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 ㅡ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08)]
2부
交 교
교역, 문물의 정수를 보여 주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전근대사회에서도 교역을 위한 바닷길을 열려 있었다. 육로를 이용해서 대륙으로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바닷길은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전의 항해는 두려움과 어려움이 따르지만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인간 활동의 결과물이었다. 바다를 통한 교류는 구석기시대 이래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해로는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 따라 이용해 발전됐다. 신라, 고려시기 바다를 통한 교역이 크게 증가한 것은 선박 제조 및 항해술이 급속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배를 이용해서 중국으로 가기 위한 항구는 각 시대별 항로의 변화에 따라 전국 곳곳에 생겨났으며, 양 국가에 가까이 인접하는 연안을 중심으로 점차 발달했다. 특히 한 · 중 교역에 주로 사용되었던 항로 속 발전한 도시들의 번영은 국제적 정세의 변화에 따라 연안에서 점차 남방 해로가 주요 항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한반도와 중국의 교류 속에 발전한 국제 항구도시들은 양 국가가 끊임없이 교역을 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해상 교역로는 한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으며, 신속하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점차 확대됐다. 해로는 세라믹 로드로도 불러질 정도로 도자기나 원목과 같은 무겁고 손상되기 쉬운 물건을 안전하고 빠르게 옮기는 문명의 고속도로였다.
통일신라 해상왕 장보고와 청해진
신라의 장보고는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을 중심으로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를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라는 명칭이 무역사절단을 보내 당 ~ 신라 ~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했다. 청해진은 군사와 무역체계를 갖춘 군사 · 생산 · 상업의 복합체로, 중국 적산赤山, 소주蘇州, 양주揚州 등지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였다.
삼국사기 장보고전三國史記張保皐傳
25 × 17
1145년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제44권 열전 제4 「장보고張保皐」의 기록에 청해진을 설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번천문집樊川文集
28 × 19
두목(杜牧, 803 ~ 852)
권6 장보고 · 정년鄭年 전傳에 장보고 일대기를 자세히 다루었다. 두목은 장보고를 '안사의 난(당나라 중기 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데, 가장 공이 컸던 당나라 장군 곽자의(郭子儀, 697 ~ 781)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하며 칭송하고 있다.
주름무늬 병甁
통일신라 5.2 × 15 국립광주박물관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주름무늬 병 3점이다. 대부분 결실되고 각각 경부와 견부, 저부와 동체부, 저부와 굽 일부가 남아 있다. 3점 모두 외면 일부에는 유약이 묻어 있다.(왼쪽)
사면편병四面扁甁
통일신라 29.5 국립광주박물관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사면편병이다. 구연부가 결싱되었고 동체는 한 변이 더 긴 평면 직사각형이다. 견부에는 음각침선이 1조 돌려져 잇고 동체에는 밑에서 1/3정도에 음각횡선이 한 줄 돌려져 있다.(오른쪽)
암키와 平瓦
통일신라 32 국립광주박물관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암키와이다. 동면에는 어골문이 타날되어 있으며 내면에는 포목흔과 사절흔이 남아 있다.
수키와圓瓦
통일신라 34.2 국립광주박물관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수키와이다. 동면에는 어골문과 마름모문이 복합 타날되어 있으며 내면에는 포목흔과 점토접합흔이 남아 있다.
장보고 초상張保皐肖像
60 × 90
흑갈유사이호黑褐釉四耳壺
중국남북조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동쪽 왕의 관대 앞에서 발견된 도자기이다. 주동이는 반구형盤口形으로 되어 있으며, 목부분에 두 줄의 돌기선이 장식되어 있다. 동체는 기다란 구형으로 어깨부분에 납작한 네 개의 귀가 달려 있는 흑유병이다. 가마 안에서 소성시 약간 일그러진 듯하며 유약도 산화되어 변색되어 있으나 중국 남조 6세기 초 흑유병의 특색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무령왕릉과 중국계 유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내 제7호분으로 분류되는 무령왕릉武寧王陵은 중국 남조양梁나라 지배계층의 무덤 형식을 받아들인 벽돌무덤이다. 직사각형 터널 형태이며, 복도인 널길과 무덤방인 널방을 갖추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였던 2장의 묘지석을 통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 ~ 523)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널길에는 묘지석 외에도 진묘수, 제기 등이 발견되어 당시 백제의 상장례의식도 짐작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중에는 유난히 중국에서 건너온 수입물품들이 눈에 띄며 특히 남조문화의 영향을 농후하게 반영하고 있다.
연꽃무늬 벽돌蓮花斜格文塼
백제 국립공주박물관
오수전무늬 벽돌五銖錢文塼
백제 국립공주박물관
오수전무늬 벽돌은 사각형으로 구획된 공간에 동전무늬를 배치하고 번갈아 사선 무늬를 새기는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문양은 군주의 권력, 재부와 부귀, 벽사僻邪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형식의 동전무늬 벽돌은 주로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등에서 출토됐다. 중국 동전인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시대에 발행되어 수나라까지 사용된 동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여수 거문도 및 무령왕릉의 널길 묘지석 위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문물 교역과 주요 항구의 발전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항쟁이 점차 치열해지면서 국제적으로 유리한 입지 확보를 위해 앞다투어 중국과 외교를 맺고자 했다. 그러나 북부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로 인해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는 백제와 신라는 해로를 주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우리나라 해상교통 발달의 계기가 됐다. 백제의 주요 항구였던 당항성(黨項城, 현재 남양만)과 풍납토성風納土城, 그리고 부안 죽막동竹幕洞에는 백제와 중국의 다양한 해상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김해 봉황동鳳凰洞 항구를 통해 중국 및 일본과 활발히 교류했다. 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와 적산으로 진출했으며, 남해지역으로써 김해 및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관련 유물들이 그 증거이다.
총일신라와 당나라 간의 교통로는 기존에 백제에서 사용하던 교역로는 물론, 서해안의 혈구진穴口津(현, 한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정해현(靜海縣, 현재 상해 부근), 영파寧波, 항주杭州 등에 이르는 항로가 있었다. 신라 상인이 적극적으로 해외로 진출함에따라 당나라의 중요한 항구에는 신라 상인들이 중심이 된 거류민들의 집단적 거주 지구, 즉 신라방新羅坊이 설치됐다. 대부분 당나라로 들어가는 신라인들은 모두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로 상륙했으며, 등주 성내에는 이들이 머무는 신라방이 있었다. 그리고 상륙한 지점에서 다시 육로나 수로를 북상하면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시대는 국제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로 고려인은 송宋나라에 대규모로 진출했으며,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바닷길 근처에 고려관高麗館을 세워 숙식을 제공할 만큼 이들을 우대했다. 고려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류했으며, 이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국제무역항 벽란도(碧瀾渡, 현재 황해도 예성강)였다. 특히, 활발한 교역만큼 흑산도에서 벽란도에 이르는 서 · 남해 도서 및 연안지역에는 사신선使臣船과 상선商船이 잠시 머무르면서 안전한 항해를 기리는 제사의식을 거행하던 거점 항구가 발전했다. 이러한 무역도시에서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중국식 동전과 중국식 동경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고려동경 등이 발견됐다.
고대 한 · 중간의 주요 교역
우리나라와 중국의 항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다. 두 나라를 오간 항로는 서해연안항로, 서해횡단항로, 서남해사단항로로 구분된다. 초보적인 항해 단계인 연안항로는 6세기 초까지 사용됐으나, 점차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하고 정치적 역학 관계가 바뀜에 따라 직선항로인 서해횡단 · 사단항로로 발전했다.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복敍福 일행이 길을 나선 것으로 유명한 서해연안항로는 선사시대 이래 꾸준히 이용해 온 항로로써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한반도의 서해를 연결하는 양국의 국토가 최단거리를 이루는 항로이다. 지문항법地文航法을 사용하여 산동반도 북부와 요동반도 끝단의 최단거리인 노철산로老鐵山路를 반드시 건넜다. 서해연안항로는 고려 초까지 활발히 이용됐으나, 정치적 변동과 기타 요인에 의해 쇠퇴했다.
전근대시기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서해횡단항로가 열린 시기는 고대국가 이전부터이다. 이후 통일신라 장보고의 활약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고려와 송나라에 이르러 동아시아교역권이 성립됐다.
서해횡단항로는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적산포赤山浦에서 황해도 첨단 부분 간의 바다를 직접 횡단하는 바닷길로 한중 간에 가장 활발히 이용된 항로이다.
3세기 요동遼東 연안 해역이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들어가 연안항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산동반도에서 곧바로 서해를 가로지르는 횡단항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작은 국제적 상황에 따라 통로가 막혀 우회하는 방식이었지만 200㎞ 정도로 짧은 거리로 곧바로 국외에 도달할 수 있다는 효율성에 주목했다. 특히 이러한 항로의 사용은 백제 시기에 나타나는 중국식 도자기, 동경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해해상로의 필요성은 화물의 대량 운송과 연관되어 주로 교역로로 사용됐다.
서남해사단항로는 중국 남북부의 연해안과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따라 왕래하는 연안항로와 중국 본토와 한국 남단 간의 서남해를 곧 바로 가로지르는 항로이다. 단독 해로로는 거리가 가장 멀고 거칠었지만, 11세기에 행상왕래의 중심지가 기존의 산동반도에서 강남江南 명주明州로 옮겨지며 활발히 사용됐다. 명주는 한반도에 대한 외교와 무역이 동시에 활용되는 항구로서 발전했다. 외교적인 상황에 따라 남송 시기에는 남방해상항로가 상요됐으며, 서해횡단항로와 더불어 주요 항로와 보조항로로써 사용됐다.
당항성
당항성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한 최적의 관문이었다.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했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으로 불렀다.
당항성은 울산항과 청해진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의 요지로 인식됐다. 이러한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 편 등을 통해 당시 당항성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당항성 출토 백자다기완白瓷茶器碗
당항성 초석건물지 하부에서 출토된 중국의 향요산 백자다기완이다. 출토 당시 두 개가 포개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탁한 백색의 유약이 시유되어 있으며, 굽의 형태는 해무리굽이다. 굽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외반하고 있으며, 구연부는 둥글게 말려 있다.
A. 1차성 4지점
북편 트렌치 전경(왼쪽)
B. 1차성 4지점 초석건물지
하부 중국자기 노출 관경(오른쪽)
북문지 발굴조사 후 광경(명문기와)
1988년 조사 2차 성벽 북벽 토층도(위)
1988년 북문지 발굴조사 후 광경(아래)
당항성 출토 명문기와편 '?宅' '唐' 銘 圓瓦
통일신라 화성시역사박물관
1차 성벽 북벽에서 출토된 명문 수기와이다. '?宅' '唐'이 장판으로 반복적으로 진사됐다. 명문은 좌우반전된 상태이다. 기와는 합단부가 파손되어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없지만 광단부와 좌측면에 원형이 남아 있다.
당항성 출토 명문기와편 名文瓦片
통일신라 화성시역사박물관
공 · 사무역 속의 문물 교류품
삼국시대에는 주로 공물과 회답품을 주고 받는 공무역 형식이 이루어졌다. 사신들이 왕족과 귀족을 위해 가져오는 사치품들은 당시 사람의 눈에는 매우 진귀한 것이었으며 평범한 계급이 갖기엔 가치가 매우 높은 것들이었다. 따라서 지배계층들은 자신의 위세를 알리기 위해 중국의 진귀한 물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과 문물들이 자유롭게 양국을 오가게 되었고, 이러한 문물 교류는 각각의 문화를 새롭게 꽃피우는 계기가 됐다.
삼국시대에는 학문과 종교 및 정치 사상을 비롯한 공예품들이 주로 유입됐으며, 백제와 중국 남조는 비단, 서적, 자기, 장식품과 인삼, 직물 등을 주로 교역했다. 또한 유리구슬이나 벽돌과 같이 한반도에서 제작할 수 없었던 물품들이 유입됐다. 통일신라의 대당무역은 조공과 상사賞賜라는 명목 아래 두 나라 사신이 왕래하면서 물품을 교환했다. 통일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공무역은 신라가 특산물과 직물류 및 금속 가공품을 비롯한 물품 화폐의 성격을 지닌 금 · 은 · 동 · 포 등을 공물로 가져간 것에 비해, 당나라는 외교적인 의례품과 아울러 직물류, 금속가공제품 및 문화관련물품을 사여賜與했다. 상단商團을 통한 사무역이 발달하자, 자연산 특산품에서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 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고려 시대에는 송나라와 도자기, 나전칠기, 종이, 인삼 등과 서적, 약재, 향료, 차와 관련된 물품, 비단 증이 배를 타고 양국을 오갔다. 시대별 양국을 오갔던 교역품 속에는 각 시대마다 가지는 특징이 녹아져 있었다.
1. 중국식 동검 中國式銅劍
중국 동주東周 45.9 국립전주박물관
완주 상림리 유적에서 발견된 자료로써 당시 서해지역과 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중국식 동검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동주東周의 황하강 유역에서 제작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예가 많지 않다. 중국식 동검은 검은 몸체와 자루를 함께 붙여 만들었으며, 일반적으로 몸체가 길고 마름모菱形 형태의 검 코가 있다.
2. 한국식 동검韓國式銅劍
초기 철기 50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중국식 동검과 한국식 동검
중국식 동검은 자루와 몸체를 한 번에 주조한 형태로 일명 도씨검桃氏劍으로 불리며 중국 동주東周(기원전 770~221)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동주식 동검이라 부른다. 중국의 중심 분포 지역인 중원지역 이외에 중국 동북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 이 동검은 대체로 기원전 3~2세기 경 서북한 지역의 새로운 철기문화 유입의 압박으로 서해안을 따라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해안의 주요 항구에서 주로 발견됨으로써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교역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된다.
한국식 동검은 중국의 요령식 동검이 유입된 후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동검이다. 교역과 교류의 상징으로 들어본 중국의 동검에 비해 날이 좁고 직선 형태를 띠어 세형동검 또는 좁은 놋 단검이라고도 한다. 한국식 동검 역시 무기 이상의 의미, 즉 당시 사회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도天圖
38 × 34 19세기 초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수진본천도 필사본이다. 천도, 중원여지(중국), 동국여지(조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순으로 수록됐다.(왼쪽)
"항주" 명동제화문방형경"杭州"銘銅製花文方形鏡
중국 송宋 12.3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의 수도개성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항주대륙가청동조자杭州大陸家靑銅照子」라는 명문이 있어 중국 제작지명이 새겨진 동경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가 송 · 원과 대외무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오른쪽)
백제 감일동유적
하남 감일동유적은 서울시 송파구와 인접해 있어 백제왕성으로 알려진 풍납토성에서 4㎞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감일동 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한성백제기(BC18~AD475) 횡혈식 석실묘 52기와 수혈식 석곽묘 2기이다. 계수로와 호수호와 더불어 부뚜막 모형토기, 금은제 착장형 장신구 등의 부장은 그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대외교류 뿐 아니라 이 묘역이 당대 최고층의 묘역임을 추정할 수 있다.
1. 화천貨泉
초기 철기 21 국립광주박물관
2. 중국 송나라 동전皇宋通寶
중국 송宋 24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부산 기장에서 발견된 송나라 동전이다. 앞면은 직경 0.3㎝의 주연周緣을 만들고, 주연보다 낮은 중앙에 방형의 구획을 만들었다. 직경 0.7㎝의 방형 구멍을 뚫고 사방에 '황송통보皇宋通寶'를 배치했다.
3. 금박유리구슬金箔琉璃玉
가야 0.8 국립전주박물관
유리옥에 금박을 씌우고 다시 유리 피막을 입혀서 제작되었다. 옥 2점이 상하로 붙어 있는 형태 5점과 환옥의 형태 7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리 피막이 전부 혹은 일부 결실되었다.
4. 유리구슬琉璃玉
가야, 고려 0.9~1 국립전주박물관
유리구슬은 당시 서역과 거래하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신라의 경우 고구려 등을 통해 육로로 수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초기철기 시대부터 유입이 되었으나, 4세기 이후 삼국시대가 시작되자 급속히 발전했다. 이후에도 장신구로 사용하는 풍습이 이어져 귀걸이, 목걸이 등의 장식품으로써 애용됐다.
동전 뭉치銅錢
중국 송宋 12.7 × 18.2 중국항해박물관
중국의 여러 왕조는 동전 반출을 금지했지만, 해상무역이나 밀무역 방식을 통해 대량의 동전이 국외로 반출됐다. 특히 송나라와 해상무역이 활발햇던 고려의 주요 항구에서도 이러한 송나라 동전이 종종 발견되어 해상교역에 주로 동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쇠칼과 칠 칼집漆鞘鐵劍
원삼국 51.8 × 3.8 / 9~162 국립공주박물관
옻칠을 한 나무 칼집은 부식되고 청동제 장식과 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길이가 51.8㎝로 장검長劍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칠기 칼집에 들어있는 칼을 창원 다호리 유적 등 주로 영남지역 수장급 무덤에서 처음 발견되어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한국과 중국의 차문화 교류
차茶 문화 교류는 구법승, 유학생, 중국 사신으로 왕래했던 사행공사, 그리고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상인 등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발달했다. 최치원이 중국의 차 문화를 소개해서 한국에 전래된 이래, 고려시대부터는 직접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송나라 사행사들의 예물이었던 차가 고려 귀복에게 공급된 것을 토대로 차가 회사품의 성격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속에는 중국의 선원들과 고려인들 간에 이루어졌던 사적 문물교환 중에 차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송나라는 당시 차문화를 대외교역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군비와 재원을 확충하여 각다법을 실시하여 차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적으로 통제 관리했다.
제차경전도制茶景全圖
20세기 50 × 18.2 중국항해박물관
고대 중국에서 이어져 어는 차 문화와 관련된 자료로서 차를 수확하고 제작하는 장면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자료이다.
자사호紫沙壺
중국 청靑 15 × 9 × 9 중국항해박물관
차 문화와 함께 유입된 문물 중 하나로서 중국인들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다호(茶壺 : 차를 우릴 때 사용하는 그릇)이다. 주로 발효차인 보이차를 우려낼 때 쓰이며, 북송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명나라부터 널리 사용됐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부에 있는 도자기로 유명한 이흥宜兴에서 생산된다. 이흥 정촉진丁蜀鎭 광산에서 분사암紛砂岩을 채굴하여 1년 정도 자연 풍화를 기다린 후, 분쇄 등의 공정을 거쳐 만든 흙인 자사紫沙를 사용해서 자사호라고 불린다.(왼쪽)
흑유 유두무늬 항아리黑釉乳頭文壺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차 가루를 담는 항아리로써 간주요의 대표적인 자기이다. 이 항아리는 차문화의 발전과 함께 강서 주변 지역 외에도 일본, 한반도에 많이 수출됐다.(오른쪽)
신안선 유물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개인적인 문물 교류가 꽃폈던 시기이다. 특히 한반도 신안섬에서 출수된 상선인 신안선에 실려있던 다양한 도자기와 공예품 등을 그 당시 한중 간의 문물교류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불교와 관련된 향로 및 자단목과 청자, 서역에서 유입된 향신료 등 당시 고려와 송나라, 그리고 일본에 교역된 물품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신안선에서는 목제족자봉도 함께 출수되어 당시 회화, 서적, 견직물 등도 교역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 청자 첩화 모란무늬 향로靑瓷牧丹纹香爐
중국 원元 5.7 × 13.2 × 4 국립광주박물관
신안선에서 출수된 청자향로로 3개의 발이 향로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향로의 몸체에는 3개의 꽃무늬가 양각되어 있는데 문양의 모습이 거의 유사해 같은 틀로 압축 시문한 것으로 보인다. 태토가 우리나라 청자에 비하여 하얗고 밝아 유색도 연한 녹색으로 보인다.
2. 청자 첩화 세 발 향로靑磁貼花三足香爐
중국 원元 국립광주박물관
신안선에서 출수된 향로이다. 중국 고대 청동기 형태를 모방했으며, 몸체 아래에는 세 개의 짧은 다리가 붙어 있다. 향로 바깥쪽 바닥면에는 굽을 만들어 바닥과 닿게 처리했다. 원통형의 몸체에는 모란넝쿨 무늬가 양각기법으로 장식됐다.
목제족자봉木製簇子棒
고려 67.5 국립중앙박물관
족자 또는 두루마리에 사용되는 하축下軸 4점과 축두軸頭로 추측되는 나무 편 6점이다. 서화 또한 교역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향목紫檀木
고려 국립광주박물관
신안선에서 출수된 자단목으로 만든 향목香木이다. 자단목의 산지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이며, 항목 뿐만 아니라 불상, 고급가구 공예품 제작에도 사용되었다.(맨 위)
청자 약연과 약완봉靑磁藥碾
고려 48 × 12.5 × 8.3 국립광주박물관
약재를 가는 약연藥碾 또는 찻잎을 가는 다연茶碾으로 불리는 발과 봉이 세트를 이루는 절구이다. 약재나 찻잎을 으깨어 갈기 위해 발의 내면 깊은 부분과 봉의 끝부분은 유약을 입히지 않았다. 주전자와 완 · 찻잔과 더불어 고려시대 차문화의 유행을 보여준다.(가운데)
후추胡椒
고려 국립광주박물관
후추는 신안선에서 발견된 식물 품목 가운데 상당한 수량을 차지한다. 나무상자에 가득 담긴 상태로 인양됐다. 해저에 오래 있었던 탓에 알맹이는 거의 없고 껍질만 남은 것이 대다수이다.(맨 아래)
도선陶船
중국 한漢 60 × 18.5 × 18.5 중국항해박물관
중국 남방지역의 광주廣州와 장사長沙에 있는 한나라 무덤에서 목선木船과 함께 출토된 배모양 명기明器이다. 남방지역에서 배를 이용한 교통의 번영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세계 최초로 배 위의 조타실이 표현된 자료이다.
한국의 봉래3호선
한반도의 선박 중에 중국의 조선 기술이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산동성 봉래수성蓬萊水城에서 발굴된 봉래고려고선(蓬萊高麗古船, 봉래3호선)이다. 봉래고려고선은 전통 한선의 조선법과 중국식 조선법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 선박은 선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가룡목加龍木으로 좌우외판을 연결하고 격벽隔壁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봉래고려고선은 한선에서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격벽과 늑골구조가 나타난다.
이는 전형적인 중국식 조선법으로 상당히 선진적인 조선 기술이다. 봉래고려고선은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조선기술이 활발히 유입된 계기는 13세기 말에 있었던 여몽연합군 선단의 일본 원정으로 추정된다. 원래 한반도를 다니는 연안선은 모두 가룡목만 존재하는 전통 한선이었으나 원거리를 가기 위해서는 파도에 견딜 수 있게 보다 튼튼한 구조를 가진 배가 필요했다. 따라서 중국의 조선 기술인 수밀격실水密隔室 기법을 도입해 각 칸이 수밀구조로 이루어져 한 칸이 파손되더라도 쉽게 침몰되지 않게 하는 구조로 발전시켰다.
모래선上海五桅沙船模型
현대 중국항해박물관
모래배라고 불리는 이 배는 바닥이 평탄하고 납작한 평저선平底船으로,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배모양 중의 하나이다. 강이나 하천을 다니기에 편리했으며, 화물선, 군선軍船, 어선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모래배는 중국의 중요한 고대 선형 중 하나로 당나라 때 등장해 현재 강소성江蘇省 숭명崇明 일대에서 먼저 사용됐다. 명 · 청 시대에는 일본 · 한반도 등지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모래선을 많이 이용했다. 아편전쟁 이후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모래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봉래3호선蓬萊古船模型
현대 중국항해박물관
지층 및 관련 문화재 연구에 따르면 고대 선박은 원나라 말과 명나라 초 사이에 산동성 봉래수역 서남쪽 끝자락에서 침몰한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된 신안의 원나라 침몰선과 고대 봉래 고려선은 한국과 중국 사이의 빈번한 민간 교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양국이 조선기술분야에서 광범위하게 기술을 교류해 왔음을 증명한다.(왼쪽)
신안선新安船模型
현대 중국항해박물관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사무역을 통한 문물교류가 꽃피었던 시기이다. 특히 한반도 신안섬에서 출수된 상선에 실려 잇던 다양한 도자기와 공예품 등은 그 당시 한국과 중국 간의 문물교류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불교와 관련된 향로 및 자단목과 청자, 서역에서 유입된 향신료 등 당시 고려와 송나라, 그리고 일본에 교역된 물품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신안선에서는 목제족자봉도 함께 출수되어 당시 회화, 서적, 견직물 등도 교역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오른쪽)
4부
藝 예
심미, 아름다움을 건네다.
한국과 중국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그 호흡을 함께 해왔다. 두 나라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가분의 관계로써 학문과 종교, 교역과 문물교류, 경험 등을 주고 받으며 흡수와 소화, 그리고 전파를 이어왔다. 이러한 한국과 중국의 문명교류는 예술품으로 아름답게 꽃피워졌으며 그 가치는 단연 독보적이다. 시 · 서화를 비롯한 서화 작품으로 예술가 및 학자들은 서로의 신의를 쌓아갔다.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황해는 '도자기의 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도자기 교역의 중심 루트였다. 도자기는 육로 운송에 비해 선박으로 대량으로 운반될 수 있으면서도, 쉽게 훼손되지 않아 주요 해상무역 대상품이 됐다. 마치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이 빠르고 안전하게 공예품들의 교역이 가능한 수단으로써 항로가 이용됐다. 이처럼 한반도로 유입된 중국제 도자기들은 다시 한반도의 예술성과 기술력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 발전하여 고려청자, 분청백자 등으로 다양히 발전해 역수출되기도 했다.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우리나라 산천을 직접 답사하고 폭에 담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이다. 진경산수화는 기존에 중국 회화작품을 모방해서 그리는 한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의 미를 화폭에 담은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다음 다섯 가지 화법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첫째는 하늘에서 굽어본 듯, 제3의 시점으로 근경과 원경을 동시에 포착하는 조감도鳥瞰圖식 부감俯瞰 화법, 둘째는 시점을 이동하며 다시점多視點으로 기억된 형상을 조합하는 합성合成 화법, 셋째는 주제를 부각시키며 전체 풍경을 줄여 그리는 축경縮景 화법, 넷째는 풍경을 간결하게 추상화한 단순화單純化 화법, 마지막 다섯째는 풍경 대상을 주역의 음양론으로 재해석하는 화법이다.
해상비룡도海上飛龍圖
조선 후기 93 × 52
김익주(金翊胄, 1646~1707)
18세기 초 남중화가인 김익주의 작품으로 필묵이 강하고 흑백대비가 두드러진 조선 중기의 화풍을 토대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부분적으로 가미한 그림이다. 남종화풍은 중국 강남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산수화 기법으로, 낮은 산과 낮은 물, 자주끼는 안개가 특징인 강남지방의 자연환경을 뛰어난 묵법으로 묘사했다. 남종화풍은 조선 중기부터 유입되어 후기까지 유행했다.
산수도山水圖
조선 후기 37 × 52.2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 ~ 1759)
조선 후기 대표 화가인 겸재 정선의 산수 그림으로 선박을 이용해 조운로인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은송당집
18세기 15 × 24 × 1
이상적(李尙迪, 1803~1865)
이상적은 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시인으로 김정희의 문인이다.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유를 맺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어 1847년 중국 우박계관藕舶溪館에서 자신의 시문집을 간행했다.
사가시四家詩
조선 후기 30.5 × 23.5 × 1
선 후기 때의 사가四가 또는 실학 대가實學四大歌라 일컫는 문인들의 시집이다.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 · 유득공柳得恭 · 이서구李書九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오문장굉선생화첩吳門張宏先生畵帖
중국 명明 64 × 32.5 × 0.5 국립중앙박물관
장굉(張宏, 1580 ~ 1659 )
장굉은 명나라 후기 오파吳派의 화가로 오파의 창시자인 심주(沈周, 1427 ~ 1509)의 화법을 따랐으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장굉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명승유람이 성행해 많은 명승실경도가 제작됐으며, 이 화첩도 그 중 하나이다.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19세기 25 × 23 국립중앙박물관
신위(申緯:1769∼1847)
조선 후기의 시인이자 서화가인 신위의 시문집이다. 약 4,000여 수의 시를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서정적인 편명을 각각 붙였다. 당대의 문인과의 천교를 맺은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국내인으로는 김조순金祖淳 · 김정희金正喜 · 정약용丁若鏞 · 정학연丁學淵 · 한치응韓致應 · 홍의호洪義浩 · 이유원李裕元 등이 있으며, 청나라 문인으로는 옹방강翁方綱 · 왕재청汪載淸 · 섭지선葉志詵 · 오숭량吳嵩梁 등이 있다.
해산정海山亭
조선 후기 60 × 45.5 × 3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동해안의 절경을 그린 작품 가운데 하나로, 동해안을 바라보는 해산정에서 조망되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원경에는 금강산의 암봉들이 예리하고 삼엄한 기세를 과시하며 열립列立되어 있고, 드높이 자리잡은 해산정의 큰 누각 아래에는 객사 건물 등이 그려져 있다. 과감하게 표현된 절벽을 이룬 적벽을 따라 남강이 흐르고 그 부근에 대호정帶湖亭이 보이며, 동해에는 칠성봉七星峯과 파도가 함께 표현돼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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