고, 듬성듬성 조금씩 피면 비가 잘 오지 않아 흉년이 될 징조라 여겼다.

 

 

 

 

 

 

 

 

 

옹기 굽던 점말

조선 후기에는 농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공업분야도 민영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옹기점 · 유기점 · 철기점 등 수공업촌인 점촌(店村, 점말)이 생겨났다. 부천 여월동 지역의 점말 또한 조선시대 말엽부터 근대까지 옹기장들이 모여 살며 옹기를 제작하던 곳이어서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만들어진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하오정면(下吾丁面)에 여월리 점촌(店村, 점말)으로, 1918년 지도에도 점촌(店村)으로 쓰고 일본어로 점말이라 표기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1866년 (고종 3년) 병인박해를 피해 점말로 이주해온 천주교도들이 두 개의 가마를 설치하고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간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도 점말에서는 자배기, 술동이, 시루 등 옹기가 제작되었으나 산업발달과 도시화로 인해 옹기제작이 중단되었고, 현재는 택지개발사업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옹기가마터 마저 사라졌다.

 

 

 

 

 

 

 

 

 

 

 

 

점마을 (店마을)

이 마을은 조선 왕조 말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이곳으로 몸을 피해와 옹기를 구웠다는 데서 이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옹기를 굽던 가마가 남아 있다.

 

 

 

 

 

 

십자문 항아리

뚜껑까지 십자가 문양을 넣은 전라도 지역 항아리 [조선, 58 × 91cm]

 

 

 

 

 

 

 

 

 

부천 점말 가마유적

 

위치 :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185-7번지, 산 29-1번지

 

점말의 옹기.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차지게 만들고 물레에 돌려 형태를 빚어 그늘에 말린다. 그렇게 말린 것을 800~900도의 가마에서 12시간 정도 구워 하루 이틀 식힌 다음에 꺼내 움집에 보관했다.

1970년대까지만해도 10~15평의 움집은 물레로 옹기를 짓는 사람들과 다 만든 옹기를 쌓는 이들로 분주했다. 한 가마당 200~300개의 떡시루가 만들어져 나왔는데, 점말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옹기를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걸어서 영등포, 왕십리까지 가 판매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마차로 이동해 팔기도 했으며 도매로 넘기기도 했다. 이와 같이 떡시루와 질그릇 등을 주로 제작하여 팔았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질그릇에서 옹기화분으로 품목을 변경해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1980년대에 이르러 수요가 사라졌고 옹기제작도 중단되었다.

현재는 점마을은 사라지고 없으며 여월택지지구 개발사업에 의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번성했던

옹기마을의 흔적

 

조선시대 말엽, 부천 여월 안동네에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가마를 설치하고 옹기를 구워 팔기 시작한 것이 옹기마을 점말의 유래이다. 공식기록에서 점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발견되는 것은 1914년 최초 발행된 <부천시사> )1988년 재발행)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점말은 여월 안동네에서 사루개 고개를 넘으면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점촌(店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 두 기의 가마를 설치하고 질그릇을 구운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중략) 1980년대 말까지도 점말에서는 떡시루, 밥솥, 자배기, 술동이 등을 구워냈다. 지금은 가마는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 앞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길 건너 성골에는 돌을 캐는 채석장이 있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도자기를 만드는 세라아트가 성골에서 영업을 했다.'

 

 

 

자료에 의하면, 1866년 (고종 3년)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마을을 이룬 것이 '점말'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이처럼 산골로 숨어 옹기를 구우며 생셰를 이은 천주교민들이 많았다. 故 김수환 추기경 역시 옹기장수의 막내 아들로 알려져 있다.

 

 

 

 

 

 

교우촌 점말

 

선교사들은 조선정부의 박해를 피해 각지에 교우촌(敎友村)을 만들고, 교육사업과 성직자 양성에 힘썼다. 더불어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노력한 결과 1886년에는 드디어 선교의 자유를 얻고 본격적으로 사회, 의료, 교육 사업 등의 각종 선교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천주교회의 박애사상과 만민 평등 의식은 조선사회 지배체제에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말엽에는 서양인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다.

 

 

 

 

 

 

 

 

 

 

 

옹기의 기원

Origin of Onggi

농경이 시작되며 씨앗을 저장할 필요가 생긴 선사인들은 빗살무늬토기를 이러한 토기를 옹기의 기원으로 본다.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 23 × 43cm (복제품)

 

 

 

 

 

 

 

옹기의 역사

The History of Onggi

 

신석기시대의 토기

이 시기는 토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대로, 이른 민무늬토기 · 덧무늬토기 · 빗살무늬토기 등이 나타났다.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문양이 단순한 토기의 초기 형태를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나타났으며 민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는 이후 옹기로 발전했다.

 

청동기 붉은간토기

 

철기시대의 토기

연질토기, 경징토기 등이 대표적이다. 1,000도 이상의 고열을 견디는 가마, 물레와 돌림판의 발명으로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다.

 

 

 

 

 

 

삼국시대의 토기

녹유기, 회청색 경질토기, 적갈색 경질토기 등이 대표적이다. 창솔구멍을 낸 가마가 개발되어 보다 견고한 토기가 가능해졌다. 삼국의 토기는 각각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 고구려

중국 선진 대륙문화와 낙랑문화를 받아들여 가야 · 신라의 경질토기(김해토기) 수준을 앞서 삼국 중 가장 먼저 도기문화가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연질 질그릇에서 출발하여 회흑색계 경질 질그릇을 생산하였고, 중기 이후부터는 녹유도기와 채색도기를 생산하였다. 기종 또한 다양하여 이때부터 항아리 · 병 · 자배기 · 동기 · 버치 · 바리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 백제

고구려, 낙랑, 가야. 신라 등 이웃 여러나라의 ㅇ여향을 받아 크고 작은 토기를 다양하게 생산하였고, 세부 조형기법도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기종으로는 항아리류 · 병류 · 굽다리그릇 · 옹관 · 건재용토기(기와, 벽돌 등)이 있다.

 

● 신라

기야토기와 함께 김해토기를 계승하여 발전하였으며, 납유(鉛釉)인 녹유도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여 도기문화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종류, 무늬, 장식이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기종은 크게 실용토기(實用土器) · 의식용토기(儀式用土器) · 물형토기(物形土器) · 토용토기(土埇土器) · 와전(瓦塼) 등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의 토기

우리나라 도자기의 발전과정을 보면

연질토기 → 경질토기 → 저화도도기 (납유도기) → 고화도도기 (회유옹기) → 자기 순으로 고려청자는 고려옹기에서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화도회유를 1200℃ 이상에서 소성한 양질 옹기가 생산되었으며, 기종은 병류와 항아리류가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의 토기

오늘날과 같은 옹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로, 조선 도자사(陶磁史)에서 자기와 함께 양대주류를 형성하였던 옹기는 자기에 비해 생산공정이 간소하고 수요량이 절대적으로 많아 자기를 능가하며 빠르게 발전했다.

궁전을 비롯하여 양반 귀족은 물론이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대형옹기는 저장용으로, 중형은 운반용으로, 소형은 식기류로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더욱 발전하여 옹기는 어느 가정에서나 사용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민무늬토기 (좌)                                                                          바리 (우)

초기철기 | 18.5 × 25cm (복제품)                                               신석기 | 13 × 7cm (복제품)

 

 

 

신석기시대

The Neolithic Period

 

농경이 시작되며 씨앗과 곡식을 저장할 필요성 때문에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이를 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등 다양한 질그릇들이 만들어졌다. 투박하면서도 단순한 무늬의 덧무늬와 빗살무늬를 주로 찾아볼 수 있다.

 

 

 

 

 

 

 

 

 

민무늬토기

삼국시대 | 19.5 × 33cm (복제품)

 

 

 

민무늬토기

삼국시대 | 19.5 × 30cm (복제품)

 

 

 

붉은간토기

청동기 | 15 × 16cm (복제품)

 

 

 

 

 

 

청동기 · 철기시대

The Bronze Age and the Iron Age

 

청동기시대에는 질그릇이 더욱 발전되어 화분형토기, 뿔모양토기, 홍도, 흑도, 옹관 등 다양한 종류들이 만들어졌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민무늬토기의 전통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두들긴 무늬(타날무늬)가 나타났다.

 

 

 

삼국시대

The Three Kingdoms Period

 

생활용토기와 의식용토기, 토용토기 등 다양한 목적과 용도, 형태를 가진 토기들이 만들어졌다. 삼국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에 따라 국가별 (고구려 · 백제 · 신라)로 특징적인 형태의 옹기가 나타났다.

 

 

 

곡식항아리

경기도 지역의 질독

조선 | 46 × 65cm

 

 

 

 

 

 

                            인동무늬 암막새 (좌)                                                 연꽃무늬 수막새

                      통일신라 | 25 × 5cm (복제품)                                     신라 | 17.5 × 5cm (복제품)

 

 

 

통일신라시대

The Unified Silla Period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재에 흙물을 혼합한 잿물로 생산하는 회유옹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신라의 대표적 도기이던 굽다리 접시의 굽다리가 낮아지기 시작했으며, 의식적(儀式的) 도기가 지배적이었던 신라에 비해 일상생활에 쓰기 편리한 실용적인 도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연꽃무늬 수막새 (좌)                                                                  연꽃과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우)

            백제 | 16.3 × 5cm (복제품)                                                              고구려 | 16 × 6.5cm (복제품)

 

 

 

고려시대

The Goryeo Period

 

통일신라에서 발달했던 고온츠성의 도기제작기술을 전승하여 일상생활 용기로서 유약을 입히지 않은 도기가 생산되었다. 독자적인 고려청자가 발달했으나 이는 상류층 이외에는 사용하기 어려웠고, 일반생활용기는 주로 질그릇을 사용했다.

 

 

 

 

 

 

                              참외모양주전자 (좌)                                                                   단지 (우)

                           고려 | 7.5 × 26.5cm (복제품)                                     초기철기 | 13.5 × 17cm (복제품)

 

 

 

조선시대

The Joseon Period

 

이 시기 옹기는 장독, 물독, 동이, 시루, 뚝배기 등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상생활용품으로 자리잡았다. 옹기문화가 일상화되어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지역별로 특징적인 옹기들이 발달했다.

 

 

 

소금항아리

경기도 지역의 푸레 항아리

시대미상 | 17 × 42.5cm

 

 

 

 

 

 

 

 

 

소주독

술도가에서 술을 배달하기 위해 만든 옹기

근대 | 30 × 60cm

 

 

 

일제강점기

The Japaese Colonial Period

 

옹기 유약으로 '광명단'이라는 화학약품이 사용되었다. 바르면 윤기가 좋아지고 이윤을 높일 수 있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지만, 광명단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납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생활옹기는 급격한 몰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라독 오지독

용수철 문양의 오지독

근대 | 30 × 50cm

 

 

 

막걸리주병

막걸리같은 액체를 담아두는 오지 병

근 대 | 30 × 50cm

 

 

 

현대

Modern

 

가볍고 견고한 화학 합성재질의 그릇들이 등장하며 깨지기 쉽고 무거운 전통옹기는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최근 웰빙 열풍과 함께 발효와 저장에 최족화된 옹기는 '숨 쉬는 그릇', '자연에 가까운 건강그릇'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옹기를 지고 시장에 팔러 나온 옹기장수의 모습

 

 

독이 다 지어지면 옹기장수들은 등에 한 아름 옹기를 지고 마을을 나섰다. 상설시장이 흔치 않던 시기, 옹기가 생활필수품이었던 옛 사람들에게 옹기장수의 방문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옹기 짓던 장소,

옹기점

 

옹기장들은 옹기를 짓기 좋은 곳에 모여 살며 다양한 옹기를 제작해 팔았는데, 이렇게 모여 살던 장소가 바로 옹기점(甕器点)이다. 오늘날 '점촌' '점말' '옹기점' '독막' '도곡' 등의 지명은 옛 옹기점이 있던 장소이다.

 

번성했던 옹기점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옹기점은 489개소에 달했으며 가마는 766기였다. 조사에서 누락된 것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옹기점에서 종사하는 종업원 수는 1,908명으로 추산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백자 생산을 말살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반대로 옹기는 더욱 인기를 얻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옹기점은 더욱 늘어났는데, 1909년 489개소이던 옹기점이 16년이 지난 1925년에는 1,365개로 급증하였다.

 

옹기점의 쇠락

이처럼 번성했던 옹기점은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물자부족과 인력부족을 이유로 기업을 통제함에 따라 옹기점 또한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후 값싼 합성소재 그릇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옹기점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옹기점의 입지조건

 

옹기를 만드는 곳인 옹기점을 짓기 위해서는 입지조건이 매우 중요했다. 우선 옹기를 굽기위한 점토를 얻을 수 있는 장소여야 했으며, 그것을 구을 솔나무나 장작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옹기는 깨지기 쉬운데다 부피도 커서 운반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등짐을 지고 나가 옹기를 팔 만한 시장 또는 마을과 멀지 않은 것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점말은 시장으로의 접근성이 양호하고 자재를 구하기 쉽다는 점에서 옹기점이 위치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말, 방해를 받던 천주교도들은 옹기를 팔러 다니며 신앙을 전파하기도 했다.

 

 

 

전통옹기의 흥망

 

옹기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현대 옹기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면 자기를 능가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자기에 비해 생산공정이 능률적인데다가, 반상을 불문하고 한국인의 삶 전반에서 생활용기로 폭넓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옹기의 대중화는 조선 말엽과 일제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점차 일제가 민족산업을 탄압하고 옹기 외에 가볍고 튼튼한 화학합성 재질의 그릇들이 등장하며 옹기는 쇠퇴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옹기의 흥망사는 조선 말엽 형성되어 현대에 이르러 자취를 감춘 점말 옹기점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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